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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묵상글 ( 부활 제6주일. - 그날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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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0 05:32
- 그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이 제자들을 떠나실 때를 말씀하시며
‘그날’이라는 표현을 쓰십니다.
‘그날’이란 미래의 어느 날이고 매우 중요한 어느 날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그날이 우리에게도 같은 그날일까요?
나는 나의 ‘그날’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요?
오늘 우리가 이 복음 말씀을 듣는 것은
제자들의 ‘그날’이 우리에게도 같은 ‘그날’이 되게 하라는 뜻일 것입니다.
오늘 사도행전 끝부분을 읽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내려가서 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세례를 받았지만, ‘그날’이 아직,
성령을 받는 ‘그날’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은 아닐까요?
그리고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에는 내게도 그날이 될까요?
그렇게 되도록 우리는 그날을 갈망도 하고 준비도 하며
남은 기간을 잘 보내야 하는데 오늘은 우선 왜 그날이 중요한지 보겠습니다.
그날이 중요한 이유는 그날에 성령께서 오시기 때문인데
그날에 오시는 성령은 진리의 영이십니다.
그리고 모든 진리로 인도하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모든 진리는 하느님 자체이시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리니까 우리의 주님께서는 진리일 뿐 아니라 모든 진리이십니다.
그런데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주실 것이다.”라고 요한복음이 말할 때의 그 ‘모든 진리’란 어떤 뜻입니까?
모든 진리란 말 그대로 일부 진리가 아니라 모든 진리이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일리(一理)와 다른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진리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께서 오실 ‘그날’을 준비하며
우리는 모든 진리에 비해 우리가 지닌 진리는 일리밖에 되지 않음을,
우리의 이성과 지적 능력이 얼마나 보잘것없음을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러기에 계시의 완성자요 모든 진리이신 주님께로 우리를 성령께서
친히 인도해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도 그리고 다른 종교와 문화도 일리를 가지고 있음을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같이 모든 진리를 이루려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일치의 성령께서 각각의 진리를 한곳에 모아주시도록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이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을 깨닫게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날 성령께서 깨닫게 해주시는데
주님께서 아버지 안에 계신다는 것,
우리가 주님 안에 있으며 주님께서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사실 이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며 아주아주 중요합니다.
이는 불교나 힌두교의 범아일여(梵我一如)와 맥이 통하는 것이며,
우리는 홀로 있는 존재도 우리끼리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고,
하느님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만도 놀라운데 더 놀라운 것은 우리 안에 주님께서 계신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보물만 있어도 대단하고 우리 안에 성인만 있어도 대단한데
주님께서 내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계시다니 이 얼마나 놀랍고도 대단합니까?
문제는 이것을 깨달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면 다 헛것이고,
완전히 행복할 수 있는데 그것을 놓치는 참으로 딱한 불행입니다.
다 잡은 고기를 놓치는 것보다 더 안타깝고도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까지 깨달아야 우리에게도 성령께서 오신 것이고,
이번 성령 강림 대축일이 그날이 된 것임을 묵상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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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끈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사랑 안에서 우리는 ‘둘’로 존재하면서도 동시에 ‘하나’로 살아갑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아가서에 나오는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
결코 끊어지지 않는 사랑의 끈
2026년 5월 9일 토요일
제임스 핀리(James Finley)는 연인들이 경험하는 결합과 분리의 춤이, 우리가 하느님과 맺는 관계를 체험하는 방식의 반영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혼인성사 안에서 깊이 사랑하는 두 사람은 서로 안에서 하나 됨의 순간을 체험하며, 그 순간에 "우리는 하나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 됨을 깨닫는다고 해서 둘의 존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둘이 사라진다면, 그들이 하나임을 인식할 수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그들이 "둘 됨"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 됨"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하나 됨 안에서 살아갈 때, 그 하나 됨은 둘의 관계 속에 얽히고설킨 모든 세부를 관통하며 스며듭니다. "여기가 하나 됨이고, 저기가 둘 됨이다"라는 구분은 없습니다. 이는 둘이면서 하나인 부부가 끝없이 주고받는 신비로운 화합의 연금술과도 같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우리가 혼인했든, 독신이든, 혹은 수도자의 삶을 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이 신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제 느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너희의 충실함, 곧 나와 하나 됨을 의식하는 능력이 자주 끊어질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하여라. 그것이 너희 쪽에서 아무리 끊어진다 해도 내 쪽에서는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 게다가 너희가 나를 찾지 못해 끈이 끊어진 것처럼 느껴질 때에도, 나는 그 찾지 못하는 너희의 무능력 안에서 사랑으로 무한히 현존한다. 너희가 나를 찾지 못하면서도 나를 갈망한다는 사실 자체가 곧 나를 향한 너희의 갈망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번 너희 쪽에서 끈이 끊어질 때마다, 그것은 오히려 너희 안에서 다시금 나를 향해 기울어지고, 결코 끊어지지 않는 나의 끈을 새롭게 붙잡으려는 갈망을 일깨울 것이다."
하나 됨과 분리의 리듬은 죽음 안에서도, 혼인성사 안에서도, 사랑하는 이들의 관계 안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랑과 하나 됨은 끝없이,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것을 관통합니다. 저는 그것이 바로 사랑의 리듬이라고 생각합니다
References
James Finley, “The Thread that Never Breaks,” Richard Rohr’s Daily Meditations (CAC Publishing, 202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Kim MacKinnon, untitled (detail), 2018, photo, Canad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달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는 것은 영혼이 하느님을 향해 올리는 사랑의 시선과, 그에 응답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스러운 시선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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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파라클레토스 성령!
얼마 전 어떤 유튜브 영상에서 어미 곰과 새끼 곰이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도로가의 1미터 남짓 되는 시멘트 벽을 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미 곰은 바로 그 벽을 넘을 수 있었지만, 새끼 곰은 그 높은 벽을 넘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어미가 먼저 올라가서 새끼를 두 앞발로 잡아 올려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어미 곰이 먼저 올라가기는 했지만 벽 위에서 어찌 할 줄을 모르고 계속 이리 저리 움직이기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래서 '곰탱이 같다'는 말이 나온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영상의 마지막 장면에서 새끼 곰이 올라올 만한 곳으로 어미 곰이 움직여 가서 거기서 새끼 곰이 스스로 올라오도록 유도했고, 결국 새끼 곰은 그 벽을 엄마와 함께 넘는 데 성공하더군요.... ㅎ
제 생각이 틀렸던 겁니다. 어미 곰은 앞발로 새끼를 들어 올릴 수도 있었지만 새끼 곰이 스스로 올라올 수 있도록 끝까지 함께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 영상을 보면서 저는 이것이 바로 성령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익숙합니다. 그런데 누군가 "주님은 나의 변호사이십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사실 이것이 바로 성령을 뜻하는 "파라클레토스(Paraclete)"라는 말의 본래 의미입니다. 요한 복음 안에서 이 단어는 다양한 뉘앙스를 지니고 있습니다. 대변자, 중재자, 중보자, 스승, 위로자, 위안자…. 그러나 단 하나, "고발자"라는 의미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발견합니다. 혹시 지금까지 하느님을 적대자나 고발자로만 생각해왔다면 놀라지 마십시오.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오해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오해 속에 살아가는 이유는 성령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선을 향해 나아가도록 우리 곁에서 그 길을 안내해 주시는데도 우리가 깨어 그 인도하심을 지켜보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버지께 청하여 다른 보호자를 보내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예수님 자신이 첫 번째 "보호자(Advocate)"이심을 뜻합니다. 요한 1서 2장 1절은 분명히 말합니다. "누가 죄를 짓더라도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변호자로보다는 심판자로 더 많이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고발자는 예수님이 아니라 사탄입니다. "우리 형제들을 고발하던 자, 하느님 앞에서 밤낮으로 그들을 고발하던 그자가 내쫓겼다." (묵시 12,10).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또 다른 보호자, 곧 파라클레토스는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증언하시고,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가시며, 제자들에게 하느님의 현존을 중재하시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게 하시며, 계속해서 그분을 해석해 주십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께서는 교회를 살아 움직이게 하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령은 교회의 숨결, 돛에 이는 바람, 교회의 일치의 원리, 내적 빛과 힘의 근원, 교회의 위로자와 보호자, 은사와 노래의 샘, 평화와 기쁨의 근원, 영원한 생명의 보증이자 미리 맛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약속하시는 성령 하느님은 우리 삶과 믿음의 여정이 아무리 고되더라도 우리 곁에서 늘 우리를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시며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도록 용기를 불어넣어 주시며 우리의 길을 이끌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길은 우리가 깨어 그 인도하심을 바라보고자 할 때 보인다는 것입니다. 삶의 이러저러한 상황들 속에서 성령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해 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말입니다!…
라오디케이아의 이냐시오 대주교는 세계교회협의회 제3차 총회(1968, 웁살라)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령 없이는 하느님은 멀리 계시고, 그리스도는 단지 역사적 인물일 뿐이며, 복음은 죽은 글자가 되고, 교회는 단순한 조직에 불과하며, 권위는 지배가 되고, 선교는 선전이 되며, 전례는 과거의 향수일 뿐이고, 그리스도인의 노동은 노예의 노동이 된다. 그러나 성령과 함께라면, 그리스도는 부활하여 현존하시고, 복음은 살아 있는 힘이 되며, 교회는 삼위일체의 친교가 되고, 권위는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봉사가 되며, 선교는 오순절이 되고, 전례는 기억과 희망이 되며, 그리스도인의 노동은 신성화된다."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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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전례]는 부활을 보증해주는 ‘성령’의 기쁜 삶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에서, 사마리아로 파견된 베드로와 요한은 안수로 성령이 충만하게 하고, 당신 사랑을 사도들에게 체험시켜줍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로 이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제2독서>에서, 베드로는 신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셨습니다.”(1베드 3,18)라고 선포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차오를 것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시기 직전에 ‘최후의 만찬’에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주신 위로의 말씀입니다. 신비로 가득 찬 사랑의 말씀입니다.
먼저, 아버지께서 당신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요한 14,16-17)
사실, 약속된 신비로운 이 일이 이미 제자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요한 14,17)
그렇습니다. ‘받아들인 이들’ 안에 ‘성령’은 이미 함께 계십니다. 바로 우리 안에는 ‘성령’이 함께 하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바로 이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이끌어주시며,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삶을 보증해주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돌아가셨다가 다시 오시겠다고 하시면서, 동시에 언제나 제자들 안에 현존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4,19)
그러니 예수님은 가시면서도 현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곧 부활생명은 항상 우리 안에 살아계심을 말해줍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당신의 선물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 안에게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21)
그렇습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사랑의 표시”가 됩니다. 곧 주님의 말씀을 지키고 있다면, 진정 주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혹 자기 자신을 지키고 있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자일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사랑하는 것을 따라 살게 됩니다. 돈을 사랑하면 돈을 따라 살게 되고,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을 따라 살게 됩니다. 아마 우리는 지금 자신이 사랑하고 있는 것, 바로 그것을 따라 살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구를 따라 살고 있는지요? 혹 자기 자신을 따라 살고 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혹 세상의 물질이나 명에나 권력이나 힘을 따라 살고 있다면, 바로 그것들을 사랑하고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금 내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다면, 진정 그분을 사랑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다른 무엇인가를 사랑하는 데는 자신이 스스로 사랑할 수 있겠지만, 예수님을 사랑하는 데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필요한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성령’의 도움으로만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다른 보호자”(요한 14,16)인 “진리의 영”(요한 14,17)을 보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분을 우리와 함께 사시고, 우리 안에 계시게.’(요한 14,17 참조) 하시어, 제자들이 당신 사랑을 지키게 하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령’께서 함께 머무르시지 않으면, 결코 우리 스스로는 사랑의 계명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성령의 도움’으로 사랑하는 일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 구원의 거대한 밑그림을 그리실 때, “사랑”이란 물감으로 그 구원의 초상화를 그리셨습니다. 이 “사랑의 초상화”는 결코 입술로 하는 사랑의 고백이나, 그 어떤 감상이나 감정이나 지성으로는 그릴 수도 그려지지도 않는, 오로지 사랑을 몸소 행함으로만 그려지는 초상화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계명을 지키고 ‘순명’함으로써만 색칠되는 그림이요, 직접 ‘사랑의 삶’으로 온갖 색체를 짜내어야만 그려지는 그림입니다. 곧 ‘사랑’은 순명의 실천으로 그려지는 삶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빈 도화지 위해 우리의 ‘봉헌의 삶’, ‘사랑의 삶’, ‘성령에 따라 사는 삶’으로 우리의 초상화를, 아니 우리의 삶으로 ‘주님의 초상화’를 그려야 할 일입니다. 우리 삶의 빈 도화지 위에 꽉 찬 ‘예수님의 초상화’를 베껴 그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
주님!
당신의 계명을 지키기보다
당신을 먼저 사랑하게 하소서.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기에 지키게 하소서.
사랑하면서도 지키지 못함은 제 사랑의 부족이오니
제 사랑을 도와주소서.
제 사랑에 앞서
먼저 베푸신 당신의 사랑을 품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깊이 물들게 하시고
당신 사랑의 향기 묻어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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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Mother’s Day입니다. 어머니는 6년 전에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그토록 사랑하신 아버지와 함께 여전히 저와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으리라 믿습니다. 두 분의 사랑으로 제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당연히 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닮았습니다. 아버지는 강인한 성격과 냉철한 판단력을 지녔지만, 체질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머리카락이 일찍 하얗게 되었고, 치아가 좋지 않았고, 혈압이 높았습니다. 어머니는 온유한 품성과 쉽게 결정하지 못하는 성격을 지녔지만, 체질은 좋았습니다. 머리카락도 검었고, 치아도 좋았고, 혈압도 정상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의 성격과 어머니의 체질을 닮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체질은 아버지를 닮아서 머리카락도 일찍 하얗게 되었고, 치아도 좋지 않았고, 혈압도 높았습니다. 성격은 어머니를 닮아서 온유한 편이고, 쉽게 결정을 못 내리는 편입니다. 예전에는 그런 체질과 성격이 맘에 들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그런 부모님을 닮아서 감사합니다. 체질은 노력으로 좋게 할 수 있었습니다. 성격은 더 좋은 분들의 도움으로 좋은 판단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방적으로 제자들을 이끌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믿음이 약했던 토마 사도를 나무라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 사도에게 손과 옆구리의 못 자국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토마야! 너는 보고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참으로 복되다.” 그러자 토마는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천천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빵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분께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을 때, 우리와 빵을 나누셨을 때, 우리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그리고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은 너희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길은 고속도로가 아닙니다. 전용도로도 아닙니다. 벗이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희생의 길입니다. 자갈과 가시밭을 정리하는 개척의 길입니다. 권력의 길이 아닙니다. 명예의 길이 아닙니다. 성공의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보다 큰 영광이 드러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진리는 남을 구속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남을 배척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벗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바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희망입니다. 예수님의 진리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넘어 부활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는 신앙입니다. 생명은 나만을 위한 생명이 아닙니다. 타인의 생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죄인일지라도, 아픈 사람일지라도, 외로운 사람일지라도,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이방인일지라도 모두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 태어난 생명입니다.
오늘은 부활 제6주일입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핵심은 ‘성령’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 협조자를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예언자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을 바른길로 인도하셨습니다.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신 예수님께서는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지만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이제 성령과 함께 시작합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 그들 가운데 아직 아무에게도 성령께서 내리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때 사도들이 그들에게 안수하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오늘 제2독서도 이렇게 전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하면 여러분은 행복합니다. 영광의 성령 곧 하느님의 성령께서 여러분 위에 머물러 계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켜라.” 그 계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살 수 있도록 가장 소중한 선물,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주십니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요구하는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내어주는 삶을 살 것인지입니다. 주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먼저 사랑하고, 먼저 내어주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면 좋겠습니다. 신앙은 어쩌면 단순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신앙은 어쩌면 단순합니다. 내게 소중한 것을 기꺼이 나눌 줄 아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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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엄청난 사랑의 기적을 연출하시는 성령님!
젊은 사제 시절, 저희가 운영하던 아동 보육 시설에는 초등학생 꼬마들도 간간이 들어와 살았습니다.
하늘 같은 중고생 형들과 함께 사느라 고생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래서인지 꼬마들에게 보호 본능이랄까 측은지심이 느껴져 더 각별하게 챙기곤 했습니다.
가끔 연피정이나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형들로부터 시달릴 꼬마들을 생각하니 영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마음은 꼬마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거 있을 때는 그나마 든든한 보호막이 되어주곤 했는데, 이래저래 불안함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안그래도 어린 나이에 부모와 분리된 친구들인데, 이제 겨우 정붙이고 마음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데, 보호자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장시간 자리를 비운다니, 아이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일종의 분리불안증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미안한 마음에 금방 돌아올 테니 아무 걱정하지 마라며 다독이고 그렇게 떠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당신과의 분리로 인해 걱정이 태산인 제자들과 오늘 우리를 향해
손수 우리의 등을 다독다독 두드리시면서 안심시키십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내 일시적인 부재로 인해 너희는 근심에 휩싸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걱정을 하지 말거라. 그 근심은 잠시뿐이란다.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란다.
내가 즉시 다시 돌아올 것이란다.
이 얼마나 마음 든든한 주님 말씀인지 모르겠습니다.
곧 돌아온다 해 놓고, 안 돌아오는 경우가 부지기수인데, 주님께서는 100퍼센트 확실히 돌아오실 것이니 아무 걱정하지 말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하신 약속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지키셨습니다.
승천하시자마자 약속하신 대로 즉시 당신의 대리자요, 우리를 악으로부터 영원히 지켜줄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히 우리 가운데 머무시도록 배려해주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은 참으로 다양합니다.
생명의 수여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참 삶에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참삶이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삶이겠지요.
중재자 성령께서는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이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계속하실 것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짓 논리에 휩싸이지 않고 참 진리이신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고통, 우리의 죄, 우리의 연약함, 우리의 나약함을 못 견뎌하시는 분이십니다.
큰 측은지심으로 우리를 바라보시며, 우리가 당신께 합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십니다.
우리의 상처를 꿰매주십니다.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올무에서 자유롭게 해주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잔잔하고 깊은 영적 샘터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가끔 만나는 교우들 가운데, 놀라운 신앙의 소유자들을 뵙습니다.
어찌 그리도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을 지닐 수 있는지, 깜짝 놀랄 지경입니다.
인간의 지성이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사랑의 기적을 연출하십니다,
그 배경에 대체 무엇이 있었을까요?
성령의 굳건한 현존과 활동이 자리 잡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한 우리지만, 보호자 성령께서 늘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고, 우리 인생 여정에 동반하심을 굳게 믿는다면 우리 역시 세상의 두려움을 기꺼이 떨칠 수 있을 것입니다.
적대자들이 아무리 우리를 협박한다 할지라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우리네 인생이 아무리 요동치고 뒤집힌다 할지라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 풍파를 견뎌낼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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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4,15–21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이어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그분께서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실 것이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사랑과 계명,
현존과 성령,
믿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감정적으로 주님을 좋아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주님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그 말씀 안에서 살아가려는 순종으로 드러납니다.
성 예로니모는
말씀을 사랑한 교부답게
주님 사랑이 곧 말씀에 대한 충실함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말씀을 입으로만 높이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실제로 지켜 내는 데서
참된 사랑이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매우 깊은 위로입니다.
주님은 떠나시지만
부재로 끝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성령을 통해
더 깊고 지속적인 방식으로
우리 가운데 머무르십니다.
보호자 성령은
외로운 영혼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흩어진 마음을 다시 모으며
진리 안에 머무르게 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특별히 마음에 남는 것은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성령의 현존이
눈에 보이는 방식만으로 확인되지 않음을 뜻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종종
조용하고 깊게 이루어집니다.
성령은 소란하게 우리를 흔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무시며
사랑과 진리의 길을 잊지 않게 하시는 분입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사랑이 왜 절제와 연결되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사랑은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방종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내 욕심과 충동을 덜어 내는 선택입니다.
아낌은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
불필요한 말,
불필요한 소비,
불필요한 자아과시를 줄이는 영적 훈련입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사랑을 아끼는 일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함부로 낭비하지 않고
삶 안에 간직하는 일입니다.
또한 성령은
우리 안에 머무시는 분이시기에
아낌의 영성을 더 깊게 만드십니다.
무엇이 정말 필요한지,
무엇이 덜어 내야 할 것인지,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삼켜야 하는지,
무엇이 생명을 살리고
무엇이 관계를 메마르게 하는지를
성령께서 조용히 가르쳐 주십니다.
아낌은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성령의 분별 안에서 사는 지혜입니다.
오늘은 성체의 날입니다.
성체 안에서 주님은
당신 자신을 가장 귀한 선물로 내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성체 앞에서 우리는 묻게 됩니다.
나는 주님의 사랑을 얼마나 귀히 여기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몸을 모시면서도
내 삶을 함부로 흩어 버리고 있지는 않은가?
성체는
우리를 아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삶을 바르게 사용하도록 부르는 초대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정말 주님을 사랑하는가?
그 사랑이 내 선택과 습관,
말과 소비,
시간과 관계 안에서 드러나고 있는가?
나는 성령을 고아처럼 잊고 사는가,
아니면 내 안에 머무시는 보호자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 사랑을 지킬 수 있도록
성령을 보내 주십니다.
주님,
제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만 하지 않게 하시고
당신 계명을 귀히 지키게 하소서.
성령께서 제 안에 머무시어
무엇을 덜고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분별하게 하시며
성체 안에서 받은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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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예수고난회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님.
예전 읽었던 묵상 글의 내용을 잠시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어느 인권 변호사의 표현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출신 학교나 지역에 현수막을 걸고 축하하는데, 오히려 축하보다는 근조謹弔라고 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변호사가 참된 변호사로 살려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변호사는 의뢰인에게 무죄를 받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변론할 때 의뢰인과 똑같은 심정과 처지가 되어 의뢰인이 당한 억울함에 이를 갈고 치를 떨 만큼 부정적인 느낌을 공감하고 동감할 때만이 무죄로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합니다. 사람을 변호하는 양심 있는 변호사가 이럴진대, 우리의 변호자이시며 협력자이신 성령께서는 하느님 앞에서 이보다 더하지 않겠어요.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 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변호해 주시는 분이십니다.”(로8,26)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신 것처럼 하느님의 자녀로 이 땅을 살아가면서,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1베3,16) 살자면, 때론 억울하고 속상한 일을 겪게 되고 그럴 때 나의 처지에서 나를 위해 올바른 변호를 해 줄 변호인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보호자이신 성령은 아무도 돌보아주지 않는 우리를 고아처럼 내 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입장과 처지에 서서 아빠 하느님께 변호해 주실 것임을 희망하며 묵묵히 자신이 해야 할 바를 살아가도록 오늘 복음은 우리를 초대합니다.
오늘 복음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문맥을 다음과 같이 변경해서 읽고 묵상하고자 합니다. 『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14,15)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14,21) 이를 위해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14, 16~20) 』 이렇게 읽다 보면 오늘 복음 메시지의 핵심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과 사랑의 계명(=서로 사랑)을 지키는 것이 똑같다는 점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님의 사랑을 듣고 보고 만져 보았기에 그 사랑의 계명을 지킬 것입니다. 여기서 ‘지킨다.’라는 의미는 단순히 ‘준수하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마음에 새겨 사랑하는 사람의 가르침과 말씀을 기쁘게 실천하겠다는 내적 다짐이며 깊은 신뢰를 담고 있습니다. 결국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랑하는 존재이신 예수님에게 대한 깊은 신뢰이며 사랑의 충실성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한 떠나가실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당신께 대한 사랑보다 당신이 남긴 계명 실천 여부가 더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며,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며, 당신도 당신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참모습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14,21) 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당신의 계명을 지키려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다른 보호자> 곧 <진리의 영>을 보내주시어 “영원히 제자들과 함께 있도록 하실 것”(14,16)을 약속하십니다. 다른 보호자라는 표현은 예수님이야말로 우리의 일차적인 보호자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신 직접적인 구원자이셨지만 이제 우리가 아버지의 집에 머물 자리를 마련하시기 위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되돌아간다는 관점에서 이 땅에 남아 당신의 계명을 지키려는 우리를 위해 무책임하게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당신 떠난 이후에 우리의 협력자이자 보호자인 성령을 보낼 것임을 약속합니다.
다른 보호자는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머무시며, 진리를 증언할 뿐만 아니라 제자들을 진리로 이끌어주실 것입니다. (요16,13) 성경에서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이고,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는 예수님이 바로 진리이십니다. (14,6) 따라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진리의 영 안에 함께 하시며 성령을 통해 현존하시고 활동하실 뿐만 아니라 새로운 차원에서 제자들과 더 친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시며 성령의 활동을 통해 당신 자신을 더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실 것입니다. 이 진리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세상과 제자는 서로 대척 관계로 격리됩니다. “세상은 성령을 알지 못하지만, 너희는 성령을 알고 있다.”(14,17참조)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여기서 말하는 앎이란 바로 인격적인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사랑의 앎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10장 참조) 그러기에 제자들은 다른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알고-받아들여-함께 생활함으로써 예수님을 좀 더 깊이 알게 되고 알게 되는 만큼 예수님의 계명을 충실히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체험적으로 깨닫게 될 때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셨다, 라는 사실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성령의 역동적인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인생은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처럼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기 마련이고, 이별은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기에 헤어짐은 순간이지만 이 순간을 통해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16,7)라는 말씀처럼 헤어짐은 영과 진리 안에서 제자들에게 성장을 위한 은총의 시간이고, 부재를 통해서 현존을 더욱 깨닫게 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하는 영적 성숙의 기회입니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14,18)은 사실 예수님의 첫 번째 떠남 곧 죽음을 말한다면, ‘그날’(14,20)은 죽음 건너편으로 부활을 의미하며 그날 이후 제자들은 예수님과 영과 진리로 새롭게 만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예수님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14,17) 생명의 빛이요 세상의 빛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빛으로 빛을 뵈온다, 는 표현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을 생명의 빛으로 다시 보게 됩니다. 이 부활의 빛으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예수님 안에 있는 것처럼 자신들이 예수님 안에 있고, 예수님이 자신들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요즘 젊은이들이 자주 사용하는 내 안에 너 있고, 너 안에 나 있다, 는 말을 이해한다면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의 하나됨을 의미합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 는 말씀처럼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이 궁극적 상태는 바로 우리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아버지께, 아버지의 집에 도달한 후 성취될 것임을 우리는 희망하고 늘 깨어 준비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희망이며, 이 얼마나 거룩한 믿음입니까? 사랑은 모든 존재를 하나로 만들 것임을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최종적인 행복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아버지의 뜻이라면, 사랑을 행하다가 고난을 겪는 것을”(1베3,17)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며 오히려 “육으로는 살해되셨지만 영으로는 다시 생명을 받으신” (1베3,18) 예수님처럼 고난을 사랑으로 받아들이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사랑하며 살아가는 우리 사랑의 실천을 통해 “모든 사람이 우리의 사랑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요13,35) 이보다 더 아름다운 예수님에게 대한 우리의 사랑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거룩한 아빠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 온 세상이 당신 앞에 엎드려, 당신의 사랑을 노래하게 하소서. 당신 이름을 노래하게 하소서. 너희는 와서 보아라. 하느님의 업적을, 사람들에게 이루신 놀라운 그 위업을!』(시66,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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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키엣 대주교님.
사랑은 직접 살아내고 체험하는 것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인간과 함께 사시고, 인간을 가르치시며, 인간에게 은총과 축복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인간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실 때 제자들은 큰 슬픔과 허전함에 빠졌습니다. 너무도 가까이 모셨던 스승과 헤어져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마음의 안식처를 잃어버렸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도 예수님께서는 성부께 청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보호자이시며 진리의 영이십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우리가 참된 길을 깨닫고 주님의 말씀 안에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세상은 달콤한 말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성령께서는 무엇이 참된 진리인지 깨닫게 하시고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주님의 길을 따르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때로는 손해와 희생을 감수해야 하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우리의 약함을 붙들어 주시고 하느님께 나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참된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의 근원이시며, 참된 사랑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 머무를 때 비로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나 지식으로 생각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랑은 직접 살아내고 체험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된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며,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사랑 안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사랑하셨기에 언제나 아버지 안에 머무르셨고,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먼저 선택하셨습니다. 우리도 자신만을 붙들고 살아갈 때에는 참된 평화를 얻을 수 없지만, 자신을 내려놓고 주님 안에 머물 때 비로소 참된 행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만으로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늘 ‘나’를 앞세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보호자이신 성령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붙들어 주시고, 자기중심적인 마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뜻 안에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그렇게 우리는 점점 더 하느님 안에 머물게 되고, 마침내 삼위일체 하느님의 사랑과 일치하는 삶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와 사랑, 그리고 죽음을 넘어 부활에 이르는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가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때로는 희생과 고난이 따르더라도, 성령께서 함께하시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생명과 사랑의 근원이신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참된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오시기를 늘 간절히 청해야 합니다.
“오소서 성령님, 저희를 위로하시고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쳐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지금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세상의 기준과 욕심입니까, 아니면 성령께서 이끄시는 주님의 말씀입니까?
내 안에서 아직 내려놓지 못한 ‘나 자신’은 무엇인지 돌아봅시다.
2. 예수님께서는 사랑과 진리, 그리고 부활의 길을 먼저 걸어가셨습니다.
나 또한 어려움과 희생 속에서도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고 있습니까?
오늘 성령께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시기를 간절히 청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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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많은 이가 아름다워지려고 합니다. 막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화장하고 성당에 온 것을 보았습니다. 화장하지 않아도 매우 예쁜데도 왜 화장할까요?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화장하고 또 예쁜 옷을 입고 때로는 성형까지 하는 것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려는 마음 때문일 것입니다. 국어사전에 등재된 ‘아름답다’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보이는 대상이나 음향, 목소리 따위가 균형과 조화를 이루어 눈과 귀에 즐거움과 만족을 줄 만하다.”
하지만 15세기 문헌 ‘석보상절’에서는 ‘아름답다’를 ‘아(我)답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는 ‘나’를 의미합니다. 즉, 아름다움이란 나 자신이 되기로 결심한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나답게 사는 것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데 ‘나’를 숨기려고만 하기에 스스로 아름답지 못하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나답게 사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그 창조 목적은 사랑에 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가장 ‘보시니 좋은’ 것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예수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 14,15)로 시작해서,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로 맺습니다. 처음과 끝에 사랑을 위치한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보통 사랑을 단순한 감정적 떨림이나 낭만적인 고백 정도로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너는 그냥 좋은 사람이 아니라, 내가 자꾸 생각하는 사람이야.’, ‘부담 주고 싶지 않은데, 내 마음을 솔직히 전하고 싶어. 사랑해.’, ‘너를 사랑하고 난 뒤, 평범한 하루도 조금 특별해졌어.’, ‘내 마음이 자꾸 너에게 가. 이제는 숨기기보다 알리고 싶어. 사랑해.’ 등의 표현으로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참된 사랑은 그분이 주신 계명(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삶 속에서 실천하려는 구체적인 의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여 그분의 말씀을 따를 때, 우리는 성부 하느님의 사랑을 받게 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자신을 더욱 깊이 드러내십니다. 특히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새로운 선물을 약속하십니다. 바로 ‘다른 보호자’, 성령입니다. 이 진리의 영은 자기중심적인 욕망에 갇힌 세상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 안에서 머무르고 활동하십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으로 나답게, 즉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매일의 삶 속에서 이웃을 향한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때 진정으로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나는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은 나를 바라보십니다(성 요한 비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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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성령의 사람인가?
“진리, 희망, 선교”
“만백성 우리 하느님 찬미하여라.
찬미의 노랫소리 우렁차게 불러라.”(시편66,8)
“어떻게 살아야 하나?”
예나 이제나 여전히 절박한 물음입니다. 어제는 젊은 형제자매 두 분이 피정 답사차 방문하여 “참 자아”와 “거짓 자아”에 대해 물었습니다. 주님을 따라 살 때 참 자아의 꽉찬 알맹이의 삶에 참 기쁨과 참 평화도 있지만, 주님을 떠나 탐욕 따라 살 때 거짓 자아, 껍데기의 허무와 무지의 삶이라 했습니다.
참 자아의 삶은 빛과 생명, 희망의 삶이요, 거짓 자아의 삶은 어둠과 죽음, 절망의 삶이라 했습니다. 참 자아의 삶은 하느님 중심의 삶이요 거짓 자아의 삶은 자기 중심의 삶이라 했습니다. 하느님이냐 우상이냐? 선택의 갈림길입니다. 새벽 바티칸 뉴스에 나오는 레오 교황님 말씀도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결코 하느님을 군사적, 경제적, 또는 정치적 이득을 위해 도구화하지 마라.”
교황청을 방문한 아프리카 세네칼 무슬림 대표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에 삶의 진정한 가치를 가르치고 있다.”
교황청을 방문한 장애자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피조물 보호는 공동선에 봉사하는 것이다.”
피조물에 대한 관리인의 책임에 최선을 다할 것을 당부한 말씀입니다. 요약하면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라는 촉구입니다. 얼마 전 어느 정의롭고 지혜로운 교사의 글도 좋은 가르침이 됐습니다.
“이제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를 넘어 아이들 사이에서 ‘문과 딸배’라는 신조어까지 나왔다. 대학에서 인문사회 계열을 전공하면, 졸업후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곤 오토바이 배달뿐이라는 자조적 표현이다. ‘딸배’는 배달이라는 단어를 앞뒤로 뒤집어 부르는 멸칭이다. 이제 문과 과목은 ‘퇴출 0순위’며 아예 ‘동네북’ 신세다.
아이들은 이구동성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일이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가장 즐거운 일이 돈을 마음껏 쓰는 거라고 답했다. 그들에겐 돈이 세상의 전부인 듯 했다. 사실 누군가 내게 교육을 정의해보라고 하면, 단1초의 주저함 없이 이렇게 답한다.
‘가난할지언정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일이고, 적게 갖고 많이 존재하는 삶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이에 공감할 수 있는 아이들이 사라져가는 현실이 그저 서글플 뿐이다.”
젊은이들뿐 아니라 남녀노소 대부분 사람들에게 돈이 전부인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돈이 절대적 우상이 된 세상이요 이제 AI라는 강력한 우상까지 등장했습니다. 답은 하나 성령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답은 성령뿐입니다. 참으로 성령 따라 살 때 참나의 기쁨과 평화의 삶이요 아름답고 행복한 품위의 삶입니다. 어떻게? 바로 오늘 말씀이 답을 줍니다.
첫째, ‘진리’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진리의 사람입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진리의 영, 성령 따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진리이신 주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할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진리의 영, 파라클레토 보호자 성령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리를 사랑합니다. 진리는 사랑입니다.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사랑하며 즐겨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주님의 다음 말씀이 참 행복의 비결을 가르쳐줍니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사랑이 진리입니다. 성령은 사랑이요 생명입니다. 사람은 사랑입니다. 진리의 영 따라 살 때 주님과 이웃을 사랑하게 되고 자발적 기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킵니다. 참사람이 되는 길은 진리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이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진리의 영 따라 사는 길뿐입니다. 날로 진리이신 주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둘째, ‘희망’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희망의 사람입니다.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희망의 기쁨, 희망의 인내입니다. 희망의 빛, 희망의 힘입니다. 희망은 어둠을 밝히는 빛이요 내적 힘의 원천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어둠을 이웃에게 참 좋은 선물은 희망의 표징이 되는 삶입니다.
삶의 의욕을 북돋아 주는 희망이 인간 품위의 기초입니다. 희망이 생생해야 유혹에 빠지지 않고 세상 것들에 중독되어 타락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영이 바로 우리를 희망의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요 우리의 희망입니다. 다음 베드로 사도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참 좋은 선물이 평화요 희망입니다. 참으로 우리의 참 평화이자 참 희망이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과 하나 되어 살아 갈 때 우리의 온유하고 겸손한 삶 자체기 이웃에게는 참 좋은 평화와 희망의 선물이 될 것입니다.
셋째, ‘선교’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선교의 사람입니다. 선교로 드러나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선교는 교회는 물론 믿는 이들의 존재이유입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 선포여야 합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파스카의 예수님을 환히 드러내는 삶 자체가 복음 선포입니다. 바로 사도행전의 필리포스와 베드로와 요한이 선교의 모법입니다. 마치 성령 충만한 주님의 현존 같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필리포스가 그리스도를 선포하자 사마리아 군중은 한마음으로 경청하였고, 많은 사람에게 붙어 있던 더러운 영들은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으며 또 많은 중풍 병자와 불구자가 나았습니다. 그리하여 그 고을에 큰 기쁨이 넘쳤으니, 기쁨 또한 부활한 주님의 참 좋은 선물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사마리아인들이 성령을 받도록 기도하였고, 세례를 받은 그들을 안수하자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 따라 신바람 나는 주님 제자들의 복음 선포 활동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성령 따라 하느님 중심의 삶을 충실히 사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진리의 사람, 희망의 사람, 선교의 사람입니다. 날로 길이자 진리이자 생명이신 주님을 닮아가면서 주님과 우정의 여정도 깊어질 것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날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주님은 우리 영혼에 생기를 주시고,
실족함이 없도록 붙드셨도다.”(시편66,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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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그리고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이지 못하지만, 너희는
그분을 알고 있다.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요한 14,15-21).”
1) 승천하실 때, 예수님께서는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라고 약속하셨습니다(마태 28,20).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주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일하시면서 표징들이 뒤따르게 하시어, 그들이 전하는 말씀을 확증해 주셨다.” 라고 증언합니다(마르 16,20).
이 증언은, 예수님께서 “언제나 함께 있겠다.” 라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고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승천은 ‘떠남’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계시기 위해서 당신의 존재 방식을 변화시키신 일입니다.
“성령을 통하여 함께 계시는 것”이 주님의 존재 방식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성령을 체험하는 것은 함께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2)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켜라.” 라는 말씀인데, ‘내 계명’은 좁은 뜻으로는 “서로 사랑하여라.” 라는 계명이고(요한 13,34), 넓은 뜻으로는 예수님의 말씀들과 가르침들 전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16절에 있는 ‘다른 보호자’ 라는 말은 ‘성령’을 뜻하고, ‘다른’이라는 말은 ‘예수님도’ 보호자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다른 보호자’, 즉 성령을 보내시는 것은 원래 보호자이셨던 예수님과 성령이 임무를 교대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과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뒤에는, 신앙인들은 ‘사람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지만, 성령을 통해서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보호와 도움은 계속됩니다.
<주님의 사랑과 보호는 단 한 순간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3) “그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진리를 깨달을 수 있도록 성령께서 너희를 인도해 주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루카복음 24장에,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루카 24,45).
이 말을 ‘성령의 인도’로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날이 밝아 오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 어둠 속에서 비치는 불빛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습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언은 결코 인간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성령에 이끌려 하느님에게서 받아 전한 것입니다(2베드 1,19ㄴ-21).”
<여기서 ‘예언’이라는 말은 성경 말씀 전체를 뜻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한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임의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유명한 학자가 한 말이 그럴듯하게 보인다고 해서 그것을 억지로 갖다 붙여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에는 교회 교도권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고, 그리고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구약은 신약으로, 복음서는 서간문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한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해석할 때에도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합니다.
4) “그분께서 너희와 함께 머무르시고 너희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일하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보호해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여기서 ‘머무르다.’ 라는 말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함께 일하는 것,
또 살아 움직이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능동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적극적으로 선교활동을 하는 사람이 성령의 인도와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사람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합니다.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내가 살아 있는 것처럼
너희도 살아 있어라.”로 해석됩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으로 죽어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묵상기도나 피정의 가치와 의미를
부정하는 말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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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0. 부활 제6주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4,15-21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어떤 결혼식에서 주례 선생님이 신랑 신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은 나이 서른을 넘기면 고쳐서 쓸 수가 없습니다. 그저 보태서 쓸 뿐 입니다. 그 사람에게 부족한 부분을 내가 보태서 채워주는 겁니다.” 참으로 공감되는 말입니다. 얼마나 많은 부부들이 배우자를 자기가 원하는 모습으로 억지로 바꾸려고 들다가 서로 마음이 상해 관계가 틀어지고 마는지요?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했습니다. 습관이 되고 삶이 되어 굳어진 모습은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바뀌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는게 중요합니다. 그에게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부분은 내 사랑으로 기꺼이, 기쁘게 채워주면 됩니다. 그러면 상처를 입을 일도, 감정이 상할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둘이 함께 더 좋은 모습으로 발전해 갈 수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사랑과 계명의 실천을 서로 연결시키십니다. 당신께서 가르쳐주신 계명들을 충실히 지켜야만, 비로소 우리가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자기 방식을 고집하며 상대방을 소유하고 지배하려 드는 일방적 사랑은 상대방에게 상처를 남기고, 자기 자신은 사랑이 주는 참된 행복을 누리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나도 좋아하기 위해, 상대방이 바라는 것을 해주기 위해 노력하는 상호 보완적 사랑은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 완성에 이르게 하지요. 그러니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내가 바라는 것을 그분께 요구하려고만 들지 말고, 주님께서 나에게 바라시는 뜻이 무엇인지,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그분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여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향한 사랑으로 나의 부족함을 채워 하느님을 닮은 완전한 모습으로 변화되어 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 힘겨운 사랑의 여정을 끝까지 잘 걸을 수 있도록 이끌어주시고 힘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보호자’를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보호자’로 번역된 그리스어 ‘파라클레토스’는 법정용어로서 ‘가까이 불린 이’라는 뜻입니다. 무섭고 차가운 법의 심판대 앞에 의지할 이 하나 없이, 걱정과 두려움에 떨며 서 있는 피고인 곁에서, 그의 입장을 대변하고 선처를 호소하는 변호자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의 존재가 피고인에게는 너무나 큰 위로와 힘이 되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존재, 즉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힘들고 괴로울 때, 모두가 나의 잘못을 비난하고 손가락질하여 세상에 나 혼자 남겨진 듯한 막막함과 고독을 느낄 때, 우리와 함께 계시며 힘을 주시는 분, 마치 내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신 것처럼 나의 슬픔과 아픔, 불안과 걱정을 완전히 이해해주시고 깊이 공감해주시며 든든하게 나를 변호해 주시는 분을 우리에게 보내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실수와 잘못을 훌훌 털고 일어나 다시 최선을 다해 사랑할 수 있도록, 끝까지 보살펴 주시고 지켜주겠다고 하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함께 있어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간절히 필요로 할 때 뿐만 아니라, 그가 고통과 시련의 무게에 짓눌려 나라는 존재를 떠올리지도 못하는 절망의 순간에도 그와 함께 머물러주는 것이 사랑인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드님이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내내 그분과 함께 하셨고, 아드님께서는 아버지께 대한 사랑과 순명으로 하느님 안에 머무르셨습니다. 또한 주님은 당신 자신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시는 그 사랑으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우리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 그분 안에 머무르지요. 이처럼 참된 사랑의 힘으로 서로가 서로 안에 머무르는 것이, 그렇게 해서 삶의 참된 기쁨과 행복을 모두 함께 누리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고 성령께서 이끄시는 ‘사랑의 일치’입니다. 그 일치에 이른 이들은 세상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진보와 보수라는 ‘대립’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선을 지향하되 악을 미워하지 않고 회개로 이끌고, 정의를 외치면서도 불의에는 함께 아파하며, 진보의 개혁을 보수의 안정으로 균형 잡아 함께 발전해 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 겁니다. 그렇게 모든 이가 회개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 함께 머물러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모두가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면 하느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향한 당신 사랑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내가 사랑하는 분으로부터 나 또한 사랑받는다는 분명한 확신 속에서 하루 하루를 기쁘게 살아갈 수 있게 되지요. 우리를 향한 주님 사랑은 절대 애매하거나 모호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한결같이, 최선을 다해, 끝까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사랑을 실천함에 있어 상처 입을까봐 망설이고, 손해를 볼까봐 주저하는 우리의 소극적 태도 때문에 주님 사랑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미루거나 주저하지 말고, 복잡하게 재고 따지며 계산하려 들지 말고, 일단 사랑을 실천합시다. 그리고 주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어떻게 실현되고 완성되는지를 기대하며 지켜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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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9일 11시부터 10일 오늘 11시까지 모든 일정에서 침묵으로 지낸 1박 2일이였다.
침묵피정이라며 함께 하자는 지인 형제의 권유에 따라, 등록을 학도 궁금했지만 우선 신부님들 묵상글 공유는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이 먼저 였다. 숙소가 1인실이기에 노트북을 가져가려고 문의를 하니 모든 전자기구는 사양이란다. 핸드폰만 입소하여 나갈 때 돌려 주니 그리 알라고---
침묵피정더 처음이였지만 북촌, 가희동 성당 맞은편에 노틀단 수녀원이 있다는 것도 60년 넘게 서울살고 가희동성당에는 10여차례 갔지만 몰랐었는데---, 들어가 보니 정원이 넓고 잘 조성되여 새가 지저귀는 도심피정으로는 최적 장소였다.
침묵피정을 주관한 한국CLC도 이번에서야 알게 되였고---
서설이 길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번 침묵피정에서 그간 계속 생각했던 이 카페에 신부님들의 묵상글을 계속 배달(?)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것이다.
다른 비대면 매체 여러 곳에서 하고 있는 것을,
몸과 마음이 잘 따르지 못하는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하지 ???,
몇 번의 공지에도 함께 할 분이 나서지 아니함은 물론 지인들에게 카페 인계 의사를 표시하고, 아니면 일부 뜨락을 맡아 돌라고 당부를 함은 물론 주변의 아는 분에게 권유를 당부드렸으나 아직까지 ---.
그래 요즈음은 할 때까지 해보자는 생각만을 했으나
이번 피정에서 우선 지금까지 여러 차례 게재 방법 등을 변경하여으나
더욱 이 부담에서 벗어나 나를 찿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굳혀
새벽미사갈 시간에 쫓겨 제목만 보고 수합하여 공유하기보다는
내가 충분한 시간을 갖고 묵상한 후, 이 강론글, 묵상글은 다른 분들이 묵상했으면 좋겠다는
글을 미사전 시간이 되면 1-2편, 아니면 귀가하여 몇편, 시간 여유가 없을 때는 오후에라도 오리는 식으로
전환하려고 합니다.
그러하오니 이 카페의 글을 재 전달하시는 분들은 다른 방도를 취하여 주세요.
아울러 이른 시간에, 또 한 신부님의 글을 계속적으로 접하고 싶으신 분들은
오늘 출처 게재하였던 내용을, 공지로 올릴 것이오니 직접 찿아가 보시든가 다른 카페, 브로그 등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정해진 시간대가 아닌 시간에, 어느 한신부님의 글을 꼭 매일 올리지는 아니할 것입니다.
널리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