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6. 3. 큐티
시편 137: 5 ~ 9
예루살렘을 그리워함
관찰 :
1)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다
- 5절.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잊을진대 내 오른손이 그의 재주를 잊을지로다” =>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을 가장 극단적 형태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조건절을 포함하는 저주문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예루살렘을 잊는다면 이라는 의미는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과 충성이 변하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수도로서의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시편 기자의 사랑과 충성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1절에 표현된 대로 여호와 하나님께 예배드리며 찬양을 올리는 곳인 “시온”과 동의어로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찬양을 연주하는 손과 찬양을 부르는 혀가 오직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만약 그 충성심이 조금이라도 변한다면 차라리 사용할 수 없는 불구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 6절. “내가 예루살렘을 기억하지 아니하거나 내가 가장 즐거워하는 것보다 더 즐거워하지 아니할진대 내 혀가 내 입천장에 붙을지로다” => 본문의 의미는 ‘만약 내가 예루살렘을 나의 가장 큰 기쁨 위에 올려두지 않는다면’이라는 의미입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을 포함한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예루살렘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저주 기원문의 형식으로 예루살렘에 대한 굳은 사랑과 충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예루살렘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가장 큰 기쁨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자신은 더 이상 어떤 노래도 부를 수 없는 벙어리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가 얼마나 진실하게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다짐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또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다시금 하나님을 향한 노래를 부르기를 염원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7절. “여호와여 예루살렘이 멸망하던 날을 기억하시고 에돔 자손을 치소서 그들의 말이 헐어 버리라 헐어 버리라 그 기초까지 헐어 버리라 하였나이다” =>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을 파괴한 바벨론을 저주하고 이에 동조했던 에돔 자손을 저주하고 있습니다. 본절에서는 예루살렘의 함락을 기뻐하고 동조한 에돔에 대하여 저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을 나타내는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합니다. 에돔은 이스라엘의 조상인 야곱의 형제 에서의 후예들이 한 민족으로 성장하여 이룬 나라입니다. 이들은 세일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건설하였고 과거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이스라엘을 적대시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이스라엘의 소유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기에 에돔은 지속적으로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적대시 해왔고 대립적인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결국 에돔은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될 때 그 일에 동참하여 주민을 학살하며 온갖 잔악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파괴되고 압제 당한 유다 남부를 합병하여 자기들의 세력으로 흡수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에돔에 대한 적대감은 다른 어떤 민족이나 국가에 대한 것보다 큰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에돔을 저주하는 것은 그들에 대한 복수심에 의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예루살렘을 무너뜨린 것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 대한 사랑, 즉 하나님에 대한 충성 및 사랑으로인한 분노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살아계심, 공의로우심, 거룩하심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보다 적극적으로 예루살렘의 회복을 바라보는 것으로서의 저주를 기원 것입니다. 이러한 시편 기자의 저주는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에돔은 A.D. 70년 로마의 침략으로 민족 자체가 세상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되었습니다.
2) 바벨론을 멸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8절. “멸망할 딸 바벨론아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네게 갚는 자가 복이 있으리로다” => 본절은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당사자 바벨론을 향한 저주를 발하고 있습니다. 바벨론은 잠깐 세력을 발휘하다 얼마 되지 않아 B.C.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시편 기자의 저주는 잔혹한 복수심의 발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공의에 입각한 정당한 것이었습니다. 시편 기자는 사악한 바벨론에게 돌려줄 것을 돌려줌으로 공의의 회복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전제하여 이러한 저주문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 9절. “ 네 어린 것들을 바위에 메어치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 => 본문은 ‘너희의 젖먹는 어인이들을 잡아 바위 위에 내동댕이쳐서 산산이 부수어 죽이는 자는 복이 있으리로다’라는 의미입니다. 매우 잔혹한 이와 같은 표현으로 말미암아 본 시편은 지나치게 잔인한 것으로, 심지어 증오와 복수에 근거한 매우 비복음적인 시로 평가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묘사된 행태는 사실은 바벨론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한 일이었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 같은 일은 다시 재기하여 보복 행위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하여 행해지는 일반적인 잔혹한 행위였습니다. 따라서 본문은 이스라엘에 가한 바벨론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보응의 의미와 다시 재기할 수 없도록 완전히 멸망함을 기원하는 문학적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바벨론에 대한 저주 기원은 에돔에 대한 저주와 마찬가지로 개인적 원한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에 따른 간구이며, 이러한 바벨론의 멸망을 간구하는 시편 기자의 마음 이면에는 이곳 바벨론의 멸망이 의미하는 것이 시온으로 돌아가 버드나무에 걸어둔 수금을 다시 연주하며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드리기를 소망하는 간절한 염원이 담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 시편에서의 표현에 대해서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보다 그 이면에 함축된 하나님에 대한 충성과 사랑을 상징하는 시온에 대한 사랑의 강도를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맞습니다.
가르침 :
1) 본 시편은 “두 성의 노래”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온에 대해서는 극진한 사랑과 그리움을 고백하지만 다른 한 성에 대해서는 지독한 저주를 퍼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 말하자면 바벨론에 대한 저주는 시온에 대한 사랑의 또 다른 형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바벨론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도성과 하나님에 대한 참사랑을 깨닫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존재입니다. 시온과 경건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와서 찬양과 예배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방인들의 조롱을 받으면서 더욱 더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참으로 깨닫게 된 것입니다.
2) 시편 기자는 자신이 깨닫게 된 시온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가장 극단적이고 처절한 형태인 저주문을 통해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가슴에 사무치는 감정을 저주문의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오늘날 너무나 쉽고 편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에 대하여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본 시편을 통해서 경각심을 갖게 됩니다.
3)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 흘리심에 근거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갈 때마다 감동과 감격과 감사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찬송을 당연한 것으로 여길 때, 시편 137편의 기자는 어처구니 없게 여길 것입니다. 주님을 예배하고 찬양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귀한 은혜인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적용 :
1)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했던 예루살렘을 잊을 수 없던 시편 기자의 심정을 공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온전히 드려지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있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입니다. 나의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께 나아가 예배를 드리는 것이기에 한 번의 예배에 마음과 생각을 집중하고 전심으로 드리는 예배를 소망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예배가 그렇게 되길 소망합니다.
2) 주님을 예배함이 기쁨됩니다. 이 기쁨을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떤 상황과 형편도 감사와 찬양을 주님께 드리지 못할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치러주신 주님의 은혜가 모든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과 경배를 드리기에 이미 충분하고 넘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형편과 상황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