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스러움이 힙이 되는 순간, 세상의 색이 뒤집힌다.”
남대문 시장은 늘 북적인다. 오늘도 예외는 없었다. 호떡 냄새와 장바구니 끌리는 소리, 이국적 억양의 대화가 한데 섞여 도시의 심장을 두드린다. 그 소란스러움 속에서 시선을 붙잡은 건 누빔 조끼였다. 지나치려다 발이 멈추었다. 시장 가게 앞마다 색색의 조끼가 걸려있지 않은 집이 없었다. ‘이건 좀 과한데? 저걸 누가 사지? 서울에선 김장도 거의 안 하는데…’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색색의 조끼들이 햇빛을 받아 작은 파도처럼 출렁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누빔조끼 점포마다 외국인 관광객들이, 젊은 커플들이, 중년들이, 서로 다른 결이 한 점을 향해 모여들었다. 그 장면은 어떤 유행이 아니라, 색의 흐름이 뒤바뀌는 장면처럼 보였다. 평소처럼 굴러가던 일상이 갑자기 금이 가듯 찢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름 모를 바람이 결을 바꾸는 그 찰나였다. 재래시장 풍경과 전혀 맞지 않는 세련된 모녀가 초록색 조끼를 집어 들었다. 손끝으로 천의 결을 한 번 쓰다듬었다. “이거 예쁘다.” 그 순간 공기가 얇게 갈라지며 내 머리 속으로 흰빛 한 줄기 흘러들었다. 촌스러움이라 여겼던 그 조끼가 초록빛 물감처럼 세련된 감각 속으로 스며드는 장면이었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감각이 그들의 손끝에서 불쑥 번쩍였다.
저녁 뉴스도 이 현상을 다루고 있었다. 화면 속 시장 골목이 환하게 담기며 소란스러운 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왔다 시장 상인들 말로는 점포마다 하루에 수십 장씩 팔려 나간다는 것이다. 특히 외국인들이 k힙이라며 몇 장씩 사 간다는 것이다. 단돈 5천 원짜리가 그들의 감각을 불쑥 비틀었다. 김장물 튀어도 괜찮다는 실용성, 우스꽝스러움과 귀여움의 기묘한 결, 그리고 누비 바느질이 품은 서민적 따뜻함이 한 덩어리로 밀려왔다. 나는 그날, 세상의 감각이 얼마나 예기치 않게 뒤집히는지 생생히 보았다.
저녁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남대문 시장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듯 목소리가 설레었다 늘 남대문으로 발길을 옮기는 내 습관을 알고 있는 친구였다. 무얼 샀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샀어. 근데 마음이 이상해. 나, 그 할머니 조끼 살까 봐?” 친구가 웃었다. “넌 평소 그런 취향 아니었잖아?” 그 물음에 나는 웃으며 “아니, 세상이 내 감각을 살짝 뒤집어 놓았으니 따라갈래!” 우린 둘 다 하하거리며 웃었다. 그 말은 농담처럼 흘렀지만 나에게는 작은 따뜻함이었다.
남대문 시장은 그런 곳이다. 오래된 것이 새롭게 태어나고, 촌스러움이 힙이 되고, 취향이라는 것이 정답 없이 흔들리며 성장하는 공간이다. 언젠가 나도 저 초록색 조끼 한 벌을 들고 시장을 나설 것이다. 변화는 거창한 게 아니다. 저 무지개빛, 한 올 한 올이 우리 안쪽 어딘가에 조용히 머물러, 오래도록 잔향을 남기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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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조용히 머물러, 오래도록 잔향을 남기는 남대문시장 내용 글 잘 읽었네요 .
늘 새로워지세요 . 그리고 건행하세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