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지스텔루이
'빅 이어'와 웅장한 테마 음악이 흐르는 UEFA 챔피언스리그는 올해로 17번째 대회를 맞는다. 1955년 '유러피언컵(European Cup)'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이 대회는 당초 유럽 각 리그의 우승팀들만 출전하는 대회였지만 1992년 규모를 확장하고 리그제를 혼합하면서 지금의 이름 'UEFA 챔피언스리그(Champions League)'를 얻었다. 1993년 5월 첫 챔피언을 가린 챔피언스리그는 그 동안 모두 열 여섯 번의 결승전을 통해 챔피언을 가렸다.
[BEST 7] 신세대 오렌지 군단의 등장
1994/1995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1995년 5월 24일)
요한 크루이프와 마르코 판 바스턴. 이 두 전설적 축구 스타를 키워낸 것은 하나의 클럽이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연고로 하는 아약스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하지만 두 영웅의 이름은 후배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면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저들을 뛰어 넘을 수 있을 것인가. 아니,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것일까.
아약스가 결승에 올랐을 때, 모두들 그것만으로 대단하다며 박수를 보냈다. 하지만 결승전 상대는 꼭 1년 전 '드림팀' 바르셀로나를 처참하게 부숴버렸던 AC밀란. 게다가 이번에 그들은 1년 전 결승전에는 징계로 빠졌던 바레시-코스타쿠르타 '철의 포백'까지 보유한 터였다. 주전 멤버에 큰 변화가 없는 밀란의 완숙된 경기력은 아약스 '꼬마'들에게는 넘지 못할 벽처럼 느껴질 지 모르는 일이었다.
여기서 아직 스물 다섯이던 판 데르 사르(현 맨유)가 오히려 베테랑처럼 보일 정도로 어렸던 아약스 선수단의 구성을 살펴보자. 오른쪽 풀백 라이지허(22세), 미드필더 셰도르프(18세), 에드가 다비즈(22세), 오베르마스(22세), 은완코 카누(19세), 클루이베르트(18세) 등 그야말로 젊다 못해 어린 팀이 아닐 수 없는 구성이다. 주장 대니 블린트(34세), 리베로 레이카르트(33세)를 제외하면 20대 초반에 불과한 평균 연령의 팀이 노련한 밀란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것이라 기대하기란 쉽지 않은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승에 오르는 동안 단련된 아약스 '꼬마들'의 눈빛은 달랐다. 조별 리그에서 이미 AC밀란과 같은 조에 속해 있던 아약스는 밀란과의 두 차례 홈 앤드 어웨이 맞대결을 모두 2-0 승리로 끝낸데다 4강에서도 만만찮은 상대 바이에른 뮌헨을 무려 5-2로 격파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러나 결승전은 쉽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경계하며 골을 넣지 못한 채 종료 시점으로 치닫고있었던 것이다. 때마침 등장한 해결사는 '18세 서브' 클루이베르트.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하던 이 거구의 공격수는 '유럽 최고의 유망주'라는 소리를 들으며 인상적인 데뷔 시즌을 보내고 있었지만 그에 만족할 수 없었다. 경기 종료 5분을 남겨놓고 극적인 결승골을 터뜨리며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 것이다. 이로써 아약스는 요한 크루이프의 선수 시절 이 대회의 전신인 유러피언컵을 3연패(1971,1972,1973)한 이래 무려 24년만에 다시 유럽 정상에 오르게 된다.
한편, 이 날의 경기는 선수들이 사상 처음으로 유니폼 스폰서를 배 위에 달고 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티에리 앙리와 호나우지뉴는 21세기 아스널과 바르셀로나를 각각 상징하는 이름이다. 두 영웅의 이름 아래 성공 시대를 열었던 두 클럽은 이들을 떠나보내기에 앞서 유럽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아스널의 결승 진출은 여러 가지 면에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웬만한 유럽축구 강국의 수도가 이 대회 우승 트로피를 가져간 경험이 있는 것과 달리 아직 런던 팀들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단 한 번도 챔피언의 영예를 만나지 못한 것이 상황. 그 악연의 사슬을 끊어줄 가장 유력한 후보로 꼽힌 아스널에게 이번 경기는 남다른 소회로 다가왔다. 앙리, 피레스, 베르캄프, 륭베리, 그리고 솔 캠벨이 함께 뛰는 이때야말로 아스널에게는 절호의 기회인 터였다. 게다가, 프리미어리그 무패 우승의 신화를 뒤로 한 채 마침내 당도한 결승전이었으니 기대감은 더했다. 아스널은 자신을 대신해 뛰던 플라미니를 벤치로 되밀어낸 애실리 콜의 합류로 힘을 받고 있었다. 반면, 바르셀로나는 부상에서 복귀한 리오넬 메시를 벤치에 앉혀둔 채 경기를 시작한다.
그러나, 선제골은 10명이 뛰던 아스널의 몫이었다. 프리킥 상황에서 앙리가 올려준 볼을 공격에 가담한 중앙 수비수 솔 켐벨이 머리로 받아 넣은 것이다. 뒤진 바르셀로나는 하프타임에 약간의 부상을 입은 수비형 미드필더 에드미우손을 빼고 이니에스타를 투입하면서 10명의 아스널을 한층 더 압박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10명으로 줄어든 아스널은 한 골 차 리드를 지키기 위해 더욱 견고한 플레이를 펼쳤고 바르셀로나의 레이카르트 감독은 후반 16분과 26분, 라르손과 벨레찌를 투입하면서 공격의 고삐를 더욱 죄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레이카르트 감독의 교체 카드는 대성공으로 끝났다.
이니에스타로부터 공을 이어받은 라르손의 패스가 에토의 발 끝에서 동점골로 이어졌고(후반 30분) 이어 5분 만에 적극적으로 오버래핑에 가담한 벨레찌가 또 한 번 라르손의 패스를 슛으로 연결하며 결승골을 엮어낸 것이다. 10명의 아스널은 더 이상 버틸 힘을 찾지 못했고 경기는 결국 2-1 바르셀로나의 승리로 끝난다. 앙리는 고개를 떨궜고 호나우지뉴는 허공에 주먹을 휘두리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BEST 5] 젊은 지단, 묄러 앞에 무릎 꿇다
1996/1997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1997년 5월 28일)
경기 초반, '젊은' 크리스티안 비에리가 골 찬스를 놓치지 않았거나, 지단의 슛이 골대를 맞고 튕겨나오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네덜란드 아약스를 4강에서 6-2 (2-1, 4-1) 스코어로 완파하고 올라온 유벤투스의 기세라면 아마도 경기 흐름은 초반에 결정되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상 도르트문트의 홈 경기처럼 치러진 이 대회 결승전에서 전년도 우승팀 유벤투스는 손에 잡았던 승기를 꼭 쥐지 못했고 결국 분루를 삼켜야 했다. 승부처는 전반 30분께의 두 차례 코너킥. 여기서 5분 간격으로 두 골을 뽑아낸 리들레의 활약으로 도르트문트는 우세한 가운데 경기를 펼칠 수 있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도르트문트의 히츠펠트 감독이 수를 꺼내 들었다. 히츠펠트 감독은 굳히기 작전이 아닌 공격의 변화를 택한다. 실점 이후 공격수 두 명을 연달아 교체한 히츠펠트 감독의 선택은 교체 투입된 라스 릭켄의 발 끝에서 결실을 맺는다. 릭켄은 투입 직후 첫 번째 터치를 슛으로 연결했는데 이것이 골문을 살짝 비우고 나온 페루치 골키퍼의 머리 위로 날아가 골망을 흔든 것이다. 3-1.
이 날 세 골에 모두 관여한 묄러가 '2골'의 주인공 리들레와 함께 가장 돋보였다면, 도르트문트 승리의 숨은 공신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드필더 폴 램버트일 것이다. 그는 유벤투스의 지네딘 지단을 꽁꽁 묶은 것은 물론 승리의 시발점이 된 리들레의 선제골을 도우며 팀 우승에 단단히 한 몫을 해냈다. 첫 시즌에 유럽 정상에 오를 수도 있었던 지단은 이 날 별다른 기여를 하지 못했고 결국 유벤투스에서는 정상 도전의 기회를 다시 얻지 못하게 된다. 지단이 유럽 챔피언 자리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5년 뒤, 이 날 자신을 끈질기게 마크했던 램버트의 땅 스코틀랜드에서였다.
유벤투스에서 유럽 정복의 꿈을 이루지 못한 지네딘 지단. 1998년(월드컵)과 2000년(유럽선수권대회),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는 각각 세계와 유럽을 제패했지만 클럽에서만큼은 정상 등극의 기회를 잡지 못했다. 지단이 2001년 유벤투스를 떠나 레알 마드리드에 합류한 것은 그 아쉬움을 풀기 위한 적극적 행동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는 라울, 호베르투 카를로스, 루이스 피구 등을 만나 레알 마드리드 이적 후 첫 시즌에 유럽 정상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잡게 된다.
하지만, 상대는 만만찮았다. 독일의 바이엘 레버쿠젠은 16강 조별리그(당시에는 32강과 16강이 모두 조별 4개팀 리그제였다)에서 아스널과 유벤투스를 조 3,4위로 밀어내고 8강에 진출한 뒤 리버풀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접전 끝에 각각 4-3, 3-3(원정골)로 물리치고 결승에 오른 상태였다. 특히, 젊은 베르바토프(현 맨유), 발락(현 첼시), 루시우(현 뮌헨) 등이 라멜로프, 슈나이더, 노이빌레 등 베테랑 선수들과 잘 조화를 이뤄 탄탄한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레알 마드리드보다 두 배나 많은 슈팅[13-7]을 하고도 아쉽게 패한 레버쿠젠에게 2001-2002 시즌은 안타까움으로 기억된다. 리그, 독일컵, 챔피언스리그 3관왕에 도전했던 레버쿠젠은 독일컵 결승(5월11일)에서 1-0으로 앞서다 2-4로 역전패하며 준우승에 머물더니 리그에서도 승점 1점 차 준우승에 그쳤다. 결국 '준우승 트레블’에 그치고 만 레버쿠젠은 여전히 리그와 챔피언스리그에서 단 한 번의 우승도 맛보지 못하고 있다.
1992년, 그러니까 챔피언스리그의 전신 '유러피언컵'의 마지막 시즌을 우승으로 장식했던 바르셀로나에게 2년만의 정상 도전은 낯설지 않은 무대였다. 1988년 감독 부임 이래 늘 공격 축구를 견지했던 요한 크루이프는 이 결승전 이전에도 팀에 무려 11개의 우승 트로피를 안겨준 상태였다. 화려한 공격력과 수 많은 트로피를 동시에 거머쥔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에는 언제나 '드림팀'이라는 찬사가 따라붙었다. 마침, 크루이프의 바르셀로나는 리그에서 막 4년 연속 우승을 달성한 터이기도 했다. 어디 그뿐이랴.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오르는 과정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았고 11경기에서 26골을 터뜨리며 우렁차게 결승까지 오른 상태였다.
반면, 바르셀로나의 맞상대 AC밀란은 코펜하겐(덴마크)과의 2라운드 원정에서 6-0 승리를 거둔 것을 제외하면 10경기에서 10골을 터뜨리는 데 그쳤다. 1년 전 은퇴한 판 바스턴의 공백은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는 약점이었다. 더욱이 밀란은 주장이자 (이제는 레전드가 된) 수비의 핵인 프랑코 바레시가 또 다른 수비 파트너인 코스타쿠르타와 함께 징계로 결장하게 되어 있었고, 나아가 당시 챔피언스리그 규정이 한 경기 엔트리에 포함할 수 있는 외국인 선수를 세 명으로 제한한 탓에 파팽(프랑스)과 미하엘 라우드럽(덴마크), 보반(크로아티아), 사비체비치(유고슬라비아) 등을 동시에 출전시킬 수 없는 어려움까지 감내해야 했다. 많은 사람들이 바르셀로나의 우승을 예상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 날의 패배는 크루이프 '드림팀' 해체의 실질적인 시발점이었다. 그 해, '발롱도르'를 수상하며 유럽 최고 선수 자리에 오른 공격수 스토이치코프(불가리아)는 이 경기가 끝난 지 1년만에 바르셀로나를 떠났고 브라질의 득점기계 호마리우 역시 같은 해 브라질 플라멩구로 날아가 버렸다. 또, 결승전 이후 2년 동안 바르셀로나는 단 한 개의 우승도 따내지 못한 크루이프 감독마저 1996년 잉글랜드 출신 보비 롭슨 감독에게 지휘봉을 물려주며 감독직을 내놓는다. 결국 이 경기는 90년대 초반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바르셀로나 드림팀의 쓸쓸한 종말을 알린 승부이자 '명장' 카펠로 감독의 지략이 만천하에 검증된 시합으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 젊은 나이지만 중원을 든든하게 이끌었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 날의 교훈을 잊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어 이번 결승전이 더욱 기대된다.)
모든 일에는 징후가 있기 마련. 우리가 '기적'이라고 부르는 축구의 이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김한윤의 인저리 타임 골이 스리위자야의 '기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물론, 징후라는 건 결국 기적이 일어난 뒤에야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말이다. (흐음.)
리버풀의 이스탄불 기적을 말하려면 그 징후를 먼저 살펴야 한다. 여기서 '첫번째 기적'이라 칭할 올림피아코스전은 '두번째 기적'인 이스탄불 AC밀란 전의 명확한 징후였다.
1st 기적 : 32강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인 6라운드 리버풀 대 올림피아코스 전 (2004년 12월 8일). 올림피아코스에 승점 3점이 뒤진 3위였던 리버풀이 1~2위에게만 주어지는 16강 진출 티켓을 따내기란 쉽지 않아 보였다. 이미 올림피아코스 원정에서 0-1로 패한 적이 있는 리버풀은 실점 없이 승리하거나(1-0 이상), 두 골 차 이상의 승리를 거둬야만 16강에 오를 수 있는 절박한 상황. 게다가 올림피아코스의 히바우두가 프리킥 선제골을 넣으면서 리버풀의 16강 진출 전망은 극히 희박해졌다. 이제, 추가 실점 없이 세 골을 넣어야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버풀에는 '용병술의 마법사'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과 주장 스티븐 제라드가 있었다. 베니테스 감독은 하프타임에 왼쪽 수비수 트라오레를 빼고 공격수 시나마 퐁골레를 투입한다. 리세를 왼쪽 수비수로 내려 수비 라인을 유지하는 대신 공격 숫자를 늘린 것이다. 퐁골레의 투입은 즉각적인 효과를 얻었다. 퐁골레가 후반 시작 2분만에 동점골을 넣은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갈 길은 멀었다. 2골이 더 필요한 후반 33분, 베니테스 감독은 밀란 바로시 대신 후보 공격수 멜러를 투입한다. 그리고, 3분 뒤 멜러는 2-1 역전골을 터뜨리며 분위기 반전에 성공한다. 그리고… 마침내 기적의 순간이 찾아왔다. 탈락 가능성이 점점 높아지던 후반 40분, 왼쪽 측면에서 공을 갖고 있던 동료를 향해, '뭔가'를 감지한 제라드가 신호를 보낸다. 큰 일을 낼거란 예감이 들었던 것일까. 동료의 패스를 이어받은 제라드는 거침없이 슛을 날렸고 이 공은 16강 진출을 꿈꾸던 올림피아코스의 골망을 출렁인다. 3-1. 리버풀은 조 2위로 16강에 오른다. (조 1위는 AS모나코)
2nd 기적 : 올림피아코스 전을 힘겹게 통과한 16강에서 바이엘 레버쿠젠을 홈과 원정에서 각각 3-1로 꺾으며 가뿐하게 8강에 오른다. 8강에서 유벤투스를, 4강에서 첼시를 꺾은 리버풀은 맨유(2-0), 인터밀란(5-0)을 차례로 꺾은 뒤 박지성이 골을 넣은 PSV마저 제치코 결승에 오른 AC밀란과 터키 이스탄불에서 맞붙게 된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밀란의 우세를 예상했다. 이미 2년 전, 유벤투스를 꺾고 이 대회 정상에 오른 바 있던 AC밀란은 카푸-스탐-네스타-말디니로 구성된 베테랑 포백과 가투소-피를로의 중원, 셰도르프-카카의 공격 지원, 셰브첸코-크레스포 투톱의 득점력이 잘 조화된 강호였다. 반면, 리버풀은 자국 리그에서 지역 라이벌 에버튼에조차 밀려 다음 시즌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권 확보도 어려운 5위에 그친 상태. (6위 볼턴과 같은 승점 58점이었지만 골득실에서 앞서 간신히 수성한 5위였다.)
출발은 다수의 예상대로였다. 경기 시작과 함께 말디니(!)골로 앞서간 AC밀란은 여유있는 경기력으로 전반전을 진행하며 경기를 지배해나갔다. 전반 38분과 44분에 터진 크레스포의 2골이 조금 늦은 감이 있다고 느껴질 정도로 우수한 경기를 펼쳤다. 반면, 전반 23분만에 해리 키웰이 부상으로 교체되는 아픔까지 겹친 리버풀은 전반 내내 단 하나의 유효슈팅만 기록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라커룸에 앉아 후반전을 기다리던 리버풀 선수들의 마음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터키까지 원정 응원을 따라 나선 수 만 명의 리버풀 팬들이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면 도무지 후반전에 나설 용기가 생기질 않았다고 한다. (수비수 제이미 캐러거는 이후 발간된 자서전을 통해 당시 심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라커룸으로 가는 동안 땅이 꺼질 듯 낙담했고 참을 수 없이 부끄러웠다. 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과 곳곳에 나부끼는 리버풀 팬들의 현수막을 쳐다볼 자신도 없어 고개를 푹 숙인채 땅만 보며 피치를 빠져나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리버풀에는 베니테스 감독과 제라드가 있었다. 밀란이 라커룸에서 전반전을 즐겁게 복기하는 동안 베니테스 감독은 조용히 교체 카드를 꺼내 들었다. 당초 트라오레를 빼고 하만을 투입해 3-5-2 포맷으로 변화를 주려던 베니테스 감독은 오른쪽 수비수 피넌이 작은 부상을 당했다는 팀닥터의 소견을 듣고 교체 대상자를 피넌으로 바꾼다. 남은 교체 카드가 2장인 상황에서 부상 우려가 있는 선수를 그라운드 위로 다시 내보낼 수 없었던 것이다. 베니테스 감독은 낙심한 선수들에게 이렇게 충고했다. "밀란 공격의 핵심은 미드필더 피를로입니다. 루이스 가르시아와 스티븐 제라드가 피를로를 마크하면서 중원을 장악하면 꽁꽁 묶을 수 있어요." 0-3의 스코어 대신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기억한 리버풀 선수들은 15분만에 고개를 들고 경기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제라드의 지휘 아래 우리 모두가 기억하는 '기적의 6분'을 만들어낸다. 후반 9분 제라드의 골로 시작된 리버풀의 반전은 스미체르의 두 번째 골과 알론소의 (PK 미스를 마무리한) 동점골로 이어지며 3-3 스코어로 귀결되었다. 우승컵을 거의 손에 쥐었다고 믿었던 AC밀란 선수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결국 경기는 연장전에 돌입한다. 연장전에서 밀란은 몇 차례 승기를 잡았지만, 피를로와 달 토마손의 슛은 골문을 빗겨났고 셰브첸코마저 찬스를 놓치면서 경기는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ps) 리버풀은 프리미어리그에서는 5위에 그쳐 챔피언스리그 진출권 획득에 실패한다. 하지만, UEFA가 내린 특단의 조치 덕에 우승팀 자격으로 2005/2006 챔피언스리그에 (32강이 아닌) 예선 3라운드 출전하게 된다. 리그 4위를 차지한 에버턴까지 출전해 프리미어리그에서만 무려 5개팀이 출전권을 얻어 '특혜' 논란이 일었지만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리버풀은 이 대회에서 16강에 진출했지만 포르투갈 벤피카에 0-3으로 져 8강 진출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BEST 1] 3분의 기적과 쿠포르의 눈물
1998/1999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1999년 5월 26일)
‘트레블(3관왕)’을 두고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 두 팀의 경기. 이미 자국 리그와 컵 대회 우승을 거머쥔 맨유와 리그 우승을 확정한 채 챔스-컵 대회 결승에 진출한 바이에른 뮌헨의 맞대결. 잉글랜드와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팀들간의 맞대결인데다 장소가 바르셀로나의 누 캄이라는 점에서도 모든 흥행 카드가 다 갖춰진 경기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맨유 퍼거슨 감독의 마음은 무거웠다. 미드필드의 핵심이라 할 두 명의 선수가 유벤투스와의 준결승 전에서 카드를 받아 결승에 나설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주장 로이 킨과 공격형 미드필더 폴 스콜스의 공백은 가뜩이나 중원이 탄탄한 바이에른 뮌헨과의 승부를 앞둔 맨유에게 무척이나 커 보였다. 반면, 바이에른 뮌헨 역시 고민거리는 있었다. 왼쪽 수비수 리자라쥐와 브라질 공격수 엘버가 부상으로 결장한 것. 뮌헨은 두 선수의 자리를 타르나트와 지클러로 메웠다.
선제골은 뮌헨의 몫이었다. 지클러가 욘센의 파울로 얻어낸 프리킥을 마리오 바슬러가 오른발로 절묘하게 차 넣은 것. 수비벽을 절묘하게 벗겨낸 바슬러의 슛이 골망을 흔든 건 전반 6분이었다. 이후 맨유는 줄기차게 뮌헨 진영을 공략했다. 뮌헨도 바슬러의 프리킥을 앞세워 반격을 이어갔다.
결정적 순간은 경기 종료 10분을 남겨두고 나왔다. 퍼거슨 감독이 앤디 콜을 빼고 '동안의 암살자(baby-faced killer)'로 불리던 '슈퍼서브' 솔샤르를 투입한 반면, 히츠펠트 감독은 스위퍼 마테우스 를 뺀 것이다. 뮌헨의 얀커가 문전에서의 오버헤드킥으로 맨유의 크로스바를 맞출 때까지만해도 뮌헨의 우승은 기정사실화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히츠펠트 감독은 내친 김에 전광판 시계가 멎기 1분 전인 89분, 공격적인 바슬러를 빼고 수비까지 겸할 수 있는 사이드 어태커 살리하미지치까지 투입하며 1-0 굳히기에 나선다.
하지만, 두 감독의 선택은 90분이 지난 뒤 극적으로 엇갈린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데이비드 베컴의 오른발'이 있었다. 인저리 타임과 함께 베컴의 발 끝을 떠난 코너킥이 슈마이셀 골키퍼까지 가세한 문전 혼전 상황에서 세링엄의 동점골로 이어진 것이다. (90분 36초) 망연자실한 뮌헨과 한껏 달아오른 맨유. 모두가 연장전을 준비하던 순간, 맨유는 다시 한 번 코너킥을 얻는다. 그리고, 또 한 번 베컴의 발을 떠난 공은 세링엄의 머리를 거쳐 이번엔 솔샤르의 발을 맞고 뮌헨의 골망을 뒤흔들었다. (92분 17초) 2-1, 극적인 역전승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종료 휘슬과 함께 경기가 끝나자 환호라는 두 글자에 담기 어려운 맨유 선수들의 표정 뒤로 마테우스의 맥빠진 얼굴과 얀커의 눈물, 그리고 뮌헨의 '유일한' 외국인 선수였던 가나 수비수 쿠포르의 통곡이 오버랩된다. 명승부의 뒤에 가려진 패자들의 슬픔이 절절하게 묻어난 장면이다. 12년 전, 1987년 유러피언컵 결승에서도 바이에른 뮌헨의 주장 완장을 차고 출전했다가 경기 막판 10분을 남겨놓고 2골을 내줘 1-2로 패한 경험이 있던 마테우스에게는 특히 가슴아픈 순간이었지만 - 결국 마테우스는 이 대회에서 단 한 번도 우승하지 못한 채 은퇴했다 – 젊은 시절 글라스고(1960년)에서 열린 이 대회 결승전(레알 마드리드 7-3 프랑크푸르트)을 보고 매혹되었다던 알렉스 퍼거슨 감독에게는 꿈을 이루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