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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톨릭 성인록
▶복자 에우제니오 3세 교황(7.8)◀
△ 복자 에우제니오 3세 (Eugene III) 교황
▶ 성인명: 에우제니오 3세 (Eugene III)
축일: 7월 8일
성인구분: 복자
신분: 교황
활동지역:
활동연도: +1153년
같은이름: 에우게니오, 에우게니우스, 에우제니우스, 유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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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설명 :
• 이탈리아 피사(Pisa) 근교인 몬테마뇨(Montemagno)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난 에우게니우스(Eugenius, 또는 에우제니오)의 본명은 피에트로 파가넬리(Pietro Paganelli)이다.
그는 1128년 피사의 산 제노(San Zeno) 카말돌리회 수도원의 원장이었고, 1130년대 말 클레르보(Clairvaux)의 성 베르나르두스(Bernardus, 8월 20일)를 만나 그에게 매료되어 1138년 클레르보에서 시토회원이 되었다.
그 후 로마(Rome)의 성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상하지 않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게니우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시아(Brescia)의 아르날도(Arnaldo)의 농간과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Roma)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 그는 1145년 파르마(Parma)의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두스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트 3세 군대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에우게니우스 교황은 1147년에 파리(Paris)와 트리어(Trier)에서 교회회의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랭스(Reims)에서 교회회의를 열어 아르날도를 단죄하였다.
•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로 로마를 떠나야 했다.
이번에는 티볼리(Tivoli)에 거주하였고, 1153년 붉은 수염왕 프레드리히 1세(Friedrich I) 황제와 콘스탄츠(Konstanz)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는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선종하였다.
그의 시신은 성 베드로 대성전에 안치되었다.
•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 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두스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부터 공경을 받았고, 사망 후에 그를 통해 기도하면 기적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그는 1872년 교황 비오 9세(Pius IX)에 의해 시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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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국재속프란치스코회 성인록 ▷
< 7월8일 복자 에우제니오 3세 교황 >
....... (안젤라 | 2010.07.03 Ud.)
▶ 축일 : 7월 8일
< 복자 에우제니오 3세 교황 >
- Beato Eugenio III Papa
- B.Eugenius III
(- (이) 복자 에우제니오 3세 교황
- (라) 복자 에우제니오 3세)
- Born: at Montemagno, Pisa, Italy as Peter dei Paganelli di Montemagno
- Papal Ascension:15 February 1145 .167대
- Died :8 July 1151 at Tivoli, Italy
(- 출생: 몬테마뇨의 피에트로 파가넬리는 이태리 피사 근처 몬테마뇨에서 生
- 교황 착좌: 1145.2.15, 167대 교황
- 사망: 1151.7.8, 이태리 티보리에서 卒)
- Beatified : 28 December 1872 by Pope Pius IX (cultus confirmed)
(- 시복: 1872.12.28, by 교황 비오 9세(공경 승인)
- Eugenio = ben nato, di nobile stirpe, dal greco
(- 에우제니오= (이) 잘 태어난, 고귀한 혈통, ☜ 그리스어)
* 위 (한역 韓譯/ '19.7.8, -아타시 韓)
이탈리아 피사 근교인 몬떼나뇨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피에뜨로 피가넬리인데,
그가 피사 대성당의 성직자가 된 후, 성 베르나르도를 만남으로써 1135년에 클레르보에서 씨토회원이 되었다.
*성 베르나르도아빠스(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축일:8월20일.게시판598번.1324번.
그 후, 로마의 성 아나스타시우스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교황으로 선출되자, 이름을 에우제니오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선출을 반대하던 브레쉬아의 아르놀드의 농간과
그리고 로마 원로원의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을 때 그는 로마를 탈출해야만 하였다.
그는 1145년 2월 18일, 파르마 수도원에서 비밀리에 축성식을 가졌다.
그 후 몇 가지 조약을 체결한 뒤에 로마로 돌아가 정상적인 직무를 수행할 수 있었다.
프랑스 국왕 루이 7세의 초청으로 그는 1147년에 그곳을 방문하였고, 제 2차 십자군 운동을 선포하였다.
비록 이 십자군은 성 베르나르도의 노력이 지대하였지만,
루이 7세와 독일의 콘라드 2세군의 패퇴로 말미암아 실패로 끝났다.
성성을 설치하고 교황청 건물을 짓기 시작하였다.
말타의 예루살렘 기사단을 승인하고 교황궁안에 장발 청소년들의 출입을 금했다.
늘 양털옷을 입고 고행용 피륙을 쓰고 땅바닥에서 잤다.
교황의 휴가에 대한 말을 한 첫 교황이고 세니에도 궁을 지었다
에우제니오는 1147년에 파리와 트리엘에서 시노드를 개최하고,
다음 해에는 라임스에서 시노드를 열고 아르놀드를 단죄하였다.
세상이 어느 정도 평정을 되찾았을 때 그는 로마로 귀향하였으나,
1150년에 재차 강제에 의하여 로마를 떠나야 하였다.
이번에는 티볼리에 거주하였고, 프레데릭 황제와 콘스탄스 조약을 체결하였다(1153년).
이 조약은 교회의 권리를 보증하는데 유익한 협약이었으나,
그해 7월 8일에 그곳에서 운명하였으며 바티칸 동굴에 묻혔다.
그는 소란스런 재임 기간을 통하여 몇 가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동방교회와 로마와의 일치를 시도하였고, 성직자의 규율을 재정비하였으며,
명예스럽지 못한 성직자들을 제거하였고, 마니교의 재건을 봉쇄하였다.
그는 실로 용기가 많았고 단순하였으며, 항상 성 베르나르도의 영적 권고를 따라 생활하여 덕이 출중하였다.
1872년 10월 3일 시복되었다.
♬16.Cherubic - monastic chants-christdesert(Benedict)
Cherubic Hymn(Gregorian chant):
https://youtu.be/eo38ghvGpns
ㅡㅡ끝.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