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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유고 신라사초 미추이사금 7년 기사입니다.
제가 이글을 올리는 것은 양나라 이전에는 신라에 문자가 없었다는 황당한 글을 보면서 울화통이 터져서 입니다.
또 황당한 것은 혹자는 신라가 문자가 없어서 구두로 암기해 오다가 진흥왕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거칠부가 국사를 기록하였다고도 하는데, 신라를 인구 몇 백명살던 촌락국가로 만드려는지 답답하군요.
七年 金兎 正月 智權伊伐飡 孫忠稟主 智權雄權之胞弟也 孫忠碩忠女也 母孫蘭孫光胞妹也 尼今以孫光之仙嗣 尊奉孫氏乎孫蘭 以叔母 其子女皆以尼今爲兄弟 干求甚多 而未嘗拒 孫忠性溫 良精於繡花 常作袞晩 有功於錦房 而不與衆兄弟 干求要進 故尼今竊愛之 曰 “蘭兄弟中 唯汝無慾” 至是最先登相
7년(A.D.331) 금토(金兎=辛卯) 1월 지권(智權)을 이벌찬으로 손충(孫忠)을 품주로 삼았다. 지권은 웅권(雄權)의 같은 어머니의 동생이고, 손충은 석충(碩忠)의 딸이다. 손충의 어머니 손란(蘭孫)은 손광(孫光)의 같은 어머니의 여동생이다. 니금(尼今)이 손광의 선도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손씨(孫氏)를 존중하여 모시기를 손란이라 부르고, 숙모(叔母)로 삼았다. 그 자녀들은 모두 니금의 형제로 삼았다. 청탁이 심히 많았는데, 일찍이 막지 아니하였다. 손충은 성품이 온후하고, 정성을 다하여 꽃을 수놓았다. 항상 늦도록 왕의 곤룡포를 지어 금방(錦房)에 공이 있었다. 무리의 형제들처럼 청탁하여 요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니금이 남몰래 사랑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손란의 형제 중에 오직 너만이 욕심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가장 먼저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二月 乙弗殂 子斯由立 是爲釗也
2월 을불(乙弗, 미천왕)이 죽어, 아들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섰다. 이분이 쇠(釗)다.
四月 倭使至鶴浦 請與元上太公相見 不肯入朝 先是于老戱 謂倭使曰 “早睌虜爾王爲爨奴婢” 皆元上拂于尼今及阿后 視王后如奴婢 而輕侮之心 偶發於倭使 倭使歸報其王 王怒命斬其使 更以他使 來求見浦 吏知有凶計 而告勿見 于老曰 “吾以一國之太公 豈畏小虜” 遂單騎往之 倭責其侮辱 于老曰 “戱言也” 倭不信之 焚之而去 命舟師 迢之不得 命厚葬之 爵其幼子訖解 或曰 于老勇而善將兵 然高尤好自矜 不得衆心 故悒 悒有反志 尼今之臣與倭使相通 而密謀制之云 恐有內訌 而外伐也 尼今親弔太公而慰命元 曰 “太公之子 吾當之子 太公之妻 吾當妻之” 命元泣曰 “自春不雨 中外行禱 妾與太公 將禱于山 夢見大火 而疑之 豈有如此匈事乎” 尼今曰 “皆朕不德之致也” 乃會群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曰 “政刑失則 禱雨無益 今太公遭變 天久不雨 寡人與爾百官 當受其罰” 尼今遂自撻 阿后聞之 親臨止之 命末仇康檍日骨乞淑連音 出五道暗祭 理方得失 問民疾苦 時阿后與乞淑嬖臣好山浸淫 連音妻蘭石與后嬖裙白歡好如夫婦 良夫曰 “上好淫下 則天不雨” 尼今欲自責者使后欲反省 而反命乞淑連音等出外 而自便縱淫 識者歎之
4월 왜의 사신이 학포(鶴浦)에 이르러 원상태공(元上太公, 우노)과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며 입조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다. 앞전에 우노(于老)가 농담을 한 것을, 왜의 사신에게 해명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너희 왕을 깔보고 사로잡아 밥을 짓는 노비로 삼겠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원상(元上, 우노)이 니금(尼今, 미추)과 아후(阿后, 아이혜)를 멸시하여, 왕후(이이혜)를 노비와 같다고 한 것이고 가벼이 모욕하려는 뜻이 있었다. 뜻밖에 왜의 사신에게 전달되었고, 왜의 사신이 그 왕에게 가서 보고하였다. 왕이 노하여 그 사신을 베고, 다른 사신으로 바꾸어 보내어 와서 포구에서 만나기를 청하였다. 하급관리가 흉계가 있음을 알고 만나지 말기를 고하였다. 우노가 말하기를 “나는 일국의 태공(太公)이다. 어찌 작은 오랑캐 따위를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결국엔 단기(單騎, 혼자)로 배에 갔다. 왜의 사신이 그 모욕을 책망하였다. 우노가 말하기를 “잘못 전달된 말이다”라고 하였다. 왜의 사신이 믿지 아니하여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 주사(舟師, 함장)에게 명하여 구하도록 하였으나 멀어서 구하지 못하였다. 후하게 장례를 지내도록 하였다. 그의 어린 아들 흘해(訖解)에게 작위를 내렸다. 또는 말하기를 우노는 용감하고 장병을 잘 다루었으나, 그런 연유로 스스로 자랑하기를 좋아하기가 대단하여 군중의 마음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근심하였는데, 근심이란 반란을 일으키려는 뜻이다. 니금의 신하와 왜의 사신이 서로 통하여 은밀히 그 음모를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다고도 한다. 아마도 내홍(內訌, 내부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분쟁)이 있었으며 외세로부터 베임을 당하였다고 한다. 니금이 태공의 죽음에 친히 조문하고 명원(命元)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태공의 아들은 마땅히 나의 아들이며, 태공의 처는 마땅히 나의 처이기도 하다”라고 하였다. 명원이 울면서 말하기를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나라 안팎에서 기도하고 있으므로, 첩과 태공이 장차 산에 올라 기도를 하려 하였는데, 꿈에 큰 불이 나서 이를 의심하였습니다. 어찌 이와 같이 흉한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하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모두 짐의 부덕 때문에 이와 같은 일을 부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이게 하여 친히 정치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어 말하기를 “정치와 형벌의 잘못으로 비를 기도하는 것은 더 이상 무익한 것이다. 지금 태공이 변란을 맞아 하늘에서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으니 과인(寡人)과 너희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스스로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후가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임하여 매질을 그치도록 하였다. 말구(末仇), 강억(康檍), 일골(日骨), 걸숙(乞淑), 연음(連音)에게 명하여 5도로 나아가 몰래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리방(理方, 관청명)으로 하여금 잘잘못을 살피고, 백성으로 질병과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아후와 걸숙과 사랑을 받는 신하 호산(好山)이 음란함에 빠져들었다. 연음의 처 난석(蘭石)과 후(后)의 사랑을 받는 군백(裙白)이 좋아하고 기뻐하며 부부처럼 지냈다. 양부(良夫)가 말하기를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음란함을 좋아하므로 하늘이 비를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자책(自責)하고자 한 것은 후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는 것이지만, 걸숙과 연음 등이 명에 반(反)하여 밖으로 나가 스스로 제멋대로 편안하게 음란함을 즐겼다.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탄식하였다.
《참조문》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7년 기사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七月 大萱伊伐飡 長禮稟主 長禮尼今之胞姉也 大萱長禮之從弟也 長禮愛之爲夫 不二夫 大萱亦勤厚不二色 時人稱之 大萱母學氏奈解女也 大萱之家世守文章 大萱之文爲當世之魁 凡祈禱褒功 吉凶之文 皆用大萱文 時有玉人 蚊足者善圖書 大萱愛之 皆令蚊足彫之 故得大萱文蚊足書 則世以爲寶 其文鄕文 而孫光稱之 曰 “吾所不及 眞吾父寵孫也” 皆孫光之父眞忠善此文故也 家居萬然 無意於朝廷 而尼今迎之 曰 “非吾兄 無以淸人慾” 長禮布裙蓬首 不行蒨 禮曰 “吾弟爲尼今 吾旣榮矣 何必行蒨乎” 尼今亦知其心 而不奪其節 大萱責之 曰 “君臣之禮 雖兄弟 不可廢” 長禮乃設蒨座及其當夕以其女勝華代入之 曰 “尼今好艾 何必我乎” 尼今笑而許之
7월 대훤(大萱)을 이벌찬으로 장례(長禮)를 품주로 삼았다. 장례는 니금(尼今)의 같은 어머니 누나이다. 대훤은 장례의 종제(從弟)이다. 장례가 그를 사랑하여 남편으로 삼았고 다른 남편을 두지 않았다. 대훤 역시 부지런하고 온후하며 다른 여자를 두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대훤의 어머니 학씨(學氏)는 내해(奈解)의 딸이다. 대훤의 집안은 세세대로 문장가의 벼슬을 지켜왔는데, 대훤의 글은 당세의 으뜸이었다. 무릇 기도하거나 공을 기리거나 길흉(吉凶)을 점치는 문장은 모두 대훤의 문장이다. 당시 옥인(玉人)중에 문족(蚊足)이라는 자가 있어 그림과 글씨에 능하여 대훤이 그를 사랑하였다. 모두 문족이라는 자에게 명하여 새기게 하였다. 그런 연유로 대훤의 문장과 문족의 글씨를 얻으면 곧 세세대로 보물로 삼았는데 그 글은 향문(鄕文)으로 작성되었다. 손광이 그 글을 칭찬하며 말하기를 “나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진짜 나의 아버지의 총애를 받는 손자로구나”라고 하였다. 모두 손광의 아버지는 진충(眞忠)은 이런 글에 능통하였던 까닭이다. 가정에서는 많이 그러하지만 조정(朝廷)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니금이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나의 형이 아니면 탐욕이 없는 사람을 바랄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장례가 치마를 펼치고 쑥대머리(蓬首,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져 어지럽게 된 머리)를 하며 천(蒨, 품주가 되는 의식인 듯)을 행하지 않았다. (장)례가 말하기를 “나의 동생이 니금이고, 나는 이미 영화로운데 하필이면 품주가 되라고 하는 가”라고 하였다. 니금 역시 그 마음을 알고 그 절개를 잃지 않게 하였다. 대훤이 그것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예절에 비록 형제라고 할지라도 그만 두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장례가 이에 품주의 자리(蒨座)에 앉고 그 날 저녁 그녀의 딸 승화(勝華)를 대신하여 들어가도록 하였다. 승화가 말하기를 “니금은 남색을 좋아하는데, 하필이면 나를 대신하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니금이 웃으며 그것을 허락하였다.
九月 命宝相 歸伊西
9월 보상(宝相)에게 이서(伊西)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첫댓글 왜 자꾸 반복되는 논의를 만드시려는지 모르겠네요. 남당유고. 남당유고를 근거 자료로 삼기 전에 남당유고의 타당성에 대한 연구를 하시는 것이 좋은 출발점일 듯 합니다. 정성일 님께는 남당유고가 정확한 근거 자료가 될 수 있겠지만 모든 이들이 동의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댓글이 올라와서 반가워서 살펴보았더니 남당유고를 올리지 말라는 글이로군요. 수박이 잘 익었는지 안 익었는지는 수박을 쪼개보고 맛을 보아야 아는 것이지, 포장지 상태 혹은 모양만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닌 것으로 사료됩니다만... 다수의 사람에게 인정 받는다는 것을 무시하면 안되죠. 권위 있는 사료에 근거하여 서술할 때 그 서술에도 권위가 생기는 법입니다. 저 같은 사람의 반대를 듣기 싫으시거든 '남당 유고에 근거한 글을 올리지 말거나 '남당 유고의 권위'를 잘 설명하여 여러 회원님들의 동의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문자가 있었겠지요. 님의 열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겠습니다.
毒
여기에 올려서, 여러 사람들이 보고, 그 진술의 진위를 판단해 나가는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보기 싫은 분들은 안 보면 될 뿐이고, 반드시 역사학자들이 미리 판단해서, 이것이 참고할만한 역사책이다 혹은 아니다라고 할 이유도 없고, 그것이 옳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남당 글을 올리는 것이 특정 누구를 비방하거나, 인격을 침해하는 것도 아닌 데, 열을 내며, 재갈을 물리려고 하는 것은 과히 보기 좋지 않습니다.
카페에 글이 올라오면 안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역사 연구의 옳은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일부러 감정적으로 재갈을 물리려는 것은 '전혀' 아니지요.
님이 과연 남당 유고가 여기 올라올 가치가 없는 글이라 판단하고, 님의 생각과 부합하는 것만이 역사 연구의 옳은 방향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역사연구의 옳은 방향 제시? 사명감이 지나친 데, 능력이 못되면 곁에 있는 사람들이 피곤해 집니다^^. 진리는 누가 독점적으로 가지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의견들이 경쟁하며, 토론되는 가운데 나올 것입니다. 요즘 높은 곳에 누구를 향해서 '소통하라'는 말이 많더군요. 푸른 집에 앉은 그 분처럼 생각이 먹통이고,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여러 사람이 불행해지는 걸 반면교사로 권하고 싶군요
그리고, 카페에 올라 와 있는 글 중 안 볼 수 있는 방법 많습니다. 여기가 님 혼자 하는 블로그도 아니고, 정성일님글을 보고 싶은 다른 사람을 고려할 정도의 배려와 존중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내가 잘나서 실력이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닙니다. "실력이 좋으신(특히 언어학 쪽에서. ex, 자유게시판 13018번 글)" 님께서 보시기에는 실력도 없는 자가 설치는 것이 보기에 안좋으시겠지만... 그리고 내 생각과 부합하는 것만이 옳은 방향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냐고 물으셨는데 네,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 적어도 나만 가진 생각은 아니기 때문이지요. 나의 이런 생각에 동의하시는 이 카페 회원님들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실례로 나는 이런 생각을 역사문 카페지기이신 김용만 선생님의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책에서 배웠습니다.
덧붙이자면 나는 남당유고를 일절 가치도 없는 책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그랬다고 한 것은 님의 생각일 뿐이고 나는 다만 충분히 검증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근거 자료로 인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고 말할 뿐입니다.
님이 검열해서 괜찮은 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찬성하는 것이고, 님이 여기 다수의 생각을 대표해서, 여기 글을 올리든지 올리지 말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누가 권한을 주었습니까? 민주주의는 내가 찬성하지 않는 생각조차도 허용할 수 있는 관용(이전에 누군가 톨레랑스라고 하든가^^)에 기반한 개인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가 가장 기초적인 것입니다. 저는 님의 생각이 여기 다수를 대표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만일 설사 그렇다 하더라도 소수의 생각이 다른 사람이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것(다른 사람를 모욕하거나, 터무니없이 비방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학설을 표현하는 것)을 막는 것이 옳은 것인지 다시 한 번 묻고 싶군요
그리고, 님한테 아주 거슬리는 말같이 보이는 '능력이 안되는'이란 표현의 앞 뒤 문맥을 잘 보세요. 저는 '역사연구의 올바른 방향제시'를 거론할 만한 능력이 안 된다는 의미로 적었습니다. 적어도 천학비재한 제가 보기에 ,수십년간 전문적으로 한 분야를 연구해서, 학계에서 모두 인정할 만한 분, 대가로 인정되는 분 정도가 저런 용어를 쓴다면, 그 분에 능력에 걸맞는 것이라 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서, 어떤 분야에 대해서 내가 '올바른 방향제시'라는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참으로 대담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습니다. 스스로 남들에게 그 정도의 권위를 보여 줄 수 있다면, 굳이 저런 말을 할 필요도 없겠죠^^
나만이 가진 생각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혼자만 하는 생각이 옳은 것이다고 하는 것은 님 말마따나 대담한 짓이겠죠. 권위자의 말을 빌어 이것이 옳으니 옳지 않으니 하는 것도 안되는걸까요? 그리고 내가 언제 검열이라는 말을 썼는지? 나의 동의 하에 정성일님의 글이 올라와야 한다고 하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하지 않은 말, 의도가 아니었던 말을, 한 것처럼 그리고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몰고가는 것이 흡사 3대 신문 언론 플레이와 흡사하시군요.
그리고 이 문제가 언제부터 불거진 문제인데, 다른 사람들 의견을 대표하느니 마느니 하는 말을 왜 하시는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내가 언제 대다수 회원님들의 생각을 대표하겠다고 했는지. 모르시겠으면 검색하셔서 그동안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동안 정성일님에게 반론 댓글을 달았던 분들에게 나에게 하시는 것처럼 놔두라고 말씀해보시지요
이미 제가 말한 것의 핵심을 이해했으리라 믿고, 적어도 3대신문을 비난할 정도이면, 무엇이 옳은 태도인지 판단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님의 생각이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생각도 소중합니다. 그 정도만 동의하면, 이런 문제로 더이상 길게 쓸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음... 저 역시 조수아님처럼 <남당유고> 는 사료로서의 가치가 (최소한 현 단계에서는) 없다는 생각입니다만, 게시판의 글 등재 원칙에서는 야율초재님의 말씀이 정론이라는 걸 부인 못하겠네요. 모든 글은, 그것이 타인을 비방하거나 욕설, 그리고 이 카페에서 경계하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글만 아니라면 일단 올리는 것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내용에 대한 검열은 가급적 않는 것이 옳다는 생각입니다.
남당유고 올리는 것 자체를 막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남당유고를 자유게시판에서라도 자주 소개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만, 역사토론방에서 토론을 할 때 근거자료로서 인용하는 것을 가급적 자제해 달라는 것입니다. 남당유고의 현 위치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누군가가 남당유고는 죄다 남당이 지어낸 것이다라고해도 딱히 제대로 된 반론을 펼칠 수 없을 정도입니다(물론 제가 이렇게 생각을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내용의 진실 여부를 떠나서 아직은 검증조차 하기 어려운 사서이기 때문에 인용을 하는 것은 극히 시기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카페에 남당유고를 연구(?)하는 게시판을 따로 만들었음 하는 개인적인 바람도 있습니다.
나중에 기회되면 남당유고 전문을 카페에 업로드해보는것도 좋은 일이라 생각됩니다. 일단 접해보고 남당유고가 맞는지 틀리는지 논해도 늦지 않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