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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편지 (25) <제대는 갈바리아 산이다>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사성제를 바치는 것보다도 더 거룩하고 더 위대한 일은 하느님께서도 하실 수 없으시다."어째서 그런가? 미사성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속(救贖) 사업을 종합적으로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미사는 예수님의 탄생, 수난 및 죽으심, 즉 하느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행하시는 신비들을 포함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렇게 가르쳤다. "최후의 만찬 때, 즉 당신께서 배반당하시던 밤에 예수님께서는 당신 몸과 피의 희생인 성체 성사를 세우셨다. 그리하여 십자가상의 희생 제사를 당신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모든 세기들을 통하여 계속하고자 하셨다" (Sacrosanctum Concilium, n. 47).
그보다 일찍 교황 비오 12세께서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가르치심을 주셨다. "골고타의 제대는 우리들의 성당들의 제대들과 다름이 없다. 성당 안의 제대 또한 골고타처럼 하나의 산이며,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하느님과 인간들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계신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미사성제를 바치는 것은 십자가상에서 예수님께서 죽으셨던 것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꼬는 "사제의 손을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께서 제대에 내려오실 때 인간들은 두려움으로 떨며, 세상도 진동하며, 천국 전체가 깊이 감동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참으로, 미사성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으심의 희생을 재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정의의 진노하심을 누그러뜨리기에 충분하다. "하느님의 모든 진노하심과 분노하심이 미사의 봉헌 앞에서 풀어진다." 라고 성 대 알베르또는 기록하였다.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는 수녀들에게 말하였다. "미사성제가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지상의 모든 것이 멸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사성제만이 하느님의 (진노의) 팔을 붙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미사성제가 없다면, 교회는 분명히 지속될 수 없을 것이며 세상은 희망 없이 상실되고 말 것이다.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는 "미사가 없다면, 지구는 오래 전에 이미 사람들의 죄로 인하여 파괴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비오 신부는 "세계가 태양 없이 존속하는 것이 미사성제 없이 존속하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씀은 뽀르 모리스의 성 레오나르드의 말씀과도 맥이 통하는 것이다. "만약 미사가 없다면, 세상은 이미 그 안의 사악함으로 인하여 깊은 구렁텅이로 침몰되고 말았을 것이다. 미사는 세상을 떠받들고 있는 강력한 힘이다." -성 알퐁소 드 리구오리 <자신의 내면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내적 열심이라는 불씨는 쉽사리 드러내지 말고 항상 잘 덮어서 조심스럽게 숨겨서 보존해야 한다.
시시각각으로 나무를 올려놓아 불씨의 불이 타오르게 하듯 화살기도 등으로 자주 마음을 들어 올려 하느님을 우러러 보고 담화하지 않고, 자신의 욕구에 몰두하거나 하느님의 특별한 부르심이나 인도하심 없이 무슨 일에 참견하려들면 이불은 꺼질 위험이 많다.
혹은 꺼지지 않더라도 여기저기 날아다니지만 밝게 비추어지지도 타지도 않는 도깨비 불과도 같다. 이 불을 보존하기 위하여 나는 앞으로 잠심 중에 기도하는 것을 더 사랑하고 이를 위해서는 참으로 가난한 영혼을 지녀야 하겠다.
가난한 영혼은 무분별한 감정과 마음을 산란케 하는 모든 형상을 가능한 한 빨리 기억에서 지워버린다.
만일 우리가 신문 한 장이라도 호기심으로 주의 깊게 읽거나 혹은 육적으로만 사물을 보게 되면 그로 인해 영혼은 무익한 형상으로 채워지고, 하느님의 감명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하느님 안에 숨은 생활 중에서 <사랑이라 불리우는 하느님>
오늘의 나의 노래 나의 생명은 한 순간이요 흘러가는 한 시각이로다. 나의 생명은 일각이요 나를 피해 도망가는도다. 오 나의 하느님, 당신은 아시나이다. 이 땅에서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 내게는 오늘 하루밖에 없음을!
-예수 아기의 성녀 소화 데레사-
‘글’은 그동안 삶을 확인하는 만남입니다! 미래의 꿈을 간직한 채 추억을 회상하며 현실의 삶을 승화시키는 하나의 축제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을 보고 듣고 노래하는, 서로 마음 열고 확인하는 거룩한 예식입니다. 그리하여 너와 내가 함께 만나 ‘우리’일을, 하느님 안에 ‘하나됨’을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을 안다는 것’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할까요, ‘한 인간을 안다는 것’ 그리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얼마나 소중할까요. 생각하는 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은 완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음이 더 깊이 자각될 때, 더 많이 아파하며, 나의 틀과 형식을 굴레 안에 새로운 정신으로 영혼을 다듬을 때, 고통의 발은 더 깊어만 가지만 넘어졌기에 다시 일어서는 법을 터득할 수 있고, ‘넘어짐’도 ‘일어섬’도 나를 있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이기에 아픔을 삼키며 오늘도 침묵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나를 위해 모든 것을 계획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믿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우리 생애의 한 순간 한 순간에 하느님의 뜻을 승낙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이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삶은 과거에 대해 ‘감사합니다’. 미래에 대해서는 ‘예’, 그리고 현실 안에서는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갚아도 갚아도 다 갚을 수 없는 평생의 빚이 있다면, 밑빠진 독에 물 붓기였어도 포기하지 않고 쏟아주신 그분의 사랑! 그 사랑의 빛이 나에게 사는 의미를 조용히 일깨워 줍니다.’
‘하느님만으로 족하다’는 예수의 성녀 테레사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을 우리가 간직한다면 세상에 그 무엇도 아쉽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창조이십니다. 사랑은 언제나 그리고 영원히 창조합니다.
그분은 풍요하시고 다양하십니다. 그분은 또한 각자의 영혼이 당신의 유일한 하나인 듯이, 그 영혼 안에 침투해 들어가십니다. 그분은 각자의 사랑의 정도에 따라 그의 소명을 완수하기에 알맞은 독특하고도 단 하나의 길로 부르십니다. 가정은 사랑을 배우는 학교입니다.
가정은 사랑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사랑을 가르치는 지혜로운 스승이 되어야 하는 동시에, 사랑을 겸손하게 배우는 제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에게 당부합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 아직까지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요한1서4.7-9.12) (장석훈 베르나르도수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당신 말씀대로 호수 깊은 곳에 그물을 쳐
- 이해인의 시 <물, 누룩 그리고 양초> 교부들 중 한 분이셨던 알렉산드리아의 성 치릴로는 영성체를 통해 예수님과 사랑으로 일치됨을 설명하기 위해서 세 가지 비유를 들었다.
"성체를 모시는 사람은 마치 물이 불 위에서 끓으며, 누룩이 밀반죽과 섞여서 전체를 발효시키고 두 양초가 녹아서 하나로 합져지는 것처럼 영혼과 육신 모두가 거룩하고 신성하게 된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몸과 피를 영하는 사람은 예수님과 융합되며, 그 영혼은 자신이 그리스도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자신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성녀 젬마는 "모든 유(有)이신 예수님과 무(無)에 불과한 젬마" 사이의 성체를 통한 경이로운 일치에 대하여 말하곤 했다. 그녀는 탈혼 중에서 다음과 같이 외쳤다. "오, 예수님! 영성체의 감미로움이 얼마나 크옵니까! 저는 당신의 품 안에서 살고자 하며, 당신의 품 안에서 죽고자 하나이다."
성 콘타르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 영성체! 인간의 영혼이 다다라야 할 표현할 수 없는 높음이여! 이 순결한 천상적 기쁨, 이 영원한 영광을 맛보는 것에 비할 만한 그 무엇을 이 세상이 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또한 영성체와 복되신 성삼위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묵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루는 팟지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영성체후에 수련자들 사이에서 두 팔을 십자로 가슴에 댄 채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매들이여, 성체의 외형이 우리 안에서 지속되는 한,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계시고 성부과 성령과의 불가분의 관계 안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성삼위께서 모두 현존하시는 것입니다." 그녀는 탈혼의 환희 속에서 말을 끝맺지 못하였다. <미사 성제는 십자가 상의 희생 제사이다> "예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당신을 희생하셨다" (갈라티아 2,20) 우리가 천국에 이르러서야만 미사 성제의 진정한 가치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과 천사의 이해를 초월하는 하느님의 역사인 미사 성제를 우리가 설명하려고 한다면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우리가 노력을 하고 아무리 거룩한 영감을 받는다고 할지라도. 삐에뜨렐치나의 비오 신부님께 어떤 소년이 물었다. "신부님, 우리에게 미사 성제를 설명하여 주십시오." "나의 자녀들아," 신부님은 대답하셨다. "내가 그것을 어떻게 너희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겠느냐? 미사는 무한한 것이다 - 예수님처럼....... 천사에게 미사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아라. 그러면 그는 솔직하게 대답할 것이다. '나는 미사가 바쳐지고 있음을 알며 또 왜 바쳐지고 있는 지도 안다. 그러나 미사의 가치는 나의 이해력을 초월한다. 천국의 수많은 천사들이 다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느님은 기대한 만큼 복을 주신다 기대하지 않은 좋은 일이 일어날 확률은 영(0)에 가깝다. 기대하지 않으면 상황은 나아지지 않는다. 늘 똑같은 수준을 기대하는 사람은 영원히 제자리를 맴돈다. 기대가 삶의 한계를 긋는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대로 되리라.”(마태 9,29)고 말씀하셨다. “네 믿음이 기대한 만큼 주겠다.”는 뜻이다. 좋은 삶을 기대하고 하느님이 주시는 멋진 미래를 믿기만 하면 된다. 좋은 일이 다가오고 있다! -<긍정의 힘>에서 죽음의 신비 "나는 죽음의 신비와 죽음 뒤에 올 그 무엇을 주목합니다.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오직 그리스도 그분만이 죽음을 환하게 비추셨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겸손한 마음과 참된 확신으로 죽음의 신비를 응시합니다. 죽음의 신비가 언제나 나를 위해서 나의 현재의 삶을 비추어 주고 있습니다. 나는 죽음에 대한 승리를 확신합니다. 죽음에 대한 승리는 어둠을 몰아내고 빛을 비추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인가? 러시아 철학자 레온 셰스토프Leon Shestov는 현명하게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Homo homini lupus'라는 말은 인간의 도덕성을 신랄하게 보여주는 격언 가운데 하나다. ...모든 이웃 안에는 늑대가 있다. ...우리는 가난하고 약하고, 너무 쉽게 무너지고 파괴된다!
어떻게 하면 이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위험, 오로지 위험만을 본다. '타인은 우리의 지옥이다.' 그러나 그 지옥은 흔히 우리가 안팎으로 겪고 있는 지옥을 다른 이에게 투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낯선 이를 만나면 우리는 우선 경계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자신을 안전한 거리에 두려고 한다. 시간이 좀 지나도 계속해서 그러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겠는가?
부드러움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흩어진다. 우리는 주변 사람들보다 더 모질고 덜 양심적이어야 한다고 배웠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도태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다원주의 세계를 보여준다. 살벌하기만 한 다원주의 세계에서 살아남는 자는 이러한 상황에 가장 잘 적응한 사람이다. 지옥 같은 상황은 개선의 여지를 보이지 않고 두려움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연민을 느끼며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연대를 이루어도 오히려 절망감만 느낄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한 사실을 잊고 있다. 연민과 사랑, 신뢰와 연대는 더 깊은 친교를 나누게 하며, 이것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현존할 때 더욱 뚜렷이 드러난다.
이러한 친교에서 우러나온 친밀감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고, 병적인 개인주의로 치닫는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게 한다.
연약하고 상처받기 쉬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어느덧 자유로워지고 두려움이 사라진다. 이처럼 다른 이들과 친밀하게 교류함에 있어 우리를 더욱 인간답게 하는 유일한 조건은 서로 돕고 격려하며 지지하고 자유롭게 하며 치유하고 구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길에서 만난 행복 중에서 / 루이스 알렉산드레 솔라누 로씨 지음 바오로의 기도 (에페3,14-21) 나는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종족이 아버지에게서 이름을 받습니다.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고,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우리 안에서 활동하시는 힘으로, 우리가 청하거나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히 이루어 주실 수 있는 분, 그분께 교회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세세 대대로 영원무궁토록 영광이 있기를 빕니다. 아멘. 바오로 사도가 교회 공동체를 위하여 바친 이 기도는 신자들이 하느님의 충만함으로 채워지기를 비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하느님의 온갖 충만함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 충만함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신비를 깨달으면 하느님의 충만함에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묵상에 내재된 치유의 힘을 찾아라
묵상 또는 명상이라고 부르는 이 기도법은 조용한 마음으로 앉아 우리와 함께 머무시도록 하느님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고통스러운 시기를 함께 견뎌내기에 하느님보다 더 좋은 상대가 있을까요?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시고, 우리를 보살피신다는 느낌은 최고의 치유 효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상이나 묵상은 어떻게 하는 걸까요? 내가 들은 최고의 대답은 "하느님이 무언가를 하시도록 그냥 있으면 된다"는 것입니다.
묵상으로 유명한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하십시오. 묵상에 잠기는 법을 모른다면 당신이 묵상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것을 하십시오."
묵상은 무엇보다도 우리가 늘 너무 많이 생각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줍니다. 우리가 해결책과 대답을 얼른 발견하려고 같은 생각을 하고 또 할 때, 우리 내면에서는 '수다 기계'가 끊임없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묵상은 마음을 잔잔하게 만들고, 사물 전체를 꿰뚫어 보지 못하게 끊임없이 방해하는 생각의 흐름을 멈추는 것입니다.
묵상을 잘 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런 능력은 연습을 통해 얻을 수 있습니다.
묵상은 자신에게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를 주는 것입니다. 묵상은 우리가 슬픔에 잠겨 있을 때 우리 존재의 중심에서 그 상실을 인정할 시간과 장소와 기술을 제공해줍니다. 그 조용한 공간, 깊이와 의미의 장소에 하느님이 머무십니다. -라이너스 먼디의『하느님과 함께 상실의 고통을 극복하기』중 새해를 맞이하며 바치는 기도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시작이요 마침이신 주 예수님, 지난 한해 동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 저희가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시고 더욱 큰 은혜를 베풀어주시어 새해에는 나쁜 습관을 버리고 맡은 책임을 다하여 가정과 사회 발전에 이바지하게 하소서.
○ 또한 저희 생각과 말과 행위를 주님께 바치오니 하느님의 영광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도와주소서.
◎ 아멘.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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