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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2 북서릉(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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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8,230m 지점까지 하산했을 때 존 로스켈리와 릭 리지웨이가 그를 구조하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몸이 얼어붙은 그는 허수아비 같은 모습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윅와이어가 동사한 것으로 착각했다. 윅와이어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나는 혼자서 하산할 수 있어.”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북동릉 직등에 실패한 후 전날 라이차트와 윅와이어의 발자취를 따라 동벽을 트래버스하고 아브루치 능선상의 제6캠프에 도달했다. 그들이 캠프에 도달했을 때 라이차트와 윅와이어는 정상을 향해 출발하고 캠프는 텅 비어 있었다. 밤이 되자 라이차트는 등정을 마치고 캠프로 무사히 귀환했지만 윅와이어는 밤새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튿날인 9월 7일 윅와이어를 구조하기 위해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로스켈리와 리지웨이는 윅와이어를 만난 후 등반을 계속해 K2의 정상을 밟았다. 로스케리는 무산소 등정이었다.
그날 로스켈리와 리지웨이가 제6캠프로 돌아와, 로스켈리가 따뜻한 음료를 준비하던 중 가스가 폭발해 텐트와 리지웨이의 침낭에 불이 옮겨 붙는 사고가 발생했다. 리지웨이는 자신의 불타는 침낭을 빙벽으로 던져 버렸고, 그들의 텐트는 소실되었다. 그날 밤 비좁은 2인용 텐트에서 네 사람은 고통스럽게 보냈다.
윅와이어는 K2의 고소에서 비박한 후유증으로 폐렴, 늑막염, 손발 동상에 걸려 베이스캠프에서 헬기로 후송되어 왼쪽 폐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는 후에 왼쪽 발가락 두 개도 동상으로 인해 부분 절제 수술을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3개월 후 척크 골드마크와 마운트 베이커를 등정했다.
크리스, 에베레스트 정상에 트럼펫 마우스피스 놓아달라고 유언
윅와이어는 1980년 여름 스팀 불릿과 마운트 매킨리를 등반하던 중에 가혹한 폭풍을 만나 정상 가까이에서 퇴각했다. 그때 K2 북동릉 등반대장 짐 위태커의 쌍둥이 동생 루이스 위태커를 만났다. 루이스 위태커는 1982년 에베레스트 북벽 등반 허가를 받아 놓고 있고 있었다. 사실은 컬럼비아 대학원생 크리스 케레브록의 부친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에베레스 북벽 등반 허가를 받아놓고, 루이스 위태커를 등반 대장으로 초빙한 상태였다.루이스 위태커는 윅와이어를 에베레스트의 북벽 등반 대원으로 초대했다.
1981년, 윅와이어(당시 40세)는 다음해의 에베레스트 등반을 앞두고, 마운트 레이니어에서 여름 방학 동안 등산 가이드로 아르바이트하고 있던 대학원생 크리스 케레브록(당시 25세)과 훈련등반 길에 나섰다. 그들의 등반 목표는 매킨리 북봉(5,934m)에 위치한 위커샘 북벽이었다. 이 벽은 1963년 미국 하버드대 산악부의 7명의 대원들이 초등했고, 캐나다 팀의 재등 이후 눈사태 위험 때문에 아무도 도전하지 않은 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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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크 8440 (알래스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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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킨리는 높이가 6,194m에 불과하지만 북극권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영하 50℃의 혹한과 시속 165km 이상의 허리케인급 강풍, 변덕스러운 기상 상태, 폭설과 눈사태, 그리고 돌발적인 고산병 등으로 인해 알프스의 죽음의 벽 아이거 북벽보다 더 많은 희생자들이 발생한 산이었다. 끊임없는 빙하의 이동으로 숨은 크레바스가 양산되어 등정 시에 안전했던 루트가 하산 시에 죽음의 함정으로 돌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크리스와 윅와이어는 위커샘 벽에 접근하기 위해 피터즈빙하에서 크리스가 장비를 실은 썰매를 끌며 앞장섰고, 윅와이어는 썰매 뒤쪽에서 6m 길이의 자일로 크리스와 연결된 채 빙하를 따라 가고 있었다. 그때 앞장선 크리스가 갑자기 눈이 덮인 깊이 30여 m, 넓이 46cm의 좁은 숨은 크레바스로 거꾸로 빠지면서 윅와이어도 썰매와 함께 따라 빠져 한쪽 발은 썰매 위에 다른 쪽 발은 얼음 돌출부에 올려놓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윅와이어는 어깨뼈 골절상을 입고도 썰매를 힘껏 잡아당겨 그들의 아래쪽으로 내려 보내 빙벽 사이에 끼게 했다.
크리스는 얼굴을 밑으로 향하고, 부상을 당한 채 그의 배낭과 몸이 좁은 크레바스의 틈새에 꽉 끼여 있었고, 그의 왼쪽 손이 비틀린 채 배낭과 빙벽 사이에 끼여 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몸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어요. 나를 좀 꺼내 줘요.”
윅와이어는 견골 골절상을 입은 몸으로, 있는 힘을 다해 크리스를 잡아 당겼으나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윅와이어는 좁은 공간에서 프런트포인팅을 시도했으나 스케이트장처럼 매끄러운 빙벽에 크램폰 날이 잘 박히지 않았다. 그는 아이스 해머로 빙벽에 손가락 굵기보다 작은 홈통을 톱니 모양, 또는 사다리 모양으로 파고, 그것들을 딛고 1시간 만에 크레바스 밖으로 기어 나와 무선으로 구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의 빙하에서 아무런 응답을 받을 수 없었다.
윅와이어는 사력을 다해 2시간 동안 크리스와 연결된 자일을 계속 잡아당겼지만, 크리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크리스는 윅와이어의 눈앞에서 크레바스 속의 혹한으로 인해 서서히 죽어가는 가슴 아픈 비극을 연출했다. 윅와이어는 차마 그 광경을 눈뜨고 볼 수 없었다. 목불인견(目不忍見) 그 자체였다. 크리스는 자신의 트럼펫 마우스피스(mouthpiece)를 에베레스트 정상에 놓아달라는 유언을 끝으로 크레바스에 빠진 지 9시간 만에 유명을 달리했다. 윅와이어는 2주 동안 피터스 빙하의 비박색 속에서 폭풍설을 이기고 드디어 구조되었다.
그는 골절상을 치료받은 후, 에베레스트 북벽 등반에 대비해 3주 동안 아르헨티나의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62m)로 훈련 등반을 떠났다. 등반 대원들로는 프랭크, 바스, 척크 골드마크, 마운트 레이니어의 가이드인 조지 던, 레이니어의 최초의 여성 가이드인 클라이머 마티 호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마티 호이는 바람둥이로 일년마다 남자 친구를 갈아치운다는 소문이 있어서 윅와이어는 그녀에게 반감을 품었다. 그러나 등반 중에 윅와이어는 마티 호이가 추진력이 강하고 유능한 산악인이며, 성격이 참 좋은 여자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조지 대원과 마티 호이는 루트 정찰을 나갔다가 마티 호이의 넘치는 추진력 덕분에 아콩카구아 남벽으로 등정에 성공했다. 후에 그 등반대의 전원이 아콩카구아 등정에 성공했다. 이 훈련 등반에서 윅와이어는 마티 호이를 짝사랑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사랑의 최대 장애물은 윅와이어가 절대로 이혼할 수 없는 사랑하는 아내 마리 루와 다섯 자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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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피루이스 라이차트(상)와 짐 윅와이어. K2 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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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질 수 없는 연인 마티 호이, 에베레스트에서 추락사
1982년 미국 에베레스트 북벽 등반대는 롱북빙하에서 경사도 45도인 빙벽 걸리, 즉 그레이트 쿨와르 루트로 등반을 시작했다. 윅와이어는 마티 호이와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을 밟고 싶어서, 4월 26일부터 그녀와 같은 텐트를 사용했다. 루이스 위태커 대장은 정상 공격조로 윅와이어, 라리 닐슨, 마티 호이를 선발했다. 데이브가 정상 공격조를 돕는 지원조가 되었다. 그들은 제5캠프(7,620m)를 떠나 제6캠프를 구축하려고 등반 중이었다.
라리와 데이브가 선등조가 되어 캠프 장소를 물색하는 동안 윅와이어와 마티 호이는 짐을 운반하다가 그레이트 쿨와르의 중간지점인 7,925m 지점에 위치한 바위 돌출부에서 40분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안개가 그들을 감싸고 있었다. 윅와이어가 어느 순간 마티 호이의 뺨에 키스를 했고, 그녀도 윅와이어의 뺨에 키스로 답했다. 그때 선등조 데이브가 갑자기 아래쪽으로 소리를 질렀다.
“로프가 필요해요. 빨리요.”
윅와이어와 마티 호이는 깜짝 놀라서 짐을 운반하려고 일어섰다. 그때 갑자기 마티 호이의 안전벨트가 풀리며 빙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윅와이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빨리 로프를 붙잡아.”
그러나 그 외침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고정 자일을 잡으려고 팔을 뻗었으나 자일을 놓치고 가속도가 붙어 안개의 터널 속과 거대한 빙벽을 넘어 1,800m 아래쪽으로 추락, 빙하의 베르크슈룬트 속으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윅와이어가 고정 로프 쪽을 바라보았을 때, 그녀의 등강기가 여전히 매달려 있었고, 안전벨트도 풀린 채 매달려 있었다. 미국 마운트 레이니어의 유능한 등산 가이드인 마티 호이는 윅와이어와 이룰 수 없는 사랑을 비관해 고의적으로 그랬는지, 아니면 납득할 수 없는 실수로 그랬는지 그녀의 안전벨트의 버클을 잠그지 않았다.
윅와이어는 허공에 대고 고함을 질렀다.
“마티 호이가 죽었어. 마티 호이가 죽었어.”
윅와이어는 등반 의욕을 상실했다. 라리 닐슨 대원이 8,382m 지점까지 진출하고 퇴각했다. 윅와이어, 조지 던, 데이브는 7,437m 지점까지 다시 진출했지만 눈사태의 위험 때문에 역시 퇴각하고 등반은 중단되었다.
1984년 2월 13일 윅와이어의 친구인 일본 산악인 우에무라 나오미가 매킨리(6,194m)를 동계 단독 등정한 후 하산 중에 실종되었다. 나오미는 숨은 크레바스에 추락하지 않으려고 긴 대나무 장대를 어깨에 묶고, 하산 중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윅와이어는 일본 산악인 오타니와 함께 구조에 나섰다. 그들은 헬기로 매킨리의 4,276m 지점에 투하되어 강풍과 눈보라 속에서 수색활동을 전개했으나, 나오미의 행방은 묘연(杳然)했다. 그들은 4,267m 지점의 설동에서 나오미가 식량으로 사용했던 순록 고기 조각, 빈 연료통, 설피, 양말, 일기장을 발견하고 하산했다.
1984년 윅와이어는 에베레스트에 재도전할 작정이었는데, 갑자기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모친의 결혼반지를 플라스틱 성냥곽에 담아 에베레스트 정상에 묻으려고 했다. 그 성냥곽은 윅와이어가 1978년 K2 정상에 남겨둔 것이었는데, 라인홀트 메스너가 1979년 K2를 등정하고 회수해 윅와이어에게 전해준 것이었다.
호주의 소규모 등반대가 에베레스트의 북벽 그레이트 쿨와르로 이미 등반 중이어서 미국 대는 이 루트로 등반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노스콜로 진출해 북릉 7,300m 지점에서 그레이트 쿨와르로 트래버스해 등반을 계속했다. 윅와이어는 존 로스켈리와 에베레스트 북벽 상의 그레이트 쿨와르 8,100m 지점에 위치한 제6캠프에서 옐로밴드(Yellow Bands) 위쪽까지 진출했지만, 윅와이어는 등반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무산소 등반을 고집하던 로스켈리도 8,500m 지점에서 저체온증으로 퇴각했고 유산소로 어쉴러 대원이 등정에 성공했다.
윅와이어의 부탁을 받고, 어쉴러가 3년 전 매킨리 피터스 빙하의 크레바스에 빠져 사망한 크리스의 트럼펫 마우스피스와 윅와이어 모친의 결혼반지를 에베레스트의 정상에 두고 하산했다. 그는 1993년까지 히말라야 등반을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