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기다리는 편지
정호승
지는 저녁 해를 바라보며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습니다.
날 저문 하늘에 별들은 보이지 않고
잠든 세상 밖으로 새벽달 빈 길에 뜨면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저무는 섬 하나 떠올리며 울었습니다.
외로운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져서
해마다 첫눈으로 내리고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에 앉아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습니다.
(시집 『서울의 예수』, 1982)
[작품해설]
이 시는 임을 기다리는 연인의 간절한 마음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임이 없는 상태에서 임을 그리워하고 있음에도 비탄에 빠지거나 절망적이지 않고, 오히려 담담한 어조를 유지하고 있는 한편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어조에 잘 반영되어 있다. 유사한 상황을 담고 있는 김소월의 「초혼」이 격정적이고 처절한 어조로 임의 부재를 노래하고 있는 것과 분명히 대비된다.
이 시의 잔잔하고 차분한 어조는 마지막 두 행에 나타난 화자의 태도와 관련된다. 화자는 저녁 해와 대립되는 ‘새벽보다 깊은 새벽녘’에 ‘그대를 사랑하는 일보다 /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였’다고 말한다. 화자는 사랑하고 있다는 현재적 사실이나 감정보다 기다림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기대감을 바탕으로한 인내를 더욱 중요시한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는 이 시의 전편에 흐르고 있는 담담한 어조를 통해 잘 드러난다. 물론 이 두 행은 임에 대한 그리움을 제어하는 방법을 통해 더욱 간절한 그리움을 말하는 일종의 반어법으로 볼 수 있다. ‘저녁 해’, ‘별’, ‘새벽달’, ‘섬’, ‘첫눈’과 같은 감각적인 시어를 이용한 표현은 시상을 구체적으로 보여 줌으로써 ‘임에 대한 그리움’이란느 주제를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데 도움을 준다.
한편 이 시의 시상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전개된다. 이러한 시간의 흐름은 화자의 정서와 심리 변화와 조응을 이루면서 작품 전체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즉 ‘지는 저녁 해’[1~2행]에서는 ‘그대’의 부재로 인해 우울했던 정서가, ‘빈 길에 새벽달이 뜬’ ‘어둠의 바닷가’[3~6향]에서는 외로움과 슬픔으로 변하였다가, ‘새벽보다 깊은 새벽 섬 기슭’[7~11행]에서는 마침내 ‘그대’를 기다리는 행복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이 시의 전체적인 상황은 작품 제목에서 유추된다. ‘또’라는 부사어를 통해 이전부터 기다림이 계속되어 왔으며, 그만큼 기다림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의도적으로 이 시를 ‘저녁 무렵’으로부터 출발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저녁 무렵’은 소멸과 절망을 표상하는 하강적 이미지로, 화자가 처한 절망적 상황과 우울한 심정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지만, ‘그대’가 없는 관계로 ‘하늘은 날이 저물’었거나 ‘별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대 없는 ‘빈 길’에 ‘새벽달’ 떠오를 때까지 ‘사랑과 어둠의 바닷가’에 나가 ‘그대’를 그리워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저무는 섬 하난 떠올리며 울’고 만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별’은 사랑하는 ‘그대’가 되며, ‘어둠에 묻힌 바닷가’는 화자가 처해 있는 절망적인 현실 공간이요, ‘저무는 섬’은 뭍으로부터 홀로 떨어져나가 거센 파도에 부대끼듯 외로움에 부대끼는 화자 자신을 의미한다. ‘새벽보다 깊은 새벽’이란 새벽보다 더 많은 시간이 경과되었음을 강조하는 역설적 표현이며, ‘섬 기슭’은 단절되고 격리된 화자의 현실 상황을 상징한다. 그러나 화자는 마침내 사랑하는 일보다 기다리는 일이 더 행복하다고 말함으로써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는 행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 깨닫는다. 지금은 ‘그대’와 단절된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올 것이라는 확신이 화자로 하여금 현재적 고통을 극복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비록 오지 않는 임이지만, 화자를 밤새도록 기다리게 하는 힘, 그것이 바로 어둠을 따라 깊어진 화자의 사랑인 것이다.
[작가소개]
정호승(鄭浩承)
1950년 경상남도 하동 출생
경희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설굴암에 오르는 영희」 당선
1973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슬픔이 기쁨에게」 당선으로 등단
1976년 김명인, 김창완, 이동순 등과 함께 반시(反詩) 동인
1982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위령제」 당선
1989년 제3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7년 제10회 동서문학상 수상
2000년 제12회 정지용문학상 수상
시집 : 『슬픔이 기쁨에게』(1979), 『서울의 예수』(1982), 『새벽 편지』(1987), 『별들은 따뜻하다』(1990), 『모밀꽃』(1995),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1999), 『이 짧은 시간 동안』(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