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문화신문=김영조 푸른솔겨레문화연구소장]
"시소(試所, 과거를 치르던 곳)의 말을 듣건대 책을 들고 따라왔다가
금란소(禁亂所)에 잡힌 된 사람이 퍽 많았다고 했다.
(가운데 줄임) 또다시 범할 적에는 결단코 덮어줄 수가 없을 것이니,
성균관(成均館)이 여러 유생을 타일러서,
다음에는 과장 안에 책을 들고 따라 들어오는
난잡한 폐단들을 다시 더 거듭 못 하게 하라." 하였다.
위는 《정조실록》 정조 7년(1783년) 9월 9일 치 기록입니다.
조선 말기 과거시험은 심각한 부패로 물들었습니다.
특히 부유한 사대부들은 즐기며 한가롭게 노느라 평소 붓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가난한 선비를 집에 데리고 있다가 과거시험이 있으면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가 대신 글을 짓거나 쓰게 했습니다.
요즘의 대리시험과 같은 것이지요.
이때 글을 짓는 사람은 거벽(巨擘, 학식이나 어떤 전문적인 분야에서 뛰어난 사람),
글씨를 쓰는 사람은 베껴 쓰는 사람이라는 뜻의 사수(寫手)라 했습니다.
황현이 쓴 《매천야록(허경진 옮김, 서해문집)》에 보면
그들은 드러누워 조보(朝報) 곧 승정원의 발표사항을
필사해서 배포하는 관보를 들춰보다가
과거를 연다는 기사를 보면 “거벽과 사수는 어디 있느냐?”라고 소리쳤다고 하지요.
그래서 글자 한 자 안 읽은 부유한 집의 아들들이 과거시험에 합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때 “공자가 시관을 하고 석숭(중국 서진의 갑부)이 장원으로 뽑혔다.
”라는 노래가 불렸다고 합니다.
▲ 이상적인 사대부의 삶(평생도) 가운데 “소과응시” 부분,
저 사람들 가운데는 응시자가 아닌 거벽ㆍ사수ㆍ
선점군(미리 자리를 잡는 사람)이 더 많았다고 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