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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묵상글(강론글)
11일 묵상글, 10일 22시 1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을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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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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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5,26─16,4ㄱ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그분이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이 말씀은
성령과 제자의 사명이 함께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먼저 증언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은 자기 힘만으로 주님을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먼저 밝히시고 움직이시는 진리 안에서
그 증언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증언은
자기 과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일에 동참하는 겸손한 순종입니다.
오리게네스는
성경과 신앙의 모든 길에서
성령의 조명이 없이는
말씀의 깊은 뜻을 온전히 알아듣기 어렵다고 보았습니다.
그에게 성령은
문자를 생명으로 열어 주시는 분이며,
흩어진 마음을 진리 쪽으로 이끄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증언은
많이 아는 사람이 하는 말이기 전에
성령 안에 머무는 사람이 살아내는 삶입니다.
성령께서 마음 안에 오시면
사람은 비로소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무엇이 영원하고 무엇이 스쳐 가는지를
분별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섬긴다고 생각하면서도
제자들을 해치는 이들이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진리는 언제나 쉽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길은
늘 환영받는 길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나중에 이 일을 겪을 때
미리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이것을 알려 주십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는 세상의 인정보다
진리를 더 아껴야 합니다.
순간의 편안함보다
주님과의 관계를 더 아껴야 합니다.
말을 많이 하는 것보다
성령께 귀 기울이는 마음을 더 아껴야 합니다.
아낌은 바로 이런 영적 분별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기에
덜 중요한 것에 자신을 함부로 소모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오리게네스의 시선으로 보면
증언은 바깥의 소란보다
내면의 일치에서 시작됩니다.
성령께서 진리 안으로 이끄실 때
사람은 말과 삶이 어긋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이 흩어지면 증언도 흐려지지만,
내면이 주님 안에 모이면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선택 하나도
복음의 향기를 품게 됩니다.
그래서 거룩한 독서의 날인 오늘,
우리는 먼저 많이 말하려 하기보다
많이 머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은
또 하나의 중요한 위로를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넘어지지 않게 하시려고
미리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버려두시지 않고
시련 속에서도 기억할 말씀을 주십니다.
성령은 바로 그 기억을 살려 내시는 분입니다.
두려움 속에서
말씀이 다시 떠오르고,
혼란 속에서
진리의 방향이 다시 분명해지는 것,
그것이 보호자 성령의 돌보심입니다.
오늘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증언하며 살고 있는가?
세상의 조급함과 비교,
자기과시와 두려움을 증언하고 있는가,
아니면 주님의 진리와 성령의 평화를 드러내고 있는가?
나는 중요한 것을 아끼며 살고 있는가,
아니면 덜 중요한 것들에
마음과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를 진리의 증인으로 빚어 가십니다.
주님,
성령께서 제 안에 머무시어
주님을 참되게 증언하게 하소서.
세상의 인정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진리를 더 귀히 여기게 하시며
덜 중요한 것에 저를 소모하지 않게 하소서.
아낌의 지혜 안에서
맑고 담대한 증언의 삶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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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는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판단하고, 때로는 마음속으로 단죄하며 살아갈 때가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지만, 마음속에서는 이미 판결을 내려버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저럴 수밖에 없어.” “저건 용서받기 어려워.”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법정에 서 있는 판사가 아니지만, 마음속에서는 수없이 많은 재판을 하며 살아갑니다. 제가 한국에서 사목할 때의 일입니다. 한 신자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하셨던 분이었는데, 어느 순간 공동체 안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작은 오해가 쌓였고, 그 오해는 소문이 되었고, 결국 그분은 공동체 안에서 점점 위축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조용히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이미 여기서 끝난 사람 같아요.” 그 말이 제 마음에 오래 남았습니다.
우리는 때로 한 사람의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 사건으로 그 사람을 규정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보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사람이 다시 일어설 가능성을 보십니다. 최근에 저는 『Dead Man Walking』이라는 책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한 수녀님이 사형수와 함께 마지막 시간을 동행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사형수는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누구라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죄였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그 사람은 점점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눈물로 고백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수녀님은 깊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이 사람은 죄인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존재이구나.” 바로 그 순간, 중요한 진리를 보게 됩니다. 인간은 죄로만 규정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성령께서 오시면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하여 드러내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는 ‘심판’과 하느님의 ‘심판’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과를 보고 판단합니다. 드러난 행동을 보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사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 사람이 왜 그렇게 되었는지, 어떤 상처를 가졌는지, 그리고 다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보십니다.
달라스에 와서 사목하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합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상처 때문에 마음을 열지 못하고, 어떤 분은 자신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기를 두려워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용기를 내어 다시 공동체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면, 저는 늘 느낍니다. “아, 하느님께서는 지금도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구나.”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 옆에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끝까지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다른 한 사람은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고백합니다. “예수님, 당신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그는 평생을 잘 살지 못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돌아섰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줍니다. 하느님의 심판은 단죄가 아니라 초대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정의는 복수가 아니라 회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을 단죄하기도 합니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이미 늦었다.” “나는 용서받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생각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끝까지 기다린다.”
부활의 신앙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 죄가 마지막이 아니라는 것, 하느님의 사랑이 언제나 더 크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하나입니다. 판단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단죄하는 사람이 아니라, 기다려 주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의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 주변에도 ‘마음속에서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이미 포기된 사람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판단이 아니라, 함께 걸어주는 한 사람입니다. 진리의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하듯이 우리들 또한 예수님을 우리의 삶을 통해서 증언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끝까지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기다림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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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우리는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닥칠 박해도 예언하십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요한 16,2).
놀라운 사실은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느님을 위하여 봉사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옳은 일을 한다고 믿으면서 예수님께 하였듯이 제자들에게도 할 것입니다.
미국 유학 시절, 저는 고생하며 얻은 공부 요령을 막 유학 온 후배 신학생들에게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후배들은 저를 멀리하였습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후배들의 생각이나 처지는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만 강요하였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는 교회가 박해를 받은 일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역사를 돌이켜 보면 교회도 하느님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폭력을 휘두른 적이 있습니다. 천주교는 이러한 역사를 통하여 배우고 성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른 종교와 다양한 생각을 존중하고 넉넉하게 품는 교회가 되려고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16,4).
우리 또한 자신이 옳다고 믿으며 다른 이를 박해하지 않도록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내 생각에 갇혀 있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갑시다.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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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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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상으로부터 고난과 박해가 오면, 제자들은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증언”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그 증언의 확실성인데, 그 확실성의 근거는 직접 눈으로 목격한 사실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을 증언하게 될 이들이 둘이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직접 본 이들 입니다.
<첫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바로 “성령”이십니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요한 15,26)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직접 목격한 성령께서 예수님을 증언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두 번째>로 증언하게 될 이는 제자들입니다.
“너희(제자들)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요한 15,27)
그렇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니 직접 목격한 그들의 증언은 확실한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직접 목격한 이들이 당신을 증언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예고 말씀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요한 16,1)이요,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요한 16,4 참조)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박해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예고’는 우리를 당혹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단지 박해를 예고만 할뿐, 박해를 피할 방도나 극복할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단지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라고만 말씀하십니다. 기껏 “기억하라”고만 할 뿐입니다. 이는 참으로 무력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예고만 하시는 것일까요?
그것은 당신을 따르는 길에서, ‘고통’과 ‘박해’는 없어져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통해 당신이 구세주이심을 증거 해야 할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립 1,29)
그러니 고통과 박해는 우리 신앙생활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를 증언해야 할 공간이고 배경이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에게서 보낼 ‘성령’이 바로 그 고통과 박해를 통해서, 바로 그 속에서 우리의 증언을 동행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6,4)
주님!
미움과 박해가 닥치면 피할 방도를 찾기보다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게 하소서.
바로 그때, 안정과 편안을 찾기보다
당신의 증인으로 부름 받았음을 기억하게 하소서.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불가항력으로 닥칠 때,
도저히 용서될 수 없을 것 같은 죄와
끝내 치유될 수 없을 것 같은 상처를 당할 때,
바로 그때, 당신을 증거 해야 할 때임을 알게 하소서!
바로 그것이 당신을 증언할 수 있는 선물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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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그분이 움직이시도록 우리가 좀 멈춥시다! 요즘 계속되는 복음 말씀은 주제어는 성령입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스승 예수님께서 떠나가신 자리를 진리의 성령, 협조자이신 성령, 보호자이신 성령께서 채워주시고, 늘 함께 하실 것임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그리고 우리 모든 그리스도 신자들의 삶 안에서 성령의 역할은 절대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충만하고 활기찬 영적 생활의 원동력은 곧 성령의 현존이요 활동입니다. 돌아보니 제 수도 생활 안에서 가장 부족했던 부분이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항상 현존해계시고 적극적으로 활동하고 계시는 성령의 현존에 대한 깨어있는 의식! 그것의 결핍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기도 생활도 물에 물탄듯 술에 술탄듯 밋밋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영적 생활에 대한 의미도, 재미도 사라져갔습니다. 영성 생활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작은 것에 크게 좌절하고 실망하곤 했습니다. 따지고 보니 그랬습니다. 성령께서 부재하시면 우리 신앙 공동체는 그저 하나의 집단이요 여인숙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지 않을 때 우리가 행하는 모든 사목활동 역시 그저 지루한 일일 뿐입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 공동체에 정말 필요한 것은 진리의 영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도록 우리 각자의 마음을 활짝 여는 일입니다. 협조자 성령께서 섭리하시고 활동하시도록 우리가 좀 멈추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삶 안에 분명히 살아 숨 쉬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큰 위안으로 다가오는 한 가지 실화가 있습니다. 존경하는 지난 세기 대 영성가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도 자주 영적 메마름, 성령 부재 체험으로 인해 힘겨워하셨습니다. 하루는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 살아있는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을 만날 기회가 있었습니다. 수녀님 앞에 일대일로 앉자마자 신부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속사포처럼 당신 내면의 숱한 문제점들을 줄줄이 털어놓기 시작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고민 보따리를 오래도록 말없이 듣고 계시던 수녀님께서는 그가 말을 그치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렇게 짧은 조언을 해주셨습니다. “신부님, 고생이 많으시군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딱 두 가지만 매일 실천해보십시오. 첫째, 매일 한 시간 동안 주님을 흠숭하십시오. 둘째, 죄라고 생각되는 일은 절대 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좋아질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짧은 충고가 너무 평범하다고 생각해서 실망했지만, 나중에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수녀님의 짧은 한 마디 말씀은 머지 않아 제 존재의 중심을 관통했습니다. 그분의 솔직하고 단순한 한 말씀이 제 불만의 큰 풍선을 터트려버리셨습니다. 제게는 더 이상 또 다른 그 무엇이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여전히 제 마음과 정신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평생토록 실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은 그때 완전히 깨달았습니다. 기도에 대해 강론을 하고 글을 쓰는 것보다 실제로 기도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동시에 공동체 생활에 대해 연구하고 강의를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제로 공동체 생활을 잘 하는 것이 몇 백배 더 중요하다는 것을 말입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그 뒤로 매일 한 시간 이상 꼬박 꼬박 주님의 성체 앞에 앉아 기도를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잘 나가던 대학 교수직을 내려놓고 토론토 데이 브레이크 공동체에 들어가 본격적인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 헨리 나우웬 신부님께서는 전보다 훨씬 더 가깝게 성령의 능동적인 현존하심을 온몸으로 느꼈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인생의 동반자이자 인도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찾아오는 수많은 순례자들에게 따뜻하고 감명 깊은 영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셨습니다. 그런데 그 수녀님 역시 평생토록 강한 하느님 부재 체험, 혹독한 성령 부재 체험에 시달리셨습니다. 살아생전 얼마나 영적 어둠 속에서 힘겨우셨으면 수녀님께서는 이런 말씀까지 남기셨습니다. “만일 제가 성녀(聖女)가 된다면 ‘어둠의 성녀’가 될 것입니다.” 그 오랜 영적 메마름과 지독한 영적 어둠과 시련 속에서도 수녀님께서는 매일 주님을 간절히 갈구했으며 매일 그분께 매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끝끝내 보여주시지 않자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 안에서 주님을 찾았고 마침내 그분을 발견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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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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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1 05:14
- 날로 먹으려 드는 것은 아닌지
날로 먹으려고 든다는 말이 있는데
요즘 와서 제가 하느님을 날로 먹으려 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날로 먹는다는 말은 회를 먹는다는 뜻도 있지만
삶지도 않고 요리하지도 않고 날로 먹는다는 뜻일 것이고,
먹기까지 필요한 수고를 하지 않고 쉽게 먹으려고 한다는 뜻일 겁니다.
저는 10, 20대 때 인생 고민을 좀 한 적이 있고 그래서 하느님 체험도 좀 하였지만
그때 이후로는 몸이든 마음이든 정신이든 고생을 별로 하지 않고,
하느님을 모시고 살았고 하느님을 팔아먹고 살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고생고생하지 않고 너무 쉽게 하느님을 모셔 들었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그리 강하게 제 안에 자리 잡으시지도 못하고
약동도 하지 못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는 것입니다.
이것을 요즘 성령을 받는 것과 연관시키면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도 너무 쉽게 받아들이기에
쉽게 번 돈 헤프게 쓰듯 성령을 너무 헤프게 쓰는 것 아닌가 생각되는 것입니다.
어제 저는 병자 성사를 한 젊은이에게 주고 왔습니다.
백혈병을 앓고 있는데 0,2%의 사람에게 생기는 아주 드문 병이고,
치유의 확률도 0,2%밖에 되지 않는 병인데다가 그 고통이 너무 심한 병이었습니다.
그런데 3년이나 이런 고통 가운데 버티다 이제 무너졌다고 어제 그가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하느님께서 빨리 데려가달라고 기도하느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이 아니고 그렇게 고통스러운데도 살고 싶다고
그래서 하느님께 맡긴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게는 그것이 이제 하느님께서 그의 안방을 차지하시는구나,
그가 이제 비로소 하느님께 자기 안방을 내어드리는구나 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까지 하여 하느님을 자기 안방으로 모셔 들이는데
나는 얼마나 날로 성령을 받아들이려고 하는지 반성이 되었던 것이고,
그리고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면 박해받아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주님께 떨어져 나가지 않을 뿐 아니라 증언까지 하게 될 거라고 말씀하시는 것에
비추어도 나는 얼마나 날로 성령을 받아들이려고 하는지 반성이 되었던 것입니다.
회는 날로 먹어도 성령은 그렇게 모셔서는 안 되겠다는 반성을 하긴 하는데
그 반성이 그리 진지하지 않은 것은 아닌지 여전히 반성이 되는 오늘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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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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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우리 곁을 지켜 주시는 성령과 더불어....
바오로 사도는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는 유다인들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입니다." (1코린 1,23)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선포하는 것은 어떤 종교 체계나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라 이미 일어난 실제 사건입니다. 어떤 학자가 말했듯이, "신약성경은 사려 깊은 에세이 모음도 아니고 윤리 체계를 세우려는 시도도 아닙니다. 그것은 독특한 역사에 대한 증언이며, 그 역사 안에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바오로도 한때는 달콤한 이성의 길을 시도했지만(사도행전 17장), 사람들은 그저 비웃었습니다. 아마 그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찾았을 것입니다. 그 이후로 그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선포했는데, 그가 선포한 것은 자신의 논리와 이성에 의한 설명이 아니라 바로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라는 실제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개인적 증언이 중요합니다. 철학적 논증과 이론은 믿음을 제안할 수는 있어도 결코 그곳으로 데려다 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어떤 학식 있는 자매가 어느 사제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퀴나스의 하느님 존재 증명이 저를 교회로 이끌었습니다."라고요. 그런데 그 사제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 말이 반갑긴 하지만, 그 증명들은 저를 거의 교회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철학적 논증은 본질적으로 회의와 제한을 표현합니다. 역사 속 어떤 시기에는 신학 안에 합리주의가 널리 퍼져 많은 이들을 소외시키고 신앙을 답답한 체계 안에 가둘 때도 있었습니다.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
사실 신앙은 "그럴듯한" 것도 아니며, 또 그것을 그럴듯하게 설명하려는 시도 역시 그 핵심을 잃는 것입니다. 존재, 세계, 하느님, 육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는 그럴듯함이 없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그럴듯한 설명이나 "대중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놀라운 사건들의 연속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사건을 선포하기 위해서는 아주 중요한 핵심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건을 머리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 사건 속으로 깊이 잠겨 드는 일입니다. 여기에 어머니이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내 주시는 당신의 우리 인간에 대한 간절한 사랑이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을 마음에 깊이 품고 새기는 것이 바로 관상적 삶을 살기 위한 디딤돌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노력을 할 때 옆에서 우리의 수양에 도움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라틴어로 "파라클리토"(Paraclitus)라는 말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누군가의 곁에 있도록 불린 이"를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파라클리트를 "보호자", "위로자", "변호자" 등으로 번역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런 수양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성령께서 우리 곁에서 우리의 이 노력에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것이고, 우리를 이끌어 그 사랑 안에 머물게 해 주실 것입니다.
게다가 성령께서는 우리 곁에서 하느님과의 친교뿐 아니라 우리 사람들 사이의 친교에도 강력한 동기부여를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 사이에 참된 친교와 사랑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하느님의 영, 곧 "신성한 삼위일체의 제3위"께서 함께 계십니다. 모든 인간 관계 안에서 성령께서는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한 사람을 통해 다른 이의 삶이 변화될 때, 그 변화를 이루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며, 그분께서는 그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모든 영적인 일과 모든 인격적 관계의 원동력은 하느님, 곧 "신성한 삼위일체의 제3위"이십니다. 그분은 언제나 그 자리에 계시며, 하느님의 영이 함께하지 않는 인간 관계는 온전히 바른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8). 이는 "열한 제자와 그들의 동료들"에게 하신 말씀이지만, 궁극적으로 모든 제자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령, 곧 "보호자"요 "위로자"께서 우리 마음과 삶, 신앙 공동체 안에서 증언하신 것을 증언해야 합니다. 성 그레고리오가 말한 것처럼, "성령께서 듣는 이의 마음에 현존하지 않으시면, 스승의 말은 헛된 것입니다… 내적인 스승이 계시지 않으면, 외적인 스승의 혀는 헛되이 수고할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성령과 더불어 우리 삶의 심오한 내적 경험을 해 가야 하며,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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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하느님의 모성(母性)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노리치의 율리안나에게는 "어머니"라는 말이 하느님의 이미지를 생각나게 합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하느님의 모성(母性)
2026년 5월 10일 일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신비주의자 노리치의 율리안나(Julian of Norwich: 1342–1416경)의 지혜를 찬미하며, 그녀가 체험한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성을 묵상합니다:
번역가이자 제가 사랑하는 친구인 미라바이 스타(Mirabai Starr)는 중세 신비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말을 전해줍니다. "이 아름다운 단어 '어머니'는 그 자체로 너무도 달콤하고 자애로워서 하느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돌릴 수 없습니다." [1] 율리안나는 이 말로 놀랍고 근본적인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모성의 가장 사랑받는 속성을 하느님께 비유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물론 그녀도 동의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말하는 것은 훨씬 더 깊습니다. 곧 "어머니"라는 말 자체가 사람들 대부분의 경험 속에서(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너무도 결정적이고 아름다워서, 가장 좋은 의미에서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분을 생각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지금까지 대부분의 세계 종교가 가르치거나 믿어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신비주의자들만이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 가운데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결정적인 위치를 차지합니다.
"어머니"라는 개념과 인간적 체험은 너무도 원초적이고, 크고, 깊고, 보편적이며 광대한 것이기에 단지 우리 자신의 어머니에게만 적용하기에는 너무 작은 그릇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께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혁명적인 통찰입니다! 율리안나에게 "어머니"는 하느님 자신을 가장 잘 묘사하는 호칭입니다! 저는 이를 통해 율리안나의 가르침이 얼마나 용기 있고 독창적이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정통적인지를 보여주고자 합니다.
리처드 신부는 인간이 본능적으로 지니고 있는 모성적 돌봄에 대한 원형적 필요를 성찰합니다:
율리안나는 마침내 제가 속한 가톨릭 문화의 한 중요한 측면을 이해하도록 도와줍니다. 수세기 동안 왜 동방 교회와 서방 교회가 중동과 유럽의 수많은 아름답고 사랑받는 장소들—성지, 언덕, 대성당, 종교 예술 작품들—을 예수님이나 하느님께 직접 봉헌하지 않고, 오히려 성모 마리아의 여러 모습에 귀속시켰는가 하는 점입니다. 율리안나 시대에는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접근할 수 없었고, 사실 대부분은 글을 읽을 줄도 몰랐습니다. 그들은 원형과 상징의 차원에서 신앙을 해석했습니다. "말씀"(로고스)은 매우 훌륭했지만, 하느님을 여성적 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더욱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영혼은 어머니이신 구세주와 양육하시는 하느님을 필요로 합니다! 하느님은 본질적으로 선한 어머니와 같으시며, 너무도 자비로우시기에 굳이 "아버지 하느님"과 경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율리안나의 가르침은 언제나 균형을 이루며 이를 보여줍니다. [2]
미라바이 스타는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하느님을 "어머니"로 묘사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를 이렇게 번역합니다:
오직 우리의 참된 어머니이시며 모든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만이 이 이름으로 불릴 자격이 있습니다. 자연, 사랑, 지혜, 그리고 지식은 모두 "어머니"의 속성이며, 곧 하느님의 속성입니다. 비록 우리의 지상적 탄생은 낮고 겸손할지라도 … [하느님]께서는 모든 아기들이 육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날 때 그 탄생을 주관하시는 분이십니다.
자애롭고 사랑이 깊은 어머니는 자녀의 필요를 알아차리고 큰 온유함으로 그를 보호합니다. 이것이 바로 모성의 본질입니다…. 인간의 어머니가 자녀를 아름답고 선한 모든 것으로 양육할 때,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어머니"이십니다. [3]
우리 공동체 이야기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이제 나의 새로운 ‘절친’입니다. 저는 오늘의 묵상을 인쇄해 여러 번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율리안나는 이렇게 말할 때 제 마음을 알아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분열되어 있고, 감정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상처받아 어디에서 위로를 찾아야 할지조차 모릅니다." 그녀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힘이 너무도 커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친밀한 친구처럼 그녀는 저를 안심시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당신의 현존의 달콤함으로 제 마음을 채워주시고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요.
—Candace F.
References
[1] Julian of Norwich, The Showings: Uncovering the Face of the Feminine in Revelations of Divine Love, trans. Mirabai Starr (Hampton Roads, 2022), 166. Selection from chap. 60.
[2] Adapted from Richard Rohr, foreword to The Showings: Uncovering the Face of the Feminine in Revelations of Divine Love, by Julian of Norwich, trans. Mirabai Starr (Hampton Roads, 2022), ix–xi.
[3] Norwich, Showings, 166–167. Selection from chap. 60.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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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 이후 추가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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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15,26-16,4ㄱ).”
1) 하느님은 ‘선(善)’이신 분입니다(마태 19,17).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이 선한 일이 아니라면, 그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런 문제로 바오로 사도는 유대인들을 아주 엄하게 꾸짖었습니다.
“...... 남은 가르치면서 왜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 왜 그대는 도둑질을 합니까?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 왜 그대는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
율법을 자랑하면서 왜 그대는 율법을 어겨
하느님을 모욕합니까?
과연 성경에, ‘하느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다른 민족들 가운데에서 모독을 받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로마 2,17-24).”
여기서 ‘도둑질’과 ‘간음’에 관한 말은, ‘말과 행실이 다른 위선’을 꾸짖는 말입니다.
“우상을 혐오한다고 하면서 왜 그대는 신전 물건을 훔칩니까?”는, 우상숭배를 반대한다는 명분을 내세워서 다른 종교의 신전에 있는 물건을 훔치는 것을 꾸짖는 말입니다.
그런 짓이 바로 ‘하느님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으로 ‘악한 일’을 하는 것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이방 종교의 신전에 들어가서
신전의 물건을 훔치고,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자기가 차지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그냥 도둑질일 뿐이었습니다.>
유대교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한 일도 그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을 위해서’ 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종교박해 과정에서 벌어진 폭력과 살인 ‘하느님의 선’의 반대쪽에 있는 일이고, 그래서 그것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될 수 없었습니다.
악한 일을 통해서는 결코 선이 실현되지 않습니다.
‘선의 실현’은 오직 선한 일을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2) 하느님은 ‘사랑’이신 분입니다(1요한 4,8).
따라서 하느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해도 사랑 없이 분노와 증오심과 적개심으로 하는 일이라면(사도 26,11), 그 일은 하느님을 위한 일이 아닙니다.
‘순교’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을 위해서 순교한다고 해도
마음속에 사랑은 하나도 없고, 분노와 증오심과 원한과 적개심만 가득하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되어버립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레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3).”
3)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자들은 하느님이 ‘선’이신 분이고 ‘사랑’이신 분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들이 하는 일이 옳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다.” 라는 뜻입니다.
4) ‘신앙’은 ‘신념’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믿음이 옳다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확신이 없다면, 즉 ‘신념’이 되지 않는다면,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일은 못할 것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으면 금방 꺾일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에 대한 신념은 ‘선’과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만일에 ‘선’도 ‘사랑’도 없이 자신의 신념만 내세운다면, 그것은 ‘광신’이고 ‘맹신’입니다.
‘광신’과 ‘맹신’이 흔히 폭력적인 모습이 되는 것은,
‘선’과 ‘사랑’ 없이 신념만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5)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나를 증언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실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나와 함께 지내면서 듣고 보고 배운 것을 모두 증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이라는 말씀은,
“너희가 받게 될 박해를 내가 예고한 이유는”이라는 뜻입니다.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는, “너희가 믿음을 잃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다.”입니다.
모든 일이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대로 되는 것을 보게 되면, 예수님이 주님이시며 메시아라는 것을
더욱더 확신하게 될 것입니다(요한 13,19).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도 그렇고, 사도들과 신자들이 받은 박해도 그렇고, 오늘날의 우리가 겪는 고난과 시련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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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1. 부활 제6주간 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요한 15,26-16,4ㄱ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따르는 이들이 박해를 겪게 될 거라고 예고하십니다. 우리는 보통 나에게 안좋은 일이 닥쳐올 것을 미리 알게 되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지요. 미리 알면 그 상황을 잘 피하거나 그게 안되더라도 피해를 최소화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수난 예고’는 오히려 그들을 당혹스럽게 만듭니다. 고통과 시련, 더 나아가 죽음까지 겪게 될 것이라고 하시면서, 정작 그 상황을 피할 방도나 극복할 묘안을 알려주시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저 그러한 때가 오면 당신이 하셨던 그 말씀을 ‘기억하라’고만 하십니다. 불안하고 두려워서 힘든데 기껏 하신다는 말씀이 ‘기억하라’뿐이라니,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그런 예수님의 모습이 야속하게 보일 겁니다. 또한 자기들로부터 그 고통과 시련을 없애주시지 않는 예수님이 정말 ‘하느님의 아들’로서 권능과 힘을 지니신 분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 겁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에는 분명한 이유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당신을 따르는 신앙의 길에서 ‘고통’과 ‘시련’은 부정적이고 쓸모 없어서 없애버려야 할 무엇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차분히 자기 삶을 되돌아보고, 당연한듯 누려왔던 모든 것들을 베풀어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며, 그분 자녀인 나에게 있어 ‘구원’이란 무엇인지, 또한 그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 하며 어떤 선택들을 해야 하는지를 진지하게 고민해봄으로써, 자기 신앙을 깊고 단단하게 다지는 ‘성장’의 시간이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일들이, 심지어 그것이 고통과 시련 그리고 박해처럼 나를 힘들고 괴롭게 만드는 것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고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하시려는 당신의 큰 그림 안에서 이루어가시는 ‘섭리’임을 믿고 깨닫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로마 8,28) 알고 믿으면, 고통과 시련을 마주하더라도 당황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다. 그 안에 숨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하나하나 찾아가며 차분히 극복해 나아갈 수 있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당신에 대한 믿음 안에서 그럴 힘과 용기를 얻기를 바라신 겁니다.
그러니 삶이 힘들고 괴로울 때면 오늘의 복음 말씀을 기억해야겠습니다. 내가 겪는 모든 일들이 다 하느님의 뜻과 계획 안에서, 그분 섭리에 따라,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이끌어 가시는 ‘과정’임을 믿어야겠습니다. 내가 하느님 뜻을 따르며 잘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 누군가가 나를 미워하거나 핍박한다면, 그건 그가 하느님을 알지 못해 하는 어리석은 행동이며 결국엔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당신 뜻에 맞게 바로잡으시리라는 것을 믿어야겠습니다. 그 믿음으로 하루 하루를 기쁘고 보람차게 살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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