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폴리코노미(경제의 정치화) 우려로 한국 산업계의 계산은 복잡해지고 있다. 트럼프의 대선 당선으로 미국 정부의 산업정책에 변화가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반도체, 신재생에너지, 전기차, 배터리 등 바이든 행정부의 지원 아래 대미 투자를 크게 늘린 기업들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우선 미국의 이익 중심의 강력한 보호주의 통상과 대중 압력 수준이 전례 없이 높아질 전망이다. 트럼프는 2017년 1월~2021년 1월 지난 집권기에 파격적인 보호무역 조치를 취했다. 당시 한국은 한국산 세탁기와 태양광 셀 모듈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 발동, 철강제품 25% 관세 일괄 부과 등으로 타격을 입었다. 이번 집권기에 트럼프는 이전보다 공세적인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재계 관계자는 "현재 트럼프 캠프는 지난 집권기보다 더 보호무역과 미국 우선주의 성향이 강해 이번에는 재선 도전이라는 제동도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국내 반도체·자동차 기업들의 대미 투자 계획에 비상이 걸렸다. 바이든 행정부가 인플레이션 억제법과 CHIPS법 등을 만들어 한국 기업에 보조금과 세액공제 등 혜택을 약속했지만 트럼프는 지속적으로 인플레이션 억제법을 비판하고 있어 폐지도 내비치고 있다. 또 지난달에는 CHIPS법을 정말 나쁜 것이라며 당선 시 보조금은커녕 오히려 관세를 높여 미국에 한국 반도체 기업의 투자를 유치하겠다고 주장했다. CHIPS법 이후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에 2030년까지 총 400억 달러(약 6조 1831억엔) 이상을 투자하기로 한 삼성전자는 64억 달러의 보조금을,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38억 7000만 달러를 투자해 패키징 공장을 짓기로 하면서 4억 5000만 달러의 보조금을 약속받았다. 그러나 이 보조금이 정권교체에 따라 지급되지 않을 경우 한국 기업의 대미 투자계획 축소가 불가피하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인상 가능성에도 대비해야 한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한국의 대미 투자는 최근 3년간 누적 850억 2400만 달러에 이른다. 지난달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500만 달러 이상 대미 투자기업 30곳은 미국 연방정부·주정부가 약속한 혜택이 이행되지 않으면 76%가 투자계획을 변경하겠다는 입장이다. '투자 규모 축소'가 33.3%, '투자를 늦춘다'가 40.0%, '투자 전면 취소'가 3.3% 등이다.
자동차 업계는 전기차 시장의 시야 제로를 우려한다. 트럼프는 전기차 의무화와 탄소배출량 축소 정책 철회를 예고했다. 인플레이션 억제법 등을 통한 전기차 지원을 축소하고 환경 규제를 완화해 엔진차 시장에 힘을 실어주겠다는 것이다. 전기차 시장은 2017년부터 지난해까지 연평균 45% 성장(시장조사업체 SNE리서치)했지만 지난해에는 27% 성장에 그치는 등 성장세가 한풀 꺾였다. 자동차 업계는 미국 내 전기차 생산공장의 일부 라인을 하이브리드나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화물트럭 같은 내연차 생산에 활용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조성대 한국무역협회 통상지원센터 실장은 "전기차 의무화 조치가 없다면 미국 내 전기차 수요는 늘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미래를 위한 전기차 투자는 계속하겠지만 당분간은 하이브리드카에 집중해 시장 상황에 맞춰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재생 에너지와 배터리 업계는 울상이다. 배터리 업계는 전기차 산업 축소에 따른 직격탄을 피할 수 없다. 전기차 수요 정체에 따른 침체 여파에 다른 수익원을 새로 만들어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태양광 풍력 같은 재생에너지 산업도 위축될 전망이다. 트럼프는 석유, 천연가스, 석탄산업 활성화를 위해 관련 규제를 완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연방토지 내 시추 허가 확대 등 화석연료 기반의 에너지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다만 새로운 트럼프 행정부가 출범하더라도 인플레이션 억제법이나 CHIPS법을 폐지하거나 크게 흔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들 정책을 바꾸려면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한국 반도체와 전기차, 신재생에너지 기업의 투자가 집중된 남부 지역은 대부분 공화당 우세 지역이다. 한국 기업의 일자리 창출을 환영하는 주정부와 의회의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이라는 뜻이다. 허준영 서강대 경제학부 교수는 겉으로 드러난 트럼프 당선인의 메시지는 강하지만 인플레이션 억제법이나 CHIPS법을 폐지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고 일부 조항이 변경될 수 있지만 그 변화의 수준과 범위가 관건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