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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탁월한 사유의 시선/최진석
시선의 높이가 삶의 높이다
철학은 기실 명사와 같은 쓰임을 갖고 있지만, 동사처럼 작동할 때만 철학이다.
포착된 그것들을 ‘형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오상아吾喪我)
[내용 요약]
내적 공력이란 ‘명’자처럼 대립된 해와 달을 동시에 품는 공력, 다시 말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하는 힘이다. 우리가 이 대립의 공존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아름답고 좋기 때문이 아니라 우선 그것이 실용적이고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철학은 살아 있는 ‘활동’이고 ‘사유’다. 무엇이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안목의 높이만큼만 구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법이다. 철학은 그 ‘내용’ 자체로 규정된다기보다는, ‘사유’ 즉 살아 있는 ‘활동’이기 때문이다.(중략) 전략적 높이를 행사해본 적 없이 그저 전술적 차원에서만 살아본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여기서 ‘내용’이 전술이라면, ‘시선’은 전략이다.
생각을 수입하는 사람들은 생각을 수출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을 수용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스스로 생각하는 일이 어려워져버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결과들은 잘 숙지하면서, 스스로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생각의 결과들을 배우는 데에만 집중하다가 졸업할 때가 되면, 정작 자기 스스로는 생각할 수 없게 퇴화되어버리곤 한다. 나 또한 그랬다. 높은 수준에서 생각을 했던 사람들이 남긴 사유의 결과들은 아주 잘 알면서, 정작 스스로 사유하는 길은 잃어버린다. 칸트가 무슨 말을 했고 노자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아는데, 정작 나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은 퇴화해버린 기묘한 상황 앞에서 당황할 수밖에 없다. 철학을 하는 목적은 철학적인 지식을 축적하는 일이 아니라, 직접 철학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념 철학은 서양의 학문 구조이고, 서양이 세계를 보는 전략적 시선의 총화다. 한국의 사상적이고 지적인 자료를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뜻이다. 철학적으로 다룬다는 이 방법이 동아시아에서는 새로운 것이다.
아편전쟁(1840): 우선 동양 사회가 서양 철학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동아시아에 서양 철학이 들어온 일은 산업혁명 이후에 힘이 커진 서양의 제국주의 역사와 관련이 있다. 동아시아에 철학이 들어온 일이나 한국에 철학이 들어온 일을 얘기할 때는 반드시 아편전쟁阿片戰爭, Opium War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1840년에 발발한 아편전쟁은 ‘동양에 대한 서양의 완전 승리’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를 의미한다. 동양과 서양 사이에 완전한 승패를 나눠 가졌다.
산업혁명(1740~1860): 이전 사회에서 전형적인 계급 구조를 이루던 영주와 농노 사이의 관계가 산업혁명을 계기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로 바뀐다. 이제 사회는 영주와 농노가 아니라 자본가와 노동자가 꾸리게 되었다.
제2장 패(敗): 서양에 의한 동양의 완전 패배
1860년 이듬해부터 중국인들은 바로 자신들의 주장을 실현하려 양무운동洋務運動: 1861년부터 1894년까지 중국 청나라에서 일어난 근대화 운동. 서양의 문물을 수용해 부국강병을 이루고자 하는 자강(自强) 운동이다.
중국인들은 서양을 이겨 중국 민족의 기상을 다시 높이고자 하는 의지, 즉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두 가지 글자로 압축해서 표현하는데, 그 첫 번째가 바로 ‘구국구망救國救亡’이다. 조국과 민족을 구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구국구망하기 위해 중국의 온 민족이 함께 해내야 하는 최종 목표를 설정하는데, 그것이 바로 ‘서양학습向西方學習’, 즉 ‘서양 배우기’다.
배후의 그 힘은 무엇인가? 바로 정치제도다. 중국인들이 보기에 서양의 강점은 단순히 과학기술 문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강력한 과학기술 문명을 가능하도록 한 배후의 힘, 즉 정치제도에 있었다. 이때부터 중국인들은 과학기술을 넘어 서양의 제도를 배우려는 노력에 집중한다. 그래서 1898년부터 다시 변법자강운동變法自彊運動*을 일으킨다.(일본의 메이지유신을 모델로) : 우리나라는 구데타로 탄생한 유신정책만 있었음.
-‘가장 큰 힘’, 문화와 사상과 철학
문제는 꿈을 꾸지 않는 일이다. 시도하지 않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를 넘어서려는 그 어떤 시도라도 감행해야만 한다.(내가 사유를 좋아하는 이유) 40
량쑤민: 1893~1988. 중국의 사상가이자 대표적인 실천적 지식인. 현대 신유학의 창시자로 평가받는다. : 이에 모두가 정치 개혁도 지엽적인 것이며 배후에 더욱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 단순히 정치 제도의 채용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면, 반드시 근본 기반을 바꿔야 하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윤리사상—인생철학이다. 그래서 진독수는 그가 쓴 「우리의 궁극적 자각吾人最後之覺悟」에서 각종 개혁이 통용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윤리사상에 있음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이 근본을 개혁하지 않으면 모든 개혁도 효과가 없으리라는 것이었다. (···) 이런 깨달음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사상의 개혁—문화운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1
1917년 신문화운동을 일으킨다. 이제 중국은 바야흐로 정치운동, 사상운동, 문화운동으로 진입한다.
이 문화운동을 촉발시켰던 천두슈가 1921년 마오쩌둥毛澤東*과 상하이에서 비밀리에 공산당을 설립하고, 각고의 노력 끝에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다. 중국인들은 혁명을 통해 세운 새로운 이 나라를 스스로 ‘신중국新中國’이라고 부른다. 이 ‘신중국’은 결국 철학적인 혁명이었다. 중국의 중심 철학이 유교에서 서양의 마르크스—레닌주의Marxism—Leninism로 이동한 것이다. 이제 동아시아에서 중심적인 지위를 누려왔던 중국은 스스로를 지배하는 가장 높은 시선을 자신들에게 이미 있던 것을 개량해 사용하는 대신 서양의 그것으로 일순간 바꾸어버린다.
동아시아에서 철학의 시작, 그 세 개의 풍경
한국은 1875년(강화도조약)에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개항한다. 그러니까 일본은 미국에 의해서 개항하고, 중국은 영국과 프랑스 등에 의해서 개항하고, 조선은 일본에 의해서 개항했다.
일본의 개항 시점인 1854년과 조선의 개항 시점인 1875년 사이에는 약 20년 정도의 간극이 있다. 이 20년 동안 일본은 영국과 미국이 중국과 일본에 그랬듯이 다른 나라를 강제로 개항시킬 정도까지 부강해진다. 이런 개항의 시간 차가 근대 국력의 차이를 형성한 것은 아닐까?
일본: 1868년부터 1889년까지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감행
- 일본이 1874년에 철학이라는 관점을 갖기 시작했다면, 중국은 1917년이 되어서야 그것을 문화운동이나 정치적인 맥락에서 접목하고 시도하였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떠했을까? 1924년 일제하에서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이 생기고, 1926년에 최초로 철학과가 만들어진다. 물론 보다 앞선 1917년에 최두선崔斗善이 일본 와세다대학 철학과를 나와 1922년에 독일 마르부르크대학에 유학을 가기도 하지만, 중도에 그만두고 귀국한다. 이때 최두선은 자신이 가지고 들어온 100여 권의 서양 철학 도서를 보성전문학교에 기증한다. 이것이 아마 한국에 들어온 최초의 서양 철학 도서
최초의 철학박사는 1921년 취리히대학에서 학위를 받은 이관용李灌鎔**이다.(894~1933. 일제강점기의 독립 운동가이자 언론인ㆍ교육자. 서양 철학을 본격적으로 국내에 소개하는 한편, 식민지 체제 극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현실에 참여)
* 일제가 서울(당시 경성부)에 세운 관립 종합대학.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강영안 교수의 말대로 “한국 철학은 이렇게 1920년대 후반과 30년대 초에 해외 유학파들의 귀국과 경성제대 졸업생들의 배출과 함께 형성”되었으며 “서양 철학을 원전을 통해 직접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이었던 것이다.2 그 이전까지 조선은 근대적 의미에서 철학이라는 시선, 철학이라는 높이, 문화 자체에 대한 자각적 시각을 갖지 못했다.
제3장 복(復), 서양을 배우다 : 미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잘 형성된 나라.
미국은 인류 최초의 실험 국가다. 미국은 최초로 평민들끼리 힘을 합쳐 만든 나라다. 영국으로부터 건너온 일군의 평범한 사람들이 미국이라는 신대륙에 뿌리를 내릴 때는 기존의 신분은 별로 큰 의미가 없었다.
초기에 미국인의 삶을 지배하는 상위의 관념, 즉 철학은 주로 독일 관념론. 독일 관념론적 시각으로는 미국식 자본주의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한다. 이 와중에 터진 것이 남북전쟁南北戰爭, American Civil War*이다. 이 남북전쟁을 기화로 새롭게 전개되는 미국식 산업 구조와 자본주의를 지배할 새로운 철학으로의 이행이 시도되는데, 그 결과 ‘실용주의實用主義, Pragmatism’가 탄생
독일 관념론이 보장하는 지배력을 부정한다. 실용주의 철학과 함께 미국은 비로소 미국적 독립을 완성했다. 이렇게 하여 미국은 미국식의 민주주의에 사상적 기초를 확보했고, 이로써 추상적 관념보다는 능률을 중시하는 미국식의 기풍을 형성
여전히 제도 논쟁이나 정치 논쟁에 빠져 있는 우리의 현실은 아직 ‘수준 높은 인식’과는 거리가 있다.
철학이 국가 발전의 기초다. 지금 이 단계에서 철학을 쉽게 얘기해본다면, 아마 ‘전략적인 높이에서 하는 사고’ 정도가 될 것이다. 전략적 단계는 전술적 단계를 지배한다. 전술적인 단계보다는 전략적인 단계가 더 높다. 높을 뿐만 아니라 더 종합적이고 근본적이며 독립적이고 주도적이다. 전략적인 사고란 이미 짜진 판 안에서 사는 전술적인 사고와 달리, 아예 판 자체를 새로 짜는 일이다. 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판을 새로 짜는 일에 대한 사고가 바로 전략적이다. 전략적으로 형성된 판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종속적인 변수들을 다루면서 하는 행동들을 전술적이라고 한다.
『인간이 그리는 무늬』3라는 책에서 밝혔듯이 ‘인문人文’이란 인간이 그리는 무늬, 즉 인간의 동선이다. 인간의 활동을 가장 높은 차원에서 개괄해 이해한다. 인간이 구축한 문명이란 모두 이 인간의 동선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 다산 정약용의 한계: 조선의 실용학자라고는 하나 유학적 도덕주의로 세계를 해석해버리는 피상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하나의 관점으로만 세계를 해석해버리는 단순함 말이다. 조선을 비판하는 일이나 조선의 앞길에 대해 선견지명을 발휘하는 일에는 능력을 보였지만, 넓은 틀 속에서 당시 세계의 전략적 움직임까지는 판단할 능력이 안 됐던 것 같다. 아직까지도 우리는 다산식의 이런 한계를 넘어서고 있지 못하다.(학자에서 그쳤으니)-탁상공론식 정치, 아직도
자기 운명의 통제권을 자기가 가지지 못하면 종속적이고, 가지면 독립적이다. 통제의 결과가 성공적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와 성공의 판 자체를 자기가 주도했느냐 상대가 주도했느냐 하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62
제4장 力, 문화, 사상, 철학의 힘
철학자가 남긴 철학적인 내용을 숙지하는 것은 철학적인 활동이 아직 아니다. 철학을 한다는 것은 앞선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 즉 사유의 결과들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숙지한 내용들을 계속 퍼뜨리고, 또 그들이 남긴 철학적인 내용 그대로 따라 사는 것도 아니다.
그들이 사용했던 시선의 높이에 동참하는 능력을 배양해서 독립적으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다시 말하면 철학이란 철학자들이 남긴 내용을 숙지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자기 삶의 격을 철학적인 시선의 높이에서 결정하고 행위하는 것, 그 실천적 영역을 의미한다.
문제를 철학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철학이지, 철학적으로 해결된 문제의 결과들을 답습하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것은 특히 철학 수입국인 우리나라에서는 경각심을 가지고 숙고해야 할 내용이다.
우리가 아는 큰 철학자들 누구도 다른 누군가를 닮기 위해서 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자기만의 시선으로 자기처럼만 산 사람들이다. 노자도 공자도 칸트도 헤겔도 모두 ‘자기처럼’ 산 사람들일 뿐이다. 자신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세계에 철학적으로 접근한 사람들이다.
그 철학자가 철학적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을 남길 때 사용했던 바로 그 높이의 시선을 자신의 삶 속에서 한번 사용해보는 것이다. 『장자』를 읽고 감명을 받았으면, 장자처럼 사는 일을 꿈꾸기보다 오히려 자신도 장자가 사용했던 높이의 시선을 지금 자신의 시대에서 사용해보려고 덤빌 일이다.
레고 회사:‘아이들에게 놀이의 역할은 무엇인가?’ ‘아이들에게 놀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아이들은 어떤 장난감을 좋아할까’라는 질문과 ‘아이들은 왜 놀까’라는 질문 사이에 존재하는 시선의 차이를 인식할 필요가 있다.
철학적이라는 것의 의미가 탁월한 높이의 시선을 갖는 것이라고 할 때, ‘자기파괴’ ‘자기부정’의 과정은 그야말로 필수적이다.
판 자체를 새롭게 벌이려는 시도, 그것이 철학이다: 플라톤의 ‘이데아idea’가 그런 역할을 했다. 데카르트의 ‘물질’과 ‘정신’이라는 실체관도 근대를 수학적이고 양적이며 확실성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해서
근대적 세계관을 인도했다.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의 ‘물질’도 그렇고 프로이트의 ‘무의식’도 그렇다. 철학적인 시선으로 포착한 ‘관념’적 범주들이 세계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또한 공자나 노자가 말한 ‘도道’도 세상을 그 이전과는 전혀 다르게 끌고 가는 역할을 했다. 철학적인 시선은 새로운 세계를 여는 도전이다. 철학적인 삶은 분명 또 하나의 세계를 생성한다. 판 자체를 보기 때문에 새판을 짤 수 있다.
포착된 그것들을 ‘형상’적인 방식으로 드러내는 것이 바로 예술이다.
모든 철학은 시대의 자식이다: 사유를 그들이 처한 바로 그 세계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철학 생산국들은 그들이 처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철학을 구성한다.
2강, 선도(先導) 이끌다
제1장 태(胎) 새로 만들다
철학은 기실 명사와 같은 쓰임을 갖고 있지만, 동사처럼 작동할 때만 철학이다. 자신의 시선과 활동성을 철학적인 높이에서 작동시키는 것이 철학이다. 그래야 창의력이나 상상력이나 윤리적 민감성이나 예술적인 영감 같은 것들이 가능해진다.
선도력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선도력은 앞에서 인도하며 끌고 가는 힘이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남들보다 앞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그것이 물건이 되었든 제도가 되었든 혹은 보이는 것이든 안 보이는 것이든 간에 다른 나라에는 없으면서 자신들에게만 있는 고유하고 앞선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장르를 개인 차원에서 말한다면, 그것은 바로 ‘꿈’이다. 고유한 장르를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가 그 사회의 선진성 여부를 보여주듯이 각자 개인들은 꿈이 있느냐 없느냐로 독립적이냐 아니냐를 보여준다.
여러분들이 지금 고유한 자신으로 고품격의 삶을 살고 있는지 아닌지 그 여부를 알고 싶다면 바로 자신에게 물어보라.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꿈이 있는 사람은 선도적 삶을 산다. 꿈이 없는 사람은 종속적 삶을 산다. 자신에게 또 물어보라.
“나에게는 어떤 꿈이 있는가?”
질문과 대답은 대립적인 한 쌍이 아니라 전혀 다른 차원의 두 행위다. 대답은 인격적인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가능하지만, 질문은 궁금증과 호기심이라는 내면의 인격적 활동성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절대 나올 수 없다. 한마디로 대답은 ‘기능’이지만, 질문은 ‘인격’이다.
질문—독립적 주체—궁금증과 호기심—상상력과 창의성—시대에 대한 책임성—관념적 포착—장르—선도력—선진국은 이렇게 연결된다.
선진국 수준의 삶을 만드는 선도력을 갖기 위해서는 ‘장르’를 만들 수 있어야 하는데, 이 장르의 창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질문’의 힘을 내면화하는 시민의식이다.(K-POP장르)
제2장 知, 창의와 상상이 작동되는 지성적 차원
사실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선언도 바로 “이제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는 통찰의 베이컨식 형태일 뿐이다.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는 탈레스Thales**의 판단도 “이제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는 통찰의 탈레스적 형태일 뿐이다. “하부 구조가 상부 구조를 구축한다”는 마르크스의 판단도 “이제는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다”라는 통찰의 마르크스식 형태일 뿐이다.
자동차 디자인이 직선에서 곡선으로 바뀌는 것처럼 인간의 욕망이 어디로 이동하는지, 인간이 그리는 무늬의 패턴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를 계속 꿈꿔보는 일, 이것이 ‘상상’이다. 그리고 이렇게 계속 꿈꿔보다가 더 이상 직선이 아니라 곡선이라고 판단하는 일, 이것이 ‘통찰’이다. 통찰이 일어나도록 새로운 빛을 향해 계속 나아가려는 의지를 ‘창의’라고 한다. 상상이나 창의도 아무 때나 나오지 않고 ‘지성’의 활동성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도달해야 비로소 발휘된다.
선진국에서는 바로 이런 창의와 상상이 도처에서 발휘된다. 질문이 활발하게 일어나는 것과 같다. 창의와 상상이 일어나는 높이에서 세계를 포착한 결과가 관념이고, 이는 ‘곡선’과 같은 ‘개념’으로 표현된다. 선진국에서 ‘개념’을 포착하면 후진국에서는 그 ‘개념’을 수용한다. 그리고 선진국에서 ‘개념(관념)’을 구체화해서 장르를 만들면, 후진국은 그 장르를 채워준다.
선진국이 장르를 기반으로 해서 선도력을 행사하면, 후진국은 열심히 따라간다. 그래서 선진국은 선진하고 후진국은 뒤따른다. 따라서 선진국의 움직임은 전략적이지만, 후진국의 움직임은 전술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가?
(선진국은 꼭 앞서는 것이고 후진국은 꼭 따르는 것일까)
유물들 하나하나를 보고 감탄하면서, 종국에는 그 유물들 하나하나를 가능하게 한 그 시대 그 문화권 사람들의 동선을 읽는다. 그 사람들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그 움직임의 패턴을 찾아 읽는 것이다. 그것을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곳이 바로 ‘인문’이 자리하는 곳이며 인간의 동선, 인간이 그리는 무늬가 보이는 곳이다.
제3장 峠(고개 상) 국가발전의 단계
중요한 것은 그 지식들을 통해서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바로 그 지점이다. 그곳이 어디겠는가? 플라톤이 자신의 철학적 이론을 남길 때 작동시켰던 그 사유의 차원, 그 사유의 높이다. 데카르트를 공부하는 목적은 그의 이론과 그의 지식이 아니라 데카르트가 그런 철학적 지식을 남길 때 사용했던 그 사유의 높이에 나도 도달해보는 것이다. 칸트를 공부하는 목적은 칸트의 정밀한 이론에 감탄하고 그것을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치밀하고 큰 스케일의 철학을 세울 때 칸트가 운용했던 사유의 높이에 내가 도달하는 것이다. 결국 칸트나 플라톤이나 공자와 동등한 높이에 우뚝 선다.
철학은 ‘시대’라는 현실적 맥락 속에 살아 있는 것
탈레스(물)가 최초의 철학자인 이유는 인간 가운데 탈레스가 최초로 믿음에서 이탈하여 비교적 근본적이고도 높은 수준에서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만물의 근원을 신이라고 믿던 시대에는 신들이 주도권을 잡았고, 그 신들의 이야기가 매개자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었다. 인간은 그것을 두려움 속에서 믿으며, 그 속에서 계시를 발견하려고 애썼다. 이때 신들의 이야기는 ‘신화’ 속에 담겼다. 탈레스는 신들의 계시나 믿음에서 이탈하여 ‘생각’을 함으로써 ‘신화’에서 이탈했다. 비로소 ‘철학’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 철학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역사의 주도권이 신의 명령에서 인간의 독립적인 활동성으로 옮겨온 것이다. 탈레스는 이 시대적 요구에 반응한 사람이었다. 최초의 철학자라는 것은 시대의 방향을 알려준 최초의 깃발이라는 뜻이다.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주의와 도덕은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하려 한다.8- 신채호 선생(낭객의 신년만필 중에서)은 식민성을 비주체성 혹은 비독립성과 직접 연관시켰다. 외부의 생각이 우리에게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면 우리는 이미 주인이 아니다. 우리의 생각이 우리에게서 생산될 때라야 우리는 비로소 스스로 주인이 된다.
제4장 思 철학을 한다는 의미
보통은 무슨 일을 할 때마다 그 일의 가능성 여부를 먼저 따지려 한다. 그런데 그것을 따질 때 사용하는 논리나 근거는 무엇인가? 지금 이미 있는 것들인가? 아니면 지금은 없지만 다가올 것들인가? 우리는 분명 이미 있는 것들을 사용한다. 이미 있는 논리로 아직 오지 않은 것을 따지거나 분석하면 결과가 정확하게 나오겠는가? 현재의 틀로 미래를 재단하면 미래가 제대로 열리겠는가?
꿈을 꾸는 삶이란 ‘나’로 사는 일
꿈을 꾸는 삶이란 바로 ‘나’로 사는 삶이다.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과 자신의 내면적 욕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절대 타인의 꿈을 대신 꾸거나 대신 이루어줄 수 없다. 꿈은 나만의 고유한 동력에서 생긴다. 대다수가 공유하는 논리나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에게만 있는 궁금증과 호기심이 발동해서 생긴다.
‘나’는 꿈을 꿀 때 비로소 참된 ‘나’로 존재한다. 이때는 내가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옹골찬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차돌처럼 존재한다. 자기가 바로 참여자이자 행위자다. 비평가나 비판가로 비켜나 있지 않다. 구경꾼으로 살지 않는다.
[독립] 제1강 : 理, 최초의 철학적 사유와 발휘
철학의 아버지 탈레스가 만물의 근원은 물이라는 이 명제를 밝히기까지 그가 걸어왔던 사유의 여정, 그것이 중요할 뿐이다.
신들의 다툼으로 나일 강의 범람을 설명한다는 것은, 이 세계를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들이 조종하는 것으로 믿고 있다는 뜻이다. 이와 달리 범람의 원인을 바람의 방향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의 생각과 관찰하는 능력으로 세계를 해석하기 시작했음을 뜻한다.
생각하는 능력, 이것으로 인간은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이 일을 탈레스가 최초로 했다. 그래서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그리스에서만 일어나지 않고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도 일어난다.
하늘이 무너지거나 땅이 꺼지는 일을 포함하여 모든 일은 다 ‘신(하늘)’이 결정한다고 믿었다. 그런데 기나라 사람들은 이런 식의 믿음에서 벗어났다. 이제 세계 현상을 다른 틀로 해석하기 시작하였다. 신의 뜻이 아니라 ‘기’ 내지는 ‘흙덩어리’라는 자연 현상을 근거로 설명한다. 기존의 믿음을 벗어나 인간의 독자적인 생각과 관찰의 능력을 발휘하는 방향으로 점점 사유의 주도권이 이동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인간에게 있다.
공자 이전 사람들은 모두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하늘의 명령[天命]에 있다고 믿었다. 공자는 여기서 이탈하여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 자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공자는 이런 주장을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서 하거나 신에 대한 믿음의 결과로 하지 않았다. 바로 자신의 생각하는 능력만으로 해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가 인간에게 있다고 할 때, 인간에게 있는 바로 그 이유 내지는 근거가 바로 인仁이다. 공자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하는 이유가 신에게 있다고 하는 그 믿음 체계를 벗어나서,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를 인간에게서 발견하였다.
철학의 시작은 인간의 독립을 의미한다. 누구로부터의 독립인가? 신으로부터의 독립이다
인간이 독립을 시도하면서부터 인간은 비로소 자연과 역사에 책임성 있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 책임성은 믿음이 아니라 생각하는 능력을 독립적으로 발휘하는 태도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말은 인간이 ‘믿음의 세계’에서 ‘생각의 세계’로 넘어왔음을 뜻한다. 중국 역사로는 이것을 천명天命을 벗어나 도道의 세계로 넘어왔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미토스mythos’의 세계에서 ‘로고스logos’의 세계로의 이동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로고스는 ‘믿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것’이다.
소피아라는 것은 로고스적인 지적 훈련을 통해서 가질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다. 생각의 힘, 이성의 힘으로 세계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이다.
제2장, 孤, 고독을 기반으로 홀로 선 자
새로운 철학의 탄생이란 결국 이런 형식의 연속적이고 반복적인 과정이다. 새로운 생각이 시간을 견디며 생존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또 믿음의 대상으로 바뀌고, 그 믿음의 체계가 다시 새로운 생각에 의해서 대체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우리는 대개 생각의 결과들을 믿음의 체계로 바꿔서 그것을 신봉하면서 산다. 이 믿음의 체계를 가지고만 세상과 접촉한다. 이때 인간이 상실하는 가장 큰 자질이 바로 ‘예민함’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민함은 가볍고 급하게 반응하는 신경질적인 민감함이 아니다. 인간을 통찰로 이끄는 매우 종합적인 직관의 터전이다. 자신의 시대적 사명과 역사적 책임을 느낄 수 있는 성숙한 직관이다. 깊고 넓은 지성이 없이 발동하는 경솔한 반응이나, 강한 신념과 믿음에서 나오는 성급한 과감성과는 차원이 다르다.
이는 주도적으로 역사를 전개해본 경험이 없다 보니 당연히 예민함을 발휘해본 적이 없고,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형성된 습성이다.(한국의 방어적 습성- 역사침탈을 겪은 문화에서의 수동성 등. 적극적이었던 사람들의 몰락과 죽음 목격)
문제는 집단은 대개 ‘보편’이라는 탈을 쓴 이념의 지배를 받고, 그러면서 권위가 더욱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모든 사회가 그렇다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현상이 두드러진다. 우리가 보통 개별적 주체들의 주체성을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집단적으로 공유된 보편적 이념을 내면화한 다음 그것을 자신의 주체성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그래서 주체라고는 하지만 기실은 보편적이거나 집단적 이념에 종속되어 있다. 더군다나 내면화된 보편성은 우주적 차원의 것이 아니라 대부분은 정치적 이념의 공유자들끼리 나누는 보편성이거나 진영의 좁다란 보편성이어서 그렇게 넓고 높지도 않다.
종속적인 사람에게는 질문보다 대답이 더 편하다. 질문은 집단에서 이탈하는 용기를 발휘할 때 가능하다. 질문을 제기함으로써 집단에서 이탈하여 자기로 우뚝 설 수 있다. 독립이라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이 강제하는 일반적인 이념과의 자발적인 단절이고 고립이다. 우선은 ‘우리’에서 이탈해 ‘나’로 서는 것이다.
익숙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이것이 자기로부터의 이탈이다.
익숙한 자기는 집단적인 관습이나 보편적인 이념을 공유하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차이가 없는 자기다.
독립을 이룬 자기는, 즉 고독한 자기는 비록 단절과 고립의 상태에 있지만, 단절과 고립의 힘을 통해서 비로소 종속성을 깨닫고 거기서 벗어난다. 종속성을 벗어나자마자 이 독립적 주체는 능동성을 회복하고 진실한 내면을 외부로 확산할 힘을 갖는다.
독립, 고독 등등은 결국 철학적 수준의 사유를 가능하게 해준다. 탈레스도 그 시대의 정해진 이념을 이탈한 가장 고독한 사람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독립적이지 않은 사람은 소피아적 단계의 사유에 접근하기 어렵다.
(사막의 은수자들, 암자의 승려, )
‘연결’, 그것은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는 창의적 활동
독립은 분명 ‘연결’과 대척점에 있지 않고, 오히려 창의적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스티브 잡스는 “창의성은 연결이다Creativity is just connecting things”라고 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능력 가운데 가장 탁월한 능력은 이질적인 것들 사이에서 유사성을 발견할 줄 아는 것이다.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던 이질적인 것들에서 유사성을 파악한 후, 그 유사성을 근거로 상호 개방시켜 접속해보는 일이 연결이다. 이런 활동을 총괄하여 ‘은유’라고 한다.
확장이 개시되도록 꿈을 꾸는 일을 상상이라 하고, 확장이 전개되는 일을 창의라고 하며, 확장의 결과를 창조라고 한다. 그래서 인간 가운데 가장 탁월한 인간은 은유하는 인간일 수밖에 없다. 창조와 창의의 능력을 발휘하는 것보다 더 위대한 일은 없기 때문이다.(시를 생각함)
이런 시詩가 있다.
새벽밥 / 김승희
새벽에 너무 어두워
밥솥을 열어 봅니다
하얀 별들이 밥이 되어
으스러져라 껴안고 있습니다
별이 쌀이 될 때까지
쌀이 밥이 될 때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런 사랑 무르익고 있습니다
아무 상관없이 다른 살림을 살던 ‘별’과 ‘밥’이 시인에 의해 서로 통하게 되었다. 은유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에게 의미의 확장은 통제 영역의 확장이다. 이렇듯 인간은 은유를 통해서 세계를 넓혀간다. 세계를 넓혀주는 자가 바로 지배자 아니겠는가?
은유는 비틀기다.
‘밥’은 ‘별’ 앞에서 자신의 원래 정체성이 뒤틀리고, ‘별’은 ‘밥’을 맞이하려 스스로를 비틀어놓는다. 뒤틀린 틈새를 허용하고 또 끼어들어 둘은 상대방을 의지하며 새로 태어난다. 새로 태어남, 바로 창조다.
독립적 주체는 자신의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우선 ‘단절’을 감행한다. ‘우리’ 모두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기존 관념과의 단절이다. ‘단절’을 해야 새로운 관념의 ‘연결’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연결’을 통해서 발휘하는 창의성은 기존의 정해진 관념과 과감하게 ‘단절’한 독립적 주체만 할 수 있다. 기존의 것과 단절한 주체라야만 ‘연결’할 수 있다.
제3장 視, 관찰과 몰입
궁금증과 호기심이 관찰과 몰입을 부른다
익숙함이 생소해지는 순간의 번뜩임
관찰력이 집요하게 발휘되면서 ‘시인’도 ‘섬’도 달라졌다. 원래의 ‘시인’도 무너지고, 원래의 ‘섬’도 무너졌다. ‘시인’과 ‘섬’은 서로에 대하여 익숙함을 벗고, 생소한 느낌을 매개로 마주 섰다.
궁금증과 호기심을 지닌 채 진실하게 보고 집요하게 관찰하면, 대상은 지금까지 봐왔던 것과 전혀 다르게 보이며 흔들린다. 이때 이전에는 느껴본 적이 없던 생소함이 등장하고, 그러면 깜짝 놀라게 된다. 그것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경이Thaumazein’*라고 했다.
*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시초를 ‘타우마제인’이라고 했는데, ‘타우마제인’은 ‘놀란다’는 뜻으로 사물에 대한 지적 경이감을 뜻한다.
제4장, 勇, 기존의 것과 불화를 자초할 수 있는 용기
이론은 사유가 아니라 사유의 결과물이다. 철학적 사유는 직접 세계 속에서 문제를 발견하는 일이다. 사유의 결과물인 ‘이론’에 갇히면, 사유의 대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려는 용기가 약해진다. 철학적 사유 대상은 기본적으로 현실이고 당장의 세계가 아닌가.
철학적 사유는 기본적으로 세계를 사유하지 사유의 결과를 사유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유 그 자체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만의 높은 시선으로 세계와 직접 접촉할 수 있어야 한다.
4. 진인, 참된 나를 찾다
제1강: 創, 훈고의 기풍에서 창의의 기풍으로 이동
우리는 철학적 지식이 아니라, 어떻게 철학적 사유의 높이에 도달하고 어떻게 그 높이에서 철학적 활동을 할 것인가를 계속 말하고 있다. 결국 ‘생각’을 말하고 있다. 생각의 중요성은 주위를 잠시만 돌아보면 알 수 있다.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의 수준은 사실 그 개인이나 사회나 국가가 가진 생각의 높이일 뿐이다. 생각의 높이가 시선의 높이를 결정하고, 시선의 높이가 활동의 높이를 결정하며, 활동의 높이가 삶의 수준을 결정한다. 결국 생각의 높이가 세계의 수준을 결정한다.
나는 나를 장례 지냈다.
(오상아吾喪我)
자기살해를 거친 다음에야 참된 인간으로서의 자신이 등장한다. 참된 인간을 장자는 ‘진인眞人’이라고 한다. ‘무아無我’도 글자 그대로 ‘자신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참된 자기로 등장하는 절차다. 그래서 무아는 ‘진아眞我’와 같아진다
제2강 殺, 기존의 가치관을 모두 던져버리다
능동적 주체를 장자 식으로 표현하면, 자신을 지배하던 규정적 관념, 즉 성심成心으로부터 벗어난 소요逍遙의 경지에 있는 사람이다. 그것을 일반화하여 ‘자유自由’라고 표현해도 된다. ‘자유’라는 말 자체가 ‘자기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다. 자기가 주인이라는 뜻이다. ‘자유’라는 말 주위에 있는 ‘자율自律’ ‘자정自正’ ‘자정自定’ 등에도 모두 이런 의미가 포함된다. 모든 것이 자기로부터 말미암기 위해서는 자기 이외의 것들은 다 자신의 외부에 있어야 한다. 자기 안에는 오로지 자기만 있다.
제3강 德, 나를 나로 만드는 힘
나무닭 이야기: 다른 닭이 울고 날갯짓하는 소리를 내도 꿈쩍도 안 합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흡사 그 모습이 나무로 만들어놓은 닭 같습니다. 이제 덕이 온전해진 것입니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립니다.
기성자의 마지막 한 구, “덕이 온전해졌다[德全]”는 말은 자기를 자기로 만드는 힘이 완벽한 상태에 들어갔음을 뜻한다. 태연자약한 사람은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자신만의 흐름이나 결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는다. 태연자약한 후타바야마의 ‘기세 없는 기세’에 눌려서 상대가 자멸하는 것이나, 나무 닭의 ‘온전한 덕’에 눌려 다른 닭들이 감히 덤비지도 못하고 도망가버리는 것은 같은 일이다.
태연하게 자신의 스모를 하지 못하고, 70연승과 경쟁하는 스모를 하도록 자신을 방치한 것이다.
자신을 자신으로 세우지 않고 자신 이외의 것을 자신의 상대로 세워놓는 한, 그 사람은 항상 경쟁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경쟁을 계속하는 한 경쟁 상대와 공유하는 구조에 갇힐 수밖에 없다. 우리는 지금 경쟁하며 공생하고 있다. 공생하며 수준이 같아진다. 같은 수준에서는 앞선다 해도 겨우 조금 나을 수 있을 뿐이다.
제4강 人, 참된 사람이 있고서야 참된 지식이 있다.
세월호, 인재의 사고 등
5 문답,공유하다
제1강 論, 사유의 높이를 나누다
문_좋은 질문 자세란 무엇인가?
답_보통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식으로 질문한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나요?”
“이렇게 될 것 같은가요, 저렇게 될 것 같은가요?”
이런 식의 질문에는 자기 주도권이 양보되어 있다. 나는 그런 식의 질문보다는 “이렇게 해도 될까요?” “이렇게 저렇게 하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라는 식의 질문이 더 질문다워 보인다. 질문에는 반드시 ‘자기 관찰’과 ‘자기 의도’가 들어가도록 하는 것이 좋다.
장자의 “유진인이후유진지有眞人而後有眞知”, 즉 “참된 사람이 있고 난 다음에야 참된 지식이 있다.” 나는 유일하게 한 번 진실해봤던 그때 그 사건으로 세상을 보는 눈, 삶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사람이 달라지면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계를 보는 눈이 달라지면 삶에 대한 관점도 달라지며, 그에 따라 사람의 태도도 달라진다. 그래서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은 태연자약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부부싸움도 하지 않고 짜증도 내지 않는 성인군자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그 이전보다 조금 나아진 것뿐이다.
문_자신이 형편없이 느껴진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답_자기 자신을 형편없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기준이 외부에 있기 때문이다.
자신으로부터 형성된 기준이 아니라 외부에 이미 설정되어 있는 기준에 자신을 맞추려 하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닌가? 외부에 있는 기준은 항상 체계적이고 보편적이라는 인정을 받는다. 보편적이라고 인정되는 기준에 견주어 부족하게 보이지 않을 인간은 없다. 그 기준과 경쟁하려 하다가는 자신은 결코 결함과 부족을 메울 수 없다.
큰 인간은 외부의 것들과 경쟁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 자신과 경쟁할 뿐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겠다는 생각을 버려라.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부족한지 더 나은지를 따지지 말라. 경쟁에 빠지지 말라. 오직 자신과만 경쟁하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나은지만 자세히 살펴라.
맹자는 『맹자』 「진심盡心 하下」 편에서 이렇게 말한다.
무조건 책만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
(진신서칙불여무서盡信書則不如無書)
여기서 ‘書’는 『서경書經』을 말한다. 『서경』에는 당시 시대적 조건 속에서 『서경』을 쓴 사람의 관점이 들어 있다. 그런데 『서경』을 맹목적으로 믿는 사람은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서경』의 관점을 지금의 세계에 그대로 적용하려고 한다. 그러면 『서경』의 관점으로 지금의 세상을 가두려 하는 꼴밖에 안 된다. 『서경』의 관점도 내가 발견한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 ‘응용’되지 않는다면, 아무 쓸모가 없다. 『서경』을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자신이 사는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지혜로 사용하려면 우선 자신이 우뚝 서 있어야 한다.
문_스스로를 자유롭게 만드는 과정에서 가족과의 조화는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
답_가족이라는 틀이 식구들의 개성을 크게 억압해서는 안 된다. 식구들 각자의 욕망을 최대한 존중하고 지지해야만 더욱 튼튼하고 발전하는 가족이 된다. 그렇지 않고 가족이 특별한 하나의 이념이나 목표에 갇히면, 구성원들의 개성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성숙된 개인은 그냥 ‘개인’이 아니다. 성숙의 높이와 깊이는 이미 그 개인을 넘어서서 영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격적으로 상당한 성숙에 이른 사람은 혼자가 아니고, 반드시 동조하는 사람이 생긴다.
(덕불고德不孤, 필유린必有隣)
성숙된 개인은 반드시 그 성숙도에 따라 동조자를 갖는다. 즉 사회적 확산을 이룰 수 있다는 말
지식과 경험의 무게보다 나의 무게를 더 키우는 것, 더 커진 자신의 내면을 가지고 지식과 경험을 밟고 서서 지배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주체의 독립이자 성숙이다.
제2장 共, 철학적 사유를 공유하다
지적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는 지적 세계를 참세계로 오해하는 것이다. 진리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적 체계는 모두 실재하는 세계를 비춘 것들이다. 그래서 주도권을 항상 세계에 두어야지 지식에 두어서는 안 된다. 지식에 주도권을 주는 한 고정된 지식 체계로 세계를 가두고 정지시키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지적 체계로 유동적 세계를 먹어버리려고 해서는 안 된다.
이질적인 것 사이에서 동질성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굉장히 높은 사유 능력인데, 앞서 이 능력의 표현을 은유라고 했다. 은유를 통해 완전히 이질적인 것들이 상호 연결되면서,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 그러니 접점이 없어서 불안을 느꼈다면, 그 불안은 안정보다 새로운 세계를 여는 데 더 큰 힘을 준다.
모든 철학은 시대의 자식이다. 한 시대의 특수한 문제의식을 보편적 단계의 사유 체계로 승화시킨 것이 철학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보편화된 사유 체계가 세계의 모든 문제에 유효하거나 언제나 유효할 수는 없다.
생각의 결과를 배우는 것이 철학이 아니라,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철학이다. 정해진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진리를 대하는 태도일 수 없다. 자기만의 진리를 구성해보려는 능동적 활동성이 진리를 대하는 태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