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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하려고 하지 말고 잘 믿어라, 민경설
많은 은혜를 주셨으나 부족한 나는 실패와 넘어짐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습니다.
오스왈드 챔버스는 “성도의 온전함이란 주님이 내 속에서 하시는 일과 나의 일이 분리되지 않아 내가 하는 일을 주님이 하는 것이라고 믿을 때이다”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입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엡2:8), 믿음으로 성령을 받고(갈 3:2), 믿음으로 능력을 받으며(막9:23),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게 됩니다(요일 5:4).
기독교는 우리의 믿음보다 대상이 더 중요한 종교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진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성령에 의해 성자 예수로 계시된 성부 하나님을 진리로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하는 종교가 바로 기독교입니다.
“인간이 자기의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된다- 벤틸 박사
우리가 십자가의 희생과 사랑으로 구원받았다고 하지만 아담을 타락시킨 나 중심, 나의 힘으로 된다는 육신적인 삶의 속성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신앙생활에서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성경읽고, 더 많이 헌신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더 많이 전도하는 것이 성숙하고 더 훌륭한 사역자로 인식되고 있다.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삶은 ‘내가 주님 안에 거함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어 그분이 나와 연합하여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요 17:23).
믿음이란 어떤 막연한 것들을 현실로 이루어 내는 힘이나 정신력이 아닙니다.
기독교 믿음이란 진리이신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며, 그분의 인격이나 능력, 사역, 말씀을 전인격적으로 신뢰하는 내적 태도, 외적 태도입니다.
성도는 구원받을 때 믿음으로 받은 것처럼 우리가 사는 삶도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살려고 하므로 세상에서 문제가 되고 실패하게 됩니다. 내가 행하고 있지만 100%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을 믿음으로 산다고 합니다(갈 3:3).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빌 2:13). 우리가 구원받을 때와 마찬가지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도 전적으로 그분을 신뢰하여 하나님이 나를 위하여, 내 안에서, 나를 통하여 일을 할 수 있도록 내가 허용하고 순종하는 삶을 말합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사시는 것입니다(고전 15:10).
믿음으로 사는 실제적인 방법
1. 확신(고전 3:16) : 우리 안에 주님이 성령으로 와 계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2. 맡김(벧전 5:7) : 우리는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우리 자신은 물론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야 합니다. 심지어 우리의 모든 근심과 걱정까지도 맡겨야 합니다.
3. 신뢰 : 확신하고 맡겼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내 삶 속에서 그것을 이루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분이 하시는 것은 늘 최선이라는 것을 신뢰해야 합니다.
4. 순종 :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데 사람을 통하여 이루십니다. 우리가 기쁨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이 그 일을 행하시고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시며, 그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빌 2:13).
성도는 잘 하려고 하지 말고 잘 믿어야 합니다.
잘 하려고 하는 것은 내가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고, 잘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해나간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인간이 손을 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도함대로 나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도함을 받는 것이 은혜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얻은 복은 결국 그 사람을 교만하게 해서 그 결과는 고통의 열매가 된다(잠 10:22). 그러나 성도의 삶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엡 2:8), 능력도 주님의 은혜 안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빌4:13).
은혜란 영여로 GRACE, 헬라어로 카리스, 즉 받을 자격이나 공로가 전혀 없는 자에게 주어지는 분에 넘치는 사랑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선하신 뜻대로 은혜 베풀 자를 선택하시고, 선택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어 이 땅에서의 승리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러한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입니다.
진정한 은혜란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통해 귀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시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편에서 은혜의 삶을 사는 길은 우리의 삶 속에서 철저하게 그분의 뜻이 나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내가 이루어야 하는 것으로 착각하기 때문에 신앙에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이 이루시되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의 결과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그뜻을 이루시도록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믿음으로 허용하고 순종하는 것이 승리하는 신앙이요, 축복의 비결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올바른 노력은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그리고 그 은혜를 인하여 이루어지는 노력을 말합니다(골 1:29).
우리가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확신이 선다면 계획에서부터 마치는 것까지 전적으로 그분이 하신다고 믿어야 합니다. 그분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기도를 통해 그분의 방법대로 따르고 순종하고 나아가는 것이 은혜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노력을 의뢰로 바꾸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혜(능력)를 받고 체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과 은혜의 관계를 정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은 단독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될 때만 역사하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입니다(엡2:8).
구원은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비유로 말하면 믿음이 선풍기라면 은혜는 전원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믿는다 해도 하나님의 은혜, 즉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면 믿음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기가 연결되지 않은 선풍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염려 근심하는 것은 은혜로 하지 않고 내 힘, 내 목적대로 이루려 하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체험은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훈련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삶입니다. 바로 내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살아난 체험입니다(갈 2:20, 고후 5:15).
어거스틴은 “영생과 이생을 태평양과 물 한 바가지”로 비교했습니다. 영생을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은 가대한 태평양 앞에서 마치 물 한 바가지가 전부인 줄 착각하고 이생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인생의 행복은 바로 영생을 아는 구원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십니다. 말씀을 통해, 기도를 통해, 의사와 약을 통해 치료하십니다. 근본적으로 병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마 8:18, 사 53:4, 벧전 2:24).
우리는 예수 안에서 부요한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정신적, 영적 풍요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예수 안에서 부요한 자는 가난하여도 나누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고후 8:9).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인간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입니다(요 15:12, 요 일4:11-12, 요일 3:14).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 힘들고 피곤함을 느끼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그 능력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면 모든 인간과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능력을 회복한 자는 세상을 능히 이겨나갈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딤전 1:12, 빌 4:13).
삶에서 기쁨을 찾아야 합니다. 항상 기뻐하며 얼굴을 펴고 환한 얼굴, 웃는 얼굴로 생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얼굴을 도우시는 분입니다. 내가 기뻐할 때 악한 것들이 떠납니다. 우리의 싸움은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기에 우리가 슬퍼할 때 싸움에서 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사 53:4).
영생을 얻은 우리의 삶은 축복의 삶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저부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죽으심으로 저주를 끊으셨습니다. 이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갈 3:13).
하나님의 역사는 기도하는 사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즉 기도를 통해 스스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소원을 가지고 행하려 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어 역사하십니다. 기도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이 기도할 때 그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소원을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간구라고 합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의 필요와 소원을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입니다(요 14:13-14).
하나님과 인격적 교제를 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버지 혹은 구주이신 주님이나 성령님과 수시로 대화하고 교제를 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기도입니다(시62:8, 살전5:17).
특별한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위험하거나 특별한 고난이나 시련을 만날 때 그 상황을 믿음으로 극복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특별히 구할 때 하는 기도입니다. 금식이나 부르짖는 기도를 말합니다(렘 33:3). 여기서 은밀한 일이란 현재의 상황에 대해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대한 해석만 된다면 이제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에 4:16). 기독교는 죽고자 하면 살아나는 역설의 종교입니다. 위기는 기도를 통해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는 기도입니다. 이 땅에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도 영적으로 보면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대화는 하나님 앞에서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다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귀에 들린 대로 행하겠다는 무서운 말씀을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언어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소망을 주는 말, 위로의 말을 해야 합니다(민 14:28).
명령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임한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권세로 우리는 악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는 기도는 권세가 있어 귀신과 질병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명령하는 기도에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확신하는 믿음이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행 16:18, 눅 4:39).
기도는 나의 중심에서 내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더 높은 차원의 기도를 배워야 합니다(엡 3:20-21).
사도 바울은 이러한 기도를 모든 성도가 배우고 간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엡 3:14-16). 더 높은 기도에는 주님과 연합된 신앙을 가질 때 가능합니다(고전 12:27, 고전 6:17, 엡 4:13).
기도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보통 일반적 기도는 자신의 뜻이나 소원, 즉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이지만 더 높은 기도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기도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역사를 나를 통하여 이루어 가는 기도입니다. 이렇게 높은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이 동행하는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눅 22:42-43, 겔 36:37).
더 높은 기도를 하게 되면 주님과 내가 하나된 것을 지식이 아니라 체험으로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요 14:20, 요 17:22-23).
높은 기도를 통해 개인의 욕망이나 뜻을 사라지고 주님의 뜻이 내 뜻과 같아지는 것을 알게 됩니다(마 26:39). 아버지의 원대로 될 때 우리 개인의 욕망이나 뜻이 없으므로 갈등이 없고 주님만으로 만족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 안에 불평, 불만이 있다는 것은 우리 안에 욕망이 끓고 있다는 것입니다.
높은 기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그분의 뜻을 깨닫게 해줍니다. 그리고 그 뜻을 기쁨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는 동역자가 될 수 있습니다(암 3:7, 행 27:22-24, 빌 2:13).
높은 기도를 통해 주님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면 우리의 기도가 주님 안에서 이미 다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응답은 미래의 사견이지만 하나님의 차원에서 보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영원히 현재입니다(계 1:8, 막11:23).
우리가 높은 기도를 하면 일반적 기도는 절로 응답이 됩니다. 높은 기도를 하게 되면 주님과 하나 되는 체험을 통해 우리의 짐을 내려놓게 됩니다. 그분이 나를 통해 일하시기 때문에 모든 결과에 대한 자유함으로 안식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마11:28, 빌 2:13, 눅 1:38).
기도는 문을 두드리는 것이고 믿음은 그것이 열릴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 열정적이고 간청하는 끈덕진 기도는 언제나 회복의 전주곡입니다.
복음의 정의는 그리스도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말씀이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게 되므로 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막 1:1, 요 1:14).
조금 더 넓게 생각해 보면 예수님의 인격과 이 땅에 와서 하신 사역을 복음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고전 5:1-2). 복음의 내용을 구별하면 바울 서신의 복음과 사복음서의 복음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죄의 결과는 값을 지불하면 되지만, 죄의 세력은 계속해서 역사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대항하여 이겨야 합니다(롬 3:23-25, 히 10:12).
우리가 주님의 보혈만을 믿는다면 반쪽의 복음 밖에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혈의 복음을 믿어 우리의 죄의 결과에서 대속을 받는다 해도 죄의 뿌리인 우리의 옛사람이 처리가 되지 못하면 계속 반복의 죄를 짓게 되어 승리하는 삶을 살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 반복의 죄를 해결 받지 못하면 능력과 축복이 없고 열매가 없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이란 옛사람인 내가 죽고 성령에 힘입어 새사람이 사는 것입니다. 주님이 내 삶에 주인이 되도록 기도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롬 6:4-6).
사복음서의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곳에 왔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이 땅에 인간의 몸으로 오실 때 하나님의 나라도 함께 왔다는 것입니다(마 4:17, 눅 17:20-21, 롬 4:17). 하나님의 나라는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 주님의 통치의 개념으로 보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여기 와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체험할 때 주님의 구원과 승리의 삶을 온전히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망은 죽어서 생명이 없는 것이고 생명은 살아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문자적으로 사망은 죽어서 생명이 없는 것이고, 생명은 살아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생명을 육적의미로 사용했고, 신약에서는 영적의미로 사용했습니다(롬 6:23).
바울 서신에서는 사망과 생명을 인격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롬 5:17). 내 속에 예수님이 사는 것을 생명이라 하고 내 속에 사탄이 사는 것을 사망이라 합니다(요일 5:11-12). 사망을 생명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전도입니다(고전 15:5-57).
예수님을 구원받은 자, 생명을 받은 자들 속에 주님이 생명으로 사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복음을 믿고 전하는 자는 상급의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구원을 받으면 성령으로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는 주님 자신이 상급이 됩니다(고전 9:25), 빌 3:14). 우리가 복음을 바로 깨닫고 믿어 복음의 사람이 되면 주님의 임재 안에서 세상의 썩어질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바라보게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성경에서 자신들을 택하신 목적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의존하며 그분의 뜻에 순종하며 나아갈 때 승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온 세상을 다스리고 정복하고 충만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금하신 것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사람을 보호하는 계명이었습니다. 그것은 주인과 종을 구별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선악과를 지어 그것을 사람이 지킬 때 모든 것에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을 살도록 만드셨습니다. 하지만 어리석은 사람이 그 계명을 어김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셔야 할 자리에 자신이 주인이 되어 앉은 것입니다.
그 이후 사람에게 죄가 들어와 삶에 엉겅퀴가 생기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이 땅에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습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주관하고 섭리하는 왕이십니다. 그분은 당신의 형상으로서 인간을 만들어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을 다스리시는 왕으로서 백성이 이 땅에 많아지도록 인간에게 전도라는 특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전도라는 미련한 것을 통해 인간을 구원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전도의 주체는 하나님이 시작이며, 성령의 사람인 인간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이 할 일은 먼저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전도는 복음을 듣는 자에게 성령의 감동이 있기에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축복은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입니다(요 6:65, 엡 2:8, 행 1:8).
이와 같이 성령이 임한 사람은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증인이 됩니다.
세상에 종교들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 진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시작부터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진, 지금도 진행되는 살아 있는 종교입니다.
주님의 약속을 믿는 자 속에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오셔서 함께 하시는 체험을 한 자들이 모여서 기독교는 시작된 것입니다(행 2:42-43, 행 2:3-4).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할 때에 예수님의 영이 들어와 죄사함과 중생의 체험을 하게 됩니다.
복옴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할 때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거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믿는 신자들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은 성도는 그 행실이 깨끗해야 하는 것입니다(갈 2:20).
전도 동력은 성령이 전도자에게 오시어 그의 삶을 전적으로 이끌어 갈 때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을 하든지 잘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잘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내가 죽는만큼 역사하십니다.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은 하나님이하십니다(빌 2:13).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소원을 두고 행하게 될 때 그 일도 하나님이 우리 속에서 하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권능은 성령이 전도자에게 주권적으로 역사할 때 나타나는 것으로 어떤 어려운 환경이나 장애물을 극복하도록 전도자에게 역사하시는 능력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은사를 주신 일차적인 목적은 영혼 구원과 전도입니다(행 20:24, 19:11-12, 13:48).
가장 주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는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의 열매입니다(눅 15:7-10, 19:10, 행 1:8.).
아브람과 요셉도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함으로 승리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같이 성도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해야 합니다.
주님이 제자를 부르신 목적이 분명 합니다. 이것은 자기와 함께 있게 하고 전도하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세를 주시기 위함입니다(막 3:13-15).
임재 훈련을 받기 위해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올바른 성도는 반드시 주님이 성령으로 내주하고 계심을 확신해야 합니다(요 14:10, 요일 4:13).
실제 교제를 나누는 방법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위해서는 지속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일상의 삶에서 주님의 임재를 누리는 길은 우리의 행동과 생각 속에 주님을 모셔 드리는 신앙적 습관이 필요합니다(시 40:16).
염려와 근심 걱정이 들어올 때 주님과 대화의 길을 여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의 생각은 평강 소망 사랑 기쁨 자신을 근신하게 합니다. 그러나 사탄의 생각은 원망, 서운함을 주어서 작은 것을 크게 부풀립니다.
먼저 주의 임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이 의지를 지속적으로 주께 순종하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고후 10:5). 준비하느라고 계속적으로 실천하는 의지와 노력가 인내가 필요합니다(살전 5:17). 아주 작은 일도 주께 묻고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잘못된 부분은 회개해야 합니다(고전 10:31).
우리의 병든 삶의 중심인 나 인간 중심에서 벗어나게 됩니다(롬6:4-5).
천국와 지옥은 인격과 의식이 살아있는 곳입니다(눅 16:24). 천국과 지옥은 운명한 실존의 장소이며 땅에서 살아온 삶의 결과에 대한 심판이 이루어 지는 곳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오직 복음으로 가는 곳입니다(눅 16:31).
우리가 하늘을 겨냥하면 땅은 덤으로 데리고 땅을 겨냥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입니다-cs. 루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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