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미디어를 통해 각종 무속 콘텐츠가 확산되고 있어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한 무속인 유튜버가 점을 보러 오는 기독교인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크리스천인데 점보러 가도 되나요… 실제로 가장 많이 물어보는 질문....’ 유명세를 타고 있는 한 무속인의 유튜브 채널 영상 제목이다. 영상 속 무속인은 기독교인의 실태를 폭로한다. 실제로 많은 기독교인이 점집에 예약할 때 본인을 교회에 다닌다고 소개하며 “점을 보러가도 되느냐”고 묻는다는 것이다. 해당 영상은 4만회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고 댓글 수백개가 달렸다. 실제 유튜브에 ‘크리스천’ ‘무당’ ‘점집’ 등의 단어를 검색하면 기독교인이 점집을 찾았다는 내용의 동영상이 뜬다. 구독자 30만명이 넘는 무속인 채널의 영상 ‘종교가 다른 사람이 점을 보러 오면 무당의 눈에 어떻게 보일까’의 조회수는 55만회가 넘는다. 이 밖에 ‘올해 결혼하는 사주’ ‘취업 언제 될까요’ 같은 젊은세대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무속인 채널도 인기다. SNS에는 ‘오늘의 사주’ ‘타로’ 등을 봐준다는 광고도 넘쳐난다. 크리스천은 점을 봐도 될까. 결론부터 말하면 성경은 무속신앙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지니라.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신 5:7~8)라며 경고한다. 젊은이들은 왜 무속인 채널에 몰리는 걸까. 백광훈 문화선교연구원장은 “(MZ세대가) 아무래도 사회·경제적으로 불안도가 가장 높은 세대이고,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해소하고자 하는 욕구가 크다”면서 “(무당 채널이) 일종의 상담 역할도 병행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김선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교수는 “무속신앙은 전근대적인 미신일 뿐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가장 큰 우상숭배”라며 “인생의 가장 큰 가치는 하나님 말씀과 신앙선조들의 가르침에 두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기복적인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소망하며 사는 것이 기독교인들이 따라야 할 유일한 가치”라고 덧붙였다. 실제로 한 케이블방송 예능 프로그램인 ‘무엇이든 물어보살’에서는 방송인이 무속인의 복장을 하고 나와 사연자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법을 제시한다. 이 프로그램은 2019년 첫 방송 이래 3년째 인기를 끌고 있다. 산본중앙교회(박상훈 목사) 청년부 장해림 전도사는 “문화와 언어가 빠르게 변화하는 과정 속에서 (기독교가) 뒤처지면서 시대적 역할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며 “교회가 청년들의 언어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한국은 무속의 영향을 많이 받는 땅이다. 무속은 아프리카에서 몽골, 그리고 아메리카 대륙까지 대단히 넓은 지역에 만연(漫然)되어 있다. 무속(巫俗)신앙은 [샤마니즘]이다. 한자의 뜻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재자로서의 사람이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재자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로마 가톨릭의 개념에서는 무속(巫俗)의 개념이 가능하다. 그것은 ‘성인(聖人)’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공덕이 뛰어난 자들이 하나님과 세상 사람들 사이를 중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가톨릭교회가 만들어 낸 것이지 성경은 이것을 말하지 않는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무속인 [소화]가 여자 주인공으로 나온다. 그녀는 [무속인]을 이 땅에 한 맺힌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고 풀어주는 일을 한다고 말한다. 무속은 다신론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신들의 수많은 관계로 인한 인간세상의 여러 가지 문제들을 무속인이 해결한다는 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기독교가 무속을 볼 때에 그것은 사탄의 영향에 있다는 점이다. 무속은 신들을 달래며 사람이 이 세상을 사는데 평안 하게 살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그러므로 공의와 사랑을 기준으로 세상을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원리와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신들의 비위를 맞추어 인간이 평안 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김영인 목사는 500명의 무속인(巫俗人)을 만나서 조사를 했는데 그들 중 많은 무속인들이 과거에 교회를 다녔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교회를 떠나 무속인(巫俗人)이 된 것일까? 그것은 교회를 다닐 때에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교회를 다닌 이유는 인생이 [평안 하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불교의 부처이든 힌두교의 시바신이든 이슬람교의 알라이든 상관없다. 어떤 신이든 혹은 어떤 무속인(巫俗人)이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편안하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들이 교회를 다닐 때에도 기독교의 예수가 자신의 삶을 평안하게 해주면 믿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어디 그러한가? 기독교는 이 세상의 삶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다. 천국에 중심이 있다. 이 땅에서 예수님을 믿으면 그 삶이 천국의 원리를 갖고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 육신의 평안만 강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교회가 영생의 도리와 진리를 확실하게 가르치지 못하면 교인이 얼마든지 무속화될 수 있는 것이다. 청년들이 마약으로 빠져 들어가고 무속을 찾아 다니는 이 불행한 사태를 어서 속히 차단하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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