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주세요
글쓴이 나유나유
2004년 1월 2일 금요일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새해 이틀째를 맞았다. 눈을 떠보니 벌써 오후 여섯 시. 콧물이 훌쩍훌쩍 나오는 게 어제 이불도 제대로 안 덮고 몸살 걸린 녀석 바로 옆에서 자버린 탓에 감기가 옮아버린게 아닌가 싶다. 완전히 주객전도인데. 그건 그렇고 아이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져 있다. 숨소리도 안정되어 있고 열도 내린 모양이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불안한 듯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일어났어?”
“네.”
기운 없는 목소리. 하지만 어제처럼 아슬아슬하지는 않았다.
“아직 일어나지는 않아도 돼. 어제 밥도 못 먹고 하루 종일 밤새도록 앓았으니까. 지금 당장은 무리하지 마.”
“네.”
그건 그렇고 이제 슬슬 보호자한테 연락이라도 넣어 둬야겠다. 어젯밤에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게 순리겠지.
“집 연락처 좀 알려줄래? 부모님께 연락을 드려야지, 널 데려가시지.”
집이라는 말에 아이는 어깨를 흠칫거린다. 거 봐 찔리는 데가 있구만.
“또 쫓아내시는 건가요?”
“쫓아내는 게 아니라 집에 돌려보내려고 이틀이나 안 돌아왔으니까 부모님이 걱정하실 거 아니야?”
부정할 필요도 없다. 당연한 이야기니까. 어제 집을 모른다던가 어쩐다던가 하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긴 한데 그런 건 일단 무시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멀쩡한 노숙자가 있을 리가 없잖아. 그리고 기억상실증이라니 그런 이야기는 웃기지도 않는다. 암만봐도 철지난 화제잖아.
“그리고 지금 남자 혼자 사는 방에 여자애가 들어와 있는데 누가 봐도 그건 좀 아니잖아. 될 수 있으면 빨리 집에 돌아가는 게 너한테도 좋고 나한테도 좋아. 그리고 너희 부모님이 아시면 나는 괜한 오해를 받게 된다고. 뭐, 굳이 설명 안 해도 알만한 문제잖아? 네 덕분에 지금 난 입장이 무지 난처하다고.”
나는 쓸데없는 소리까지 늘어놓았다. 어제 이 아이가 했던 행동이 방금 전의 대화 때문에 뇌 구석에 밀어놓았던 불길한 예감이라는 녀석이 꼬리를 흔들고 있는 탓에, 입이 제멋대로 움직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집……몰라요. 그러니까 화내지 말아주세요. 재우님.”
장난이라기에는 너무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 그리고 내 이름.
“거참. 화내고 자시고 간에…… 집을 모른다는 게 있을 수 있나?”
“아으우으아으. 의심하시는 거군요. 저는 의심받고 있어요!”
아이는 당황해하고 있다. 그런데 이건 어쩐지 거짓말을 해서 속지 않아서 당황한 것이라기 보다는 어째서 말을 믿어 주지 않을까 원망섞인 당황이다. 두 주먹을 가슴께에서 비비적 거리면서 아이는 간신히 다시 말을 잇는다.
“의심하시는 게 당연해요. 저라도 이런 말은 정말 못믿을 거에요. 그치만! 정말로! 집도 제가 누군지도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요! 정말이에요! 제발 믿어주세요. 안 그러면 저는……저는……아흑.”
아이는 누운 채로 힘겹게 상체만 들어 올렸다. 그리고 내 팔에 매달렸다. 나는 팔을 흔들어 떨쳐내려다가 그 가여운 얼굴 때문에 그만두었다. 그 얼굴은 반칙이잖아!
“집만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전부 기억이 안 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혹시 영화나 만화를 너무 많이 본 거 아니야? 그런 건 사실 다 거짓말이야. 기억 상실증이라는 게 영화나 만화에서 나오는 것 마냥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없애고 싶은 부분만 편하게 없앨 수 있는 병도 아니라고. 그리고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도 아니고.”
나는 여전히 이 녀석을 믿을 수가 없다.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나 아니면 집을 모르겠다고 해대는 거나 여전히 믿을 수가 없다. 집을 말하기 싫어하는 걸 보면 분명히 가출한 중학생…… 뭐, 생긴걸로 봐서는 잘해야 중학생일 거 같다. 뭐, 그 이상은 쬐끔 힘들지 않을까나. 아무튼 이 녀석의 말을 아직 완전히 믿을 순 없다.
“하……하지만!”
“그래그래 일단, 그래 네가 기억상실증이라고 치고.”
“치는 게 아니라 진짜에요. 그런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기억이 안 난다구요.”
“그래그래 진짜라고 치고.”
하지만 나는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이 아이의 말이 진담일 가능성도 있으니까……. 그리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밖에서 밤새도록 아무것도 없이 내몰았던 죄책감 때문이었다. 물론 집에 갈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지만, 나는 사실 그 때 그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했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집에 가기 싫은 이유가 있다든가 여러모로 이 녀석 입장에서도 생각해 봤어야 했다. 내 생각 없는 행동 때문에 결과적으로 이 녀석은 밖에서 하룻밤을 새웠다. 그리고 그 때문에 이 녀석의 집이 어디인지 모른다는 말은 나름대로 설득력이 있었다. 아무리 나한테 뭘 바라고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혹시 가출을 해서 나한테 엉겨붙은 것이라고 해도, 바보처럼 그런데서 떨고 있지는 않는다. 가출이라면 하룻밤 자고 떠날 집이 필요한 것이지 내가 필요한 것이 아닐테니까. 그리고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그렇게 멍청하게 그리고 불쌍하게 떨고 있을 리가 없을테니까.
“자 그럼 나한테 뭘 원해서 여기로 온거야?”
“에!? 그 그 그 그러니까 그게…… 잘 모르겠어요.”
모른다는 건 참 편한 것 같다. 그 말 한마디면 모든 게 해결되어 버리니까. 이 녀석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은 몰라도 나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그 말은 그런 것도 없이 그냥 나에게 달라붙었을 뿐이라는 소리가 아닌가?
“그치만 서재우님을 보고 나서 부터는 ‘아!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분을 따라가야만 해. 그래서 얻어내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 이런 생각을 계속 했어요.”
거 참 무서운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구만.
“나한테 뭘 얻어내겠다는 건데?”
“그걸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냥 서재우님을 보면 웬지 화가 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고……아니에요. 그냥 화가 났어요. 그런데 막상 이렇게 앞에 있으니까 화가 난다기 보다는 너무 안심이 되요. 으흑 흑 그러니까.”
아이는 갑자기 훌쩍거리면서 울기 시작했다. 뒤에 이어지는 단어의 조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말을 다시 배워야겠구만. 도무지 한국어가 아닌 것 같은 말을 그렇게 펑펑 해대지 말란 말이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부탁이에요.”
부탁이고 나발이고 간에 버리기도 힘들어졌어. 집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모르쇠로 일관하질 않나. 내 이름을 알고 있는데다가 왜 나한테 왔냐는 질문에는 그냥 모르겠다고 하지를 않나. 일단 가출한 건지 아닌지만 판단해 보기로 했다. 가출 했다고 해도 이런 얼굴을 하고 있는 녀석을 무턱대고 내쫓을 생각은 없다. 한동안은 데리고 있던지 하다가 될 수 있는 한 빨리 집이나 거주지를 찾아서 돌려보내야겠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도 생각해봤지만 아무래도 그 건 너무 매정한 것 같아서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좋아. 몇 가지만 물어 볼게.”
처음부터 직구로 가지 말고 몇 가지 물어보다보면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나오겠지? 가출했는지 어디서 왔는지.
“네.”
순순히 대답하는 녀석. 안심했다는 표정이다. 그래그래 걸려들었다. 이 녀석은 분명 말하다가 본심이 튀어나올 거다.
“네 이름. 이름이 뭐니?”
“에?”
녀석은 이름을 묻자 처음 듣는 소리마냥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는 싱긋 웃으며 대답한다.
“그게 잘 모르겠어요.”
“모르다니?”
“그게 그러니까 으……정말로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아요.”
처음에 했던 말과 마찬가지다.
“내 이름은 알고 있었잖아.”
“네. 그런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모르겠어요.”
하아, 원점으로 돌아왔다. 처음부터 이렇게 막히면 가출여부를 묻기가 어려운데. 의외로 넘어가지 않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건가?
“아……. 그러고보니 서재우님을 만나기 전에 배가 고파서 튀김을 사 먹었어요. 맛있었어요. 그건 기억이 나요.”
아 네 그러세요? 그게 무슨 상관인데. 튀김을 네 돈 내고 사먹은 게 뭐 어쨌다고. 한숨만 나온다. 어라? 잠깐. 돈? 그럼 혹시…….
“혹시 지갑 같은 거 가지고 있으면 좀 볼 수 있을까?”
“아앗! 안돼요! 지갑은 남한테 함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고 들었어요.”
그러면서 코트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서 손에 꼭 쥐고 끌어안았다. 어디 있는 지도 몰랐는데 이렇게 친절하게 꺼내서 들이 대 주시다니 감사할 다름이다. 다만 주인이 저렇게 완강하게 거절하면, 하는 수 없이 완력을 사용해서 뺏는 수밖에……. 이건 어디까지나 강도짓이나 도둑질이 아니라 가출청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야겠다는 의무감에서 한번 확인차 하는 행동이다. 정당하다 암암 정당하고말고.
“그래? 그럼 잘 볼게.”
“에? 에? 안돼요!”
그러면서 나는 녀석의 오른손을 잡아서 슥 올리고 가슴께에 있는 지갑에 손을 댔다. 하지만 왼손으로 가슴께에 꾹 누르고 있어서 지갑을 빼내기가 여의치가 않았다. 양손으로 오른손을 떼어내는 건 일단 간단했지만 이 녀석 의외로 힘이 세서 왼손만으로 오른손을 잡고 한 손만으로 왼손에서 지갑을 빼기가 힘들었다. 그렇게 잠시 실랑이를 하던 차에 왼손을 걷어내려던 내 오른손에 뭔가 물컹한 것이 닿았다.
“아앗.”
사실 느낌이 별로 없기는 했지만 녀석은 귀까지 새빨갛게 변해서는 순간 힘이 빠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지갑을 뺏었다. 아 어쩐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지갑 디자인이 참 어린애 지갑같다는 생각을 하면서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열자마자 바로 보인건 주민등록증. 내 기억에 내가 주민등록증을 만든건 고등학교 2학년 때 그러니까 만 17세가 넘어야 만들 수 있다는 말. 그렇다는 건 최소한 고2 이상이라는 거고 지금이 1월이니까 아무리 어리게 봐도 올해 고3올라가는 녀석일 가능성이 무척 크다는 이야기인데. 저 정도면 동안 수준을 넘어서 사기다. 어떻게 저 얼굴 저 키에 고3일 수가 있냐고! 하긴 엊그제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아주 어린 건 아니고 한 중학생쯤 되었을 거 같네……. 싶은 그 가……가슴이었지만. 아……아무튼! 사진은 지금 모습과는 달리 차분한 검은 옷에 새침한 얼굴로 찍혀있었다. 하긴 신분증사진이 다 그렇지만.
이름은 지하나 한자는 성만 연못지(池)자로 나와 있고 이름은 한글이었다. 주민등록번호는 뭐야? 870131-2XXXXXX 정말로 18살이었다니. 내가 지갑에서 민증을 꺼내자 어질어질한 걸 참고 억지로 일어나서 나한테 뺏으려고 팔을 뻗지만 팔이 짧아서 닿질 않았다. 닿지 않자 울폴짝폴짝 뛰어 오르지만 나는 휙 팔을 올려서 머리 위로 민증을 올렸다. 음 울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는 녀석이랑 민증의 주민등록번호를 번갈아본다. 거짓말이다. 이건. 가짜다 위조다. 이 얼굴 이 사진으로 게다가 똑같은 옷에 후드만 내리고 있잖아. 아무튼 이 얼굴 이 몸집으로 18살일 리가 없어. 이건 위조가 분명해. 가짜야 가짜라고. 그리고 거주지란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건……이건 이 집 주소잖아. 뒷장의 주소변경란이 깨끗한 걸로봐서는 이 녀석이 사는 곳은 확실히 우리 집 주손데. 이럴 리가 없잖아!
“이거 장난이지? 가짜지?”
“아우 아니에요!”
아니라면서 내게서 민증을 뺏으려고 달려든다. 나는 달려드는 녀석이 손을 뻗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왼손으로 홱 돌린다.
“기억이 없다면서! 결국 나를 속이기 위해서 이런 증명서 위조까지 하고!”
“아. 기억은 안 나지만 가짜는 아니에요! 아닐거에요!”
잘은 모르겠지만 억울한 지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있다. 그러면서 왼쪽으로 따라온다. 당연히 나는 왼쪽으로 홱. 어차피 나하고 녀석은 머리 하나에 반개 정도 차이가 나니까 팔 길이는 말할 것도 없다. 이쪽으로 가면 저쪽으로 저쪽으로 가면 다시 이쪽으로 머리 위에서 팔만 까딱까딱해도, 녀석이 점프까지 하면서 따라와봐야 소용이 없다. 점프해도 그냥 서 있는 내 팔도 닿지를 않는다. 뭐랄까 강아지풀로 고양이를 놀리는 기분?
“저는……저는 그게 그러니까 아무튼 아니에요! 아으 아. 에취! 앗!”
내게서 다시 민증을 되찾으려고 민증을 든 내 팔이 움직이는 대로 오른쪽 왼쪽 옮겨다니던 녀석은 정말 재채기 같은 재채기를 하다가 자기 서슬에 발이 엉켰는지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침대쪽으로 쓰러졌다. 어쩐지 미안해졌다. 너무 놀린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일단 괜찮은 지부터 살폈다. 그렁그렁한 눈물이 분을 못 이기고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뾰로통한 얼굴을 하고 치뜬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아무래도 돌려줘야겠다. 어차피 알아낼 건 다 알아냈고, 더 이상 괴롭히는 건 불쌍하다.
“자.”
나는 민증을 돌려주었다. 집 주소에 대한 건 뭔가 착오겠지. 하긴 내 주민등록증도 집 주소가 엉터리나 다름없으니까. 여기로 이사 오고 나서 주소변경한다고 갔더니 담당 공무원이 안 해도 된다고 손사레를 쳤다. 내 기억으로 분명 주소란 자기가 기록하게 되어 있었고 공무원이 서류랑 대조해서 확인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니까 지금 주소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대충 추측해보면 작년에 여기 살았던 녀석이고 아마 근처나 어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갔는데 우연히 돌아왔다가 혹은 그냥 돌아왔다가 녀석의 말대로 갑작스럽게 기억을 잃어버렸다…… 라면 어쩌면 앞뒤가 대충 맞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 녀석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 그냥 내버려 두도록 하자.
“우으 여기저기 아파.”
“많이 아파? 어디 보자.”
내가 정색을 하고 묻자 녀석은 이를 꾹 깨물고 고개를 저었다.
“안 아파요 안 아파. 아야야”
뭐, 아프다고 뭐라 하지는 않을 건데 말이지. 그렇게 죽어라 부정하면 또 놀리고 싶어 지잖아.
“아무튼 네 사정은 대충 알겠어.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내 이름은 알고 있다.”
“네.”
나는 놀리고 싶은 마음을 가까스로 자제하고 녀석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녀석은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엉덩이를 문지르던 것을 그만두고 내게 집중한다. 어째 가출했는지 여부를 묻기에는 타이밍이 안 좋다. 내가 이 녀석 페이스에 말려버린 걸까나?
“그리고 잘은 모르겠지만 내가 밉다?”
“아니에요! 미운게! 그런게 아니라! 그러니까! 그게!”
갑자기 목소리를 높여서 또 횡설수설 떠든다. 아마 자기도 흥분해서 하고 싶은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거겠지.
“알았어 알았어. 그러니까 기억은 아무것도 안 나지만 일단 나는 기억이 난다는 거지?”
“네.”
그렇다는 이야기는 이렇게도 생각해 볼 수 있겠구나.
“그럼 내 옆에 있으면 뭔가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르겠네?”
아, 생각없이 말해버렸다.
“에?!”
아 그래. 뭐 어때, 이런 어린애쯤 데리고 있어도 별로 문제 될 일은 없겠지. 법적으로는 성인이라고 해봤자 이 얼굴에 이 몸매를 보면 절대로 18살이라고 볼 수가 없다. 잘 해줘야 중학생? 아니면 발육이 좀 잘된 초등학생정도?
“그……그럼 여기 있어도 되는 건가요?”
“뭐, 굳이 싫으면 나가도 상관은 없어. 아니 그 편이 나한테는 좋아.”
잠시 창밖을 바라본다. 시커먼 하늘. 골목길에는 방범등 불빛만 보인다. 시간은 그다지 늦지 않았지만 날씨가 이러다보니 지나가는 사람조차 없는 쓸쓸한 거리. 지금 이 녀석을 밖으로 내 모는 건 과연 사람이 할 짓이 맞긴 한가? 물론 이 녀석이 나간다고 하면 붙잡을 생각은 없지만, 망설인다면 붙잡아 두고 내일 아침에 보내는 편이 낫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밤중에 내 보낼 수는 없다. 어제는 돌아갈 곳이 있다고 확신했지만, 오늘은 그런 확신따윈 없으니까.
“아우 으으 하윽”
“에? 왜 그래?”
“으아아아앙”
왜 우는 거야.
“감사합니다 서재우님. 감사합니다.”
울면서 매달리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그리고.
“그……‘님’이라고 부르는 건 그만둘래?”
“에? 하지만.”
녀석은 울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눈물 콧물이 질질. 아구 디러. 귀여운 얼굴이 엉망이 되었잖아. 나는 일단 휴지로 코를 닦아 준다. 아,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키이잉.”
휴지가 눈앞을 감싸자 반사적으로 휴지를 잡고 코를 푸는 녀석. 코를 풀고 나서 깜짝 놀래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깨달았는지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서 손등으로 얼굴을 닦는다.
“그게 재우님이라고 부르는 건 너무 웃기잖아. 내가 무슨 대통령도 아니고.”
“그치만, 훌쩍 그럼 어떻게 해야…….”
중간에 콧물을 훌쩍 거린 것 같아 또 휴지를 대 줄까 하고 신경이 쓰였다,
“일단 오빠 같은 거나 아무거나 적당한 걸로 참아주지 않을래? 네가 여기 얼마나 있을 지는 모르지만 그 ‘님’자 소리는 너무 웃긴 것 같아서.”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대충 눈치챘겠지?
“하……하지만. 어떻게 제가. 엣취!”
내가 무슨 옛날 왕이라도 되냐? 어떻게는 무슨 어떻게야!
“하지만이고 어떻게고 안돼.”
“그……그럼 서재우오빠……?”
“성은 빼도 상관없어.”
“재……재우 오빠?”
아……왜 저렇게 뜸을 들이는 거야. 내참. 듣는 내 쪽이 더 부끄럽다구. 하긴 뭐랄까 호칭을 강요한 느낌이 없진 않지만. 성까지 같이 부르면서 붙어다니면, 어쩌다가 마주친 동네 사람이 나를 어떻게 얼마나 엄청나게 이상한 시선으로 볼지는 상상조차 안 간다. 게다가 같은 방에 들어가는 걸 본다면? 아아 끔찍한 오해를 살지도 모른다. 그랬다가는 여자친구도 안 생기고 그리고 결국은 이 녀석 때문에 나는 결혼 실패. 인생은 외로운 길로 전락. 게다가 경찰은 납치 지명용의자로 나를 체포. 콩밥을 먹으면서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다가 결국은 결국은…….
“……빠.”
아아 내 인생은 그리도 허망하게 끝나는 구나.
“……오빠.”
“재우오빠!”
멍청히 놓아둔 정신을 챙겨들었다. 녀석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어?”
“아, 그게. 저기 그러니까 그……배……배가.”
아, 그렇구나. 어제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을 테니 배가 고프겠구나. 그렇지만 왠지 저 우물쭈물 하고 망설이는 모습을 보니까 장난이 치고 싶어졌다.
“배가?”
“우으 그러니까 배……배가 이런 말 하면 그……저기 염치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
“설마 감기가 나으니까 이제는 배가 아픈거야? 그거 큰일이다! 빨리 병원에 전화를…….”
나는 전화기쪽으로 가면서 녀석의 눈치를 힐끔 본다. 녀석은 깜짝놀라 허둥대고 있다.
“아으아으아으 그게 아니구요! 그……저기 배가……켈록켈록”
“뭐? 배가 부르다고?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배가 아플정도로 배가 부르단 말이야? 신기하네.”
“아으아으.”
녀석은 낙심한 듯 고개를 떨궜다. 더 이상 말을 붙이기가 무서워진 모양이다. 그리고 기침을 연신 해대는 게 아직 완전히 감기가 나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놀리기도 미안해졌다.
“알았어. 하는 수 없지. 어제 끓여둔 죽 좀 데워 올게. 조금만 기다려.”
“아…….”
그리고 봤다.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말을 했다니 너무해! 라는 원망이 가득담긴 시선을. 하지만 그 가운데에도 고맙다는 말이 얼굴 한 구석에 쓰여있는 복잡한 표정이다. 아, 그리고 선심쓰듯 한 마디 했다.
“그리고 속옷차림으로 너무 오래 있으면 감기걸린다.”
“앗!”
녀석은 그제야 자신의 차림새를 깨달았는지 이불속으로 숨었다.
“거기 가방 들여놨으니까 네 옷 꺼내서 입어.”
“네에…….”
정말 작은 목소리였다. 하긴 외간남자앞에서 속옷차림으로 십분도 넘게 거의 쇼를 했으니……. 그러고도 부끄럽지 않으면 그건 노출광에 변태지.
남은 밥을 가지고 냄비에 넣고 끓여서 만든 맛없는 음식이지만 녀석은 게눈 감추듯 먹어치웠다. 한 냄비 분량을 전부. 보통 한참 굶고 있으면 위가 쪼그라들어서 많이 못 먹지 않나? 뭐, 김치랑 간장밖에 없는데도 잘 먹어줬으니 다행이다. 중간에 궁금해서 참지 못하고 “맛있니?” 하고 물어보았을 때 그 행복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네, 정말 맛있어요!” 라고 대답하는 녀석을 보면서 어젯밤의 작은 노력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뿌듯했다. 나도 대충 밥을 먹고 나서 녀석과 함께 녀석의 짐을 정리했다. 커다란 하얀 가방은 겉이 부드러운 털로 덮여 있었는데 얼핏 봐서는 코트 같은 느낌도 든다. 그리고 안에는 정말 별별 물건이 다 나왔는데, 전부 하얀색 일색이었다.
“음. 이제 전부 꺼낸 것 같네.”
그냥 까 뒤집어서 확 쏟아버릴까 했지만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좁은 옥탑방이 완전히 폐허로 변해버릴 것 같아서, 나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분류하면서 꺼냈다. 혹시나 녀석의 기억에 도움이 될만한 물건이 있나 싶어서 일부러 꺼내면서도 하나하나 물건의 이름을 부르면서 꺼냈지만 녀석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꺼낼 때마다 신기해 할 정도였다.
“네.”
늘어놓은 짐은 일단 당장 필요한 물건부터 따로 모았다.
간단한 세면도구와 속옷 몇 장 갈아입을 블라우스와 바지 그리고 원피스 스타일의 스커트와 하얀색 후드가 달린 잠옷까지 해서 일단 어디 수련회 갈 때 쓸 것 같은 필요한 물건들. 그건 그렇고 속옷이 너무 어린애 같잖아. 이래서야 좋은 남자가 나타나도 시집가기는 틀렸어 이 녀석. 시집이랑 속옷은 상관없나? 하지만 나 같은 경우에 만약 결혼했는데 첫날 밤에 이런 속옷을 입고 있으면 당황해서 그 날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은데……. 아, 녀석이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얼굴이 빨개져서는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겼다. 나는 내 서랍장 한 칸을 끄집어내서 다른 쪽에 쑤셔넣고 거기에 적당히 정리하라고 했다. 당장은 옷이 몇 벌 없어서 서랍안에 들어가고도 상당히 공간이 남았다.
“에 일단 대충 정리가 끝난 거 같아.”
“네에.”
벽 에 걸린 시계를 보니 벌서 1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짐이 많다고 해도 가방 하나에서 나온 것 치곤 많다는 거지 실제로는 그렇게 많은 건 아니었다. 다만 이 짐을 정리하고 어딘가에 수납하기 위해서 내 방에 있는 내 물건들의 재배치가 이루어졌는데 이게 문제였다. 이 녀석 물건과 내 물건을 될 수 있으면 구분해서 집어넣으려다 보니 안 그래도 좁은 내 방의 장롱이며 책상서랍 같은 곳을 둘로 나누던가 아니면 내 물건을 통째로 들어내고 녀석의 짐을 넣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를 옮기고 나면 또 다른 게 나오고 또 다른 게 튀어 나왔다. 아무튼 어찌어찌 정리를 끝내고 이부자리를 폈다. 나는 침대 녀석은 바닥. 너무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절대 너무한게 아니다. 뭐, 가엽다는 점은 이해하겠지만, 내가 침대를 포기할 이유는 전혀 없다. 여긴 내방이고 저 녀석은 손님도 아니고 그저 임시로 머무는 식객이니까. 그리고 내 이불을 전부 끌어다가 깔아주고 덮을 걸 마련해 준 덕분에 나는 이 추운 겨울에 얇은 여름 이불 두 개랑 모포 하나만 덮고 자게 생겼다. 가끔 친구들이 자고 갈 때는 대충 손님용 이불 한 채만 던져주면 알아서 잘 자기에 나는 비상용 이불로 모포만 갖고 있지만……. 음 이 녀석 때문에라도 어디서 이불 한 채 구해 와야 할라나?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그냥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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