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주세요
글쓴이 나유나유
2004년 1월 4일 일요일
“조심해야 해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 듣는 사람의 목소리였다. 남자……아니 여자의 목소리다. 그 것도 어린 여자아이의 목소리처럼 꼼지락꼼지락 말랑말랑한 목소리. 하지만 그 목소리가 들리면 들릴수록 불쾌하다.
“당신은 지금 위험에 처해 있어요.”
다시 그 목소리가 들린다. 다짜고짜 위험에 처해있다. 조심해야 한다라 그런 말을 해봤자 전혀 설득력이 없다. 애초에 여기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런 위험도 없으니까.
“그녀가 왔어요. 당신의 생명을 받으러.”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그리고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제 적당히 하지 않겠나? 여기는 아무것도 없다고. 아무도 없고. 있는 건 쥐들의 찍찍대는 울음소리. 나는 아르바이트에 바쁘다고.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한테 듣고 싶지는 않아. 위험한 건 꼬리뿐이야. 무서운 건 꼬리뿐이야. 긴 꼬리 마치 마디가 진 것처럼 거칠거칠하고 뱀처럼 꾸불거리며 감겨오는 그 빌어먹을 느낌. 그 꼬리가 두려울 뿐이야.
“당신이……린……그…….”
말하지마! 듣고 싶지 않아! 그건 정말 어쩔 수 없었어. 꼬리는 싫어. 꼬리는 싫다고. 오지마! 꼬리는 싫어!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마!
“그만해!”
소리를 지르며 팔을 휘저었다. 허공에 떠 있는 내 팔이 보였다. 잠옷이 말려 올라가서 손목 아래까지 다 보이는 팔. 적당히 움직여본다. 내 팔 맞다. 주변을 돌아본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된 방. 벽에 걸려있는 동그란 시계는 지금이 오전 9시라고 알려주고 있다. 꿈인가보다.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오늘 할 일이 생각났다. 과외 첫 미팅이 있는 날이다. 오후 한시부터라고는 하지만 일단 사람은 아침에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하지 않으면 금방 생활습관이 무너져서 폐인이 되버리는 법이다. 일어나야겠다. 나는 이불을 들췄다. 아니 들추려고 했지만 이불에 또 무언가가 감겨있다. 아니 이불보다는 내 엄한 곳에 무언가가 손을 대고 있다. 아니 이봐 얼굴도 대고 있잖아. 그만해!
“얌냠”
잠깐! 자면서 먹지 마! 아니 먹어도 좋지만 그건 먹지마아! 그건 여러 가지 의미로 먹는 게 아니야! 옷 위로라도 그 위치는 위험해!
“하웅 맛있어.”
맛있으면 어떻게 하겠다는거야! 이 식인종아! 아니 식인종 이전에!
“일어나!!!!”
여러 가지 의미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된 나는 어제처럼 이불을 휙 들어서 침대 아래로 집어던졌다.
-쿵!
뭐랄까 사람 몸에서 나지 않을 것 같은 엄청난 소리가 났다. 이번에도 머리통 부딪친 게 아닐까?
“아야야야.”
아픈가보다.
“우웅 머리아파. 아으 여기는…어? 왜 이런데서?”
부딪힌 이마에 손을 얹고 눈을 찡그리면서 주변을 둘러보는 녀석. 보니까 잠이 깨기는 했는데 정신은 덜 돌아온 모양이다.
“거기가 네 자리잖아.”
“우와아아앗!”
내가 침대 밑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뒤통수에다가 말을 걸자 녀석은 기겁을 하면서 앞으로 고꾸라진다. 내 참 내가 괴물이라도 되냐고.
“일어났으면 씻을 준비해. 오늘도 내가 먼저 씻을 테니까.”
“아, 네. 그런데 이상해요.”
“뭐가?”
“어제 분명히 위에 올라갔……핫!”
제멋대로 자백을 하는구만.
“오호라? 어제도 올라오셨어? 그 말은 역시나. 아까는 나를 잡아먹으려고 하고 역시 너는…!”
“으아아앗! 아니에요! 절대 아니에요! 그런게 아니에요! 우아아앗! 먼저 씻을 게요!”
내 말을 잘라먹고 마구 얼버무리는 녀석. 결국 손끝까지 새빨개져서 급하게 옷장에서 자기 속옷만 챙겨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거기 선반 문 열고 옷 벗어서 집어 넣어놔. 거기다가 물을 뿌리지만 않으면 안 젖을 거야.”
“네.”
어제 생각해보니 그러면 되는 거였다. 화장실 안에 문 달린 선반이 있는데, 그 안엔 휴지나 치약 사둔 것 몇 개가 들어있을 뿐이니까. 한 쪽은 완전히 비어있다. 거기다가 옷을 넣어두면 안 젖는다.
아침을 대충 먹고 나는 하나에게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어디가세요?”
“과외 하러.”
“우우 저를 버리고 가시는 거군요. 저는 혼자 외로울 거에요. 흑흑흑. 그치만 재우오빠를 방해할 수는 없으니 집을 보고 있겠어요.”
과장되게 우는 시늉까지 하더니 이내 눈물을 닦고 주먹을 불끈 쥐어보인다. 괜찮다는 거구나. 하지만 그렇긴 해도 정말 혼자 남겠네. 어쩌지. 혼자 남겨두는 건 아무래도 걱정이 되는데. 집안에 뭐 할만한 것도 없고. 안테나가 잘못 됬는지, TV도 제대로 안 나오는데. 게다가 더 중요한 건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것도 별로 없는데. 일단 나가면 점심때 넘어서야 들어올 텐데. 그리고 혹시나 수상한 사람한테 무심코 문이라도 열어주……지는 않겠지. 아무리 어려보여도 일단은 내일모레 성인인데.
“점심 먹을 때쯤엔 들어올거야. 그리고 있다가 도한이가 또 오기로 했는데 그 전까지는 들어올거니까 걱정하지 말아. 대신에 수상한 사람은 절대 열어주면 안돼. 알겠지? 그러면 갔다 오면서 사탕 사다줄게.”
“사탕요?”
녀석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리고 표정을 보니 고민을 하는 것 같다. 사탕이라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지?
“말 잘듣는 착한 어린이한테는 선물을 주는 거야.”
“어린이? 저는 어린이가 아니에요.”
“어린이는 아니지만 준 어린이정도로 봐줄게.”
“아이 참. 어린이가 아니라니깐요.”
아이 취급하는게 마음에 안드는지 볼을 부풀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영락없는 어린애였다. 귀엽다.
“알았어. 준준 어린이로 타협하자.”
“어린이는 빼주세요.”
“어쩔 수 없지. 그럼 준준 아동이다.”
“아우 으으.”
놀리는 건 이만해두고.
“아무튼 집좀 봐줘. 금방 올테니까.”
“네. 다녀오세요.”
“갔다올게.”
그렇게 집을 나섰다. 있다가 집에 돌아갈 때는 장좀 봐서 가야겠다. 냉장고 안에 있는 거라곤 김치 조금하고 밑반찬 몇 가지뿐이다. 라면도 다 떨어졌고 쌀도 간당간당하다. 김치야 둘이 먹더라도 한통정도 있으니까 일주일 정도는 버틸 수 있고 그 다음에는 집에 가서 얻어오거나 하면 된다. 사실 자취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생활비 말고는 집에서 이것저것 손 벌리는 게 많긴 하다. 가까운 탓도 있지만 부모님이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신 덕분이다. 물론 감사하고 있지만 나와 집의 관계는 글쎄 껄끄럽다고 할지 푸석푸석하다고 해야할지 그런 느낌이다. 아직 내가 제대로 독립하지는 못한 모양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버스 정거장에 도착했고 버스를 탔다. 내릴 곳을 확인하고 그 집 부모님께 어떻게 하면 잘 보일지 생각해 본다. 경력을 내새우는 건 좋아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오히려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자신감은 적당히 있어야 하지만 너무 하면 눈꼴시게 보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아이의 상태가 어떻든 무조건 칭찬하고 보는 방법이 더 좋다. 자기PR보다는 칭찬이 이런 거래에서는 잘 먹히는 경우가 많다. 굳이 학원을 안 보내고 과외를 시키는 경우는 보통 두 가지. 아주 못하거나 아니면 부모의 관심이 많거나. 학원을 가든 과외를 하든, 사실 마찬가진데 말이다. 아무튼 부모를 구워삶을만한 아이템 몇 개를 끄집어 낼 무렵 내릴 곳에 도착했다. 나는 탈 때 찍었던 카드를 다시 찍고 내렸다. 최근 서울시에서 시험운영하고 있는 환승할인제도 때문이다. 지난번에 버스를 타고 내릴 때 카드를 안 찍었다가 식겁한 적이 있다. 요금이 더블로 나와버리니 나 참. 여기서 전화를 한번 해 줘야겠다. 물론 오늘도 나서기 전에 연락을 한번 하기는 했지만, 근처에서 연락을 한 번 더 해주는 게 좋다. 그래야 시간을 잘 맞춘다는 인상을 줄 수 있으니까. 아, 아파트 7층이군. 도착했다.
701호 701호 여기군.
-딩동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네, 아까 전화한 서재우입니다.”
-철컥
문이 열리고 안에서 한 아이가 나왔다. 아, 이 아이가 내가 과외하기로 아이인가? 어깨까지 닿을락말락하는 짧은 단발머리에 커다란 눈동자는 끌려들어갈 것만 같이 새까맣다. 키는 녀석보다는 조금 크려나? 한마디로 참 예쁘게 생겼다.
“안녕하세요? 들어오세요. 선생님.”
역시나 과외를 맡기로 했던 아이중 하나인 모양이다.
아이는 나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서 곧바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야기내용은 아이의 부모님은 현재 외국에 나가있는 상태라 아이의 집에는 이 아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이 외국으로 장기출장을 가게 된 옆집의 아이 둘이 살고 있다고 했다. 아, 그런데 이 아이가 이 집 아이인지 옆집아이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과외는 저희가 하기로 결정하고 부모님께 말씀드린거에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과외비는 저희가 직접 드릴거에요. ”
그렇다는 건 이 아이가 고용주이자 학생이 되는 걸라나?
“그렇구나. 그런데 부모님이 외국에 계시면 영어 잘하지 않니? 굳이 둘이서 과외까지 할 생각이 들 거라고는 생각 안 하는데.”
“우…….”
어쩐지 곤란한 눈치다. 방금전까지는 꽤 야무지게 보였는데.
“실은 저희 영어 많이 못해요.”
누군가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대신 대답했다.
“외국에 따라가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에요.”
찻잔을 내려놓은 그 소녀는 자리에 앉았다. 갈색의 긴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웨이브지며 뒤로 흘러내린다. 약간 탁한 색깔의 암갈색 눈동자가 차분하게 내쪽을 바라보고 있다.
“민희야!”
“사실인데 뭐.”
뭐, 외국에 나가면 영어가 더 늘 테니까 그쪽이 낫지 않나? 영어 공포증이나 뭐 이런 게 있나보다. 그런 건 사실 직접 부딪히는 게 최곤데.
“내가 가르쳐 줄 수 있는 건 영어시험이나 수능 같은 걸 잘 볼 수 있는 공부방법이야. 아쉽게도 회화에는 재능이 없어.”
뭐, 금방 드러날 거짓말로 꾀는 것보다는 사실대로 말해서 과외를 할 지 안 할지 확실히 결정하게 하는 편이 낫다. 어차피 물주는 이 두 아이들이고. 거짓말을 해봤자 별로 득 될게 없다.
“괜찮아요.”
“응?”
“저희도 일단 학교공부가 부족해서 과외를 하기로 한 거에요. 그리고 민희가 한 말은 반만 맞아요. 영어를 못해서 학교 진도를 따라갈 수가 없어서 못간 것도 있지만, 당장 올해 수능을 보고 대학에 가야하는데 이제와서 외국에 나가면 재외동포 자격으로 입학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모로 불리해서 둘만 남은 거에요.”
연두라고 했던 그 아이의 말.
“그리고 소개해주신 분이 선생님은 저희같이 그 모……못하는 아이들 전문이라고 하셔서.”
뭐, 전문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맡은 아이들은 좀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이 많았다. 물론 머리가 나쁘거나 그 아이들이 열심히 안 했다는 건 아니지만 그저 성적이 좀 안 나오던 아이들이었다. 대부분 공부하는 습관이 제대로 안 들어 있거나 방법이 비효율적이었던 경우가 많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봐서 그런 걸 바로잡아주었었다. 재밌는 건 가르쳐주는 건 그다지 없었지만 공부하는 방법을 좀 손봐준 것만으로도 그 아이들의 성적이 많이 올랐다는 것이다. 물론 최상위권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공부방법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노하우가 있겠지만 그건 나로서도 알기 힘든 것이다. 사람사람마다 공부하는 스타일은 다른 거고 그 최적의 방법도 다른거니까. 다른 사람의 방법이 우연히 잘 맞았다면 다행이지만 그런 걸 일일이 시험하다가는 고1부터 시험해 봐도, 수능 날이 지나가버린다.
“뭐, 요즘에는 그렇지.”
“다행이에요.”
연두는 얼굴빛이 환해졌다.
“사실 저희가 영어를 너무 못해서 영어 선생님이 저희한테 그렇게 하다간 수능은커녕 내신도 대학갈 수준은 안되겠다. 라고 하셔서.”
뭐, 보통은 그런 말은 안 듣는데 말이지.
“그래서 영어를 기초부터라도 다시 배우려고요. 잘 부탁드려요. 아 저희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연두에요 여기 이 집주인이에요.”
“저는 도민희에요. 연두네 집에 잠시 같이 살고 있어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두 사람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래 나도 잘 부탁해. 선생님 이름은 서재우야. 선생님한테 뭐 궁금한 거 있니?”
보통 이렇게 직선적으로 묻기를 청하면 아무도 안 물어본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단체도 아니고 이렇게 두세명이 있는 경우에는 특별히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못 묻는다. 왜냐하면 부끄러우니까. 아무래도 교실 전체에 앉아서 막무가내로 터져나오는 질문이 아닌 이상 이런 상황에서는 어쩐지 물어보기가 힘든 게 사실. 덕분에 오히려 질문 없지? 하고 첫날부터 수업진도를 팍팍 나갈 수 있어서 이 방법은 참 괜찮다. 어차피 개인적인 질문이야 수업을 하면서 차차 받으면 되는 거고 안 받으면 나야 좋고. 심심할 때를 대비해서 남겨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
“네 첫 번째 질문이요!”
……라는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응. 뭐니?”
“선생님 연세가 어떻게 되세요?”
내 나이 올해로 스물넷 꽃다운 청춘.
“스물넷이야. 군대는 제대했어.”
“와아. 실은 아저씨구나!”
아저씨라니……. 아무리 예비역은 모두 아저씨라는 공식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스물넷 꽃다운 내 청춘. 아저씨라니. 아저씨라니.
“그럼 선생님 두 번째 질문해도 돼요?”
“응.”
“선생님 애인 있으세요?”
이 녀석 굳이 이 타이밍에 크리티컬을 날리는 이유는 뭐냐. 여기서는 뭐라고 대답할까나. 뭐 적당히.
“아니, 사귀는 사람이라면 지금은 없어.”
그 동안 연애를 못해본 건 아니지만……. 그 생각은 일단 접어두기로 하고, 지금은 전혀 만들어질 기색조차 안 보인다. 아아 어디서 참한 아가씨 한명 못 모셔오나?
“에에? 지금 없으면 예전에는 있었나요?”
“뭐 그렇지.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답해주기 곤란한걸. 별로 재밌는 얘기가 아니라서.”
사실 재미없는 얘기기도 하지만 그다지 좋은 기억도 아니다. 이정도로 말하면 알아들었겠지 싶었는데 갑자기 무언가가 내 팔에 매달렸다.
“에헤헤. 나중에 들려주셔야 돼요?”
연두가 어느 틈엔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내 팔에 매달리고 있었다. 어이 어린애도 아니고 무슨 짓이야? 그렇게 다가오면 그 그 그 가슴이 팔에…….
“여…연두야?”
“에이. 그러지 마시고요.”
점점 조여오는 연두의 팔과 다가오는 연두의 얼굴. 새까만 눈동자가 반짝반짝이면서 내 눈에 별빛을 쏘아보낸다. 곤란하다고 곤란해. 대답해 버릴 것 같아. 이야기할 것 같아. 안돼.
“연두야.”
내 팔을 끌어안고 보채기 시작하려는 연두를 붙잡고 흔드는 민희. 그제야 연두는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었는지 깨달은 모양이다.
“아앗!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좀 에헤헤.”
혀를 쏙 내밀고 제 자리로 돌아가 앉는 연두. 아아, 정말 감당하기 힘든 아이다. 나는 민희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민희도 알아들었는지 생긋 웃었다.
“자 그럼 더 질문은 없지?”
“연두 세 번째 질…아얏…아뇨 없어요.”
민희가 탁자 아래에서 연두의 허벅지를 꼬집은 모양이다. 고맙다 민희야. 연두의 폭주는 이걸로 일단락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우선 두 사람의 실력을 알아보기 위해서 간단한 테스트를 해봤다. 풀게 한지 삼십분 경과 그 결과
“에에? 저 진짜 이렇게 심각한가요?”
연두 80점 만점에 25.5점.
“저도 정말 심각한가봐요.”
민희 80점 만점에 20.4점.
“뭐, 처음이고 하니까 수능기출문제를 가지고 와봤어. 2002년도 기출문제인데 어땠니?”
“어려웠어요.”
“저도요.”
두 사람모두 자기 실력을 알고 나자 상당히 쇼크를 받은 모양이다.
“학교에서 못한다 못한다 했지만 사실 모의고사 같은 건 대충 보니까 괜찮아. 했었는데 정말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어요.”
“저도 잘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자 틀린문제를 같이 풀어보자.”
그런 식으로 첫 날 수업은 세 시간만에 끝났다. 앞으로는 두 시간씩 하기로 했다. 첫날 오리엔테이션을 겸해서 한 수업이라 확실히 길긴 길었다. 다음 번 수업 때 할 숙제를 내주고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정말로 슈퍼에 들러서 사탕을 샀다. 사실은 마트나 빵집에 들려서 좀 제대로 된걸 사다줄까 했지만 마트는 너무 멀고, 빵집에 가려고 해도 지금 생각보다 늦어져서 점심도 못 먹었을 녀석이 걱정이었다. 슈퍼에서 대충 반찬거리가 될만한 것들을 사서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바리바리 들고 가던 슈퍼마켓 봉투를 땅바닥에 떨어트리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내 방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 틈엔가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와 있었고 나는 봉투를 내던지고 미친듯이 층계를 뛰어 올라갔다. 내가 방으로 달리자 몇몇 사람들은 나를 제지했지만 나는 모두 뿌리치고 달렸다. 저 안에 녀석이 있는데! 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불투명한 유리문에는 열쇠가 잠겨 있었다. 급하게 주머니를 뒤져 열쇠를 구멍에 꽂았다. 평소에는 한 번에 들어가던 열쇠가 하필이면 구멍에 제대로 꽂히질 않는다. 젠장젠장젠장 침착하자. 아직 불은 크게 나지 않았어. 빨리 들어가서 하나를 구해야해. 지금이라면 할 수 있단 말이닷! 들어갔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지하나!”
내 목소리가 시커먼 연기속에 울렸다.
“앗! 수상한 사람은 들이면 안된다고 재우오빠가 말했었는데!”
맥이 빠지도록 멀쩡한 녀석의 목소리가 내 코앞에서 들려왔다.
“으아앗! 갑자기 웬 연기에요?”
그건 집에 있었던 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할말을 잃었다. 연기가 나는줄도 모르고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 설마 아앗! 김치찌개!?”
아?
하나는 갑자기 가스렌지쪽으로 갔다. 나도 뒤따라 들어갔다. 거기에는 검은 연기를 뭉개뭉개내뿜고 있는 내 방에 두 개밖에 없는 양은냄비와 검은연기를 내뿜고 있는데도 계속해서 그 냄비를 달구고 있는 가스불이 보였다.
“에구 너무 오래 끓였다.”
가스 불을 끄자 연기가 점차 가라앉았다.
“너어!”
“네? 아얏!”
“깜짝 놀랐잖아!”
나는 하나의 머리에 알밤을 먹였다. 아마 내가 집에 늦게 들어오니까 뭘 해먹으려고 가스불에 올려두긴 했는데 깜빡하고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히잉 아파요.”
“아프라고 때렸으니까 아프지! 불 난줄 알았잖아! 아니 불 날뻔 했다고!”
“저도 연기 때문에 깜짝 놀랐다구요!”
적반하장도 참 이런 적반하장이 없다.
“네에탓이이잖안아!”
나는 녀석의 머리양쪽에 주먹을 쥐고 빙글빙글 돌렸다.
“꺄아아앗 아파요.”
잠시후 나는 다 타버린 냄비와 안에 시커멓게 눌러 붙은 것들-아마도 우리집에서 가져온 늘 모자라는 김치-을 정리하고 밖에 던져둔 봉지들을 주워왔다. 내용물은 다행히 멀쩡한가보다. 밖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내가 들어가서 연기가 나오지 않게 되자 안심한 모양인지 모두 돌아갔다. 그을음과 가스레인지에 붙어있는 숯검정들을 대충 긁어내고 방안이 그럭저럭 정리가 되고 나서 나는 녀석을 바닥에 앉혔다. 딱히 어떻게 앉으라고는 하지 않았는데 무릎을 꿇고 조심스럽게 앉은 모습이 반성하고는 있는 것 같았다.
“왜 그랬어?”
“그게요 실은.”
다짜고짜 물었다. 그러자 역시나 녀석은 고개를 떨구고 밍기적밍기적 대답을 못한다.
“대답해봐. 화내지 않을 테니까.”
물론 지금 화내고 있는 거긴 하지만.
“재우오빠가요…….”
“내가.”
“그…….”
“그?”
녀석은 내가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하며 추궁하자 점점 말수가 적어지더니 점점 녀석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잘못……했어요 아……우…윽……흐……윽흑.”
급기야 울기 시작했다. 짜증이 났다. 울어서 얼버무릴 생각인가? 고개를 돌렸다. 괜히 여기서 약해지면 죽도밥도 안 된다. 다음부터 또 곤란한 일이 생기면 울어서 얼버무려 넘길거다.
“뭘 잘못했는지 말해봐. 뚝 그치고.”
조금 심하게 나간 것 같지만 뭐 괜찮다. 아직은 풀어줄 때가 아니다. 나쁜 버릇이 생긴다고.
“아흑 으으욱. 그……흑.”
녀석은 필사적으로 말을 하려고 하는 것 같긴 한데 막 흘러넘치기 시작한 울음이 멈추질 않는지 말은 못하고 손으로 눈을 비비면서 눈물을 닦아내고만 있다. 이런데서 약해지면 안 되지만 일단 이야기 진행이 안 되니까 멈추게 해야겠다. 절대로 녀석이 불쌍하다거나 그래서 용서해줬다거나 하는건 아니다. 암암. 절대로 저런 왕반칙 얼굴에 진게 아니다. 단순히 참고 있을 뿐이다. 암암. 그렇고말고. 이게 정답이다.
“미안, 울릴 생각은 없었어. 그냥 왜 그랬는지 이유가 궁금했을 뿐이야. 혼내려는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그만 뚝. 울면 예쁜 얼굴이 엉망이 되잖아.”
어린아이는 조금만 얼러줘도 괜찮아지겠지.
“아흑 우윽 그 그러니까요 그게요.”
억지로 터져나오는 울음의 펌프를 눌러가면서 녀석은 설명하기 시작했다.
“재우오빠가 우윽 그러니까 집에 오면요 우윽.”
“응.”
조금 시간을 두고 숨을 고르는 녀석. 조금씩 진정이 되는 모양이다.
“밥은 있는데 먹을 반찬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찌개를 만들려고 했는데 있는게 김치밖에 없어서 그래서 그러니까 그게.”
녀석은 양손 검지 손가락을 맞대고 꼬물거리면서 우물쭈물하다가 말을 이었다.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가스레인지를 보고 있으니까 눈앞이 가물가물하다가 어어어 하는 사이에 그게 그러니까.”
요는 잠들었군.
“큰일 날 뻔 했잖아. 잘못했으면 불 났을거야.”
“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그치만 그치만.”
하나는 또 울음보가 터진 모양. 이제 그만해줬으면 하는데.
“괜찮아.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되지. 너무 그렇게 울지마.”
“에?”
“그……짜증난다구 자꾸 울면.”
“힉.”
하나는 숨이 목구멍에 걸린 것 같은 소리를 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내가 나쁜놈이 된 것 같잖아. 괜히 별것도 아닌 일로 울리고.”
뭐, 별거는 별거지만 따지고 보면 불이 난 것도 아니고 적절히 조치도 되었고 다른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고 나를 생각해서 했던 일이니까.
“그래도…….”
“됐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말자. 오늘 일은 이걸로 끝.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되는 거야. 나랑 약속.”
“네.”
녀석은 내가 내민 새끼손가락에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했다. 아, 이게 뭐야 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리하야 어찌어찌 사태는 마무리 되었으나……. 나의 일용할 양식……그러니까 김치가 전멸해버렸다. 오늘 사온 반찬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역시나 김치가 없으니 밥하기가 너무 귀찮다. 게다가 타버린 냄비를 철수세미로 벅벅 긁어서 닦다보니 구멍이 나버렸다. 냄비도 없다. 아, 라면 끓이는 냄비는 하나 있긴 한데 그걸로 뭘 해먹을 만큼 크지는 않다. 결론은
“누구 탓에 먹을 게 없네.”
“아우.”
하나는 찔끔해 한다. 재미는 있지만 불쌍하다. 될 수 있으면 자극하지 말아야겠다. 그럼…….
“그럼 나가서 먹을까?”
“네?”
나가서 먹을 거라고 해도 예산이 뻔한데 먹을 것도 뻔하다. 그리고 집안을 치우는데 기력을 써버려서인지 배가 고프다. 아무튼 빨리 밥을 먹고 싶다.
“자자 옷 챙겨 입어.”
나는 벗어둔 낡은 재킷을 입고 지갑을 꺼내들고 나갈 준비를 했다. 녀석도 잠깐 우왕좌왕하다가 하얀 코트를 입고 장갑을 끼고 나갈 준비를 끝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왔다.
“뭐 먹을까?”
“으음. 튀김요!”
그건 밥이 아니잖아.
“무슨 튀김?”
“으음.”
녀석은 눈 사이에 주름을 세우고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머리위에 튀김이 종류별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모양이다.
“그럼 라면 먹으러 가자.”
“역시 고구마튀김!”
“그럼 라면 먹으러 고!”
“네!”
녀석은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못 알아들었는지 계속 “아니야 그래도 깻잎도 괜찮은데 고추도 사실 맵지만 먹을 수 있고 오징어도 맛있고…….” 라고 쉴새없이 중얼중얼거린다. 내 생각에는 내가 라면 먹으러 가자고 한 말은 죽어도 못 알아들었다. “아아 튀김 맛있겠다.” 라니 절대로 못 알아들었어 음음. 확실해. 내기해도 좋아. 나는 못 알아들었다에 50만! 올인이닷!
“재우오빠 그런데 여기에요? 튀김? 맛있어요? 떡볶이도?”
어느 틈엔가 라면집에 도착했다. 라면집이라기보다는 분식집이지만 여기는 튀김도 팔긴 판다.
“라면 먹을거야.”
“에에?”
뜻밖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녀석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튀…튀김 먹기로 했잖아요?”
언제 그랬다는 거지.
“아니야 잘 생각해봐. 그런 적 없어.”
“분명히 고구마튀김으로 하자. 그런 것 같은데.”
나는 튀김의 튀자도 꺼낸 적이 없다. 하지만 튀김은 안 먹는다고 말한적도 없다. 이럴 때는 화제를 두루뭉실하게 해서 넘어가야한다. 그래, 일종의 물타기라고나 할까?
“그건 말이지. 거짓 기억이라고 하는 현상이야. 옛날에 미국에 수잔 네이슨이라는 한 여자가 자기 아버지를 20년전 살해당한 친구의 살인범이라고 고발했대. 그리고 하는 진술이 전부 일치해서 아버지가 결국 범인으로 잡혀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그 여자가 신문에서 읽었던 일을 진짜 자기가 겪은 일이라고 착각해서 일어났던 거야. 이른바 거짓기억이라고 하는 현상이지.”
“에? 그게 갑자기 무슨 이야기에요?”
“그러니까. 나는 튀김 먹자는 말은 한 적이 없다는 거지.”
설명은 장황하지만 결론은 간단하다.
“아우 튀김.”
“안돼. 안 그래도 돈이 간당간당하다고.”
“그치만.”
녀석의 눈은 가게 앞에 늘어놓은 튀김에서 떠나질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꿋꿋하게 아주머니께 라면 두 개를 주문했다.
“그랴 조금만 기다려요.”
“네.”
느긋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떼를 아무리 써도 지금 들고 온 돈은 달랑 오천원뿐이라고. 라면 두 그릇 5천원 땡이야. 공기밥이 무료가 아니었으면 밥도 못 먹는다. 튀김은 무리야. 녀석은 내가 설명은 더 안 해주었지만 이내 잠잠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시선은 튀김에 고정되어 있다. 뭐랄까 조금만 더 있으면 튀김 한쪽에서 불이라도 날 것 같다.
“자 여기 라면 두 그릇. 요건 자주 와주니까 서비스야.”
“와아! 잘먹겠습니다!”
아주머니께서 튀김 몇 개를 그릇에 담아 주셨다. 으이구 이 녀석 그렇게 떠들어 대니까 아주머니께서 주셨잖아.
“아 아주머니.”
나는 죄송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는데,
“괜찮아. 괜히 이쁜 동생 칭얼대게 하지 말고 먹고 싶다는 거 잘 멕여. 전에 얘기하던 사촌동생인겨?”
“아 네.”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지하나 이 녀석 집에 가면 가정교육을 똑바로 시켜주지!
“이거 맛있어요! 재우오빠. 에헤헤.”
똑바로 흘리지 말고 먹으라고! 저런 미소를 보면 정말 뭐라고 하기가 힘들다. 아아 나는 이렇게 약한 존재였던가.
“응. 여기 라면이 끝내줘. 어떻게 끓이시는 건지는 모르지만 정말 최고야. 특히 면발이 아주 그냥.”
“네 튀김 정말 맛있어요. 이거랑 이거 김말이도 최고에요!”
어 그렇구나. 녀석은 어느 틈에 라면을 해치우고 튀김을 먹고 있었다. 나도 빨리 먹는 편인데 나보다 훨씬 빠르다. 그러다가 체하지나 않을까 모르겠다.
“천천히 먹어 누가 쫓아오니?”
“에헤헤 알았어요.”
어머니께 자주 듣는 말을 내가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벌서 튀김까지 해치우는 건 너무하잖아. 밥을 다 먹고 계산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간다.
“다음에 또 올게요. 서비스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올게요. 맛있었어요.
“그랴, 다음에 또 와. 또 서비스 많이 줄게.”
둘이 약속이나 한 듯이 꾸벅 고개를 숙이고 집으로 돌아갔다. 우중충한 하늘은 벌써 푸르스름하게 변해 있었다. 집에 돌아오던 길에 전화가 울렸다. 누구지? 싶어서 받았더니 익숙한 목소리였다. 도한이다.
“아, 오늘 온다면서?”
「아, 미안해. 오늘 가려고 했는데, 재밌는 알바자리가 나서 그거 좀 알아보다보니까 늦었다. 지금 가기엔 좀 늦었지? 밖에서 볼래?」
하긴 벌써 일곱시 반. 술마시러 만나기엔 무지하게 알맞은 시간이지만 하루종일 하나를 두고 다니다가 또 나가는 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뭐 상관은 없는데 오늘 이 녀석 하루 종일 집에 두고 다녀서 또 나가기는 그러네.”
「음, 그럼 뭐 어쩔 수 없네. 내일 보자. 어차피 네 사촌동생한테 딱 맞을 것 같은 알바를 몇 개 찾아놔서, 네 사촌동생도 만나봐야 하니까.」
“그래? 알았어. 그럼 내일 몇시에 올건데? 아니 우리가 갈까?”
「내일 열 두시쯤 갈게.」
“오케이.”
「알았으.」
전화를 끊고 나는 내일 할 일을 생각했다.
“재우오빠? 그 도한이 오빠에요?”
“어. 내일 네 알바자리 몇 개 소개시켜 준댄다.”
“와아 정말요? 잘됐다.”
손뼉을 치는 녀석, 뭐랄까 어쩐지 다행이라는 표정. 기뻐보인다.
“그렇게 좋아?”
“네. 재우오빠한테 너무 신세만 지고. 사실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그냥 제 이야기만 듣고 이렇게 믿어주시고.”
“하하. 그럼 지금 당장 정체를 밝히시지?”
녀석은 그 말을 한 순간 굳어졌다. 그리고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기억이 안나요 죄송해요 그런 말을 반복했다. 나도 물론 장난삼아 물어본 거라서 우와! 알면서 그러다니! 하면서 놀려대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아 오늘 하루도 힘든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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