갯마을 산책
정기고사라 주중 오후 틈을 낼 수 있었다. 어제는 북면 지인 농장으로 들어 그간 밀린 안부를 나누고 가을 푸성귀를 챙겨 나왔다. 지인 밭뙈기 가장자리 내 몫으로 분양받은 자리 심어둔 무와 배추, 그리고 쪽파였다. 보조가방까지 가득 담아온 채소는 한동안 우리 집 식탁에 찬이 되어 오를 것이다. 시월 셋째 목요일 고사 감독을 끝내니 오후는 어디 얽매임 없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학생들은 썰물처럼 교정을 빠져나가고 담임들은 학교 바깥으로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나는 무소속인지라 어디 붙을 데가 없었다. 충혼탑 사거리에서 대방동을 출발해 석교로 가는 216번 버스를 탔다. 석교는 마창대교가 걸쳐진 합포만 구석이다. 승용차를 타고 가면 방파제와 해안 시설물에 가려 건너편 마산이 제대로 보이질 않는다만 시내버스는 조망 위치가 높아 훤히 다 드러났다.
합포만 건너는 무학산 자락이 넓게 퍼져 흘러내렸다. 산비탈 산복도로 아래 달동네 집이 즐비했지만 그 앞에 높이 솟구친 고층 아파트로 조망권이 침해당하는 듯했다. 바다 건너편에서 바라본 마산은 평소 그곳을 지날 때와 사뭇 다른 풍광이었다. 같은 사물일지라도 어느 방향에서 얼마만큼 떨어져 바라보느냐에 따라 겉모습이 다름을 실감하였다. 돝섬이 손에 잡힐 듯 눈앞에 가까웠다.
신촌 삼거리에서 두산중공업을 지났다. 두산중공업은 창원에서 단일 공장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산업부두를 지난 용호 들머리에서 내렸다. 용호 입구는 삼귀해안 산책로 기점이었다. 그곳부터 석교에 이르는 해안선에는 근래 찻집과 횟집이 많이 들어섰다. 시내와 멀지 않은 곳이라 점심시간에도 직장인들이 잠시 다녀가는 곳이다. 용호마을에서 해안 산책로를 따라 갯마을로 걸었다.
해안 산책로에는 마침 전국 단위 문학 단체에서 걸개그림 시화전을 열고 있었다. 나와 면식이 있거나 서책을 통해 알려진 시인의 작품이 더러 보였다. 수도권을 비롯한 전국 각지 문인의 글 향기를 만날 수 있었다. 시화 전시가 지방자치단체 후원을 받은 행사인지라 옥외 광고물 눈총 받을 일도 없었다. 중간에 행사 안내문을 살펴보니 걸개 시화는 무려 넉 달 동안 게시한다고 했다.
높이 솟구친 마창대교 교각이 바로 눈앞이라 폰 카메라에 몇 장면 담아놓았다. 요트 계류장도 있고 바다 건너편은 가포 신항 크레인이 보였다. 바다 바깥 저 멀리는 사궁두미 앞 모개등대가 하얀 분필처럼 뾰족하게 서 있었다. 나에겐 산책보다 점심 요기가 우선이었다. 풍광 좋은 자리 횟집을 비롯한 여러 식당이 있었으나 혼자 들릴 여건이 아니었다. 낚시꾼을 상대하는 슈퍼가 보였다.
가게 안으로 드니 주인 할머니는 낚시꾼에게 미끼를 챙겨 건네는 즈음이었다. 곁에는 며느리가 아닌 딸인 듯 중년 아낙이 할머니 일을 도왔다. 나는 라면을 끓여 주십사하고 막걸리를 청했다. 안주가 될 만치 계란을 넣어 달라고 했다. 간단한 상차림인 묵은 김치와 함께 나온 라면은 나에겐 식사대용이 아니라 막걸리 안주였다. 그때 멀리 떨어진 친구의 전화가 와 안부를 나누었다.
점심때가 늦은지라 시장기가 있어도 금방 갓 끓여 나온 김이 모락모락 나는 라면보다 곡차에 더 눈길이 갔다. 누가 잔을 채워줄 이 없어도 좋았다. 아낙이 꺼내온 냉장 숙성된 곡차를 흔들어 잔을 연거푸 비웠다. 평소 일과 중이라면 감히 누려볼 수 없는 행복이었다. 나는 라면 면발이 불어가는 줄도 모르고 곡차를 한 병 더 시켜 바닥을 보았다. 가게를 나오니 성근 빗방울이 들었다.
용호마을 썰물 갯가에서는 한 사내가 어디선가 구해 온 바지락 종패를 뿌리고 있었다. 합포만이 되살아나는 증표로 여겨졌다. 연안 공유수면에 패류 양식을 허가 받은 사람인 듯했다. 마창대교 교각을 돌아 갯마을로 갔다. ‘갯마을’이 보통명사이나 삼귀해안에서는 고유명사로 마을의 이름으로 불렸다. 저만치는 삼귀 주민센터이고 석교 종점이 멀지 않았다. 석양이 비치기엔 아직 때가 일렀다. 17.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