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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
-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미친 광기의 인간들
김유섭
1. 주제
영화 기생충의 주제는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 미쳐 멸망해 가는가? 하는 질문이면서 동시에 경고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21세기라는 현시점의 세상 또는 사회를 얼마나 적확하게 그리고 근본적인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기생충은 사회학, 철학, 논문이라고 할 수 있는 관념적 환타지 영화다.
특이하게도 기생충은 주제를 위한 영화와 재미를 위한 영화 두 편으로 구성되어있다. 즉 읽는 영화와 보는 영화다.
주제를 위한 영화(읽는 영화)의 관점으로 보면 재미를 위한 영화(보는 영화)의 장면과 대사는 맥거핀에 가깝다.
반대로 재미를 위한 영화의 관점으로 보면 주제를 위한 영화의 장면과 대사 역시 맥거핀으로 위장시켜 놓은 상징이다. 그러나 감독이 처음부터 두 개의 영화로 기획했다고 보이지는 않는다.
극적인 스토리 속에 무수한 상징을 넣어 마치 비단만도 아름다운데 그 위에 눈부신 상징의 수를 놓은 형식이다. 따라서 비단과 그 위에 놓은 수를 함께 보고 읽게 만드는 영화의 새로운 장르 탄생을 목격하게 한다.
봉준호 감독은 재미를 위한 영화(보는 영화)에서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인간이 극단적인 갈등 속에서 처참하게 몰락한다는 경고를 한다. 그러나 상징을 수놓아 최종적으로 드러내려고 하는 주제는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인간이 미쳐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스스로 멸망해 가는 근본적인 문제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영화 끝 부분에 기우의 입을 통해 기택 가족이 수없이 반복적으로 되풀이해서 말하던 “계획”의 그 계획이 아니라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겠다.”고 독백하는 대사가 그것을 상징한다.
21세기 신자본주의 속에서 그 누구든 “계획”을 세우는 것은 차라리 없는 것 보다 못한 절망의 되풀이라는 것을 기택에 이어 기우도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기우는 그런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계획”이 아니라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겠다고 한다.
영화 첫 장면에서 기우와 기정이 와이파이를 찾아 반지하를 뛰어다니다가 겨우 연결해서 피자박스 접는 일을 하게 되는 것과 명확하게 대비된다.
그 “근본적인 계획”이 무엇인지 관객에게 그리고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미쳐가는 인간에게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기우가 휴대폰을 바라보는 이유는 당신에게서 올 답장을 기다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주제의 깊이 때문에 봉준호 감독이 장주네의 “하녀들”부터 김기영의 “하녀”, “충녀”, “육식동물” 등을 훌쩍 뛰어넘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2. 근본적인 문제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가 인간을 행복의 나라로 인도할 것이라고 인류는 굳게 믿어 왔다. 실패한 공산주의도 시장경제를 도입해서 뒤따라오고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프랑스 시민혁명의 대표적인 구호였던 자유, 평등, 박애에 근원을 두고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의 핵심 요소로 국민주권과 국민자치, 복지주의, 평등주의로 이어졌다. 따라서 자유 평등 박애를 민주주의 근본적인 가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자본주의는 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 여러 수단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이용하려는 합리주의적 경제활동이다. 따라서 민주주의 가치에 자본주의 가지를 더하면 자유, 평등, 박애의 바탕위에 이윤의 획득을 목적으로 합리주의적 경제활동을 하는 세상 또는 사회가 된다.
이러한 장밋빛 이념의 자본주의가 인간을 행복하게 하고 있는가? 아니, 21세기 신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인간이 정말 행복한가? 라고 봉준호 감독은 묻는 것이 아니다.
영화 기생충 속에 자유, 평등, 박애와 합리주의적인 경제활동 따위는 없다. 오직 이윤 또는 편리와 생존 획득이라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거짓과 가식과 위선과 범죄의 극악함만이 있을 뿐이다. 때문에 21세기 신자본주의 구조 속에 인간은 1등과 그 외로 존재한다. 1등이 모든 것을 가지고 나머지는 반지하나, 지하에 살아야 하는 구조를 그 어떤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절벽의 세상임을 보여준다.
그래서 영화 초반 민혁의 입을 통해 “21세기 신자본주의 행복”이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 날마다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또 실패하고 낮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인간에게 “정신 차려!”라고 봉준호 감독은 소리치는 것이다.
3.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숙주인 인간의 삶의 형태
영화 시작 부분 기택 앞에 꼽등이가 나타나는 장면이 있다. 꼽등이와 같은 메뚜기목 곤충은 연가시 유충이 몸속에 유입하여 어느 정도 자라면 신경조절물질을 분비해서 숙주인 메뚜기목 곤충을 조종, 물가로 유인해 자살을 유도한다.
꼽등이는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이 역시 신경물질을 분비해서 숙주인 인간을 미쳐가게 하고 결국은 자멸하게 만들 것이라는 영화의 주제를 상징한다.
박사장가족, 기택가족, 근세부부, 세 가족은 각각 1등과 그 외의 삶을 상징하고 있지만 그들은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사람들이고 그래서 공통적으로 인간성을 상실한 채 거짓과 가식(pretend)과 위선으로 가득 차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만 본다. 때문에 언제든지 거짓말을 하고 가식과 위선으로 자신을 끝임 없이 위장한다. 원하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도덕이나 법률을 어기는 일을 손쉽게 죄의식이나 양심의 가책조차 없이 자행한다. 다만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콘돔이 상징하는 본능뿐인 것이다. 이것이 기생충인 21세기 신자본주의가 만들어낸 숙주, 인간의 모습이다.
민혁이 기우를 찾아와서 수석을 건네고 박사장네 가정교사 자리를 제안하는 행위는 거짓을 권하는 것이다. 그런데 민혁은 그것에 멈추지 않고 망설이는 기우에게 “니 동생 기정이 손재주가 좋다며”라는 대사로 연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할 것을 가르친다. 거짓을 넘어 범죄를 사주하는 것이다. 죄의식 따위는 전혀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기우도, 기택네 가족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는 영화의 관점에서는 개연성의 결여가 드러난다. 때문에 기정이 PC방에서 연세대 재학증명서를 위조하는 장면부터 범죄 블랙코미디로 장르를 바꿔서 타당성을 확보한다.
또한 영화 후반부 병원에서 깨어난 기우가 “의사 같지 않은 의사” “경찰 같지 않은 경찰”이라고 하는 장면의 대사에서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된 인간이 위선과 가식과 거짓에 빠져있는 단지 수단에 불과한 존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음을 알 수 있다.
4. 남궁 현자가 설계한 박사장 집과 양극화
과외 선생이 되려고 박사장 집에 면접을 보러 간 기우에게 집사인 문광은 불쑥 존경과 경배에 가까운 목소리와 표정으로 이 집은 “남궁 현자” 선생님이 설계하셨다고 한다. 문광이 “남궁 현자”를 존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남궁 현자”가 설계했다는 집의 구조를 살펴보면 햇빛이 많이 드는 밝고 세련된 2층 저택이지만 계단을 내려가면 숨겨진 좁은 복도에 변기 하나뿐인 지하실이 있다.
지하실은 남궁 현자가 설계할 때 사람이 살거나, 지하 건축에 합당한 재난에 대비한 대피소나, 창고 등의 용도로 설계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좁고 비좁은 통로처럼 설계된 것이 마치 아프리카에서 흑인을 사냥해서 미국으로 보내던 노예선의 내부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것이 근세가 머리로 리스펙트를 외치며 박사장이 2층으로 올라갈 때 켜주는 등이다. 이 장면은 남궁 현자의 설계가 보편적인 건축물을 계획하고 설계한 것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이다.
남궁 현자가 설계한 박사장 집은 감독이 생각하는 신자본주의를 관념적으로 상징화시킨 상징물임을 나타내고 있다.
겉으로 화려해 보이는 1등의 삶과 그 1등을 맹목적으로 존경하면서 인간성을 포기하고 상실한 채 목숨만 이어가는 노예보다 못한 나머지 사람들을 지하에 숨긴 양극화 구조가 신자본주의라고 봉준호 감독은 말하는 것이다.
지하에 숨어 사는 근세가 그것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충숙의 뒷발차기에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져 죽은 문광은 사실 계단이 죽인 것이다. 계단이 없었다면 문광은 충숙에게 뒷발차기를 당했을 뿐이다. 그러나 1등을 존경하고 신자본주의를 숭배하는 숙주인 근세는 충숙이 문광을 죽였다고 생각한다. 남궁 현자가 자본주의 구조로 계단을 만들어 놓지 않았다면 문광은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중에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채 미쳐버린 근세는 깨닫지 못한다.
처참하게도 바비큐 쇠꼬챙이에 찔려 죽어가면서도 근세는 박사장을 향해서 “리스펙트”라고 외친다. 박사장은 “나를 아시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이것이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게 먹혀서 뇌가 사라지고 오직 맹목적 숭배만 남은 21세기 참혹하고도 비극적인 숙주 인간의 모습니다. 개들이 달려와서 쇠꼬챙이에 남아있는 바비큐 고기를 뜯어먹는 장면에서 감독의 절규가 들린다.
이것은 반지하에 사는 기택네 역시 근세와 마찬가지로 결국은 지하에서 살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저택 외부에 설치해놓은 1837년 산업화 시작 시점의 통신 수단인 모스부호로 반짝이는 등 하나는 드디어 도달한 21세기 신자본주의 속에서 인간성을 상실한 채 미쳐, 스스로 멸망해 가는 인간에게 봉준호 감독이 보내는 마지막 소통과 호소와 자각의 메시지인 것이다.
5. 로르샤흐, 데칼코마니, 기생충
영화 기생충의 처음 제목이 로르샤흐였다고 한다. 두 번째 제목이 데칼코마니였고 최종적으로 기생충으로 확정되었다고 한다.
로르샤흐는 스위스 출신 정신분석학자이며 동시에 로르샤흐 검사법의 창시자다. 로르샤흐 검사법은 잉크반점 그림으로 정신분열증을 감정하는 방법이다. 잉크반점 그림은 데칼코마니와 흡사하다. 따라서 처음 제목이었던 로르샤흐나 데칼코마니는 영화로 관객 또는 인간의 정신분열증을 감정해주겠다는 감독의 의도가 포함된 것이다. 그런데 최종 제목은 “기생충”이 되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정신분열증은 이미 나타난 현상이다. 감독은 이미 나타난 현상보다 근본적인 이유를 드러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을 바꾼 것이다. 그래서 연가시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어서 연가시가 분비한 신경물질이 조종하는 대로 물가에 가서 스스로 자살하는 숙주, 꼽등이를 발견해 낸 것이고 따라서 최종 제목이 “기생충”으로 확정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기생충”을 최종 제목으로 정했지만 감독의 의도는 여전히 로르샤흐 검사법의 잉크반점 그림으로 영화를 만든 것임이 여실히 드러난다. 관객이 영화를 보는 것은 정신분열증 검사를 받는 것이고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정신병자라고 느끼지 못한다면 당신 역시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되어 인간성을 상실한 채 미쳐가는 숙주라는 사실을 자각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을 보는 관객 또는 신자본주의 속에 사는 모든 인간에게 간절하게 호소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하실에 갇힌 기택이 죽은 문광을 마당에 묻어 장사를 지내주고 또 “박사장아 미안하다.”라고 우는 장면이 나오는 이유다. 기택은 자신이 죽인 박사장과 그리고 죽은 문광도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미쳐가고 있던 숙주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고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극적인 현실 앞에 우는 것이다.
기우가 수석을 다시 냇물 속에 되돌려 두는 장면 역시 세상이, 인간이,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되어 미쳐가고 있음을 깨달았음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6. 인간성 상실, 미쳐가는 인간
박사장가족, 기택가족, 근세부부, 모두는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된 숙주들이다. 그런데 앞서 “남궁 현자”가 설계한 신자본주의에 포함되지 않은 기택가족이 그나마 감염의 심각성이 다소 덜하다. 기택의 반지하 낡은 액자 속에 가훈처럼 걸려있는 “안분지족”이 그것을 은유하고 있다. 그러나 박사장가족과 문광부부는 심각한 지경에 이르러 있고 그들은 이미 인간성을 상실하고 미쳐버린 인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물론 미래세대라고 할 수 있는 박사장의 딸과 아들 역시도 심각한 애정결핍에 빠져있고 그들 역시 절망적인 상황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영화를 끌고 가는 이 세 가족이 얼마나 인간성을 상실하고 미쳐 있는지 살펴보는 것이 동시에 이 영화를 보는 관객의 ‘자본주의라는 기생충 감염 지수’를 나타내는 것이기도 한 것일 터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각 인물들이 인간성을 상실한 채 미친 행동을 하는 장면을 보고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기생충 감염 지수가 그들과 같다는 것이 된다. 즉 관객 역시 미쳐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라는 경고다.
영화 기생충은 로르샤흐 검사임을 기억하시기 바란다.
*박사장 가족
박사장은 IT기업 사장이라는 1등의 삶을 살면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선은 언제나 위선과 거짓으로 감추고 있지만 1등인 나와 같을 수 없는 1등이 아닌 사람들이 넘어와서는 안 되는 경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계급의식으로 민주주의 기본 개념인 평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박애와도 배치되는 것이다.
나아가서 냄새가 선을 넘는다고 하는 지점에서 박사장의 인간성을 상실한 정신병적 현상을 보여준다. 인간은 누구나 냄새가 난다. 그리고 그 냄새가 에티켓을 넘어설 때 불쾌를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박사장이 말하는 냄새는 “전철을 타면 나는 냄새”다. 그 냄새를 불쾌해하는 것이 아니라 경멸한다. 서울로만 한정해서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의 시민들이 전철을 탄다. 물론 1등은 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1등인 자신 외의 사람, 즉 전철을 타는 다수의 사람은 사람도 아닌 수단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경멸의 대상인 냄새일 뿐이라는 말이 된다. 따라서 수단이고 경멸의 대상인 사람도 아닌 것이 1등인 자신에게 인간적인 접근을 해 올 때 박사장은 거짓과 위선으로 숨기고 있던 경멸의 분노를 드러낸다.
차 안에서 기택이 “그래도 사모님 사랑하시죠?”라고 물을 때와 마당 파티에서 다시 기택이 “사랑하시니까”라는 말을 할 때 박사장은 경멸의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박사장에게 기택은 인간이 아니라 수단이고 냄새일 뿐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사회 구성원인 인간을 인간이 아니라 수단으로 보고 경멸하기까지 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말살시키는 반민주적인 짓이다. 또한 자유, 평등, 박애를 짓밟는 인간 본연의 인간성을 상실한 행위이고 계급적 정신병을 드러내는 짓이라고 감독은 말하는 것이다.
박사장 아내는 아이들은 안자주지 않으면서 개는 품에 안고 다닌다. 엄마의 마음으로 세심하게 살피고 대화했다면 아들이 근세를 보고 기절했었던 사실을 알아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식을 사랑으로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병적 징후를 드러낸다.
그런 그녀가 아내의 역할, 엄마의 역할, 가정주부의 역할, 그 어떤 것에서도 시늉만 할 뿐, 제대로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녀의 삶마저도 행복하게 사는 척 시늉만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한 그녀의 거짓말과 가식과 위선은 일상적인 것이어서 기우에게 과외비를 챙겨주면서 돈을 빼고도 더 넣었다고 한다. 파티에 친구들을 초대하면서 선물 같은 거 사오지 말고 츄리링 입고 오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대로 한 사람은 없다.
그녀의 삶은 그녀의 삶이 아니고 1등인 남편에 맞춘 아내와 아이들의 엄마, 주부의 역할을 가식적으로 연기하는 껍데기뿐인 불안한 자아의 병적 정신 상태를 보여준다.
딸은 먼저 과외 선생이었던 민혁을 사랑했었던 듯하지만, 기우가 과외선생으로 오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진다. 역시 민혁도 기우도 자신의 사랑이라는 욕구를 채우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수석에 머리를 맞고 쓰러진 기우를 구해내기도 하지만 실낱같은 박애를 보여줄 뿐이다.
아들은 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아버지와 어머니 때문에 극심한 애정결핍을 겪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들은 오직 자본주의밖에 모르기 때문에 근세를 사람으로 알아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그가 보내오는 모스부호를 읽어도 구조적으로 그 의미를 해석해 소통할 수 없는 절망의 미래를 상징하기도 한다.
*근세 부부
문광은 유능한 집사처럼 보이지만 지하실에 남편 근세를 숨겨두고 있으면서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게 거짓으로 포장하고 있다. 기우에게 남궁 현자 선생님이 설계한 집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설명하면서 “지금은 애들 사는 집이지만” 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과 기우에게 그리고 기정에게 마치 주인처럼 행세하기도 하는 장면에서 자신이 오히려 박사장 가족보다 저택에 잘 어울리는 사람이고 또 우월하다는 생각을 보여준다. 그리고 잠든 박사장 아내를 손뼉을 쳐서 깨우는 장면에서 경멸이 보인다. 이것 역시 인간을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고 자신만의 가치관과 기준으로 구분지어 인간을 경멸하는 박사장과 다르지 않다.
CCTV 선을 자르고 나타난 후, 지하실에서 북한 노래를 부르면서 보여준 맹목적 신봉자의 모습은 병적 정신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불리한 상황에서 충숙을 언니라고 부르다가 상황이 유리해지자 곧바로 돌변해서 발작적으로 쌍욕을 퍼붓고 경멸한다. 그것은 인간성을 상실한 채 인간을 언제나 수단으로만 보는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병적 증세인 것이다.
근세 역시 1등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지하로 숨어들었다. “내가 여기서 태어나 살아온 것 같다. 결혼도 여기서 한 것 같다.”고 한다. 근세는 이미 인간성 상실의 상태를 지나 자아마저 사라져 오직 본능만 남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 문광의 보살핌을 받고 목숨을 이어가고 있지만, 신자본주의 1등인 박사장 덕분에 살아가고 있다는 맹목적 믿음과 존경으로 박사장을 숭배하기까지 하는 병적 정신상태다. 기생충인 신자본주의가 분비한 신경물질에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비극적이고도 처절한 21세기, 뇌가 사라져버린 숙주 현대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기택 가족
민혁이 들고 온 수석 때문에 기택 가족은 변화된다.수석은 앞서 남궁 현자가 설계한 박사장 저택과 마찬가지로 봉준호 감독의 관념을 상징화시킨 상징물이다.
이런 감독의 관념을 상징화시킨 또 하나 상징물은 짜빠구리다. 짜빠구리는 세 개의 계급을 상징하고 역시 그릇 안에 담겨 신자본주의의 먹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석은 돌이다. 돌이 수석으로 변하면 수억 원짜리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거대한 사기라고 감독은 말하고 있다. 신자본주의 신경물질에 마비되어 미쳐 버린 병적 현상이라는 의미다. 즉 수석은 신자본주의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목적만을 이루려는 반인간적이고 범죄적인 속성을 상징한다. 그래서 기택 가족은 그나마 반지하 벽에 걸린 “안분지족”이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의 준동을 막고 있었지만, 민혁이 가져온 수석으로 인해 돌변하고 만다.
감독은 신자본주의라는 기생충에 감염된 숙주가 되어버린 인간의 모습을 인간성을 상실한 채 미쳐가는 기택 가족을 통해서 더욱 세세하게 보여준다. 이런 기택 가족의 모습이 보편적인 21세기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연세대 재학증명서를 죄의식 없이 위조하는 재주를 보여주었던 기정은 기우의 소개로 학력, 경력 등을 속이고 이름까지 바꿔서 박사장 아들 미술 과외 교사로 들어간다. 또한 기택도 역시도 경력을 속이고 기정이 팬티를 벗어 젊은 기사를 쫓아낸 뒤 기사로 취직한다. 그리고 가족이 합작해서 집사 문광을 복숭아 알레르기를 이용해서 폐결핵이라고 속여 쫓아내고 충숙까지 집사로 취직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기택 가족 그 누구도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그것은 수석이 상징하는 신자본주의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오직 목적만을 이루려는 반인간적이고 범죄적인 속성 때문이다. 봉준호 감독은 이러한 관념적 사건 전개의 어색함을 블랙코미디 장르로 전환해서 상쇄시키고 있다.
마침내 모두 박사장집에 취직하게 된 기택 가족은 삼겹살 파티를 하고 기택은 “존경하는 박사장님을 위하여” 라고 말하기도 한다. 후에 죽어가면서도 박사장님 리스펙트를 외치는 근세와 닮아가는 것이다. 나아가 박사장 가족이 캠핑을 떠난 날, 기택 가족은 박사장 집이 자신들의 집인 양 술파티를 벌인다. 마치 장주네 “하녀들”의 역할 바꾸기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장면에서 기택 가족의 내면을 여실하기 드러내어 보여준다.
기정은 욕실에서 목욕을 하고 충숙은 마당에서 투해머던지기를 한다. 충숙이 던진 투해머는 주택가 다른 집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유리가 깨어지고 뭔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타인이 받는 피해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설사 타인의 죽음이라고 할지라도 상관없다. 때문에 자신의 뒷발차기로 문광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는 병적인 상태인 것이다.
기택은 술 파티 중에 발작적으로 충숙의 멱살을 잡기도 하고 급기야 술상 위에 놓인 것들을 바닥으로 쓸어버려 깨어져 박살이 나게 한다.
박사장 딸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우... . 모두 인간성을 상실해버린 병적인 정신 상태다. 이렇게 미쳐가는 기택 가족은 신자본주의 1등의 삶이 자신들의 것이 된 듯 즐거워한다. 이때 감독이 숨겨둔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된 인간의 본질적인 삶이 무엇인지 미쳐가는 그들에게 보여준다. 바로 문광의 등장이다. 기택 기족은 애써 부정하지만 비극적으로 목숨을 이어가는 지하실 근세의 삶 역시 1등이 아닌 기택 가족의 미래라고 충격적으로 알려주려는 것이다. 동시에 1등의 삶을 살고 있는 박사장 가족 또한 벗어날 수 없는 신자본주의 기생충에 감염된 발작적 멸망의 모습이라고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기택과 기정과 함께 박사장집에서 빠져나온 기우는 폭우가 내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계단에 서서 “민혁이라면 어떻게 했을까?”라고 자문한다. 그나마 “안분지족”이 조금 남아있기 때문이다. 민혁은 신자본주의 속성을 상징하는 수석과 다름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빗물에 침수된 반지하 집에서 수석이 물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재민들과 함께 체육관 바닥에 누워서 수석을 배위에 올려놓고 수석이 자꾸 자신에게 붙는다고 한다. 이것은 기우 내면에서 신자본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반인간적이면서 범죄적인 속성이 폭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다음날 기우가 박사장집으로 수석을 들고 가는 것이 이해가 된다.
마침내 자신의 앞길을 막는 근세 부부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감독은 냉정하게 다시 신자본주의 속성을 알려준다.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 수석이 굴러 떨어지는 것과, 근세가 두 번이나 수석으로 기우의 머리를 내려치지만 죽지 않는다. 그것은 신자본주의 속성은 죽음과 다름없는 상태로 영양분을 빨아먹을지언정 절대로 숙주인 인간을 직접 죽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만 기생충인 신자본주의가 뿜어내는 신경물질에 의해 숙주인 인간이 미쳐서 서로 죽이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기우가 수석을 물속으로 돌려주고 드디어 “근본적인 계획”을 세우게 된다.
기택 역시 1등이 되지 못한 까닭에 반지하집을 떠도는 무기력한 가장이다. 계획이 없으면서 계획이 있다고 수시로 거짓말을 한다. 수해로 반지하집이 물에 잠겨버려 체육관에 누워 잠을 청하면서 기택은 스스로 위기에 빠져있음을 느낀다. 그에게 남은 것은 근세와 비슷한 본능뿐이다.
다음날 박사장집 마당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인디언 놀이를 설명하는 박사장에게 수해로 집을 잃고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는데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해야 하는 분노의 본능을 숨기기 위해서 “사모님을 사랑하시니까 그러시는 거”라는 말을 하고 그 말에 기택이 선을 넘어오는 것이라고 생각한 박사장이 경멸의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는 것을 느낀다.
그때 근세가 뛰어들어 기정을 칼로 찌르고 충숙을 찾는다. 충숙이 격투 끝에 상처를 입으면서도 바비큐 쇠꼬챙이로 근세를 찌른다. 파티장은 피로 물들지만 박사장은 단지 기절만 했을 뿐인, 그러나 15분 안에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 아들을 안고 기택에게 차 키를 달라고 한다. 이 장면에 감독이 숨겨둔 중의적인 의미가 있다.
읽는 영화의 해석 측면에서 보면 기택의 입장에서 운전기사인 자신에게 박사장이 차 키를 달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박사장이 직접 운전하겠다는 것이고 기택이 운전할 수 없는 상황에 아니라는 점에서 기택을 더 이상 운전기사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미 이외에 그 무엇도 없다. 그래서 처음 박사장이 차 키를 달라고 했을 때 기택은 몹시 당황한 표정을 짓는다. 조금 전에 “일의 연장이라고 생각하라”고 했던 박사장이 차 키를 달라고 하는 것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 기택은 긴장한 채 꿈쩍 않고 박사장의 행동을 살핀다.
급기야 다시 차 키를 달라고 다그치는 박사장 말에 차 키를 던져주고 계속 박사장의 의도를 살피는 기택의 표정에 본능적인 불안과 분노가 복잡하게 뒤엉킨다. 결국 근세 몸에 깔려있던 차 키를 집어 들고 밖으로 뛰어나가려는 박사장을 보면서 기택은 ‘자신이 해고당했다’고 확신한다. 즉 밥줄이 끊어지는 절망적 순간을 다시 마주하게 된 기택은 발작적으로 박사장을 죽이게 된다.
7. 개연성의 결여와 천재 시인 이상의 치밀함
영화 기생충은 보는 영화의 관점으로 보면 이야기의 개연성 많이 결여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개연성의 결여를 장르 전환으로 관객이 눈치 채지 못하게 끌어간다. 때문에 2시간이 넘는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잠시도 관객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영화 기술 덕분이다. 그리고 이런 개연성의 결여 정도는 읽는 영화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을 훌쩍 뛰어넘고도 남는 주제 의식을 가지고 있어서 오히려 새롭고 눈부시다.
끝임 없이 이어지는 빛나는 상징과 은유의 대사들에 감탄하게 된다. 영화의 대사가 이토록 상징적일 수 있는 것은 오직 봉준호만이 보여주는 작업일 것이다.
리얼리즘으로 시작한 영화가 블랙코미디로 그리고 서스펜스 호러로 다시 리얼리즘으로 끝나지만 사실은 전체적으로 보면 주제를 전달하기 위한 관념적 환타지 영화인 것이다.
이것은 봉준호 감독이 만든 새로운 영화 장르라고 생각된다. 감독이 의도하는 주제를 전달하기 위해서 영화의 장르 변환은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자본주의체제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을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사회학적 철학적 존재방식의 영역까지 영화의 주제를 확장시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도발적으로, 영화를 보는 관객과 21세기 신자본주의 속에 살고 있는 인류에게 스스로의 정신 감정을 요구하는 외침이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정밀한 상징의 의미구조는 천재 시인 이상이 오감도에서 보여준 상징의 치밀함에 닿아있어서, 봉준호 감독을 놀라운 눈으로 바라보게 한다.
조금 걱정인 것은 “근본적인 계획”과 “안분지족”과 “기사식당”과 그리고 박사장집 마당 파티의 연관관계다. “안분지족”은 “기사식당”과 이어진다. 그것은 자유 평등 박애와 맞닿아 있고 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의 한 모습으로 보인다. 그러나 박사장집 마당 생일 파티는 자유 평등 박애와 “안분지족”과도 무관하다. 이런 장면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킨 것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봉준호 감독이 꿈꾸는 근본적인 계획이 “안분지족”과 “기사식당”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미래에 펼쳐질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세상의 모습을 다음 작품에서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영화 기생충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바로 이것이다.
“근본적인 계획을 세웠습니다. 아주 돈을 많이 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