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의 완성 가체(加髢) 1편
조선시대 패션은 화려했다.
남성은 수정을 잇댄 갓끈과 옥으로 만든 관자, 귀걸이로 꾸몄다.
여성은 풍성한 가체(加체) 와 絢爛한 비녀, 노리개로 治粧했다.
길고 화려한 갓끈, 높고 풍성한 加髢는 요샛말로 ‘패션아이템’이었다.
조선 시대 부녀자들이 성장(盛裝)할 때, 머리 위에 머리숱을 많아 보이게 하려고 덧붙여 올리는 딴 머리가 ‘가체(加髢)’이다.
흔히 ‘다래’ 또는 ‘다레’라고 하나 표준어는 ‘다리’이다.
한자로는 체라 하고, 월자(月子)라고도 한다.
조선시대 여성 패션의 완성은 ‘가체’였을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형편이 되면 반드시 장만해뒀다가 禮儀를 갖춰야 하는 자리에는 머리에 얹고 나갔다.
加髢는 머리 모양에 따라 다리를 머리에 붙이거나 위에 얹어 사용하였다.
종류로는 조짐머리, 얹은머리, 새앙머리, 어여머리, 대수, 큰머리, 첩지머리, 족머리 등이 있다.
가체는 兩班층만이 아니라 일반 서민층 부녀자에게도 크게 流行했으며,
좋은 다래로 땋은 머리를 틀어서 얹은 加髢를 행사나 명절에 한번 씩 사용하는 것을 큰 자랑거리로 여겼다.
조선후기 들어서 가체의 需要가 크게 증가하면서 가체의 價格도 천정부지로 치솟아서 가격대가 엄청난 奢侈品이 되었고,
최고 비싼 가체는 800냥에 달한 것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기와집을 두 채에서 수채 정도는 구입 가능하고, 노비를 수십 명씩 구할수 있는 金額이었다.
현대로 치면 최소 수십억 원에 달하는
奢侈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부녀자의 가체를 통해 그 집안의 경제사정을 가늠할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시의 여성들은 더 크고 무거운 가발이 더 아름답다고 생각하였다.
성종 때는 그 길이가 무려 1척(30.3cm)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머리 사치를 위하여 가산탕진
은 물론, 그 가체의 무게 때문에 시집오는 처녀가 혼례중에 혼절 하기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나이 어린 신부의 방에 시아버지가 들어오자 신부가 갑자기 일어나다 머리 무게에 눌려 목뼈가 부러진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가체를 마련하지 못한 집에서는 혼례를 치르고도 시부모 보는 예를 행하지 못하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국가 주요 행사시에 왕의 가족들이 착용할 가체제작에 필요한 머리카락을 각종 공출을 통해 강제 수집하는 등 백성의 불만을 초래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가체의 풍습은 통일신라시대에 이미 존재하였는데,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태평어람(太平御覽) 신라조 에 신라부인에는 미발(美髮)이 많고 길이가 길다고 하였으며, 《당서(唐書) 신라조》에도 아름다운 두발(頭髮)을 머리에 두르고 주채(珠綵)로 장식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머리 모양을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서는 오래 전부터 다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 성덕왕조 에 ‘미체(美髢)’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이 바로 다리이며, 신라의 명물로 외국에 輸出도 하였다.
또한 《당서 신라조》에 남자가 머리를 깎아 팔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가난한 자가 머리를 깎아 다리로 판 것으로 보인다.
다리란:
예전에, 여자들의 머리숱이 많아 보이라고 덧넣었던 딴머리.
패션의 완성 가체(加髢) 2편
고려시대에도 가체의 風習은 있었다.
具體的인 것은 알 수 없으나, 고려 말기에는 원나라의 영향도 받아 더욱 크게 성행하였다.
조선시대로 이어지면서 가체는 부녀자의 장식품으로 絕對的인 條件이 되었다.
성종실록에는 사람들이 고계(高髻:높은 상투)를 좋아하여 사방의 높이가 한 자가 된다고 하였는데, 이는 다리를 더하여 머리를 높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리를 이용하는 방법 또한 여러 가지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땋으면서 손가락 굵기의 다리를 반복적으로 넣어 길이와 부피를 연장하는 방법이 있으며, 이런 모습은 신윤복의 그림 <계변가화溪邊佳話>에 잘 나타나 있다.
또 다른 방법은 아예 땋거나 쪽진 모양으로 만든 가체를 자신의 머리카락 위에 얹거나 덧붙여 고정하는 것이다.
이런 가체는 끝부분을 20~30쯤 남기고 紫朱色이나 검은색의 가느다란 댕기를 넣어 함께 땋은 뒤에 模樣을 整理한다.
다리에 댕기를 넣어 땋으면 짧은 머리카락이 가장자리로 튀어나와 흩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끝부분에 머리카락이 뭉툭하게 남지 않아 본래의 머리채에 붙여 마무리하기가 쉽다.
1788년(정조 12년) 가체신금절목이 시행된 이후에는 머리카락 대신 나무로 만든 떠구지나 머리카락과 옷감을 엮어 만든 다리가 사용되기도 했다.
조선 중기부터 가체의 사치가 심해 영조 32년(1756년) 1월에는 『사대부 집안의 가체 제도가 날로 사치가 심해져 부인이 한번 가체를 하려면 많은 돈을 허비하게 되었다.(朝鮮王朝實錄 英祖 32年 1月)』는 기록이 있다.
그리하여 영조 때는 가체를 금하고 족두리로 대용하게 하는 가체금지령을 내려 이를 바로잡고자 하였으나 예장할 때 꾸미는 머리 模樣에 계속 가체가 사용되는 등 금체령의 완전 실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정조 12년(1788년)에는 『처음에는 두발(頭髮)을 모으던 것이 무거운 머리꾸밈으로 이루어져, 다투어 서로 크게 만들어서 물가가 올라가고,
사치스러운 자는 그 가산이 기울어지며 가난하고 窮塞한 자는 인륜을 폐함에까지 이르렀으니 그
弊端이 극도에 달한 것이다.
(朝鮮王朝實錄 正祖 12年 4月 辛卯)』 하여 《가체신금절목(加申禁節目)》을 제정하게 하였다.
정조는 왕명으로 가체 사용을 금지하면서 머리를 꾸미고 싶으면 가체 대신 족두리를 쓰라고 했다,
사대부의 妻妾과 閭閻의 부녀는 가체는 물론 본머리에 다리를 보태는 것도 금지하고, 천한 신분의 여인은 머리를 얹는 것은 허용하되 다리를 드리거나 더 얹는 것을 금하는 내용의 금지령을 내렸으나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다가 순조 때에 이르러 비로소 대례식 한정으로 착용하게 된다.
왕실 여인들은 생일 연회와 대례식 이외의 일상이나 소례 때는 첩지를 두르고, 그 첩지 위에 화관이나 칠보족두리를 썼으며, 궁녀들은 민족두리를 썼다.
양반가 여인들 역시 얹는 가체 대신 이어붙이는 가체로 쪽을 지고, 비녀와 뒷꽂이로 머리를 화려하게 장식하여 이를 代替했다.
패션의 완성 가체(加髢) 3편
19세기 들어 양반 階級의 여성들은 족두리를 쓰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가체의 대용품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기생들은 계속해서 가체를 사용하였다.
여러 가지 장식을 包含한 가체의 무게는 보통 3~4kg정도이다.
史劇에 출현하는 여배우들이 가체의 무게에 따른 고통을 토로하기도 한다.
가체가 비싼 건 일단 가장 중요한 재료인 머리카락부터도 특정 지역 남자들이 몇 년 간 잘 관리하며 길렀다가 팔았는데 그래야만 품질이 좋은 가체 재료가 되었다고 한다.
가체는 진짜로 급한 일이 아닌 한 여자들이 목숨만큼 귀한 자기 머리를 잘라 파는 일은 드물었고, 대부분 남자들이 머리를 잘라 팔았다고 한다.
공급도 적지만 松津, 연지, 소금, 참기름 등 다양한 성분 분말로 만든
溶液에 收去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고 脫色했다.
당연히 이것도 며칠이 걸린다. 곱슬머리와 직모, 갈색과 검은색 등 모질과 색이 제각각이었기에 따로따로 검정색으로 脫色해야 했다.
가체는 ‘가체장’이라고 불리우는 장인들이 만드는데, 워낙 비싸고 재료비부터도 비싸기에 비싼 가체를 만들자면 30년 이상 경력를 인정받은 고수 장인들의 전문 지식과 기술이 필요했다.
66세 영조와 15세 정순왕후의 혼례를 기록한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에 따르면, 가체를 만드는 가체장은 당주홍, 홍합사, 황밀, 송진, 주사, 마사, 홍향사, 소금, 참기름 등 다양한 성분의 분말로 만든 溶液에 收去한 머리칼을 담가 곧게 펴고 탈색하여 머리카락을 손질했다.
조선 남성은 상투를 맵시 있게 틀려고 정기적으로 정수리를 깎았다.
이를 ‘베코친다’ 고 불렀다.
남성은 ‘베코를 쳐’ 맵시를 더했고,
여성은 그 머리카락으로 가체를 얹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가체를 만드는 데는 죄인이나 僧侶의 머리카락도 썼다.
가체는 단순히 빗으로 빗고 길게 잇대며 땋는 게 아니었다.
이른바 검은 구름처럼 풍성하면서 윤기 흐르는 가체를 만들려면 다양한
溶液을 다루는 기술과 함께 유행에 맞춰 땋는 기술도 필요했다.
먼저 빗으로 가지런히 빗어 머리 타래를 만들었다.
이어 ‘말이 쓰러지는 듯’ 기운 모양새로 땋아 촛농으로 고정했다.
이렇게 기본 모양새를 잡은 뒤 光澤을 내면 검은 구름처럼 풍성하면서도 윤기 흐르는 가체가 완성됐다.
가체는 체괄전(가발전문매장) 에서 팔거나 여쾌(뚜쟁이) 수모(手母:미용사) 가 방문 판매했다.
가체는 고가에 거래됐다.
재료가 귀했고 水準높은 製作기술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크기 경쟁까지 더해 가격 상승을 부채질했다.
갈수록 높고 풍성한 가체가 유행하자 커진 크기만큼 가격은 치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