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두천(東豆川)⸱ Ⅰ
김명인
기차가 멎고 눈이 내렸다 그래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신호등
불이 켜지자 기차는 서둘러 다시 떠나고
내 급한 생각으로는 대체로 우리들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리라 혹은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에 파묻혀 흐려지면서
우리가 내리는 눈일 동안만 온갖 깨끗한 생각 끝에
역두(驛頭)의 저탄 더미에 떨어져
몸을 버리게 되더라도
배고픈 고향의 잊힌 이름들로 새삼스럽게
서럽지는 않으리라 그만그만했던 아이들도
미군을 따라 바다를 건너서는
더는 소식조차 모르는 이 바닥에서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캄캄한 어둠 속으로 흘러가게 하느냐
바라보면 저다지 웅크린 집들조차 여기서는
공중에 뜬 신기루 같은 것을
발 밑에서는 메마른 풀들이 서걱여 모래 소리를 낸다.
그리고 덜미에 부딪쳐 와 끼얹는 바람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은 알 수도 없지만
아무것도 더 이상 알 필요도 없으리라
안으로 굽혀지는 마음 병든 몸뚱이들도 닳아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 이제 벗어날 수 없어도
나는 나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떠나야 되돌아올 새벽을 죄다 건너가면서
(시집 『동두천』, 1979)
[작품해설]
김명인의 시 세계를 관류하는 시적 원리를 한 마디로 말하면 추억이다. 그러나 그의 추억은 아름다운 과거보다는 고통스러운 기억에 가깝고, 과거의 것이면서도 오늘 속에 선명하게 남아 그의 존재를 구속한다. 상처 난 과거로서의 추억이라 하더라도 평생 동안 가슴에 묻어 두고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로서는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어 치유하려 한다. 그의 얼룩진 추억은 6.25와 아버지라는 두 가지 어둠으로 대별된다. 전쟁 속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로서는 전쟁으로 훼손된 유년의 체험을 형상화하는 한편, 전쟁이라는 극한 공간 속에서 보호받지 못한 과거의 기억은 아버지로 상징된 절대성에 대한 부정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러한 두 가지 어둠은 그의 시를 공간적으로는 변두리 선호 경향을 드러내게 하며, 의식면에서는 서민 또는 하층 민중 지향적 경향을 띠게 하였다. 그의 초기시의 대표작인 「동두천」 ⸱ 「켄터키의 집」 ⸱ 「베트남」 ⸱ 「어우시비쯔」 ⸱ 「영동행각(嶺東行脚)」 등의 시편들이 모두 그 같은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대학을 마친 직후 동두천의 어느 고등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할 때 만났던 무수한 혼형아들을 떠올리며 지은 작품으로, 동두천역(驛) 저탄(貯炭) 더미에 내려 쌓이는 눈을 통해 혼혈아와 같은 소외된 인간의 설움을 형상화하고 있다. 유년의 전후 폐허 속에서 자연스럽게 배태된 허무 의식과 유신 체제라는 1970년대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서 형성된 절망적 현실 의식이 작품에 투영됨으로써 이 시는 과거의 어두운 기억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도 캄캄한 어둠으로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의 시적 배경인 동두천은 우리 민족에게 일종의 상처와도 같은 도시이다. 동족 간의 비극적인 전쟁에 개입했던 미국 군대가 머무르고 있는 그곳엔 그들을 상대로 몸을 팔아 살아가는 여자들이 있으며, 그들 사이에서는 약소민족의 슬픔을 자신의 운명으로 안고 혼혈아라는 이름의 불행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시인은 그 도시에서, 그것도 떠나가는 사람과 남는 사람의 운명을 표상하는 기차역에서 저탄 더미에 떨어져 내리는 눈을 바라다본다. 신호등이 바뀌자 서둘러 떠나가는 기차를 보면서 인생도 저렇게 ‘어디론가 / 가고 있는 중’이라는 상념에 잠겨 있다가, 혹시나 군중에서 ‘떨어져 남게 되더라도 / 저렇게 내리면서 녹는 춘삼월 눈’처럼 ‘파묻혀 흐려’질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눈이 아무리 깨끗하다 할지라도 ‘내리는 눈일 동안만’ 깨끗할 뿐, 떨어져 녹는 순간 석탄과 구분되지 않는 진창의 검은 물이 되어 흐르는 것을 발견한 그는 결국 제 아버지들을 따라 바다를 건너가게 될 혼혈아들의 운명이 바로 그와 동일함을 깨닫게 된다. 낯선 나랄 험한 세상에서 그들이 어린 날의 순수함을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을 ‘첩첩 수렁 너머의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이 땅이야말로 절망적인 진창길임을 알고 있는 시인은 마침내 그들과 하나가 되어 ‘더러운 그리움이여 무엇이 / 우리가 녹은 눈물이 된 뒤에도 등을 밀어 / 캄캄한 어둠 속에서 흘러가게 하느냐’라고 부르짖는다. 여기에서 ‘그리움’이란 좀더 순수하고 인간적인 삶에 대한 희망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것이 ‘더럽다’는 것은 그 희망이 늘 우리를 배반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처음엔 ‘눈’처럼 순수했던 우리였지만, 그리움에 현혹되어 진흙탕의 눈물이 되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욕망에 이끌려 현실을 ‘신기루’처럼 여기며 ‘캄캄한 어둠 속에서’ 어디론가 흘러가게 되는 막막한 존재의 설움을 노래한 것이다.
그런데 이 ‘눈물’은 중의적 의미로, 눈이 녹은 물인 동시에 시인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이다. 그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그가 순수한 사람임을 알게 하는 행위이지만, 이 눈물도 역시 눈 녹은 물처럼 ‘맨살로 끌려가는 진창길을 벗어날 수 없’다. 한편 자신의 순수한 시가 맞이하게 될 운명도 결국 그와 같은 것임을 알고 있는 그는 마침내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을 지나’ 현실의 진창가지도 다 건너야 비로소 순결한 새벽으로 돌아올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다시 말해, 순수한 눈이 녹아 떨어지는 이 진창과, 자신의 순수한 시가 미래을 두려워하지 않고 끌어안아야 하는 그 어두움이야말로 새벽으로 상징된 순수한 인간적 삶에 다다를 수 있는 유일한 의례임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작가소개]
김명인(金明仁)
1946년 경상북도 울진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과 및 동 대학원 졸업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출항제(出港際)」가 당선되어 등단
1976년 김창완, 이동순, 정호승, 김성영 등과 ‘반시(反詩)’ 동인
1992년 제3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1992년 제7회 소월시문학상 수상
1995년 제8회 동서문학상 수상
2000년 제45회 현대문학상 수상
2001년 제13회 아산문학상 수상
현재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시집 : 『동두천(東豆川)』(1979), 『머나먼 곳 스와니』(1988), 『물 건너는 사람』(1992), 『푸른 강아지와 놀다』(1994), 『바닷가의 장래』(1997), 『잠들지 못하는 희망』(1997), 『길의 침묵』(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