雪曉설효
梅月堂매월당
我似袁安臥雪時。아사원안와설시
小庭慵掃捲簾遲。소정용소권렴지
晚來風日茅簷暖。만래풍일모첨난
閑看前山落粉枝。한간전산락분지
내가 袁安처럼 눈에 누워있어
조그마한 뜰도 쓸기 싫고 발마저 늦게 걷는다.
늦어 부는 바람과 해에 草家 처마 따뜻해져
閑暇히 앞山을 보니 나무가지에서 떡가루가 떨어진다.
袁安원안=원안(袁安, ? ~ 92년 4월 9일)은 후한 전기의 관료로,
자는 소공(召公)[1]이며 예주 여남군 여양현(汝陽縣) 사람이다.
원안 자신을 포함하여 4세대에 걸쳐 삼공을 배출한
후한의 명문가 여남 원씨(汝南 袁氏)의 시조이다.
조부 원량(袁良)은 맹씨역(孟氏易)을 배운 유학자로, 전한 평제 때
태자사인(太子舍人)을 지냈으며 광무제가 후한을 일으킨 후
성무령(成武令)을 지냈다. 원안은 원량으로부터 가학(家學)인
맹씨역을 배워 유학자로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원안은 처음에 현의 공조(功曹)를 지냈으나, 영평 3년(60년)에 효렴으로
천거되어 낭중(郞中)에 임명되었다.[1]
효렴에 천거되었을 때의 일화가 다음과 같이 전해지고 있다.
원안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던 때에 눈이 많이 내려 굶주리게 되었는데, 원안은 집에 혼자 틀어박혀 잠을 잤다.
이따금 저잣거리를 시찰하던 현령이 눈을 치우지 않은 집을
발견하고는 굶어 죽은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을 치우고 집 안으로 들어갔는데, 그 집은 원안의 집이었다
. 현령은 원안에게 왜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구하지 않느냐고 물었는데,
이에 원안은 큰눈으로 사람들이 곤경에 처했으니 밖에 나가면
폐를 끼치게 된다고 대답하였다. 이에 감복한 현령은 원안을 효렴으로 천거하였다.
관계에 진출한 원안은 음평장(陰平長)·임성령(任城令)을 차례로 지냈다
.[1] 이때 엄중하고 공정한 정치를 펼쳐 사람들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다.
원안의 아들 원창은 사공에 올랐으며,
원경(袁京)의 아들 원탕은 사공과 사도를 거쳐 태위까지 지냈다.
원탕의 아들 원봉과 원외 또한 삼공의 지위에 올랐다.
후한 말의 군벌 원소와 원술은 원탕의 손자이다.
한편, 원안을 기리는 비로 전서로 새겨진 《원안비》(袁安碑)가 있다.
慵=게으를 용
遲=더딜 지.
茅簷모첨=초가의 처마
雪曉. 1
滿庭雪色白暟暟 ~ 뜰에 가득한 눈빛은 희고 아름다운데 (䁗. 밝을 개)
瓊樹銀花次第開 ~ 玉나무 銀빛 눈꽃이 차례로 피어나는구나.
向曉推窓頻著眼 ~ 새벽 되어 窓門 열고 자주 눈을 돌리니
千峰秀處玉崔嵬 ~ 一千 봉우리 빼어난 곳에 玉이 높게도 쌓였구나.
雪曉. 2
我似袁安臥雪時 ~ 내가 袁安처럼 눈에 누워있어
小庭慵掃捲簾遲 ~ 조그마한 뜰도 쓸기 싫고 발마저 늦게 걷는다.
晩來風日茅簷暖 ~ 늦어 부는 바람과 해에 草家 처마 따뜻해져
閒看前山落粉枝 ~ 閑暇히 앞山을 보니 나무가지에서 떡가루가 떨어진다.
雪曉. 3
東籬金菊褪寒枝 ~ 東쪽 울타리에 金菊花의 褪色된 울타리
霜襯千枝个个垂 ~ 서리 內衣를 千 가지에 하나하나 널어 놓았다.
想得夜來重壓雪 ~ 생각건데 밤동안에 무겁게 눌린 눈
從今不入和陶詩 ~ 이제부터 陶淵明의 和陶詩에도 들지 못한다.
원문출처=梅月堂詩集卷之四 / 詩○雨雪
雪曉。三首。
滿庭雪色白皚皚。瓊樹銀花次第開。向曉推窓頻著眼。千峯秀處玉崔嵬。
我似袁安臥雪時。小庭慵掃捲簾遲。晚來風日茅簷暖。閑看前山落粉枝。
東籬金菊褪寒蕤。霜襯千枝个个垂。想得夜來重壓雪。從今不入和陶詩。
ⓒ 한국고전번역원 | 영인표점 한국문집총간 | 19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