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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묵상글(강론글)
12일 묵상글, 11일 22시 30분에 1차분 올립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05시전에 2차분,
8시이후 가능시간에 3차분으로 나누어 공유할 계획입니다.
5월 10일 공지로 게시한 바와 같이, 제가 묵상글을 먼저 읽은 후 공유하는 것이오니
이 곳에 오시는 분들은 공지 취지에 따라 판단하시고 이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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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05월 12일 화요일
[부활 제6주간 화요일] 보호자를 보내겠다 (요한16,5-11)
제1독서<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사도16,22-34)
필리피의 22 군중이 합세하여 바오로와 실라스를 공격하자, 행정관들은 그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고 지시하였다.
23 그렇게 매질을 많이 하게 한 뒤 그들을 감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단단히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24 이러한 명령을 받은 간수는 그들을 가장 깊은 감방에 가두고 그들의 발에 차꼬를 채웠다.
25 자정 무렵에 바오로와 실라스는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며 기도하고, 다른 수인들은 거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26 그런데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즉시 문들이 모두 열리고 사슬이 다 풀렸다.
27 잠에서 깨어난 간수는 감옥 문들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다. 수인들이 달아났으려니 생각하였던 것이다.
28 그때에 바오로가 큰 소리로, “자신을 해치지 마시오. 우리가 다 여기에 있소.” 하고 말하였다.
29 그러자 간수가 횃불을 달라고 하여 안으로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면서 바오로와 실라스 앞에 엎드렸다.
30 그리고 그들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두 분 선생님, 제가 구원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31 그들이 대답하였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32 그리고 간수와 그 집의 모든 사람에게 주님의 말씀을 들려주었다.
33 간수는 그날 밤 그 시간에 그들을 데리고 가서 상처를 씻어 주고, 그 자리에서 그와 온 가족이 세례를 받았다.
34 이어서 그들을 자기 집 안으로 데려다가 음식을 대접하고, 하느님을 믿게 된 것을 온 집안과 더불어 기뻐하였다.
복음<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16,5-11)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5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6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7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8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9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10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11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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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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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6,5–1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리고 이어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하십니다.
이 말씀은 처음 들으면 낯설고 어렵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떠나시는 것이
어떻게 제자들에게 이로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부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현존의 길을 열고 계십니다.
그 길이 바로 성령의 오심입니다.
대 바실리오는
성령을 단지 위로를 주는 힘이 아니라
진리를 밝히고 생명을 거룩하게 하는 하느님의 현존으로 보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흩어진 생각을 모으시며,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오심은
어떤 분위기나 감정의 고조가 아니라
존재의 중심이 다시 하느님께 향하도록 바로잡히는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하여 세상이 잘못 생각하는 것을 밝히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죄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먼저
“사람들이 나를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죄는
단지 도덕적 실패 하나하나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근원적으로는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을 믿지 않고
자기 자신만으로 살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입니다.
그 불신이
다른 모든 왜곡을 낳습니다.
대 바실리오는
하느님을 떠난 인간의 혼란을
질서를 잃은 영혼의 상태로 보았습니다.
성령은 바로 그 혼란을 드러내시고
다시 질서 안으로 이끄십니다.
성령께서 죄를 드러내신다는 것은
우리를 짓누르기 위한 폭로가 아니라
병든 곳을 정확히 보여 주시는 치유의 빛입니다.
숨기고 덮는 동안에는 회복이 시작되지 않지만
빛 안에 드러날 때
비로소 다시 살아날 길이 열립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의로움에 관하여 말씀하십니다.
당신이 아버지께 가시고
사람들이 더 이상 당신을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의 길이
세상의 실패가 아니라
아버지께 향한 의로운 길임을 뜻합니다.
세상은 외적으로 드러난 힘과 성공을 의로움으로 여기지만
하느님께서는
순종과 사랑,
끝까지 진실한 길 안에서 참된 의로움을 드러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이 하느님의 기준을 다시 세워 주십니다.
심판에 대해서는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이는 악이 최종 승자가 아니라는 선언입니다.
거짓과 폭력,
교만과 자기기만이
세상에서 잠시 힘을 얻는 것처럼 보여도
이미 그 근원은 심판받았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악의 소란에 압도되지 않고
하느님의 승리를 믿도록 도우십니다.
그래서 성령의 분별은
두려움을 줄이고
용기를 줍니다.
아낌 주간의 관점에서 보면
오늘 복음은
무엇을 아껴야 하는지 더욱 분명히 보여 줍니다.
우리는 마음의 맑음을 아껴야 하고
양심의 예민함을 아껴야 하며
진리를 향한 갈망을 아껴야 합니다.
아낌은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는 무방비가 아니라
무엇이 내 영혼을 흐리게 하는지 알고
거기에서 자신을 지키는 지혜입니다.
성급한 말,
자기합리화,
겉모양만 따르는 판단,
쉽게 휩쓸리는 감정 낭비를 줄일 때
성령의 빛이 더 또렷해집니다.
오늘 화요일 성령의 날에
우리는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믿고 있는가?
주님인가,
내 계산인가,
세상의 기준인가?
내 안에서 성령께서 드러내고 계신 죄와 거짓을
겸손히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참된 의로움을
성공이 아니라 하느님께 대한 충실함에서 찾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오늘도
성령을 보내시어
우리 안에 진리의 감각을 다시 살려 주십니다.
주님,
성령께서 제 안을 밝히시어
거짓을 거짓으로,
진실을 진실로 보게 하소서.
성급한 판단과 자기기만을 덜어 내게 하시고
무엇이 죄이고 무엇이 의로운지
당신 안에서 분별하게 하소서.
아낌의 지혜 안에서
맑고 단단한 양심을 지키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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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매일 아침 산책길에 새 소리를 듣습니다. 요즘은 좋은 앱이 있어서 새 소리를 녹음하면 새의 이름과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냥 듣던 때도 좋았지만 새의 모습을 알 수 있으니 더 좋았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땅을 기어다니는 작은 벌레를 봅니다. 발을 조심해서 걷게 됩니다. 혹 저의 실수로 벌레를 밟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벌레는 그런 줄도 모르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천천히 기어가고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작은 벌레를 잡기 위해서 바라보는 참새가 있습니다. 그 참새를 잡으려는 매가 있습니다. 그 매를 잡으려는 포수가 있습니다. 돌아보면 내가 보는 세상이 전부인 것 같지만, 늘 더 넓고 더 깊고 더 큰 세상이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어릴 때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학생이 되면서 나라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직장에 다니면서 회사를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가정을 이루면서 가족을 바꿀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결국은 나 자신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는 걸 알게 됩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근 무력증으로 투병 중인 형제와 함께 부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봉사자들과 함께 병원에 찾아가서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작년처럼 병원에서도 기꺼이 미사 봉헌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습니다. 이제는 손도, 발도 사용할 수 없는 형제님이지만 밝은 모습으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챗지피티, 제미나이, 클라우드, 그록을 이야기했더니 형제님은 그런 도구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거라고 했습니다. 형제님은 주로 클라우드를 사용한다고 합니다. 움직일 수 없고, 홀로 병원에 있어야 하는 형제님에게 인공지능은 세상과 연결해 주는 다리와 같습니다. 대화할 수 있는 친구와 같습니다. 그날 미사에 참례한 분 중에 수녀님을 제외하면 모두가 인공지능을 활용하고 있었습니다. 저도 인공지능인 챗지피티를 자주 활용합니다. ‘글로벌 엔트리’를 신청할 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신용카드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마치 길을 안내해 주는 도우미처럼 제가 질문하면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10번을 물어도 친절하게 답해줍니다. 답변은 물론 다른 해결책도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진리의 성령입니다. 진리의 성령께 의탁하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이 밝혀질 것이라고 이야기하십니다. 세상의 그릇된 기준은 무엇입니까? 부정한 여인을 돌로 치려고 했던 단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는 이들이 먼저 돌을 던지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부정한 여인의 죄를 묻지 않고 용서해 주셨습니다. 의로움을 독점하려고 하는 권위주의입니다. 의로움은 권위주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의로움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는 봉사에서 드러납니다. 십자가를 지는 희생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한 빌라도의 심판은 불의한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남의 눈에 있는 작은 티를 보기 전에 내 눈에 있는 큰 들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당당하게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님을 믿으시오. 그러면 그대와 그대의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이오.” 꽃은 피었다 지기 마련이고, 사람은 나올 때가 있으면 들어갈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역사는 혼자서 모든 것을 하려 했던 사람들 때문에 본인은 물론 공동체가 수렁에 빠지는 것을 반복해서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때가 다 될 것을 예감하십니다. 구원의 역사에 또 다른 협조자가 올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바쳐서 함께 했던 제자들을 떠나야 하고, 하느님 나라 운동에서도 떠날 때가 되었음을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주님의 ‘비움’이 바로 참된 자유의 시작입니다.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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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권순호 알베르토 신부님
홍상수 감독의 “북촌 방향”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참 난해합니다. 뚜렷한 줄거리도, 인과 관계도 없습니다.
제목도 그렇습니다. 대체로 ‘북촌 방향’이라고 하면 ‘북촌으로 향하는 방향’을 이야기할 터인데, 이 영화는 ‘북촌에서 가리키는 방향’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정해진 목적지 없이 그저 방향만 있을 뿐이지요. 많은 현대인의 삶이 그렇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고, 세상의 바람이 부는 대로 살아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요한 16,5).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러나 어디로 가시는지는 여쭙지 않습니다. 방향만 있고 목적지는 없는 것이지요. 방향은 그 순간의 선택일 뿐입니다.
그러나 목적지에는 의도가 있습니다. 멀리 보고, 계획하며, 마침내 도달하려는 곳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떠나신다는 것만 느낄 뿐, 목적지는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16,7)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예수님께서 떠나시면서 보호자 성령을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하느님 나라라는 목적지로 이끄십니다.
성령의 바람을 따르는 그리스도인은 정처 없이 세상의 바람을 따르는 이들과 다릅니다.
우리도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성당에 가기는 하지만 왜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세상 사람들처럼 순간의 감정이나 순간의 욕구를 좇아 살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하루 성령의 날개를 달고, 하느님이라는 목적지를 향하여 날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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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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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승천과 성령의 파견을 예고하시는 장면이고, <뒷부분>은 세상에 대한 성령의 역할에 대한 말씀입니다. <뒷부분>은 내일 복음과 함께 보도록 하고, 오늘은 <앞부분>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승천을 암시하십니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요한 16,5)
이는 ‘당신이 파견 받아 오셨다’는 것과 ‘사명을 마치실 때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러나 당신이 떠나간다는 말에 제자들의 마음은 근심이 가득 찼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보호자’이신 성령의 파견에 대해서 거듭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요한 16,7)
왜 꼭 당신이 가셔야만 그분을 보내시는 것일까?
그것은 마치, ‘어제가 가야 오늘이 오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시간이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함께 있으면서도, ‘오늘’을 통하여 어제도 내일도 드러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성령께서 같이 계실 수가 없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그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우리의 눈이 ‘영적으로’ 열리게 되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보호자 성령’으로 눈이 더욱 밝아질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만물을 지으시고 구원하실 수 있으시지만 아들을 통하여 그것을 이루시면서 아들을 드러내시듯이, 예수님께서도 모든 일을 이루실 수 있지만 성령의 존귀함을 드러내시기 위하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곧 삼위일체 하느님 사랑의 특성으로, 자신 안에서 자신이 아닌 타자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곧 ‘아버지께서’는 아들과 성령을 드러내시고, ‘아들’은 아버지와 성령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아버지와 아들을 드러내시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 그분을 사랑한다면, 우리 안에서 우리 자신이 아닌 우리 안에 계신 그분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요한 16,7)
주님!
보는 것, 아는 것에 매여 있는 저를 부수소서.
제 눈을 비추시어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시고,
제 자신에게 매이지 않는 당신 영을 보게 하소서.
저를 부수고 당신을 드러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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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6.05.12 05:24
-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중생에게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오늘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 가신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이 어디로 가시는지 묻지 않는다고 나무라시는 것인지
서운해하시는 것인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 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주제를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중생’이라고 정해봤습니다.
중생(衆生)이란 한자어를 그대로 풀이하면 많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불교에서는 아직 깨닫지 못한 많은 사람이고 그래서 구제 대상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중생이라고 한 것에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는 사람은 구제 대상이라는 뜻이 숨어있습니다.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고 사는 인생은 두 부류입니다.
어디로 떠날 생각이 없는 안주적(安住的) 인생이거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지 않고 그저 방황하고 표류하는 인생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떠날 생각이 없는 안주적 인생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이어 하시는 말씀을 보면 제자들 마음이 근심으로 가득하다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가시는 쪽(방향)에 관한 관심은 없고,
주님이 떠나시고 난 뒤의 여기에 관한 관심밖에 없고
주님이 떠나시고 난 뒤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근심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 가신다며 가시는 방향을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주님께서 자기들을 떠나시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여 제자들은 주님께서 제시하신 방향을 놓치고 잃는 것입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는데 그곳을 보지 않는 것이고,
가리키는 사람을 보거나 자기만 보거나 하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주님 떠난 뒤 살 근심이나 하는 제자들에게 주님께서는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 오히려 이롭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이 떠나시는 것이 이롭다고 하시는데
이로움의 기준이 분명 제자들의 생각과 다릅니다.
제자들의 생각과 다르기에 이롭다고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다르지 않다면 굳이 떠나시는 것이 이롭다고 말씀치 않으셨겠지요.
그렇다면 왜 주님이 떠나시는 것이 이롭습니까?
실은 주님이 떠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식의 현존입니다.
다른 식으로 제자들과 함께 계시는 것이고,
이름하여 초월적 내재(內在)입니다.
이제까지 함께 계시던 방식을 초월하는 함께 계심이고
육화적 임마누엘이 아니라 초월적 임마누엘이십니다.
성령께서 오시면
제자들에게 이것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나누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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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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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숨영성 묵상글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우리를 삶의 배움의 과정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계서는 마치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손님처럼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긴 하지만 우리의 본성을 취하시어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삼종기도를 바칠 때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시도다!" 하고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하고 말씀하시며,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Advocate)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요한 복음에서 파라클리토(Paraclete)는 곧 예수님의 지속적인 현존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현존이 성령의 오심을 방해할 수 있을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성령, 곧 보호자는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하실 것"이라 하셨습니다(요한 14,26). 예수님은 눈에 보이는 현존을 거두시지만, 그분의 영은 우리와 함께 머무십니다.
스승은 누구나 다 언젠가는 꼭 물러서야 합니다. 스승이 늘 곁에 머무른다면 제자인 우리는 독립심, 내적 용기, 위험을 감수하며 배우는 힘을 얻지 못합니다. 부모 역시 자녀를 위해 물러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강한 성격의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가 오히려 수동적이고 허약하게 성장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도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신뢰하시며, 실수를 하더라도 외부에서 통제하지 않고 내적으로 영감을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강력한 지도자를 볼 때마다, 그의 지도력이 그를 따르는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는 "형제들을 굳건히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외향적 성향의 맹점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실수를 하더라도 우리를 신뢰하시는 지혜를 지니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외부에서 우리를 억누르려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적으로 우리를 고무하시며 성령 안에서 자유롭게 살도록 이끄십니다.
어쨌든 주님의 이 말씀, 즉 당신께서 우리 곁을 떠나신다는 말씀은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주님을 잃을 것이라는 말씀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을 잃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은 곧 예수님의 영이십니다. 오히려 그분은 육신적 현존으로 우리 곁에 계실 때보다 더 친밀하게 우리 내면에 머무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선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 내면에서 길 자체로 거하시면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마치 자동차 운전을 배울 때 운전을 가르치는 사람이 운전을 배우는 사람에게 어느 정도 운전에 대해 가르쳐 준 다음 운전대를 배우는 사람에게 내 주고 그가 스스로 운전할 수 있도록 함께 차 안에 머물러 주는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스스로 이 여정을 해나갈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시기는 하지만, 우리 내면에 깊이 거하시면서 우리의 길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얼마 전 밭에 고구마순을 심었는데, 여러모로 잘못 심은데다 심고나서 물을 바로 주지 않아 심은 고구마 순이 거의 다 죽었더군요. 이틀에 걸쳐 죽은 고구마순이 있는 곳에 새 고구마순을 다시 심고 순이 물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순을 심은 곳의 비닐의 틈을 넓혀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허리도 아프고 너무 힘이 들어 저도 모르게 은근히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으니 묵묵히 일을 해야 하겠구나 하며 일을 하다 보니 서서히 제 마음 안에서 미소가 떠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배움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하면서 말입니다.…
이렇듯이 주님께서는 영으로서 우리 내면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우리의 실수를 눈감아 주시며 조용히 우리를 삶의 배움의 과정으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여전히 우리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말입니다.
리처드 로어 신부님은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죄라고 생각했던 것은 단지 우리의 죄책감이었고, 우리가 의로움이라고 여겼던 것은 단지 우리의 자기-의로움이었으며, 우리가 정의(올바른 심판)라고 믿었던 것은 단지 우리의 복수심에 불과했습니다."라고요.
로어 신부님은 성령께서 우리 내면에서 이루시는 작업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별은 단순히 외적인 규칙이나 겉모습으로는 배울 수 없고, 오직 깊은 내적 머무름과 변화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말이지요.
다시 말해, 로어 신부님은 같은 진리를 되새기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 없이는 우리가 죄와 의로움, 정의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자아, 죄책감, 혹은 통제하려는 욕망에 의해 쉽게 왜곡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령과 함께할 때,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시는 방식으로 현실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더 맑은 눈으로, 더 깊은 동정심과 자비, 그리고 더 온전한 진리 안에서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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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C 매일묵상
사랑 안에 머무는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은수처!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노리치의 율리안는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신비주의자 중 한 분입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노리치의 율리안나: 보편적 신비주의자
사랑 안에 머무는 은수처
2026년 5월 11일 월요일
리처드 로어 신부는 노리치 율리안나의 신비 체험을 이렇게 전합니다:
수십 년 전 처음 노리치의 성녀 줄리안을 알게 된 이후로, 저는 언제나 그녀를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신비주의자 중 한 분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녀의 저술을 다시 펼칠 때마다 새로운 빛을 발견하곤 합니다. 율리안나는 1373년 5월 어느 날, 죽음에 가까운 병상에서 열여섯 가지 환시를 받았는데, 그녀는 이를 "보여주심(showings)"이라 불렀습니다. 사제가 십자가를 들고 있을 때, 율리안나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받으시는 주님을 뵙고 몇 시간 동안 그분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모든 신비주의자가 그러하듯, 율리안나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는 동시에 곧 온 세상과 모든 현실에 대해 말씀하고 계심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일치의 의식(unitive consciousness)"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신비입니다.
그 후 율리안나는 깊은 체험을 묵상하기 위해 세상과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내적 부르심을 느꼈습니다. 그녀는 주교에게 청하여 영국 노리치의 성 율리안나 성당 옆에 은수처(Anchor-Hold)를 마련하고 그 안에 은수자로 살게 되었습니다. '율리안나'라는 이름도 바로 그 성당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녀는 자신의 글에 결코 자기의 본래 이름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자아를 버리고 오직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한 겸손의 표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은수처에는 두 개의 창이 있었는데, 하나는 성당 안으로 연결되어 줄리안이 미사에 참여할 수 있게 했고, 다른 하나는 바깥으로 나 있어 사람들을 맞아 기도와 상담을 나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율리안나의 은수처는 13세기와 14세기 유럽 곳곳에서 발견되며, 은수자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 뿌리내리고 세상과 연결되는 독특한 영적 공간이었습니다.
율리안나는 처음에 환시(보여주심)에 대해 짧은 글을 남겼지만, 이후 인내심을 가지고 20년 동안 관상과 기도에 전념하며 하느님께서 환시 속에 담긴 더 깊은 의미를 분별하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신뢰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신적 사랑의 계시(Revelations of Divine Love)』라는 장문의 저술을 완성했습니다. 율리안나의 하느님 체험에 대한 해석은 당시까지 역사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던 종교적 관점과는 달랐습니다. 그것은 죄, 수치, 죄책감, 하느님이나 지옥에 대한 두려움에 기초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기쁨과 자유, 친밀함, 그리고 우주적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그런 자유를 지킬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녀가 사제처럼 제도적 언어를 강요받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최근 율리안나의 글을 읽으며 놀라운 점은, 그녀가 살던 시대와 오늘날 우리의 상황이 놀랍도록 닮아 있다는 것입니다. 성공회 사제이자 학자인 메리 얼(Mary Earle)은 줄리안의 14세기 배경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율리안나는 자신의 앵커홀드 안에서 관상의 영적 유익을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고독 속에서 깨어난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앞에 온전히 현존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우리는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녀는 그 사랑을 자신 안에만 머물게 하지 않고, 거리에서 상담을 청하는 이들에게 흘려보냈으며, 오늘날 우리에게는 그녀의 글을 통해 그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우리 공동체 이야기
노리치의 율리안나는 이제 나의 새로운 ‘절친’입니다. 저는 오늘의 묵상을 인쇄해 여러 번 읽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율리안나는 이렇게 말할 때 제 마음을 알아줍니다. "우리는 너무도 분열되어 있고, 감정 속에서 여러 방식으로 상처받아 어디에서 위로를 찾아야 할지조차 모릅니다." 그녀는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힘이 너무도 커서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친밀한 친구처럼 그녀는 저를 안심시켜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당신의 현존의 달콤함으로 제 마음을 채워주시고 언제나 저와 함께 계실 것이라고요.
—Candace F.
References
[1] Mary C. Earle, Julian of Norwich: Selections from Revelations of Divine Love—Annotated & Explained (SkyLight Paths, 2013), xx–xxi.
Adapted from Richard Rohr, Intimacy: The Divine Ambush, (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2013). Available as MP3 audio download.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Syuhei Inoue, untitled (detail), 2020, photo, Japan,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빛은 노리치의 율리안나의 고요한 계시를 상징합니다. 그녀는 자신이 온전히 담아내거나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지혜와 힘으로 빛을 받습니다. 그 빛은 평화로운 때든 위기의 순간이든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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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깊은 감옥 속에서도 기쁨으로 가득한 찬미가를!
젊은 시절 잠시나마 교정 사목에 참여했었는데, 돌아보니 참으로 은혜로운 시절이었습니다.
소년원이나 구치소, 교도소를 내 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었습니다.
수감되어 있는 형제들의 얼굴을 한번 보기위해서는 꽤나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했습니다.
높은 담장, 초병들이 보초를 서고 있는 망루 사이에 난 견고하고 육중한 철 대문을 지나면,
또 다른 문이 하나 있습니다.
그 문 안에 또 다른 문... 도시 한 복판에 위치했지만 깊고 깊은 심연의 동굴 바닥으로 들어선 느낌입니다.
사도행전은 바오로와 실라스가 필리피에서 복음을 선포하다가 투옥되는 장면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이번 투옥은 비교적 짧은 감금이었지만 바오로와 실라스가 겪은 고통은 극심한 것이었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의 필리피 지방에서 보인 행동이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던 행정관들은 형리들을 시켜 두 사람의 옷을 벗깁니다.
그리고 온몸에 채찍질을 가한 후 감방 중에서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특별실’에 그들을 가둡니다.
그것도 모자라 발에다가는 ‘차꼬’를 채웁니다.
차꼬란 두 개의 긴 나무토막을 맞대고,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게 한 옛 형구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오로와 실라스는 로마 시민권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로마법에 따르면 로마 시민권자에게는 태형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키케로는 로마인에게 쇠사슬을 채우거나 채찍질을 하는 사람은 범죄자라고 말했습니다.
로마 시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공직자는 그 직책을 박탈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오로와 실라스는 옥에 갇히기 전 충분히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투옥을 피할 수 있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부당한 대우를 생각하며 묵묵히 부당한 대우를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사실이 한 가지 있습니다.
빛도 잘 들어오지도 않고 공기도 잘 통하지 않는 깊은 감옥에 갇힌 바오로와 실라스였습니다.
온몸은 상처투성이였으며 발에는 차꼬가 채워져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였습니다.
아마도 차꼬 외에도 손에는 수갑, 그리고 목에는 형틀까지 씌워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자정이 되자 그 한밤중에 하느님께 찬미가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두 선교사는 혹독한 고통 속에서도 밤새워 기도한 것입니다.
온몸은 채찍질로 인한 고통이 극심했지만, 마음은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이상 채찍질도 차꼬도 깊은 감옥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깊은 감옥 속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과 희망으로 가득 차 기쁨의 찬미가를 부르는 두 사람의 모습에 하느님께서도 크게 응답하십니다.
갑자기 큰 지진이 일어나 감옥의 기초를 흔드십니다.
감옥 문이 자동으로 활짝 열리고 두 사람을 옥죄고 있던 사슬들이 거짓말처럼 술술 풀렸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다가 갖은 모욕과 박해를 당하는 바오로와 실라스의 모습, 그러나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굳게 믿으며, 고통이 클수록 더욱 신뢰하고 기뻐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오늘날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채찍질을 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전교를 한다고 해서 우리를 깊은 감옥에 가두는 사람은 더 이상 없습니다.
그런데도 복음 선포에 보다 적극적이지 않은 제 모습을 크게 반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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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그런데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너희 가운데 아무도 없다.
오히려 내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 찼다.
그러나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는데,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보호자께서 오시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밝히실 것이다.
그들이 죄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나를 믿지 않기 때문이고, 그들이 의로움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내가 아버지께 가고 너희가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심판에 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이 세상의 우두머리가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한 16,5-11).”
1)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데, 앞의 13장을 보면 베드로 사도가 어디로 가시느냐고 예수님께 물었고, 14장을 보면 토마스 사도가 ‘예수님께서 가시는 길’을 물었습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께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3,36).”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 14,5-6)”
그래서 “어디로 가십니까?” 라고 묻는 사람이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사도들이 묻지 않는 것을 꾸짖으신 말씀이 아니라, “너희는 왜, 내가 어디로 가는지는 생각하지 않고 슬퍼하기만 하느냐? 슬퍼하지 마라.” 라고 타이르신 말씀으로 해석됩니다.
2)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하신 말씀과 토마스 사도에게 하신 말씀을 보면,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지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이고, “그러나 나중에는 따라오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베드로 사도의 순교를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당신이 아버지께 가신다는 것이 암시되어 있긴 하지만, ‘어디로’ 가시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구체적으로 명확하게 말씀하시지 않고 막연하게 암시만 하셨을까?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하고 믿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시고 나서 침묵을 지키라고 명령하신 것도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람의 아들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날 때까지, 지금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분부하셨다.
그들은 이 말씀을 지켰다.
그러나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저희끼리 서로 물어보았다(마르 9,9-10).”
3) 5절의 “이제 나는 나를 보내신 분께 간다.” 라는 말씀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그 일은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 즉 아버지께 가는 일이고, 슬퍼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입니다.
이 말씀은 14장에 있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요한 14,28).”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죽음을 정복하는 일이고, 당신의 ‘떠나심’은 떠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라, 다시 오셔서 신앙인들을 데리고 가시는 일로 이어지기 때문에, 당신의 죽음과 떠남을 슬퍼하지 말고 기뻐하라는 뜻입니다.
4) 7절의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는, “내가 떠나도 너희의 이로움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는다.”입니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는, “내가 떠나도 성령께서 오신다.”입니다.
8절-11절의 말씀은, 제자들이 성령을 받은 뒤에 깨닫게 될 진리에 대한 말씀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는 죄인이다.’ 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고, 자기들이 죄인을 심판했다고 생각했지만, 진짜 죄인은 예수님을 믿지 않고 죽인 그들입니다.
예수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
즉 ‘의로우신 분’이라는 증거입니다.
박해자들은 예수님을 안 믿고 죽인 죄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11절을 보면, ‘이미’ 심판을 받았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의 죽음과 부활은 사탄을 심판한 일과 같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승리하신 분이고, 신앙인은
승리자이신 예수님의 뒤를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신앙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심판을 받고 패배한 사탄의 뒤를 따라가는 자들입니다.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고, 어떤 길로 갈 것인지는
각자 선택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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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512. 부활 제6주간 화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23:55 추가
요한 16,5-11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이롭다. 내가 떠나지 않으면 보호자께서 너희에게 오지 않으신다. 그러나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지인 중에 아버지를 일찍 여읜 분이 있습니다. 보통 아버지를 일찍 여의면 그분의 빈자리 때문에 많이 힘들 거라고, 그만큼 고생도 많이 하고 부모님이 모두 건강하게 잘 계시는 사람들을 보면 기가 죽거나 의기소침해질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다행히 그분은 그러지만은 않았습니다.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것은 너무나 슬프고 힘든 일이었지만, 그로 인해 다른 이들보다 일찍 세상을 마주하여 그 뼈저린 현실을 깨닫고 일찍 철이 들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또한 다른 이에게 의지하거나 기대려 들지 않고 독립적으로, 주도적으로 살게 되어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어 좋았다고 했습니다.
아침에 아이들이 학교 가는 모습을 보면 엄마들이 아이의 가방을 대신 메주고 가는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볼 때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곤 하지요. ‘저렇게 엄마가 가방을 대신 메주는 것이 과연 아이에게 유익한 일일까?’, ‘저렇게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부모가 대신 해주는 것이 최선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것입니다. 자기 가방은 자기가 직접 메고 가게 하는 것이 아이의 교육에도 더 유익한 참 사랑의 모습일진데,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가 고생하는 게 보기 안타까워서 일단 그 힘든 걸 덜어주고자 자기가 직접 해주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낮은 차원의 사랑에 머무르고 맙니다. ‘일(1)단은’ 해주는 사랑에 멈춰버리면 2단, 3단으로는 올라갈 수 없는 한계를 마주하는 겁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제자들 곁을 떠나는 것이 그들에게 이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스승이시자 주님이신 분이 옆에 계시고 안계시고는 제자들에게 하늘과 땅 차이지요. 예수님이 함께 해주시며 도와주시고 힘을 주신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지만, 그분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제자들은 이미 ‘빈 그물’의 경험을 통해 뼈저리게 체험한 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을 향한 당신 사랑이, 그리고 당신을 향한 제자들의 사랑이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에는 아무래도 제자들의 시선이 그분의 물질적인 부분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데 그래서는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볼 수 없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가르침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에, 제자들의 시선이 물질적인 차원을 넘어 영적인 차원에 다다를 수 있도록 당신은 그들 곁을 떠나시고, 대신 그들을 하느님 뜻에 맞는 올바른 길로 이끌어줄 ‘성령’을 보내주겠다고 하신 것이지요.
그러면 ‘죄’와 ‘의로움’과 ‘심판’에 대한 세상의 그릇된 생각을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참된 진리에 비추어 바로잡게 됩니다. 율법을 어기는 것이 죄가 아니라 그 율법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심판하고 단죄하려 드는 무자비한 태도가 죄입니다. 다른 사람들 눈에 올바르고 정의롭게 보이는 게 의로움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맺고 그분 뜻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의로움입니다. 물질적 세속적으로 망하는 것이, 고통이나 시련을 겪는 것이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과 그분 뜻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그렇게 그분 사랑으로부터 단절되는 것이 심판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성령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뜻 안에서 봐야만 비로소 보이는 구원의 진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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