子游曰 子夏之門人小子 當洒掃應對進退 則可矣 抑末也 本之則無 如之何 자유가 말하기를, “자하의 제자들이 물 뿌리고 청소하며 응대하고 진퇴하는 예절에는 괜찮지만 이는 지엽말단이라 근본적인 것은 없으니 어찌 하겠는가?”라고 하니,
○ 子游譏子夏弟子 於威儀容節之間則可矣 然此小學之末耳 推其本 如大學正心誠意之事 則無有 자유가 자하의 제자들은 위엄 있는 의태와 용모, 예절 사이에 있어서는 괜찮은데, 그러나 이것은 소학의 말단일 뿐이고, 그 근본을 미루어가는 일, 즉 대학의 正心(마음을 바르게 함)과 誠意(뜻을 정성스럽게 함) 같은 일은 없다고 풍자한 것이다. 雲峯胡氏曰 集註推子游之言本末者如此 然小學大學時節 可分先後 不可分本末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집주에서 자유가 말한 본말을 미루어나간 것이 이와 같았다. 그러나 소학과 대학을 하는 시절은 그 선후를 나눌 수 있지만, 근본과 말단을 나눌 수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夏聞之曰 噫 言游過矣 君子之道 孰先傳焉 孰後倦焉 譬諸草木 區以別矣 君子之道 焉可誣也 有始有卒者 其惟聖人乎 자하가 그 말을 듣고 말하기를, “아, 언유(言游)의 말이 지나치다. 군자(君子)의 도(道)에 어느 것을 먼저라 하여 가르치고 어느 것을 뒤라 하여 게을리하겠는가?
초목(草木)에 비유하면 초목이 갖가지 종류로 구별되는 것과 같으니, 군자(君子)의 도(道)를 어찌 속일 수 있겠는가? 처음과 끝을 구비한 것은 오직 성인(聖人)뿐이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 倦 如誨人不倦之倦 區 猶類也 言君子之道 非以其末爲先而傳之 非以其本爲後而倦敎 但學者所至 自有淺深 如草木之有大小 其類固有別矣 若不量其淺深 不問其生熟 而槪以高且遠者强而語之 則是誣之而已 君子之道 豈可如此 若夫始終本末一以貫之 則惟聖人爲然 豈可責之門人小子乎 倦은 남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의 倦과 같다. 區란 무리와 같다. 군자의 도는 그것이 말단이라 하여 우선하여 전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근본이라 하여 나중으로 미루어 가르치기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사람이 각자 이른 경지에는 스스로 깊고 얕음이 있으니, 마치 초목의 크고 작음이 있어서 그 비슷한 무리가 본래부터 구별됨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만약 그 깊고 얕음을 헤아리지 않고, 그 설고 익음을 불문하고, 모조리 높고도 먼 것으로써 억지로 말해준다면, 이것은 그를 속이는 것일 뿐이다. 군자의 도가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만약 시종일관 근본과 말단을 하나로 꿰는 것은 오직 성인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니, 어찌 문인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하라고 나무랄 수 있겠는가? 厚齋馮氏曰 區 丘域也 別 分也 古者以園圃毓草木 蓋植藝之事 各分區域 藝一區畢 復藝一區 不相凌躐 후재풍씨가 말하길, “區는 丘域이다. 別은 구분한다는 것이다. 옛날에 園圃로써 풀과 나무를 길렀는데, 대체로 심고 가꾸는 일은 각자 구역을 나누어서 하되, 한 구역을 기르다가 마치면, 다시 한 구역을 기르는 식으로 했기에, 서로 뛰어넘을 수 없었다.”라고 하였다.
此二句補足上下文意 이 두 구절은 상하 글의 뜻을 보충하여 충족시킨 것이다.
此三句又補足上下文意 이 세 구절은 또 상하 글의 뜻을 보충하여 충족시킨 것이다.
朱子曰 非以灑掃應對爲先而傳之 非以性命天道爲後而倦焉 但道理自有先後之殊 不可誣人以其所未至 惟聖人然後有始有卒 一以貫之 無次第之可言耳 須知理則一致 而其敎不可缺 其序不可紊 惟其理之一致 是以其敎不可缺 其序不可紊也 주자가 말하길, “쇄소응대를 우선으로 생각하여 그것을 전하는 것도 아니고, 性과 命, 그리고 天道를 나중으로 여겨서 이에 가르치기를 게을리하는 것도 아니다. 단지 道理는 저절로 선후의 차이가 있기에, 남이 아직 이르지 못한 바로써 그를 속여서는 안 된다. 오직 성인처럼 그렇게 된 연후에, 처음이 있고 끝이 있어서 一以貫之하니, 언급할 만한 순서가 없는 것일 뿐이다. 이치라면 일치하는 것이지만, 그 가르침을 빠뜨려서는 안 되고, 그 순서도 흐트러뜨리면 안 된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오직 그 이치가 일치되기 때문에, 이런 까닭으로 그 가르침을 빠뜨려도 안 되고, 그 순서도 흐트러뜨려서도 안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子夏對子游之語 以爲譬之草木區以別矣 何嘗如此儱侗來 惟密察於區別之中 見其本無二致者 然後上達之事 亦在其中矣 雖至於堯舜孔子之聖 其自處常只在下學處也 上達處不可著工夫 更無依泊處 日用動靜語默 無非下學 聖人幾曾離此來 今動不動 便先說箇本末精粗無二致 此說大誤 자하가 자유에게 대꾸하여 한 말은, 비유하자면 ‘초목은 같은 부류로써 구별한다’고 여긴 것이니, 어찌 일찍이 이처럼 미련하게 굴었던 것일까? 오직 구분하는 가운데 정밀하게 살펴보면, 그것이 본래 두 개로 나뉨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그러한 후에 上達(위에 이름)의 일 역시 그 안에 있게 되는 것이다. 비록 요순임금과 공자의 성스러운 경지에 이르렀다 할지라도, 그들이 자처하는 것은 항상 그저 下學(아래에서 배움)의 곳에 있었다. 上達의 부분에 있어서, 공부에 힘쓸 수 없다면 더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것이다. 일상생활의 動靜과 語默은 下學이 아님이 없다. 어찌 성인께서 일찍이 이것을 떠난 적이 있었겠는가? 지금은 걸핏하면 곧바로 먼저 ‘本末(근본과 말단)과 精粗(정밀함과 거칢)가 둘로 나뉘지 않는다’는 등의 말을 해버리니, 이 말은 크게 틀린 것이다. 問有始有卒 曰 此不是說聖人敎人事 乃是聖人分上事 惟聖人道頭便知尾 下學便上達 不是自始做到終 乃是合下便始終皆備 若敎學者 則須循其序也 누군가 ‘처음이 있고 끝도 있다’는 것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말하길, “이것은 성인께서 사람을 가르친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인의 분수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이다. 오직 성인만이, 머리를 말하면 곧바로 꼬리를 알고, 아래에서 배우면 곧바로 위까지 통달하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해낸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원래부터 곧바로 처음과 끝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우는 자에게 가르치는 경우라면, 모름지기 그 순서를 따라야 마땅하다.”고 하였다.
○ 程子曰 君子敎人有序 先傳以小者近者 而後敎以大者遠者 非先傳以近小 而後不敎以遠大也 정자가 말하길, “군자가 사람을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다. 먼저 작은 것과 가까운 것을 전하고, 그러한 연후에 큰 것과 먼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먼저 가깝고 작은 것을 전한 후에 멀고 큰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理無大小而無不在 是以敎人者 不可以不由其序而有所遺 子游不知理之無大小 則以灑掃應對爲末而無本 不知敎人之有序 故於門人小子而欲直敎之精義入神之事 주자가 말하길,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면서도 없는 곳이 없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그 순서를 말미암지 않아서 빠뜨리는 것이 있어서는 아니 된다. 子游는 이치에 크고 작음이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으니, 쇄소응대를 말단이라 근본이 없는 것으로 여겼고, 사람을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문인과 제자들에게 대하여 직접 정밀한 뜻과 신의 경지에 들어가는 일을 가르치고자 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若不觀明道說 君子敎人有序 四五句也 無緣看得出 만약 명도 선생이 말한 ‘군자가 사람을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다’는 것을 살펴보지 않는다면, 4-5구절은 보아도 이해할 도리가 없을 것이다.
雲峯胡氏曰 此第一條說敎人有序 是發子夏之意 後第二至第五條說理無二致 是矯子游之偏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여기의 제1조에서 사람을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음을 말하였는데, 이는 자하의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고, 뒤의 제2 내지 제5조에서 이치는 둘로 나뉨이 없다는 것을 말하였는데, 이는 자유의 치우침을 교정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又曰 洒掃應對 便是形而上者 理無大小故也 故君子只在謹獨 또 말했다. “물 뿌리고 마당 쓸고 손님을 응대하는 것은 곧 形而上者인데,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자는 그저 謹獨(홀로 삼감)에 있을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不能謹獨 只管理會大處 小小底事 便照管不到 理無大小 小處大處都是理 小處不到 理便不周匝 주자가 말하길, “謹篤할 수 없어서, 그저 큰 부분만 이해할 수 있으면, 자잘한 일은 곧 돌볼 수 없게 된다.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작은 부분이나 큰 부분 모두 이치다. 작은 부분을 돌볼 수 없다면, 이치는 곧 두루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洒掃應對 所以習夫形而下之事也 精義入神 所以究夫形而上之理也 此其事之大小 固不同矣 然以理言 則未嘗有大小之間 而無不在也 程子之言 意蓋如此 但方擧洒掃應對之一端 未及乎精義入神之云者而通 以理無大小結之 惟理無大小 故君子之學 不可不由其序 以盡夫小者近者而後 可以盡夫大者遠者耳 故曰 其要只在謹獨 此甚言小者之不可忽也 其曰便是云者 亦曰不離乎是爾 非卽以此爲形而上者也 쇄소응대는 저 형이하의 일을 익히는 것이고, 精義入神은 저 형이상의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일의 크고 작음은 본래부터 같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치로써 말한다면, 일찍이 크고 작은 차이가 없었으며 없는 곳이 없었다. 정자의 말은 그 뜻이 대체로 이와 같다. 다만 바야흐로 쇄소응대의 한쪽 끝을 들었기에, 아직 精義入神이라고 말하는 것에 미쳐서 통하지 않았으니,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는 말로써 끝맺음을 한 것이다. 오직 이치에 크고 작음이 없기 때문에, 군자의 학문은 그 순서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니, 이로써 저 작고 가까운 것을 다 한 이후에 저 크고 먼 것을 다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그 요체는 오직 謹篤에 있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것은 작은 것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심하게 말한 것이다. 위에서 바로 이것이라고 말한 것은 역시 이것에서 떨어질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일 뿐, 곧바로 이것이 형이상자라고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다.
理無大小 無乎不在 本末精粗 皆要從頭做去 不可揀擇 此所謂敎人有序也 非是謂洒掃應對便是精義入神 更不用做其他事也 이치에는 대소가 없고 없는 곳이 없으니, 本末과 精粗도 전부 처음부터 해나가야 하므로, 가리고 고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이른바 사람을 가르침에는 순서가 있다는 말이지, 灑掃應對가 바로 精義入神이므로, 다시는 그 밖의 다른 일을 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洒掃應對是事 所以洒掃應對是理 事卽理 理卽事 道散在萬事 那箇不是 若事上有毫髮蹉過 則理上便有間斷久缺 故君子直是不放過 只在謹獨 但不知無事時當如何耳 謹獨須貫動靜做工夫始得 쇄소응대는 일이고, 쇄소응대를 하는 까닭이 이치일 뿐이지, 일이 곧 이치고, 이치가 곧 일이어서 道가 만사에 산재한다는 저것은 아니다. 만약 일 위에서 터럭만큼이라도 잘못됨이 있다면, 이치 위에서는 곧바로 중간에 끊어지고 오래도록 비는 상황이 생기기 때문에, 군자는 바로 그냥 방치하고 지나가지 않고, 그저 근독할 뿐이다. 다만 일이 없을 때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할 따름이다. 謹篤이란 반드시 動靜을 관통하여 공부를 해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勉齋黃氏曰 形而上謂超乎事物之表 專指事物之理言也 洒掃應對 事雖至粗 其所以然者 便是至精之理 其曰理無大小者 非以灑掃應對爲小 形而上者爲大也 蓋不但至大之事 方有形而上之理 雖至小之事 亦有之 故曰 理無大小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形而上을 일러 사물의 겉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오로지 사물의 이치를 가리켜 말한 것이다. 쇄소응대는 그 일이 비록 지극히 거친 것이지만, 그렇게 하는 까닭은 곧바로 지극히 정밀한 이치다.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고 말한 것은 쇄소응대를 작다고 여기고 형이상의 존재를 크다고 여긴 것이 아니다. 대체로 비단 지극히 거대한 일이라야만 바야흐로 형이상의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극히 작은 일이라도 역시 그것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치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又曰 聖人之道 更無精粗 從洒掃應對 與精義入神貫通只一理 雖洒掃應對 只看所以然如何 또 말했다. “성인의 도에는 더이상 정밀함과 조악함(거칢)이 없다. 쇄소응대부터 精義入神까지 더불어 관통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치다. 비록 쇄소응대라 할지라도 그저 그렇게 된 까닭이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한다.”
朱子曰 此言灑掃應對與精義入神 是一樣道理 洒掃應對必有所以然 精義入神亦有所以然 其曰貫通只一理 言二者之理只一般 非謂洒掃應對便是精義入神 固是精義入神有形而上之理 而灑掃應對亦有形而上之理 주자가 말하길, “이것은 쇄소응대가 정의입신과 더불어 같은 모양의 이치라고 말한 것이다. 쇄소응대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을 갖고 있고, 정의입신도 역시 그러한 까닭을 갖고 있다. 관통한 것은 그저 하나의 이치라고 말한 것은 두 가지의 이치가 그저 한 종류일 뿐이라고 말한 것이지, 쇄소응대가 곧바로 정의입신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본래부터 정의입신은 형이상의 이치를 갖고 있지만, 쇄소응대도 역시 형이상의 이치를 갖고 있다.
灑掃應對精義入神 事有大小而理無精粗 事有大小 故其敎有等而不躐 理無精粗 故惟其所在而皆不可不用其極也 쇄소응대와 정의입신의 경우, 그 일에 크고 작음이 있지만, 이치에는 정밀하고 조악함이 없다. 일에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에, 그 가르침에는 차등이 있어서 엽등하지 않는 것이다. 이치에는 정밀함과 조악함이 없기 때문에, 오직 이치가 있는 곳이라면, 그 지극함을 다 쓰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須是就事上理會道理 非事何以識理 洒掃應對 末也 精義入神 本也 不可說這箇是末不足理會 只理會那本 這便不得 又不可說 這末便是本 但學其末則本便在此也 모름지기 일 위에 나아가 도리를 이해해야 하는데, 일이 아니라면 무엇으로 이치를 알아낼 것인가? 쇄소응대는 말단이고, 정의입신은 근본이다. 이것은 말단이므로 이해할 만한 것이 못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단지 저 근본만을 이해해서는, 이것은 곧 안 된다. 또한 이 말단이 곧바로 근본이라고 말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 말단을 배우면 근본도 곧바로 여기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勉齋黃氏曰 精究義理極其微妙而至於入神 神者 理之妙而不可測者也 所精之義至於入神 義理之至精者 程子引易中此語 與灑掃應對 對言 灑掃應對所以然者 卽至精之義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義理를 정밀하게 궁구하고 그 미묘함을 지극히 하여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神이란 것은 이치 중에서 미묘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정밀하게 궁구된 義가 입신의 경지에 이르면, 義理 중에서 지극히 정밀한 것이다. 정자는 주역 안의 이 말을 인용하여, 쇄소응대와 더불어 짝지어 말한 것인데, 灑掃應對의 그렇게 하는 까닭이 곧바로 지극히 정밀한 義다.”라고 하였다.
又曰 凡物有本末 不可分本末爲兩段事 洒掃應對是其然 必有所以然 또 말했다. “모든 사물에는 근본과 말단이 있으나, 本末을 나누어 두 가지 서로 다른 일로 삼을 수는 없다. 쇄소응대가 그러한 것에는, 반드시 그렇게 하는 까닭이 있다.”
朱子曰 治心修身是本 灑掃應對是末 皆其然之事 至於所以然 則理也 理無精粗本末 皆是一貫 주자가 말하길,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닦는 일은 근본이고, 쇄소응대하는 일은 말단이나, 모두 다 그것이 그러한 일들이다. 그것이 그렇게 된 까닭에 이르러서는 곧 이치다. 이치에는 정밀함과 조악함이나 근본과 말단이 없어서, 모두 다 하나로 관통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或問其然所以然之說 曰 洒掃應對之事 其然也 形而下者也 洒掃應對之理 所以然也 形而上者也 自形而下者而言 則洒掃應對之與精義入神 本末精粗不可同日而語矣 自夫形而上者言之 則未嘗以其事之不同而有餘於此不足於彼也 曰 其曰物有本末而本末不可分者 何也 曰 有本末者 其然之事也 不可分者 以其所以然之理也 혹자가 그러한 것과 그렇게 되 까닭에 관한 학설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말하길, “쇄소응대의 일은 其然이고, 형이하학적인 것이다. 쇄소응대의 이치는 그렇게 된 까닭이자 형이상학적인 것이다. 형이하학적인 것으로부터 말하자면, 쇄소응대는 정의입신과 더불어서 그 근본과 말단, 그리고 정밀하고 조악함을 같은 선상에 놓고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저 형이상학적인 것으로부터 말하자면, 그 일이 다르다고 하여 여기에서는 남음이 있고 저기에서는 부족한 적은 일찍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누군가 말하길, “사물에는 본말이 있지만, 본말을 구분할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길, “본말이 있다는 것은 其然의 일이고,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된 이치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然猶云如此也 其如此者 洒掃應對之節文 所以如此者 謂有此理而後其節文之著見者如此也 면재황씨가 말하길, “그러하다는 것은 이와 같다(如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이 이와 같다는 것은 쇄소응대의 節文이고, 이와 같이 된 까닭이란 이 이치가 있은 후에 그 節文이 드러나 보임이 이와 같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按朱子謂有本末者事也 不可分者 其所以然之理也 饒氏却謂已然者爲末 所以然者爲本 蓋朱子解程子之言以本末爲事而不可分爲兩段事者是理 饒氏解程子之言以末爲事而本爲理 不可不辨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살펴보건대, 주자는 本末이 있는 것을 일러 일이라고 말하였고, 나눌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그렇게 된 이치라고 말했다. 쌍봉요씨는 오히려 이미 그러한 것을 일러 말단이라 말했고, 그렇게 된 까닭을 근본이라 말했다. 대체로 주자는 정자의 말을 풀이하면서 本末을 일로 여겼고, 두 가지 다른 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은 이치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씨는 정자의 말을 풀이하면서 말단을 일로 여기고 근본은 이치라고 여겼으니, 구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又曰 自洒掃應對上 便可到聖人事 다시 말했다. “쇄소응대부터 올라가면, 곧 성인의 일에 도달할 수 있다.”
問聖人事是甚麽樣子 朱子曰 如云下學而上達 當其下學便上達天理是也 누군가 “성인의 일은 어떤 모습입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下學하여 上達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마땅히 아래에서 배우면 곧 위로 천리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洒掃應對 雖至小亦由天理之全體而著見於事物之節文 聖人之所以爲聖人者 初不外乎此理 特其事事物物皆由此理而不勉不思從容自中耳 면재황씨가 말하길, “쇄소응대는 비록 지극히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天理의 온전한 體를 말미암아서 사물의 節文에 드러나 보이는 것이다. 성인께서 성인이신 까닭은 처음부터 이 이치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그 일마다 물건마다 모두 이 이치를 말미암아서, 노력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아도 조용하게 저절로 中道에 맞게 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程子此四條 皆所以破子游‘抑末也本之則無’七字 운봉호씨가 말하길, “정자가 말한 이 네 조항은 모두 子游의 ‘抑末也 本之則無’라는 7글자를 깨뜨리기 위함이다.”라고 하였다.
愚按 程子第一條 說此章文意 最爲詳盡 其後四條 皆以明精粗本末 其分雖殊 而理則一 學者當循序而漸進 不可厭末而求本 蓋與第一條之意 實相表裏 非謂末卽是本 但學其末而本便在此也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정자의 제1조의 말은 이 장의 글 뜻을 제일 상세하게 다 말한 것이다. 그 다음 4개조의 말은 모두 정밀함과 조악함, 근본과 말단에 있어서 그 구분이 비록 많이 다르기는 하지만 이치는 곧 하나임을 밝힌 것이다. 배우는 사람은 마땅히 순서에 따라 점차 나아가야 하고, 말단을 싫어하고 근본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대체로 제1조의 뜻과 실제 서로 표리를 이룬다. 말단이 곧 근본이므로 그저 그 말단만 배우면 근본이 곧 여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朱子曰 孔門除曾子外只有子夏守得規矩定 故敎門人皆先洒掃應對進退 所以孟子說孟施舍似曾子 北宮黝似子夏 주자가 말하길, “孔門에서 증자를 제외하고는 오직 자하만이 법도를 확실하게 지킬 수 있었기 때문에, 문인들에게 가르칠 적에 항상 쇄소, 응대, 진퇴를 우선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때문에 맹자가 맹시사는 증자를 닮았고 북궁유는 자하를 닮았다고 말했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事有大小理却無大小 不問大事小事 合當理會處 便用與他理會不可說箇是粗底事不理會 只理會那精底 又不可說洒掃應對便是精義入神 洒掃應對只是粗底 精義入神自是精底 然道理却一般 須是從粗底小底理會起 方漸而至於精者大者 或曰 洒掃應對非道之全體 只是道中之一節目 合起來便是道之全體 非大底是全體 小底不是全體也 일에는 크고 작음이 있으나, 이치에는 오히려 크고 작음이 없다. 대소사를 불문하고, 마땅히 이해해야 할 부분은 곧 그것과 더불어 이해해야 한다. 그것이 粗惡한 일이니 이해하지 않고, 그저 저 精密한 일만 이해하고자 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또한 쇄소응대가 곧바로 정의입신이라고 말하는 것도 안 된다. 쇄소응대는 단지 粗惡한 것이고, 정의입신은 저절로 精密한 것이지만, 그러나 道理는 오히려 동일한 종류다. 모름지기 조악하고 작은 것에서부터 이해해 나가야만, 바야흐로 점차 정밀한 것과 큰 것에 이르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길, 쇄소응대는 道의 전체가 아니라 그저 道 안의 한 절목일 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합쳐놓으면 곧 道의 전체가 되므로, 큰 것만이 전체이지 작은 것은 전체가 아니라는 뜻은 아니다.
勉齋黃氏曰 所引程子四段 首言理無大小以見事有大小而理則一也 次言道無精粗以見學有精粗而道則一也 又次言是其然必有所以然 所以發明上二段所以無大小無精粗之意 又次言便可到聖人事 則亦以其所以然而無大小精粗者爲之也 亦足以見其編次之意至精而不苟矣 면재황씨가 말하길, “인용한 정자의 말 四段에서, 첫 번째로 ‘이치에는 대소가 없다’고 말함으로써 일에는 대소가 있되 이치는 하나임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그다음에 道에는 정밀함과 조악함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배움에는 정밀함과 조악함이 있되 道는 하나임을 드러내 보여주었다. 다시 그다음에 그것이 그러함에는 반드시 그렇게 된 까닭이 있음을 말하였는데, 이는 윗 두 단의 ‘大小가 없고 精粗도 없다는 뜻’을 드러내어 밝힌 것이다. 다시 그다음에 곧바로 성인의 일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역시 그 所以然이면서 大小와 精粗가 없는 것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역시 편차한 뜻이 지극히 정밀하여 조금도 구차하지 아니함을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窮理之至 知言之極 則學者所得之淺深 不啻白黑之易見 故如草木之有大有小 其類各不同而無不昭然在吾之目中 然後循其次第等級而敎之 若夫先傳後倦 則君子無是心也 但時其可而已 至於言之未知 知之未至 不察學者淺深生熟之異而一槩以子游之所謂本者 强而聒之 則學者漫而聽之 實不知其味 勉而行之 終不得其方 則是誣之而已 君子敎人之道 豈有誣之之理 경원보씨가 말하길, “이치를 궁구함이 지극하고 말을 아는 것이 극진하면, 배우는 자가 터득한 바가 깊은지 얕은지 흑백처럼 쉽게 알 수 있을 뿐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치 초목에 큰 것이 있고 작은 것이 있듯이, 그 종류는 각자 다르지만, 그것이 내 눈 속에 명확하지 않음이 없게 된 연후에, 그 순서와 등급에 따라 가르치는 것이다. 만약 먼저 가르칠 것이라 하여 전수하고 나중에 할 것이라 여겨 게을리하는 저것이라면, 군자에게는 이러한 마음은 없는 것이지만, 단지 때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말을 아직 알지 못하고 앎이 아직 지극하지 못한 지경에 이르러, 배우는 자의 깊고 얕음과 설고 익은 차이를 살피지 아니한 채, 일괄적으로 자유가 말한 소위 근본이라는 것으로써 억지로 시끄럽게 떠든다면, 배우는 자는 질펀하게 그것을 듣지만, 실제로는 그 맛을 알지 못하고, 힘써서 그것을 행하지만 끝내 그 방도를 터득하지 못하니, 이는 곧 그를 속이는 것일 따름이다. 군자가 사람을 가르치는 道에 어찌 속이는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子游以正心誠意爲本 洒掃應對爲末 子夏謂 小子且當敎以洒掃應對 及入大學却敎以誠意正心 就二說觀之 子游欲人於根本上做來 則末底自然中節 施敎無序 把大小學袞作一事 非也 子夏之說 自合聖人之敎 但只言事而不及理 則小學大學分爲兩截 而無以貫通之至 程子方以理爲本 事爲末 謂事有小大精粗而理無小大精粗 小子未能窮理謹獨 且把洒掃應對以維持其心 雖學至粗至小之事 而至精至大之理寓焉 年寖長 識旣開 却敎之 窮理以致其知 謹獨以誠其意 前日之習洒掃應對者 卽爲精義入神之地 今日之精義入神 實不離乎洒掃應對之中也 程朱所論本末不同 朱子以大學之正心誠意爲本 程子以理之所以然爲本 朱子是以子游之意而推之 쌍봉요씨가 말하길, “자유는 正心과 誠意를 근본으로 여겼고, 쇄소응대를 말단으로 여겼다. 자하는 제자들은 장차 쇄소응대로 가르쳐야 마땅하고, 대학에 들어갈 때에 이르러 오히려 성의와 정심으로써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였다. 이 두 가지 학설에 나아가 살펴본다면, 자유는 사람들이 근본 위에서 노력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하면 말단은 자연스럽게 절도에 들어맞는다고 하였으나, 이는 가르침을 베풂에 순서가 없고 대학과 소학을 붙잡아서 굴려 하나의 일로 만든 것이니, 잘못된 것이다. 자하의 말은 저절로 성인의 가르침에 부합하지만, 다만 그저 일만 말할 뿐 이치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는 소학과 대학을 서로 다른 두 개로 구분해서 관통하는 지극함이 없는 것이다. 정자는 바야흐로 이치를 근본으로 여기고 일을 말단으로 여겼는데, 일에는 크고 작음과 정밀하고 거칢이 있으나, 이치에는 大小와 精粗가 없다고 말하였다. 제자들이 아직 이치를 궁구하고 謹獨할 줄 모르니, 장차 쇄소응대를 붙잡음으로써 그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지극히 거칠고 지극히 작은 일을 배울지라도 지극히 정밀하고 지극히 큰 이치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것이다. 점점 나이가 들어서 식견이 이미 트였다면, 오히려 가르침에 있어 이치를 궁구함으로써 그 앎을 지극히 하고, 근독함으로써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 전날에 쇄소응대를 익힌 것이 곧 정의입신의 지경이 되므로, 오늘날의 정의입신은 실제로 쇄소응대 중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정자와 주자가 논한 근본과 말단은 서로 같지 아니한데, 주자는 대학의 正心과 誠意를 근본으로 삼았고, 정자는 이치가 그렇게 된 까닭을 근본으로 여겼다. 주자는 바로 子游의 뜻으로 미루어간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學者之病有二 謂末不當理會 只當理會本者 不知理之一也 謂末卽是本但學其末而本便在此者 不知分之殊也 朱子政慮學者差認程子之意 故有是說 趙氏除去非謂二字 却謂學其末而本便在此者 理貫於萬事 不以事之近小而理有不該 則誤矣 운봉호씨가 말하길, “배우는 자의 병통에는 둘이 있다. 말단은 마땅히 이해할만한 것이 아니고 그저 마땅히 근본만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가 하나임을 알지 못한 것이다. 말단이 바로 근본이니 그저 그 말단만 배우면 근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구분됨이 다름을 알지 못한 것이다. 주자는 배우는 자들이 정자의 말을 잘못 인식할까봐 곧바로 염려하였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다. 조씨가 주자의 말 중에서 ‘非謂’라는 두 글자를 제거하고, 오히려 그 말단을 배우면 근본이 곧바로 여기에 있다고 말한 것은, 이치는 만사에 관통되므로, 일이 가깝고 작다고 하여 이치가 갖춰지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니, 이는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饒氏謂 小學未能窮理慎獨 且把灑掃應對以維持其心 年寖長 却愼獨以誠其意 蓋以大學誠意章方有愼獨工夫 然程子第二條云 君子只在謹獨 蓋程朱二子之意 政謂小學是至微之事 愼獨正要愼其微 若從念慮之微說 小學灑掃在長者之前能謹 長者不在前不能謹 便是不能愼獨 饒氏此語竊恐有誤 後學不可不辨 쌍봉요씨가 말하길, 小學 시절에는 아직 이치를 궁구하여 愼獨할 줄 모르니, 또한 灑掃應對를 붙잡아 그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고, 나이가 점점 들면 오히려 愼獨으로써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대학의 誠意章에 비로소 愼獨 공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정자는 제2조에서 말하길, 군자는 오직 謹篤에 있을 따름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정자와 주자 두 분의 뜻이다. 바로 ‘小學은 지극히 미세한 일이고, 愼獨은 바로 그 미세한 것을 삼가려 하는 것’이니, 만약 念慮의 미세함으로부터 말하자면, 小學의 灑掃應對는 어른 앞에서는 능히 삼갈 수 있지만, 어른께서 앞에 계시지 않으면 능히 삼갈 수 없으니, 곧바로 愼獨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쌍봉요씨의 이 말에는 오해가 생길지 남몰래 걱정되니, 후학들은 분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新安陳氏曰 程子此處說謹獨 與大學中庸之謹獨小異 此只是謹小事 無人所不知己所獨知之意 饒氏所云謹獨以誠其意 與程子此語不相妨 非以解程語也 신안진씨가 말하길, “정자가 여기서 말한 謹篤은 대학과 중용의 謹篤과 더불어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그저 작은 일을 삼간다는 것이어서, 남이 알지 못하는 바를 자기 홀로 안다는 뜻은 없다. 요씨가 말한 ‘근독으로써 그 뜻을 정성스럽게 한다’는 것은 정자가 여기에서 한 말과 더불어 서로 방해가 되지 않지만, 이로써 정자의 말을 풀이한 것은 아니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