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굉덕(만덕, 경주 금장사 주지)
1) 관정 스님과의 만남
출가하면서부터 나의 수행법은 염불이었다.
아미타불 모시고 아미타경 읽고 아미타불 염불을 하는 것이었다.
참선을 해도 나무아미타불이 속에서 돌아가기 때문에 화두를 들 수가 없었다.
이처럼 염불 수행하는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극락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스님이 극락을 다녀오셨고, 그 이야기를 쓴 극락세계유람기를 보게 되었다. 극락세계유람기를 읽고 극락을 다녀오신 관정 스님을 꼭 한 번 뵙고 싶었다.
1997년 극락을 다녀오신 관정 스님이 한국에 오셔서 군위 압곡사에서 법회를 갖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기회에 군위 압곡사에 가서 처음으로 관정 스님을 친견하고 마정수기를 받았고, 1998년 관정 스님 다시 오셔서 말씀하셨다.
“너는 내 제자로서 인연이 깊다.”
그래서 관정 스님으로부터 등덕(騰德)이란 법명을 받고 정법안장을 받았다.
정법안장에 기록된 게송(표신게)은 다음과 같다.
萬德 騰德
騰開淨土禪法深 정토선법 깊이 일깨우고
德傳雙修福慧明 덕을 전하고 복혜를 함께 닦아
自性竟通蓮花境 자성이 마침내 연꽃 경계에 통하면
一心念佛九品興 한 마음 염불로 9품을 일으킨다.
그러나 큰스님께서 나중에는 주로 굉덕(宏德)이라고 부르셨다.
굉덕은 임제종 항렬자라고 한다.
나중에 다른 스님들이 받은 게송을 보면 주로 처음에는 임제종 항렬, 이어서 조동종 항렬로 머리글자를 삼는데 나는 먼저 등덕이라는 조동종 항렬자를 쓰고 뒤는 항렬과 관계없는 글자를 썼다.
게송의 내용을 보면 나에게 정토선을 익히고 복과 지혜를 함께 닦아 자성이 높은 경계에 이르면 한마음 염불로 9품 극락에 간다는 뜻을 일러주신 것이다.
압곡사에서 법회가 끝나신 뒤 나는 바로 차로 스님을 모시고 강원도 정선에 있는 정토암으로 모셨다.
비록 좋은 환경은 아니지만 우리 절에서 며칠 묵으시면서 강의할 때 쓸 차트도 그리시고, 우리 절터도 봐주시는 등 편하게 지내셨다.
2) 정토선 수행과 자성염불
당시 정토암에는 굉원(宏圓, 慧圓) 스님이 함께 계셨다.
원래 법명이 혜원(慧圓)이었는데, 표신게에 앞에는 혜원이란 머리글자를 그대로 썼고 나중에 조동종 항렬자를 썼다.
그러나 평소에는 굉원(宏圓)이라는 법명으로 부르셨다.
慧圓騰滿
慧眼自知性情淸 혜안 스스로 깨달아 성품 맑아지고
圓通佛理敎導人 불교 원리 두루 통해 중생 가르쳐 이끌다
騰開宇宙萬物境 우주만물 경계 뛰어 넘어 통달하면
滿上西方九品心 서녘 극락 9품 마음자리에 넉넉히 오를 것이다.
관정 스님을 모시고 차를 타면 우리는 자주 관정 스님이 정토선 염불 선창을 하고 굉원 스님과 나는 뒤따라 하는 정토선 연습을 하였다.
정토선을 펼쳐 보이신 관정 스님이 직접 우리를 훈련시켜 주시니 얼마나 믿음이 일어나고 환희심이 났는지 모른다.
관정 스님이 돌아가신 뒤 우리 둘은 함께 정토선 집중 수행에 들어갔다.
나는 관정 스님이 오셨을 때 쓰던 방에서 하고 굉원 스님은 옆방에서 시작하였다.
한 달 쯤 되었을 때 굉원 스님부터 먼저 소식이 왔다.
“몸속에서 염불이 왕왕하고 들리고 몸이 마치 공중에 뜨는 것 같고, 마치 구름 낀 하늘에 햇빛이 쫙 비치듯 몸속이 원통처럼 확 뚫려 버린 것 같다.
당시 상황을 이렇게 말씀하셨다.
원래 굉원 스님은 소화기관이 안 좋아 흔히 남들이 먹는 시래기 국이나 라면을 한 번도 못 잡수시던 건강이었고, 그래서 그런지 나도 늘 체기가 있었던 체질이었다.
그런데 굉원 스님이 이렇게 자성염불이 되신 뒤 위병이 완전히 나아버려 15년이 다 되어 가는 오늘까지 무엇이든지 잘 잡수시게 되었다.
나는 그 뒤로도 몇 달을 더 열심히 하고서야 몸속에서 염불 소리가 깨알같이 들렸다.
굉원 스님은 관정 스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열심히 하는 근기가 있었지만, 나는 늘 생각하여 헤아리고 스스로 시름과 걱정을 만들어내는 편이었다.
그래서 굉원 스님이 자성염불이 되자 이런 생각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가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눕거나(行住坐臥) 염불이 되는 원통이 안 되면 뚫리지 않는구나.”
“나는 집중이 안 되고 내면적으로 산만하구나.”
당시는 이런 쓸데없는 망상이 바로 자성염불이 한마음(一心) 단계로 가지 못하는 것이라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한 발 더 나아가 굉원 스님은 자신의 몸속에서 염불 소리가 크게 들리고 몸이 붕 뜨는 것 같은 현상에 대해 두려움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눈을 뜨고 해 보시라.”라고 했지만 나 또한 그것이 정확한 처방인지 알지 못하면서 한 소리였다.
산속에서 물어볼 곳도 없는 두 초보자는 그 뒤 처음 가졌던 마음자리가 느슨해지면서 좋은 시작을 제대로 키우지 못했다.
1년 뒤에 관정 스님이 다시 오셨지만 이런 현상을 질문하여 바로 잡을 생각을 못하고 “나는 아직도 제대로 공부가 안 됐다”는 생각만 하면서 그렇게 시간만 보냈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적극적으로 파고들어 묻고 수행하는 근기가 부족했던 것이다.
3) 관정 스님 시봉 이야기 – 큰스님은 보살이시다.
처음 관정 스님을 만나기로 한 날 꿈에 밥상을 차리는 꿈을 꾸었다.
실제로 2000년 큰스님이 전국을 돌아다니시며 법회를 하실 때 시봉하면서 주로 큰스님의 공양과 의발 시중을 들었다.
돌이켜 보면 전생에 큰스님의 피붙이가 아니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절에서 행사를 하실 때는 절에서 차린 상을 가져다 드리는 일만 했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내가 직접 공양을 지어 올릴 때가 많았는데 중국 음식을 만들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처음에는 막막했다.
관정 스님은 빵도 계란이 들어서인지 안 잡수시고 일체 채식만 하셔서 그래도 하나라도 마음에 드시는 음식을 만들어 보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였다.
보통 때 야채에 기름을 많이 넣고 볶음밥을 해드리면 아주 좋아하셨다.
중국 물품 파는 데 가서 두부를 짜게 발효시킨 홍부유(紅腐乳)를 사다 드리면 아주 잘 드셨다. 옥수수도 좋아하신다.
나는 옥수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때부터 옥수수를 하나씩 먹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 홍부유(紅腐乳)을 먹으면서 스님을 그리워한다.
큰스님은 아무리 더워도 샤워를 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겉옷은 물론 내복도 갈아입지 않으신다.
그러나 큰스님 몸에서는 전단향 향내가 났고 늘 따뜻하셨다.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비구 스님들이 스님을 목욕탕으로 모시려고 애쓸 때를 보면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큰스님은 부드러우셨다.
혹시 우리가 실수해서 꾸짖으실 때는 호랑이처럼 무서운 호령을 하셨지만 평소에는 정말 자애로우신 도인이셨다.
당시 몇몇 스님들과 함께 부산에서 서울로, 다시 서울에서 부산으로 강행군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피곤하지 않았다.
깨달은 분의 에너지는 주변 몇 m까지 미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관정 스님은 어떤 절을 가시게 되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그 절에 대해서 알고 계셨다.
어느 날 우리에게 말씀하셨다.
“오늘은 꼭 새벽 예불에 참석하여라.”
그 절의 주지 스님 마음을 읽고, 필요에 따라 이런 행동지침을 내려주시기도 했다.
보통 절에 가면 마이크 장치를 하는데 관정 스님은 “마이크 없으면 내 소리가 더 크게 들릴 것이다.”고 하셨다.
실제로 법회하실 때 보면, 80살이 다 되신 노스님으로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우렁찬 목소리를 힘주어 또박또박 말씀하신다.
관정 스님이 한국에서 법회를 할 때는 천도재를 가끔 했다.
일반 사찰에서 정기 법회를 빼고 신도들을 모이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천도재를 하면 많은 공양물을 준비한다.
그러나 관정 스님은 늘 “편하게 하라.”고 하시지 무엇을 차리느냐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시지 않는다.
다만 밀가루를 놓도록 하고, 영가의 옷에 영가의 이름을 쓰도록 하는 것이 다르다.
그리고 가는 곳마다 영가를 보고 그 영가에 맞게끔 염불을 하고 진언을 하신다.
천도재가 끝나면 영가가 “극락 중품 이상 갔다.” “하품 이상 갔다.” “갈 곳을 갔다.”고 일러 주신다.
우리 집 천도재 할 때는 “아버지는 극락에 갔다.”고 하셨는데, “동생은 떠돌고 있다.”고 하셨다.
동생의 사인을 말씀드리지 않았는데 정확하게 집어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 뒤 다시 천도를 해 주었다.
울주군 서생면 관음사에 갔을 때다.
관정 스님이 이곳에는 웬 영가가 이렇게 많으냐며 깜짝 놀라신다.
알고 보니 이 절 법단 아래는 이 절에서 평생 천도재를 지냈던 위패들이 가득 차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주지스님께 큰스님 계실 때 위패를 정리해야 한다고 귀띔했더니, 갑자기 등짝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관정 스님이 금방 알아보시고 가까이 오라고 하시더니, 손을 코밑에 싹 문지르시고 주문을 외우시면서 내 등짝을 한 번 딱 치니 바로 등짝이 시원해졌다.
보통 다른 절에서는 천도재를 하면 20분 정도면 마치시는데, 이곳에서는 거의 1시간 이상이나 걸렸다.
그 많은 영가들을 말끔히 천도하신 것이다.
큰스님은 시력이 나빠 늘 눈이 불편하셨다.
문화대혁명 끝나고 큰스님이 일주일간 선정에 들어갔다 나오셔 많은 군중들이 스님에게 몰려들자, 중국 당국에서 연행해가서 머리 수술을 했을 때 눈의 시신경을 다 끊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나마도 눈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관세음보살님이 낫게 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치료 능력이 탁월한 보리선원 법사님을 모시고 가서 큰스님 치료를 부탁하였다.
치료를 마친 법사님이 말씀하셨다.
“대사께서는 대단한 분이시다.
이미 허공에 관세음보살을 비롯하여 많은 불보살들이 호위하고 계신다.”
나는 지금도 큰스님이 보통 스님이 아니고 보살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큰스님은 귀속에서 난 털이 밖으로 튀어 나와 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조용한 시간을 틈타 여쭈어 보았더니 이렇게 대답하셨다.
“스님은 왜 다른 사람과 달리 귀속의 털이 밖에까지 자라고 있습니까?”
“그것은 마지막에 나는 도인(道人)의 털이다.”
4) 큰스님 가까이서 모시며 많은 은혜를 입었다.
스님은 내가 게으른 단점이 있다는 것도 알고 계셨고, 폐활량이 작고 비장이 약하다는 것을 아시고, 늘 “피곤하니 일찍 자거라.” “많이 먹어라.” 하시며 어린애 보살피듯 자상하게 대해 주셨다.
강원도 정선에 있던 정토암을 정리하고 다른 곳에 절을 세워보겠다고 말씀드리자 새로 지을 절터를 몸소 찾아가 봐주시고 어떻게 절을 지을지 큰 전지에다 자세하게 그려 주셨다.
우선 그 그림의 제목을 “대한국(大韓國) 정토선사(淨土禪寺) 전경”이라고 쓰시고, 한 가운데 ‘대웅보전(大雄寶殿)’을 짓고, 대문은 오(午)자 방향으로 오른쪽 모퉁이에 내고, 전면에 담을 쌓은 뒤 그 담에 나무아미타불을 쓰라고 하셨다.
2002년 2월 관정 스님은 나에게 자신이 간직하고 계시던 스승 허운 화상의 사리 3과를 주시면서 그 사리의 내력과 이 사리를 어떻게 쓸 것인지에 대한 증명서를 써 주셨다.
아울러 가사를 한 벌 가져다주시며, 가사에다 동운종 대대로 전하는 조사의발(洞雲宗 代代傳 祖師衣鉢)이라고 써 주셨다.
동운종(洞雲宗)은 우리가 잘 아는 조동종(曹洞宗)과 같은 법맥이다.
그런데 관정 스님이 주신 정법안장이나 이 가사에는 모두 동운종이라는 이름을 쓰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조동종 이름을 관정 스님의 스승이신 허운 화상이 바로 잡은 것이라고 한다.
조동종(曹洞宗)의 조사는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 선사인데, 동산(洞山)에서 새로운 종파를 창설한 양개(良价)는 제법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재능을 보인 것이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이다.
본적(本寂)이 조산(曹山)에서 스승인 양개의 선풍을 이어받아 크게 떨쳤기 때문에 조산(曹山)의 조(曹)자와 동산(洞山)의 동(洞)자를 합해서 조동종(曹洞宗)이란 이름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조산본적의 법맥은 5대쯤 가서 끊겨 버린다.
한편 같은 동산양개의 제자인 운거도응(雲居道膺, ~902)의 법맥은 지금까지도 이어내려 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조동종 이름이 생기게 된 조산본적(曹山本寂)의 법맥은 끊어졌기 때문에 실제 법맥은 운거도응(雲居道膺)이 이어받았고, 이런 사적을 잘 아르신 허운 화상은 동산양개(洞山良价)과 운거도응(雲居道膺)의 첫 자를 따서 동운종(洞雲宗)이라고 고친 것이다.
관정 스님이 주신 가사는 물론 동운종의 조사(祖師)이신 운거도응(雲居道膺) 때부터 내려온 가사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관정 스님의 옛 선사들이 법을 전해 줄 때 의발을 전해 주시던 법도를 본받아 나에게 가사를 내리신 것이다
관정 스님의 마정수기는 정말 신비감을 자아내게 한다.
손을 코밑으로 싹 문지르고 손가락을 세워 ‘띠디디디디’하고 주문을 외실 때는 사람에 따라서는 온몸에 전기가 들어오는 것 같다는 분들이 많았다.
나는 큰스님을 가까이 모셨기 때문에 시간이 나면 수시로 수기를 해 주셔서 늘 환희에 차 있었다.
어느 날 관세음보살을 꿈에 뵙고 관정대사님을 만나라고 현몽한 보살에게 마정수기를 하는데, ‘띠디디디디’하고 수기를 하자 마치 굴삭기로 뚫는 것 같은 감을 내가 느낄 수 있었다.
“아! 저 보살은 이제 마지막 뚫는구나!”
이런 나의 생각을 큰스님이 아셨던지 “너에게 마정수기하는 법을 전수해 주겠다.”고 하셨고, 어려운 수인도 여러 번 보여 주셨지만 나는 인연이 박했는지 다음으로 미루었다.
다음에 또 오시면 배운다고 되뇌며 시간만 보냈는데 2004년 이후는 오시지 못했고, 2007년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나이 들어 생각해 보니 큰스님을 곁에 모시며 제대로 배우지 못했던 것이 너무 아쉽고 또 아쉽다.
지금도 내 방에는 내가 모신 두 스승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 있다.
어느 날 나는 큰스님에게 여쭈었다.
“진부티(金菩提) 상사 밑에 가서 공부하려고 생각합니다.”
큰스님은 대답하셨다.
“그 분의 명성은 중국에서도 들었다.
“사람을 이익 되게 하는 법이면 사법(邪法)은 아니다.”
지금은 큰스님의 은혜를 가슴에 안고 스승 진부티(金菩提) 밑에서 수행한다.
이제 큰스님 탄강 90주년을 맞아 이 글을 쓰면서 되돌아보니 큰스님이 주신 은혜에 만분의 일도 갚지 못한 것 같아 부끄러움이 앞선다.
그러면서도 염치없는 마음은 아직도 큰스님의 가피가 함께 계신걸 항상 느낀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큰스님께서 나를 꼭 극락으로 데려가신다는 손가락을 걸고 한 약속을 떠올려본다.
“극락에 가면 이제는 오지 않는다. 너무 힘들다.”
“큰스님 저도 극락세계 왕생하도록 데려가 주세요.”
“알았다. 꼭 데려가 주마.”
아~ 극락에서 뵈올수 있기를….
그러니 나는 극락 아닌 곳은 갈 곳이 없다..
"극락 다녀온 관정스님과 극락 가는 사람들"에서 옮김
관정스님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
편안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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