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19. 1.5~6 이틀에 걸쳐 통영과 그 앞바다에 있는 무인도인 납도에 다녀왔다. 통영에서 미륵산 케이블카를 타고 산 정상쪽으로 오르며 섬연구가이고 통영에 관한 저서를 낸 시인 강제윤 선생에게, 통영출신의 소설가 박경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박경리 선생은 그녀가 고향인 통영( 1995년까지는 충무라 불리웠다)을 떠난 이후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그녀의 초기 장편소설 <김약국의 딸들>이 실제 충무에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한 것이기에 고향을 찾아갈 수 없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래서, 그렇게만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히 강제윤 선생의 글을 통해 박선생이 재혼과 이혼의 과정을 거쳤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륵산에서 케이블카를 함께 타고 올라가면서 박경리 선생의 개인적 사정에 대한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물어보았다. 그는 증언자가 아직 생존해 있다고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박경리 선생은 철저하게 함구하고 있었던 그녀의 잊고 싶었던 개인적 과거사를 이곳에 올리는 것은, 그녀의 많은 작품들과, 또 그녀의 대표작인 대하소설 <토지>를 읽으면서 느꼈던 묘한 의아심, 특히 남성 주인공의 성격 형상화에 대한 해명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대하소설 <토지>의 작가 박경리(1926.10.28 ~ 2008.5.5) 선생은 살아생전 고향 통영을 떠난 뒤 50년 동안이나 고향을 찾지 않았다. 외국에 나가 살았던 것도 아니고 수몰민이나 실향민처럼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처지도 아니었는데 선생은 어째서 50년 세월, 단 한 번도 고향을 방문하지 않았던 것일까. <토지>나 <김약국의 딸들>, <파시> 같은 선생의 소설 속에는 통영을 끊임없이 등장시켰으면서도. 혹 고향에 돌아갈 수 없는 말 못 할 사정이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
2004년 11월 5일, 박경리 선생은 떠난 지 50년 만에 처음으로 고향 통영을 찾았고, 남망산의 시민문화회관 강연을 통해 고향 사람들과 다시 만났다. 거리 곳곳에는 선생을 환영하는 현수막들이 내걸렸고 800석의 문화회관 대극장은 '송곳 세울'(立錐) 틈도 없이 꽉 들어찼다. 무명의 여인 박금이로 떠났던 고향을 대작가 박경리가 되어 돌아왔으니 가히 금의환향이라 할 만했다.
이날 강연에서 선생은 통영을 떠나 산 지난 세월이 '생존 투쟁'의 나날이었고 25년간은 소설 <토지>를 쓰느라 또 10년간은 원주의 토지문화관을 꾸리느라 힘들어서 고향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도 못 가봤다고 말했다. 또 '기질 탓'에 고향을 찾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아무리 그래도 그사이 한 번도 못 왔느냐고 물으시면 변명인지는 모르겠으나 제 기질 탓도 있습니다. 어릴 적 저는 방안에만 있는 '구멍 지기'라고 어머니한테 야단맞곤 했지요. 결혼 때는 이웃에서 이 집에 처녀가 있는 줄 몰랐다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수줍음이 많아서 지금도 낯선 사람 만나는 게 힘들어요. 잘나고 도도해서가 아니라 제가 워낙 그래요." - <한국일보> 2004년 11월 5일
선생이 50년이나 고향 땅 통영을 찾지 않았던 것이 과연 그 이유만이었을까? 선생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이날 강연에서 선생은 그 "세월 동안 고향뿐만 아니라 다른 어디에도 못 가봤다"고 했지만 1989년 여름에는 중국 각지를 여행한 뒤 이듬해 <만리장성의 나라>라는 중국 기행문집까지 펴낸 바 있다. 또 2002년에는 10년 만에 하동을 다시 찾아가기도 했었다. 그러니 고향뿐만이 아니라 아무 데도 못 갔다는 말씀은 그저 '변명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체 왜 중국 여행도 하고 10년 사이 하동에는 두 번씩이나 갔으면서도 하동과 지척의 고향 통영을 찾지 않았던 것일까.
수업 중에도 소설책 보느라 공부는 중간
▲ 고향 통영은 박경리에게 아픔과 위로를 함께 준 곳이다. 박경리 기념관 모습. ⓒ강제윤 제공
나그네는 지금 통영시 산양읍 신전리 박경리 기념관 전시실 벽 앞에 서 있다. 벽에는 박경리 선생이 남긴 어록이 새겨져 있다.
"문학이라는 것은 '왜'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멈출 수 없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학의 골자입니다."
선생은 왜라는 질문을 던지며 창작을 했지만, 나그네는 박경리 선생이 50년 동안이나 고향을 찾지 않았던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왜'라는 질문을 던진다. 박경리 선생의 본명은 '금이'다. 통영에서 태어나 국민학교에 다녔던 소녀 금이는 수업 시간에도 소설책을 볼 정도로 책을 좋아했었다. 그래서 국민학교 시절 공부는 겨우 중간쯤밖에 못했다.
"집이 가난해 엄마가 바느질 등으로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지만, 어린 금이는 언제나 당당하고 궁색한 법이 없었다. 그리고 자립심이 강하고 무슨 일이든 최선을 다했지. 평생 그랬던 것 같아. 지금 생각해 보면…." -<한산신문> 2008년 5월 9일
<한산신문> 김영화 기자가 소녀 금이와 어린 시절 친구였던 홍봉연 할머니에게 들은 증언이다. 박경리는 1945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1946년 1월 30일 김행도와 결혼했다. 하지만 남편 김행도는 한국전쟁 중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사망했다. 혼자가 된 박경리는 아들딸 둘을 데리고 고향 통영으로 내려왔다. 항남동 오거리 부근에서 수예점을 열었다. 당시 친구들이 수예점을 드나들며 물건을 많이 팔아주었다. 자존심 상하지 않게 도와준 것이었다고 홍봉연 할머니는 전한다.
그러나 돌아온 고향에서 박경리는 안식을 찾지 못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을까. 고향은 그녀를 품어주지 않았다. 어느 해 박경리 선생은 쫓기듯이 통영을 떠나야 했다. 그날 이후 박경리는 평생 통영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한다.
적삼 하나만 입어도 서문안 고개가 환해지던 어머니
▲ 박경리 선생이 태어난 집에 지금은 다른 이들이 살고 있다. ⓒ강제윤 제공
세병관을 지나 충렬사 방향 언덕길을 오른다. 이 일대가 박경리가 어린 시절 금이로 살던 동네, 간창골이다. 간창골은 삼도수군통제영 관아 아랫마을인 관청골이 와전된 이름이다. 간창골 도로변을 따라가는데 고풍스런 2층짜리 붉은 벽돌 건물 하나가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은 본래 통영청년단 건물이었다. 삼일운동 직후인 1923년 준공돼서 1931년 통영청년단이 강제 해산될 때까지 10여 년간 통영 항일운동의 본산지였다. 지금은 통영문화원과 통영고등공민학교가 함께 사용하고 있다. 참으로 귀한 역사 유물이다.
서문 고갯마루에 왼쪽 골목이 박경리 생가로 가는 길이다. 이 고개는 옛날 통영성의 서문인 금숙문이 있던 곳이다. 그래서 서문고개가 됐다. 통영 말로는 서문 까꾸막이다. 골목 입구에는 <김약국의 딸들> 표석이 놓여 있다. 이 일대는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들>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박경리는 어린 시절 자신이 살던 마을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여 생생하게 되살렸다. 표석을 지나 골목 안쪽으로 들어서 쭉 직진하면 박경리 생가였던 집이 나온다. 지금은 다른 이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이다. 벽에 붙은 작은 푯말이 이 집의 내력을 알려 준다.
박경리가 태어난 뒤 아버지(박수영)는 젊은 여자 '기봉이네'와 딴살림을 차려 나갔고 어린 박경리는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다. 어머니는 '적삼 하나만 갈아입어도 서문안 고개가 환해졌다'고 할 정도로 고왔다. 아버지는 새터(지금의 서문시장 일대)에서 차부를 운영했다. 통영에 하나뿐인 화물차 차부. 아버지는 통영에서 생선을 실어 진주로 보내면 진주에서는 과일을 싣고 오던 화물차의 차주였다. 차부에는 살림집이 딸려 있었고 아버지는 거기서 '기봉이네"와 딴살림을 살았다. 그 덕에 박경리는 일찍부터 상처를 먹고 자랐다. 박경리도 스스로 그 시절의 경험이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 바 있다.
"나는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경멸, 아버지에 대한 증오, 그런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고독을 만들었고 책과 더불어 공상의 세계를 쌓았다."
소설 쓰기는 어쩌면 어린 시절 입은 상처를 봉합하는 과정이 아니었을까. 상처는 덧나면 죽음을 불러오기도 하지만 잘 아물면 보석이 되기도 한다. 진주조갯살 속의 상처가 진주를 키우듯이. 박경리는 생살을 파고든 온갖 상처들을 덧나지 않게 잘 다스려 문학이라는 빛나는 진주를 키웠다.
총각 선생과 재혼
▲ 기념관에 유품으로 재현된 박경리 선생의 집필실. ⓒ강제윤 제공
박경리가 평생 통영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갖게 한 그 일은 무엇이었을까? 혹 그 일 때문에 선생은 50년 동안이나 고향 통영을 찾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삼십대 초반, 박경리는 돌아온 고향 통영에서 충렬초등학교 음악 선생과 재혼을 했다. 총각 선생은 그녀의 딸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였다. 용화사 옆 작은 암자에서 정화 스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세간의 비난이 쏟아졌다.
짐작건대 당시에 총각 선생이란, 더구나 총각 음악 선생이란 지금의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와 동경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처녀도 아닌 애 딸린 과부'가 총각 선생과 결혼을 했으니 무사할 수가 있었겠는가. 온갖 악소문과 질시에 시달렸고 결혼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 와중에 불의의 사고로 아들마저 죽었다. 참척(慘慽)의 슬픔을 당한 것이다.
그 사건 이후 박경리는 통영을 떠났고 50년 동안 단 한 번도 통영을 찾지 않았다. 결국, 그녀가 그 오랜 세월 고향을 등진 것은 그 일련의 사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50년 만에 돌아온 고향 통영에서 그녀는 그 당시 일의 섭섭함에 대해 일절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고향에 돌아왔고 고향에 묻히길 원했고 고향에 묻혔다. 고향이란 그런 곳이다. 50년 동안이나 간직한 원망도 설움도 한순간에 녹여버리는.
연민이라는 복음
▲ 고향 통영 바다가 보이는 양지 녘에 누워 선생은 영면에 들었다. ⓒ강제윤 제공
통영대교 건너 박경리 기념관으로 간다. 기념관 뒷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는 선생의 묘지도 있다. 바다가 환히 내려다보이는 해변의 묘지. 고향은 그녀에게 상처를 입혔지만 그녀는 끝내 고향으로 와 잠들었다. 고향도 끝내는 그녀를 품었다. 기념관 전시실에는 토지 친필 원고와 여권, 편지 등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나그네는 다시 기념관 전시실 벽 앞에 서 있다. 그녀가 가졌던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가슴을 파고든다. 약자들에 대한 연민이야말로 그녀가 소설을 통해 세상에 널리 전하고자 하는 '복음'이 아니었을까.
"사랑이라는 것이 가장 순수하고 밀도도 짙은 것은 연민이다. 연민, 연민은 불쌍한 것에 대한 말하자면 허덕이고 못 먹는 것에 대한 것, 생명이 가려고 하는 것에 대한 것에 대한 설명이 없는 아픔이거든요, 그것에 대해 아파하는 마음, 이것이 사랑이에요. 가장 숭고한 사랑이에요." - 박경리, 2004년 마산 MBC 특집 대담에서
유마거사는 세상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 했다. 그가 진정한 보살인 이유다. 박경리 선생도 세상의 아픔을 같이 아파했다. 그래서 그녀의 문학은 세상의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가 위대한 예술가인 이유다. 약한 것들에 대한 연민이 없는 예술은 예술이 아니다.
첫댓글 🤗 원주 박경리문학관 앞에 푸근한 모습의 동상이 눈에 아른거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