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특별한 친구들
시골에서 초등학교 4년이던 때
5명의 아이가 전학을 왔다.
이 아이들은 산 너머 나환자촌에서
격리되어 살아가던 아이들이었는데
나환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죄로
그때까지 격리되어 살았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의학계에서
나환자 어머니로부터 태어나는 아이들도
양수 속 태아시절에는 감염이 안된다는게 입증되었고
나병조차도 완치약이 개발되었다.
이후부터 정부에서 나환자촌의 2세들을
일반학교에 함께 보낼 수 있도록 국민들의 협조를 구했는데
워낙 고정관념이 강했던 탓으로 여의치 못했으며
우리 학교의 학부모도 거세게 반발했다.
결국은 다섯 친구중 넷은 서로가 짝쿵이 되어
별개의 책상을 같이 쓰게 되었는데
남은 남자친구 하나는 격리해서 두기도 힘든 처지였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버지가 공무원이신 나의 옆자리에
전학 온 남자친구를 앉히게 하셨다.
나병에 관하여 교육을 받으신 아버지께 미리 양해를 구하셨고
아버지도 내게 설명을 하시면서 내 의사를 물어보셨다.
나도 아버지를 믿었기 때문에 같이 있겠다고 했다.
나는 점심때면 도시락 반찬도 함께 나누어 먹었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들으시고는 기절하실 정도가 되셨다.
혹여 아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싶어서
책상을 따로 쓰도록 선생님께 요청해달라시며
아버지께 강력한 주문을 하셨다.
아버지는 그날 밤에 나를 따로 부르셨다.
그리고는 나한테 물으시는 것이었다.
"너, 그 애랑 같은 책상 쓰는 것이 무섭나?"
"엄마가 같이 밥먹으면 큰일난다고 하시니 좀 무서워요..."
아버지가 조용히 내 어깨를 껴안으셨다.
"괜찮다. 아무 일 없을 거야. 그 친구들하고 잘 지내라..."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한참을 내 어깨를 토닥거려 주셨다.
사실 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친구들은 말도 안건넸다.
나까지도 문둥이 되었다며 멀리하는 친구도 있었다.
결국 이를 눈치챈 내 짝이 나까지 피해본다며 제의를 해왔다.
자기는 괜찮으니까 다른 친구들하고만 말하라고 했다.
나는 그럴 수 없다고 했고
몇달이 지나자 급우 전체가 점점 분위기가 좋아지게 되었다.
1년을 그렇게 함께 지내고 나는 읍내로 전학을 왔고
그 후로는 서로가 만나지 못했다.
그러던 중 군에서 제대해서야 고향에 있던 친구에게서
그 친구들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모두가 대화만 해도 문둥이가 된다고 믿었던 친구들 속에서
유독 반찬까지도 함께 나누었던 내가
그들에게는 크게 위안이 되었던지
자기네들끼리 모이면 내 이야기를 많이 한다면서
나를 찾아 일부러 내 고향까지 찾아 왔었다는 것이었다.
자기들 부모와 같은 환자들을 돌보고자
간호학과에 진학했다던 친구도 있었고
일류대에 진학해서 유학을 가겠다는 친구도 있었다고 했다.
내 짝이었던 친구도 성직자로서의 길을 택했다고 했다.
내가 제대를 하면 자기에게 꼭 연락을 주라고 했었다지만
내 짝도 유학을 떠나면서 이후로는 아예 연락할 길이 없었다.
지금도 하얀 가운의 간호사와 신부복장을 보면 그들이 생각난다.
그때는 몰랐던 그들의 애환에 대하여
철들면서 그들이 얼마나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는지 알게 되었고
사소한 일로 힘들어했던 내가 시간이 갈수록 부끄러워졌었다.
그 친구들은
두 팔과 다리가 있고 생각할 줄 아는 머리 하나만으로도
스스로를 완전한 존재라고 생각할 줄 알았다.
그 혹독한 편견과 격리를 당했는데도 말이다.
요즘도 다소 힘든 시간을 보내는 내게
그들이 자꾸 생각난다.
그리고 아버지의 한마디 격려가
나이를 먹을수록 내게 미친 영향도 적잖음을 알게 된다.
햇빛이 찬란할수록 생기는 그늘은 더욱 선명해진다.
누구에게나 성공을 일궈낸 인간승리의 뒤안길에는
언제나 눈물로 범벅이 된 빵이 있다.
오늘도 하루종일 가랑비 내리고 어두운 날씨.
그들이 보고싶다...
2001. 11. 송창한
첫댓글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