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전체
한시와 한국화 산책(2) - 매화 창가에서
한시와 한국화 산책(2) - 매화 창가에서
근래의 안부는 어떠신지요 사창에 달 떠오면 하도 그리워, 꿈 속 넋 만약에 자취 있다면 문 앞 돌길 모래로 변하였으리.
近來安否問如何 근래안부문여하 月到紗窓妾恨多 월도사창첩한다 若使夢魂行有跡 약사몽혼행유적 門前石路己成思 문전석로기성사
- 이옥봉(李玉峯, 1550∼1600, <자술(自述)> -

양현정, 끝없는 길
님을 그려 지은 시다. 근래에 안부를 묻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님이 나를 찾은 것이 하마 오래였음을 알 수 있다. 여느 때 같으면 견딜 만하다가도 깁창으로 달빛이 스며드는 밤이면 더더욱 그리움을 가눌 길 없다. 님을 만날 방법은 꿈길밖에 없어, 나는 오늘 밤도 꿈길을 따라 님의 곁으로 간다. 무심한 님은 꿈에서도 나를 본체만체하지만 그를 향하는 내 마음은 나도 어찌해 볼 도리가 없다. 3, 4구에서 이 시를 읽는 묘미가 있다. 만일 꿈 속의 일이 자취로 남는 다면, 그 많은 밤마다의 꿈은 집 앞의 돌길이 다 닳아 모래로 변하게 하기에 충분하리라는 것이다. 남들이야 편히 잠을 잔다고 할지 몰라도, 굳이 잠을 청하는 것은 그길 밖에는 님을 만날 길이 없는 까닭이다.
이명한(李明漢, 1595∼1645)님의 시조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꿈에 다니는 길이 자취 곧 날 양이면 님의 집 창 앞에 석로(石路)라도 닳으련마는 꿈길이 자취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그는 아마 이옥봉의 한시를 보고 이 시조를 지었던 모양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에 머물고 싶은 마음은 늘 안타깝다. 자취 없는 꿈길이고 보니 내가 밤마다 그 창 앞을 서성거려도 님은 내 마음을 아실 리가 없다. 나는 그것이 슬픈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무명씨의 시조 중에는 이런 것도 있다.
사랑이 거짓말이 남 날 사랑 거짓말이 꿈에 와 뵈단 말이 그 더욱 거짓말이 날같이 잠 아니 오면 어느 꿈에 뵈리오.

양현정, 길을 찾을 수 없는 길
님은 날더러 사랑한다고 속삭이지만, 나는 그것이 멀쩡한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님 그려 잠 못 이루고 밤마다 하얗게 새우고 있는데, 팔자 좋게 누워 자며 꿈에서 나를 찾아와 만났다니 이 무슨 배부른 소리란 말인가 ?
이옥봉의 시를 하나 더 읽어 보자. 제목이 <즉사(卽事)>다. 문득 떠오른 생각을 노래했다는 의미이다.
버들숲 밖 강머리에 오화마 울고 까부룩 술에 취해 술집 나설 때, 거울 앞 청춘은 비쩍 말라서 매창에서 반달 눈썹 그려 봅니다.
柳外江頭五馬嘶 류외강두오마시 半醒半醉下樓時 반성반청하루시 春紅欲瘦臨粧鏡 춘강욕수임장경 試畵梅窓半月眉 시화매창반월미
嘶 : 말 울 시, 瘦 : 여윌 수
버둘숲 밖 강머리에서 히히힝 하고 우는 말 울음소리가 들린 것만 같다. 아! 늦은 술자리가 이제 파해서 술집을 나서시나 보다. 붉어진 얼굴로 활짝 웃으며 조금 미안한 표정으로 불쑥 대문을 들어서지는 않을까? 오늘은 혹 나를 찾아 주지 않으실까? 하염없는 기다림에 지쳐 수척해진 얼굴은 그만 마음이 다급해져서 화장 거울 앞에 자리를 고쳐 앉는다. 틀림없이 오실 것만 같아서 매화 그림자 흔들리는 창가에 뜬 반달처럼 곱게 눈썹을 그려 본다. 환청이었을까? 조금 전 내 귀에 분명히 들렸던 오화마(五花馬)의 울음 소리는 달빛 따라 방 안의 그림자만 빙빙 도는데, 곱게 그린 눈썹이 서운하도록 님은 오실 줄을 모른다.
싱겁고 맨숭맨숭한 나날들 속에서 마음에 이런 사무치는 기다림 하나 지니고 살았으면 싶을 때가 있다.
(정 민의 <꽃들의 웃음판> 책에서 전재)
전시회 관람기
경인미술관에서 한국화 <연후(然後)전>을 본 감흥
꼭 한 달 쯤 전이다. 서울서 볼 일 마치고 관훈동 경인미술관으로 행선을 잡았다. 경인미술관은 나를 실망시키는 적이 없다. 꼭 갈 때마다 걸죽하고 옹골찬 전시 작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가 살랑살랑 오는 둥 마는 둥 하는데, 날씨는 알맞게 쌀쌀맞다. 미술관 현관을 들어서니, 아직 가지에 붙어 있던 배롱나무 낙엽이 트렌치 코트 위로 팔랑 떨어진다. 오늘 주 전시 작품은 '연후전'이라 한다. 영어로 'After'란 말인가 본데 어떤 일의 다음 순간을 즐긴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헤어지고 난 뒤, 복사꽃이 떨어지고 난 직후, 낙숫물이 처마 밑에 떨어진 다음 등등..., 한국화를 벗으로 삼아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30여 인의 여성들로 이루어진 모임인데, 벌써 열 세 번째 전시란다. 그러고 보니, 한 칠 년 쯤 전에 본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다들 교육 현장에 몸을 담고 있는데, 초등학교 교사가 제일 많았다.

이정인, 한련화
여인들이 그린 한국화라면 일순 호감부터 간다. 선과 색채가 곱고 유려하기 때문이다. 역시 전시장 곳곳에 은근하고 맵시 고운 작품들이 저마다 향기를 내뿜고 있다. 보통 전시 공간에 들어섰을 때 한 번 죽 훑어보며 전체적인 느낌을 가늠하는 습관이 있는데, 이번에는 기법이나 형체보다 느낌과 감흥이 향기를 담고 바로 밀려왔다. 찬찬히 작품 하나 하나를 뜯어보며 이런 그 느낌은 공통된 하나의 생각이 되었다. 마치 한복의 색상이랄까, 아무리 양복이나 양장이 화려하고 빛나더라도, 갑사 비단이나 수놓은 공단의 곱고 온유한 색깔에 비하지 못한 것처럼, 이 그림도 서양 채색화가 주지 못하는 아련한 색감과 소박한 질감을 느끼게 하여 주었다. 여인들의 작품이라는 선입감 때문이라기 보다, 전체 작품들이 여인의 단아한 풍모를 가졌다. 봄 가을 규방의 깁창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처럼 투명하고 고즈녁했다.

정란순, 氣-律
한참 감상하고 있는 사이에, 또아리 나무 계단을 밟고 이층으로 올라오는 하이힐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세 명의 아가씨들이 작품 보러 와 있었다. 그 중 하나, 나의 눈을 크게 뜨게 한 여인의 옷차림, 노랑색 셔츠와 연고동색 스커트를 받쳐 입은 위에 진청록색의 벨벳 자켓을 걸치고 옥색 스카프를 V자로 둘러맨... 웨이브 머리를 한 여인의 옷차림, 강하고 진한 색을 어떻게 저렇게 조화롭게 연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생기발랄한 표정과 몸가짐, 그 모습이 초봄을 알리는 전령사처럼 나의 가슴을 때렸다. 관람을 다 한 연후라 참으로 다행이었다. 관람 도중에 그녀가 들어와 내 눈에 꽂혔다면 나머지 다른 작품들을 혹시 건성으로 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몰래 휴대폰 디카의 단추를 눌렀다. 참으로 나도 주책이다. 그러나 상큼하고 발랄한 그녀 모습은 분명 봄철 전시장 한구석에서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보였다. 이래저래 봄 향기를 느끼고 즐겼던 하루로 기억된다.

최화순, 아름다운 동심
전시회 소식 1. 천수 노상동 (千手 盧相東) 문인화전 일시 : 2006.03.15.수~2006.03.30.목 장소 : 목연 갤러리
획 하나로 서법의 이치를 연구하여 한일자의 실체를 밝히고 한일자서예라는 새로운 형태의 서법을 확립하여 서예적 방법과 요소를 통한 현대회화로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천수 노상동의 현대서예전이 3월 15일(수)부터 30일(목)까지 명덕네거리 대구불교회관 내에 있는 목연갤러리에서 초대전으로 열린다. 이미 수년간 전통의 서예정신을 바탕으로 문자의 조형성을 해체하여 글씨이기도 하고 그림이기도 한 한일자체의 작업을 하고 있는 천수 노상동 선생은 문자의 획을 분해한 파서와 다시 획을 쌓는 적서의 기법에 획을 이루는 먹을 색으로 분해하여 흰 여백의 공간 위에 묵필과 색필의 다양한 조형과 작가의 정신적 근간인 반야심경의 독특한 리듬과 운율이 서로 돋보이게 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다. 이번 작품에서는 작가의 정신적 근간인 반야심경을 한일자체로 크고 작게, 길고 짧게, 진하고 흐리게, 빠르고 느리게, 넓고 좁게 등 여러 가지 운필과 묵필, 색필의 파서와 적서를 통한 색획과 먹획이 어우러져 나타나는 다양한 조형적인 추상미술의 바탕위에 전통에 충실한 서예의 형식과 내용을 얹어 전통의 문자 와 현대회화가 한 공간 안에 어우러진 새로운 형식의 서예회화작품 20여점을 선보인다.

2. 자연의 숨결, 생명을 노래함 일시 : 2006.03.20.월~2006.04.22.토 장소 : 갤러리 분도 진보적인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을 지향하는 갤러리 분도는 2006년 희망찬 봄을 여는 <자연의 숨결, 생명을 노래함>전을 선보인다. 기운생동으로 축약되는 수묵화의 전통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작가들의 최근작으로 구성된 이 전시는 전통적인 수운묵장에 실험적인 매체가 도입되어 신선한 충격을 불러일으킬 감성 공간을 창조할 것이다. 서울에서 활동 중인 정종해는 이번 전시에 흔쾌히 참여하면서 앞으로 대구화단과 더욱 긴밀하게 교류할 계획이다. 김호득은 1년 간의 미국체류 후 새롭게 시도하는 작품을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선보일 것이다. 최근에 대구에 정착한 임현락은 음악이나 스펙터클과 연결한, 다른 장르 예술 간의 상호교류를 시도한다. 기호 혹은 문자추상을 연상시키는 이영석의 작품은 심원한 우주의 원기를 추구하고 있다. 이 네 명의 작가들은 기운생동의 원천적 의미를 독창적으로 인식하고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조형의식을 탐구하면서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기운생동의 현대적 변용을 시도하고 수묵화의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작가 약력 정종해; 서울대 미대 및 동 대학원 졸, 현재 한성대 교수 김호득; 서울대 미대 및 동 대학원 졸, 현재 영남대 교수 이영석; 서울대 미대 및 동 대학원 졸, 현재 계명대 교수 임현락; 서울대 미대 및 동 대학원 졸, 현재 경북대 교수

이영석, 무념 임현락, 나무들 서다
3. 추진호 서예展 일시 : 2006.03.22.수~2006.03.27.월 장소 : 대백프라자 갤러리 고전을 바탕으로 각 서체를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적극적으로 작품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중진서예가 석저(石渚) 추진호의 첫 번째 개인전이 오는 3월 22일(수)부터 27일(월)까지 대백프라자 갤러리 전관(053-420-813)에서 마련된다. 많은 단체전과 초대전, 공모전 수상을 통해 이미 그의 작품성을 인정받아왔지만, 스스로 만족하지 못해 30여 년 간 작품활동에만 매진해 오다 마련되는 늦깎이 첫 개인전이라 작가가 가지는 의미는 남다르다 할 수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고전을 바탕으로 전서(篆書),예서(隸書),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등 다양한 서체로 제작된 작품들로 그 내용은 한시(漢詩)와 대학(大學), 논어(論語), 중용(中庸), 시경(詩經), 명심보감(明心寶鑑) 등 중국 명서(名書)에 나오는 글귀들을 옮겨 놓았다. 용비어천가를 한글의 원문(原文), 전문(全文)을 쓴 다음 그 글귀의 해석을 한글로 덧붙여 놓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작품 속의 원문의 음(音)과 뜻을 쉽게 한글로 이해하며 감상할 수가 있다. 그리고 어려운 원문의 한시 내용과 서체를 누구나 쉽게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배려한 석저 추진호의 서예 작품들은 다양한 서체가 가지는 한자의 어려움을 해소하면서 서예작품과의 대중화를 위해 마련한 하나의 새로운 시도로 여겨진다. 단조로워질 수 있는 화면구성을 위해 각기 다른 색지를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원문과 해석을 가지런히 적음으로써 하나의 작품 속에 공존하는 새로운 글귀로 보아진다. 70여 점에 달하는 출품작 중 초서로 써내려 간 대작(大作) 4폭은 단연 이번 작품전의 대표작으로 여겨진다. 글씨는 쓰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특히 일반 글씨가 아닌 예술로서의 글씨는 더욱 그러하다. 정갈하고 잡티 없는 마음에서 예술혼이 배어 나오듯 글씨 역시 기도하는 마음이 없이는 인간의 심성을 획으로 드러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서예는 그래서 오래 전부터 예술의 정점을 이루고 있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삶의 양식이 바뀌면서 중국식 서풍(書風)과 일본에서 밀려오는 현대 서예 물결, 그리고 서구미학까지 가미한 글씨에 영향을 받으면서 한국 고유의 서예 양식이 침체기에 머물러 있다. 이 때문에 21세기 한국 서예의 정체성을 살펴보고 이후 서예가 나아갈 방향성을 살펴보는 것이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과제로 대두되고 있다. 한국식 조형 개발을 위해 어느 때보다 노력을 배가하고 있는 서예가 석저 추진호의 진지한 고민을 그대로 보여주는 이번 전시회에서는 현대 서예의 새로운 모색을 위한 조형적 변화가 어떠한 성과로 나타나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이 될 것이다.

추진호,栗師寂偈 추진호,心善淵
4. 이경이 서양화 展 일시 : 2006.03.16.목~2006.03.25.토 장소 : 송아당 화랑

이경이, 정물 이경이, 꽃
* 메일 제목 <한시와 한국화 산책>에서, '한시'는 漢詩가 아니라, 한국인이 지은 시(한시나 시조 등)를 말합니다. 첫 메일에서 일부 그림 파일이 뜨지 않아 죄송했습니다. 그림 파일 원본은 '보조 앨범'에 있습니다.
달솔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