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일러스 마아너(Silas Marner)]-독후감
소설 [싸일러스 마아너] Silas Marner는 영국의 여류 소설가 조지 엘리어트(1819~1880)가 1861년에 출판한 것으로 그 당시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지만, 그의 소설들은 영문학과 영국사회에 큰 공헌을 했다고 평가된다. 그가 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의 출생, 혹은 그것을 암시하는 전원의 자연과 인생, 그리고 인간 문제의 구현, 유혹과 죄악의 응보, 인간 고통과 정신의 정화였으며, 그것은 근대소설의 기조가 그러한 인생관 내지 세계관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자의 해설에 의하면 조지 엘리어트의 개인적인 삶이 그리 평탄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16세까지 교육을 받다가 모친의 사망으로 집안살림을 하며 독학을 했고,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었으나 이전의 엄격한 종교에서 벗어나 일생을 합리주의로 자처하려고 했다. 부친의 사망 후에는 런던에서 초보기자 생활을 했는데 그 때 처가 있는 Henry Lewes와의 동거로 사회비난을 받았으며 그로 인한 이성과 감수성의 분열로 마음의 고통이 심했고, 사물을 깊이 통찰하는 인간으로 변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가 조지 엘리어트의 세상에서의 등장이 루이스를 통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묘한 인연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했다.
소설 외 다수의 詩作, 수필 및 번역이 있고 그 중에서 [싸일러스 마아너]는 비교적 짧으면서도 종교적인 갈등으로 빚어진 주인공의 삶과 복잡한 사건들을 기묘하게 해결하며, 여류작가 특유의 섬세함으로 당시 영국의 지방생활을 회화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종교 안에서 가장 친했던 친구의 배신으로 신앙과 애정을 잃고 고향을 떠나 신(神)에 의지하지 않는 마을의 숲속 오두막에서 직조일로 방랑의 길을 접는 싸일러스 마아너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독실한 신자였던 마아너는 교회에서 일으킨 발작으로 악령이 씌웠다는 친구 윌리암의 의심과 교회 신도들의 제비뽑기로 단죄 결정이 내려 엄청난 충격을 받는다.
마아너의 신앙관은 성실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시리라는 것이고, 윌리암의 신앙관은 선택받은 자에게만 은총이 내린다고 믿는데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끝까지 참고 신앙을 지키려 했던 순진한 청년 마아너가 죄 없이 누명을 쓰고 약혼녀까지 빼앗긴 채 추방 당하는 모습은 안타까웠다. 오늘날에도 이런 그릇된 신앙으로 교회 안에서 상처 받고 떠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내 가슴을 더 아프게 했다.
울울창창한 오두막에서 두문불출하고 베틀소리만 내며 사는 직조공의 삶을 라벨로 마을 사람들은 처음엔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았지만, 심장병 처녀를 보살펴주는 모습과, 그가 짜준 옷감이 모자라거나 질이 나쁘지 않음에 툭 불거진 근시안의 창백한 청년이 선량하고 성실한 사람임을 알게 된다. 그는 낮에 직조일로 번 금화를 술친구 삼아 저녁이면 시름을 달랜다. 금화를 세어보고, 쌓아 올리기도 하고, 손가락 사이에 넣어 돈의 촉감을 맛보기도 하고 그것은 돈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반미치광이로 한기지 일에 몰두하여 슬픈 기억을 지우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렇게 15년을 지내니 돈은 쇠항아리 가득 넘쳐 주머니 두 개에 나누어 담아 베틀 아래에 묻어두었는데 마을 사람들을 믿고 베틀실을 사러 간 날 저녁에, 부잣집 캐스 나리의 둘째 아들 단스틴으로부터 도둑 맞는다. 대지주 캐스는 부인이 일찍 죽고 자식을 잘 돌보지 않아 큰 아들 거드후리는 애정행각으로 내연의 처와 딸을 아버지 몰래 두었고, 둘째 아들 단스틴은 불량배로 소작료를 받아 탕진하는 등, 온갖 못된 짓을 하는 사람이었다. 형의 비밀을 숨겨준다는 명목으로 형의 말(馬)도 팔아먹고, 드디어 숲속 마아너의 돈까지 훔쳐간 것이다.
그날 밤 베틀 아래 벽돌 밑에 있어야 할 금화가 없어진 사실, 모래가 파헤쳐진 것으로 보아 도둑 맞았다는 사실에 마아너는 또 한번 인간으로부터의 배신 앞에 절망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가정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부잣집 영감 캐스의 자녀교육에 대한 무관심으로 빗나간 자녀가 올곧게 살아가는 한 인간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것이다. 마아너가 좌절한 것은 없어진 돈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두번째 당하는 사회의 악으로부터 느끼는 오열이라고 나는 생각되었다.
돈의 액수가 272파운드 1쉴링 6팬스라고 끝전까지 기억하는 마아너를 마을 사람들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오직 정직하게 번 돈이며, 그 돈을 세어보는 일로 잃었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몸부림쳤을 마아너, 자신을 배반한 고향 교우를 용서하는 의미로 금화 하나 하나를 쌓았을 테고, 져버린 신앙을 되찾기 위해 멍든 마음을 꺼내 금화 속에 묻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도난문제로 마을은 떠들썩 했지만 도둑을 찾지 못한 채 일단 끝이 났으나, 그로 인하여 마을 사람들과의 벽이 조금씩 무너지고 또한 신앙의 힘으로 위로를 받는다. 특히 선행가의 한 사람인 윈스릎 부인이 음식을 해 가지고 숲속으로 찾아와 교회에 가라고, 기도하고 찬송 부르면 나을 거라고 일요일엔 일하지 말라고, 그렇게 영혼과 육체를 상하면서 번 돈은 안개처럼 사라져버리거나 돈더미 위에 누워 있을 때도 편하지 않을 거라고 권고한다. 이 때까지도 마아너의 신앙은 닫혀 있어 교회에 대해 모른다고 했고, 오히려 그녀가 나간 뒤 자유스럽다고 했다. 그렇게 말한 마아너의 마음도 편하진 않았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닫혀진 신앙의 문을 연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세례까지 받은 신앙인이지만 신상에 타격을 받는 일이 일어나면 神은 없다고 외친 적이 있기에 마아너의 부정 아닌 부정, 사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갈망하는 심정을 읽을 수 있었다.
마아너의 베틀은 여전히 거기 그대로 있는데 금화는 증발 되었고, 또 다시 번 돈도 잃어버린 옛 금화의 기억만 불러일으킬뿐 희망이 사라진 어느 날 밤, 마을은 크리스마스 행사인 그믐날 밤의 무도회로 흥에 겨워 있을 때 마아너에게 엄청난 행운이 찾아온다. 부자 영감 캐스의 아들 거드후리가 그 동안 숨겨놓고 구박한 내연의 처가 복수하기 위해 어린 딸을 데리고 캐스 집으로 가다가 그만 눈덮힌 가시덤불에 빠져서 어미는 죽고 아이만 불빛 따라 오두막에 들어온 것이다. 조지 엘리어트의 기묘한 소설기법을 터득케 하는 문제해결 고리를 연상할 수 있었다. 그 아이가 어디 예사 아이던가.
비록 캐스의 아들 단스틴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크지만, 또 다른 아들 거드후리의 이 숨겨 기르던 딸로 인해 마아너의 인생관이 바뀌게 되니 말이다.
이런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거드후리는 그 지방에서 가장 훌륭한 집안의 딸 낸시를 신부로 맞으려고 춤을 권하며 혼을 쏟고 있었다.
조지 엘리어트가 詩作도 남겼음인지 시적인 구절이 많이 나오는데 특히 거드후리가 낸시에게 반하여 말한 다음의 말이 아주 인상적이다.
'누구든지 올 겨울이 몹시 춥다고 말하면 난 그믐날 밤에 장미꽃이 피는 것을 보았다고 말해 줄 거야'
물론 여기서 장미꽃은 낸시이고, 한 여인을 위해 극찬하는 것은 좋은데, 나는 거드후리가 이율배반적인 사람으로서 남성의 삶을 모독한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눈 속에 주검으로 누운 옛 아내를 보고, 그가 끼워준 반지까지 보았으면서도, 오히려 낸시와 홀가분하게 결혼식을 올릴 수 있다고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을까. 결국 낸시와 결혼했지만 자식을 두지 못하는 벌을 받는다. 스르로 천벌이라고 토로하는 대목에서는 안쓰럽기도 했다. 마아너는 그 아이를 세례 받게 하고 에피라 이름을 지어주고 신앙 안에서 올바르게 키운다.
윈스릎 부인의 도움을 받아 양육하다가 결국 그 부인의 아들 에이런과 혼사까지 성사된다. 에피를 기르면서 마아너는 세상을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돈은 그 베틀에 묶어놓고 단조로운 베틀소리와 직조의 반복 이외의 다른 것은 볼 수도 없게 만들었지만 에피는 그를 베틀에서 불러내어 쉬도록 만들고, 그 생생한 생명의 힘으로 그의 감각을 일깨워주고, 이른 봄 햇빛을 쬐러 기어나온 겨울 파리까지 보게 하는, 즉 영혼의 맑은 눈을 열어주고 있었다.
낳지는 않았지만 양부로서 사랑과 정성을 다 쏟아 기른지 16년, 에피 나이 18세, 마아너 56세, 거드후리 40세가 되던 해, 딸의 생부 거드후리로부터 양녀로 데려가겠노라는 일방적인 제안을 받는다.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계기는 바로 물이 빠진 바위웅덩이에서 동생 단스틴의 유골과 마아너의 돈이 발견 된 것을 보고 심한 충격에 빠져, 자신의 숨겨왔던 죄를 부인 낸시에게 다 고백하고, 자식이 없으니 친딸 에피를 데려오자고 합의를 보았기 때문이다.
참으로 거드후리가 철면피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과연 부족한 것이 없는 생부와 초라한 오막살이의 양부 앞에서 에피의 선택은 어떤 쪽일까, 나는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과연 나라면 어떤 쪽을 택할까. 다음 장에서 심금을 울리는 에피의 선택을 보고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내 아버지는 오직 한분이시며 오두막에서 웅크리고 앉아 계신 아버지를 보살피며 사는 것이 나의 행복'이라며 '지금의 아버지가 아니었으면 나는 고아원에 보내어졌을 것'이라는 대답에서 양부 마아너에 대한 은혜의 보답과 사랑이 깊음을 알 수 있었다.
이제 마아너도 고스란히 다시 찾은 금화에 대해 '이제 돈이 무슨 소용이겠느냐. 다시 에피 너를 잃으면 그 때의 심정으로 또 다시 버람 받았다고 생각하게 될 것' 이라며 '그 돈은 아주 적절한 시기에, 에피 너를 위해 꼭 필요한 지금 돌아왔다'고 그의 금전에 대한 개념도 정상적으로 바뀌었다. 에피 문제도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는 보잘 것 없는 아비를 떠나 귀부인 대접 받으며 살라고 권한다. 그러나 에피는 초지일관 어미 없는 고아를 친자식처럼 거두어 길러준 마아너를 선택했고, 대모 윈스릎의 아들 에이런과 신앙 안에서 마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며 결혼하여 아버지를 모시고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이 소설은 끝을 맺는다.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은 몇 가지의 감동과 교훈을 얻었다.
첫째, 거드후리가 친딸임을 알면서도 오갈 데 없는 아이의 양육을 포기했는데 후일에 다 길러 놓은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생부의 권리를 주장할 때 '찾아온 복을 내어쫓을 때는 그 복을 맞아준 사람에게로 가는 법'이라는 마아너의 항변에서 정의의 위대함을 알았다.
둘째, 1814년 Bray부부와 Hennell가의 사람을 만나 엄격한 이전 종교에서 분리되어 합리주의 신앙으로 바뀐 조지 엘이어트 자신의 신앙관을 작중 인물 마아너에게 투사했음을 알 수 있었다. 신앙 안에서 교인의 보살핌으로 마아너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며 어떤 의미로든 神의 은총은 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인과응보의 도덕성을 강조한 주제와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짓는 면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고대소설과 흡사하여 좀 진부하였지만, 19세기 영국의 풍습과 풍물을 잘 묘사하였고 특히 교육보다 혈동을 중요시함으로 대지주의 특권과 위엄이 대단했던 생활상을 생생하게 간접체험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넷째, 한 사람의 일생은 아주 작은 일로 빗나갈 수도 있고, 아주 작은 일로 큰 축복의 길이 열림도 알았다. 나는 남은 생을 이 소설을 교훈 삼아 찾아온 복을 내어쫓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