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출처: 비공개 입니다
| 부메랑인터뷰] (1) '타짜'의 최동훈, 술집에서도 대사 쓰는 감독 | |||||
| [이동진 닷컴 2007-07-10 04:39] | |||||
(오늘의 한국영화 대표 감독들을 만나는 '부메랑 인터뷰'를 연재합니다. 이 인터뷰 시리즈는 모든 질문을 그 감독 영화들 속의 대사나 자막에서 빌어오는 형식으로 이뤄집니다. 자신이 만든 작품 속에서 되울려오는 물음에 감독들은 어떤 대답을 들려줄까요.)
[이동진닷컴] 재능에도 색깔이 있다. 최동훈 감독의 재능은 한국영화계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색깔을 지녔기에 더욱 빛난다. 기계적으로 감동을 직조해내느라 따뜻하다 못해 쉰내까지 풍기고 있는 충무로 온난화 현실 속에서 그의 영화들은 냉각수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
그의 영화에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넘쳐난다. 비슷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다르게 말할 줄 아는 화술도 지녔다. 그가 배우에 대한 감식안이 탁월한 연출자라는 사실도 빼놓을 수 없다. 백윤식에서 염정아와 김혜수까지, 우리가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연기자들 내면의 깊은 구석에서 새로운 인물을 건져올림으로써 관객들에게 짜릿한 발견의 쾌감을 선사했다.
충무로가 장르 영화에 대한 오랜 콤플렉스로부터 벗어나는데 큰 역할을 한 그는 ‘범죄의 재구성’ ‘타짜’ 등 단 2편의 장편영화를 내놓은 신인급 감독. 그러나 위기에 처한 2007년의 한국영화계가 손꼽아 차기작을 기다리고 있는 가장 믿을만한 구원투수 중의 하나다.
광화문의 한 오피스텔에서 차기작 구상에 여념이 없는 최동훈 감독을 찾아갔다. 컴퓨터와 포스트잇을 쑥과 마늘 삼아 탈고의 날을 위해 동굴처럼 작은 공간에 틀어박힌 그였지만, 자신의 영화들만큼이나 재치 있는 답변으로 방문자를 시종 즐겁게 만들었다.
“뭐, 아이, 가만 있어봐. 바쁘다 지금..”(‘범죄의 재구성’에서 하던 이야기를 마저 끝내려는 천호진이 끼어들던 동료 형사를 제지하면서.)
- 요즘 신작 시나리오 작업 때문에 바쁘시죠? 단편영화제 심사도 하셨다구요.
“미장센 단편영화제였어요. 작품들이 좋은 게 많아서 개인적으로도 상당히 자극을 받았죠. 우리나라 단편영화의 캐릭터들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장편영화에서 없었던 캐릭터들인데, 실험성은 좀 적어졌지만 여유가 생겼더라구요. 사회적인 주제를 가진 영화들을 모아놓은 ‘비정성시’ 부문에 출품된 영화는 전부 좋던데요.”
- 그렇게 능력 있는 후배들의 단편을 보면 한편으론 ‘앗, 뜨거라’ 싶으실 수도 있겠네요.(웃음)
“좋은 신인 감독은 아무리 영화계가 어려워도 계속 나오기 마련이구나 싶더라구요. 두 편 밖에 안 했으니 저는 아직 신인감독이라고 스스로 생각하는데 그런 후배들을 보면 무섭기도 하고 자극도 되고 그래요.”
“가만 있어봐, 내가 근사한 거 하나 메이킹 중이거든? 이거 되면, 우리가 사기로 한 그 땅 있잖아? 그거 사자, 한 방에.”(‘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크게 한 탕 할 것을 염두에 두고 형에게 큰소리치며.)
- 지금 근사한 거 하나 메이킹 중이시죠?(웃음) 감독님의 세번째 영화 기다리시는 분들이 참 많은데 어떤 거 쓰고 계십니까.
“지난 두 달간 슬픈 스릴러를 쓰려고 준비했었어요. 그런데 머리 속에서 구상중일 땐 위대한 작품이었는데, 이게 전혀 위대하지 않다는 걸 시나리오 2장째 쓰면서 깨달았어요.(웃음) 그리곤 8장째 쓰다가 바로 엎었죠. 흥이 안 나더라구요. 내가 나를 배신하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품의 질적인 상승을 원하느라 제가 지닌 3류 정신의 근본을 버리고 있지 않나 싶었던 거죠.(웃음) 이 이야기는 제 나이에 할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 어떤 내용이었는데요?
“최근 여배우들의 자살이 크게 문제가 됐잖아요? 그 모티브를 중심으로 협박 음모 배신 표절이 얽히는 이야기였는데, 풀어내기가 너무 어렵더라구요.”
- 중단하신 게 언제였습니까.
“3일 전이죠.”
- 그럼 지금 패닉 상태이시겠네요.(웃음)
“마음은 한참 아쉬웠는데, 그 시나리오 쓰는 걸 중단하니까 어깨가 아픈 게 사라지는 등 그동안 괴로웠던 온 몸의 병이 다 한 순간에 물러가더라구요.(웃음)”
- 왠지 지난 3일 동안 그 대신 쓰실 새 작품을 구상하셨을 것 같은데요.(웃음)
“SF 코미디라고 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직 막 생각하고 있어서 자세한 내용은 저도 몰라요.”
- 슬픈 스릴러와 SF 코미디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제가 아직 슬픈 게 감당이 안 되는 거죠.”
“워낙 유명하신 분이라서 이거 어떻게 해야할지, 아이 참.”(‘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사기꾼 사이에서 전설적인 존재인 백윤식을 처음 만나서.)
- 단 두 편의 영화로 정말 많은 관객들이 좋아하는 감독이 되셨습니다. 서강대 출신으로 학교 광고 모델로까지 나오셨죠?(웃음) 사인해달라는 분들도 많으실텐데요.
“가끔 사인을 요청하시는 분들이 있으시죠. 무척 쑥스러워요. 사인해주면서 기분 좋았던 적은 딱 한 번이었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였죠. 제가 사인을 하다가 잠깐 어머니를 보았는데 그 표정은 정말이지…(웃음) 어머니는 사실 감독이 뭘 하는지도 잘 모르셨거든요. 사인을 마치고 나니까 어머니가 ‘힘든 일 하는데 닭이라도 한 마리 먹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시더라구요.(웃음)”
- 유명해지신 걸 즐기시는 편입니까. 요즘은 감독이 일종의 스타가 되는 경우도 많잖습니까.
“아뇨. 저는 감독이란 숨어 지내야 된다고 생각하는 편이예요. 스타 감독이라는 말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게 이 직업의 진실과는 거리가 머니까요. 전 예전엔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열정적으로 일하고 단번에 세계를 해석하면서 곧바로 글을 쓰고 낭만도 좀 있구요. 그러나 그게 기자라는 직업의 진실은 아니잖아요. 매일 일에 치어서 허덕이시는 거잖아요.”
- 알고 보면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죠.(웃음)
“감독도 마찬가지죠. 남들은 화려하게 볼지 모르지만, 그런 날은 일년에 3일 정도나 될까. 나머지는 내내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촬영장에서 정신없이 휘둘려야 하죠. 그게 감독의 본질이라고 생각하니까, 스타 감독이란 말은 좀 이상해요.”
“그래, 그 접시는 언제부터 돌리시고?”(‘범죄의 재구성’에서 함께 한국은행을 털 계획을 세우던 박원상이 박신양의 사기 경력을 물으면서.)
- 두 영화에서 개성 넘치고 리얼한 대사들을 쓰셨습니다. 인물들의 세계를 적절히 설명하면서도 그 자체로 대단히 신선한 용어들이죠. 범행에 몇 명이 필요한지를 물을 때 “영화배우 몇 명이 필요한데?”라고 하고, 배신당한 사실을 털어놓을 때 “나 수술당했어”라고 말하는 식이죠. 탈(얼굴) 졸업(출옥) 등의 비유적인 은어들로 가득한데요, 이런 용어들은 취재의 결과입니까.
“취재의 산물인 경우도 있고 제가 만들어낸 말인 것도 있죠. 사기를 접시 돌리기에 비유하는 것은 접시를 사기로 만들기 때문이죠. 이건 사기꾼들이 실제 쓰는 말입니다. ‘타짜’에서 ‘어디서 약을 팔아?’ ‘혓바닥이 왜 그리 길어?’라는 대사 역시 도박판 취재의 결과이구요. 영화배우라는 표현은 사기꾼들이 꼭 배우들처럼 행동하는 걸 보고 제가 만든 말이예요.”
“청진기 대보니까 진단이 딱 나온다. 시추에이션이 좋아.”(‘범죄의 재구성’에서 백윤식이 범죄 성공 여부를 가늠하면서.)
- 그럼 청진기 대사는 어떻습니까. 개봉 후 인구에 회자된 명대사인데요.(웃음)
“술자리에서 어떤 아저씨가 그 말을 쓰는 걸 들었어요. 대사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화장실로 가서 메모를 했어요. 화장실에 갔다온 지 얼마되지 않았던 순간이라서, 돌아오니 그 아저씨가 ‘젊은 사람이, 전립선이 안 좋아?’라고 하더군요.(웃음)”
- 술자리에서도 취하실 수가 없겠네요. 언제 대사들이 튀어나올지 모르니까요.(웃음)
“아뇨. 취해도 그냥 무조건 써요. 현장에서 메모를 못하면 아무리 취해도 집에 들어오자마자 적어두죠. 사실 다음날 그 글씨를 못 알아보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요.(웃음) 작년에 고향 가서 술 한 잔 하는데, 친구가 ‘그 새끼가 폼은 아랑 드롱이야’라고 하더라구요. 그걸 ‘타짜’에 써먹으려고 적어놓은 것을 결국 못 넣었는데, 아마 다음 영화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웃음)”
“니, 제비랑 똥구멍 맞출려고 했던 놈이 제비가 어딨는 줄 모른다고?” “형님, 제가 카프카를 좀 아는데요. 부조리. 저 제비랑 친해요. 근데, 집을 모르네.”(‘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사인 천호진이 취조할 때 이문식이 비웃듯 발뺌하며.)
- 감독님 영화엔 저절로 무릎을 치게 되는 대사들이 가득합니다. ‘범죄의 재구성’의 카프카 대사도 그렇고, ‘타짜’에서 아귀가 내뱉는 “복수? 복수 같은 그런 순수한 인간적인 감정으로다가 접근하면 안 되지. 도끼로 마빡을 찍든 칼로 배때지를 쑤시든 고기 값을 번다, 뭐 그런 자본주의적인 개념으로다가 나가야지” 같은 대사도 무척이나 인상적이죠. “추위 타시나 보네”(‘겁먹으셨나 보네’의 뜻), “넌 생각하지 마. 생각은 내가 하니까”(생각 좀 해보겠다는 말에 윽박지르면서)처럼 인용하고픈 대사들이 진짜 많습니다. 영화 대사로 질문을 이끌어내는 ‘부메랑 인터뷰’ 같은 형식에 환상적인 레퍼런스를 제공해주시는 감독님이신데요(웃음), 어떻게 이런 대사를 쓸 수 있는 ‘경지’에 오르신 건가요.(웃음)
“전 사실 대사를 너무 못 써서 고민을 많이 했던 사람이예요. 저도 이전엔 “이번 계획이 끝나면 너에게 후한 보수를 주마” 같은 대사들을 썼다니까요.(웃음) 그런데 그렇게 쓰기가 싫으니까 다양한 시도를 했죠. 도서관에 가서 희곡집 같은 걸 혼자 조용히 소리내서 읽어보기도 했어요. 그러다 보면 희곡 작가들이 만들어낸 발음의 미학 같은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오태석 선생의 희곡을 소리내어 읽어보니 말의 장단이 너무 좋았어요. 대사는 이렇게 쓰는 거구나 싶었죠.”
- 시나리오를 다 쓰고나서 직접 읽어본다고 하셨죠?
“네. 혼자 방에서 읽어봐요. 그러면 그때의 느낌대로 영화가 나오게 되지요. 읽어보면 알아요. 이 사람이 이 상황에서 이 대사를 해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잘 쓴 대사인지 못 쓴 대사인지.”
“아니 와인을 이렇게 두는 사람들이 어딨어. 제 정신이야? 아니 여기다 불 환하게 켜놓고 이거이거, 얼마나 뜨뜻해? 이게 다 뭐하는 플레이냐구. 와인은 온도가 얼마나 중요한데.”(‘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염정아의 와인 보관법을 탓하면서.)
- 감독님 영화는 무척이나 쿨하다는 느낌을 줍니다. 사실 충무로에서 쿨한 영화 찾기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잖아요? 감독님은 영화 속에서의 감정 과잉을 본능적으로 참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격정적 드라마는 안 쓰죠. 어려서부터 텔레비전을 보시면서 이틀에 한 번씩 우시는 어머니를 보면서 일종의 짜증을 느꼈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인지도 모르겠네요.(웃음) 그런 걸 쓰면 제 마음 깊은 곳에서 브레이크가 걸려요.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면 그런 걸 위해서 서사를 늦추고 싶지 않아요. 원래는 서사가 그런 걸 위해 복무해야 하는데 저는 반대인 셈이죠. 감정이 넘쳐나려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야 하는데 그게 싫습니다. 단계를 밟기 위해서 어느 순간 정지하는 걸 생리적으로 싫어하는 것 같아요.”
“고니야, 갔다 와서 아까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 “얘기는 무슨.”(‘타짜’에서 이혼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누나와 조승우의 대화.)
- 아닌 게 아니라 감독님의 영화를 보면 이야기꾼의 영화란 생각이 듭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사람의 영화라고 할까요. 이야기에 대한 욕망이 정서 전달에 대한 욕망보다 영화 속에서 훨씬 더 크게 느껴집니다.
“내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듣는 사람이 울면 싫은 거죠. 근데 저도 영화 보면서 잘 울긴 해요.(웃음) 운다는 것은 진정으로 반응해서 우는 거잖아요? 울고 나서 창피한 영화와 안 창피한 영화가 있는데, 울고서 창피하지 않았던 영화는 끝까지 사랑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 그런 영화가 최근에 어떤 게 있으셨나요.
“박진표 감독의 ‘그 놈 목소리’와 ‘너는 내 운명’이 그랬어요. 그리고 ‘빌리 엘리어트’ 같은 작품. 그 영화는 저의 어린시절과 상황이 똑같아요. 저는 버스도 안 다니던 마을에서 태어났거든요. 전주였는데 행정구역만 전주였지 시의 가장 외곽이라서요. 사실 저희 집은 아들을 서울로 보낼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어요.”
“빨리 닫아 빨리. 지금 뭣들하고 있는 거야?”(‘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꾼들에게 당했음을 뒤늦게 깨달은 한국은행 직원.)
- ‘범죄의 재구성’이나 ‘타짜’나 모두 기본적으로 이야기의 양이 무척 많은 작품들입니다. 감독 경력의 첫 대사를 위에서 인용한대로 “빨리 빨리”를 외치는 다급한 말로 시작하셨는데요, 감독님 영화의 스피드는 빠른 스타일을 좋아하시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정해진 두 시간 안에 해야 할 이야기가 많기 때문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양과 질이 작품의 속도와 스타일을 결정하는 측면이 있다는 거죠.
“ ‘범죄의 재구성’ 시나리오를 다 써놓고 보니 양이 무척 많더라구요. 그 시나리오를 본 모든 사람들이 2시간 안에 다 들어갈 수 없는 이야기라고 했습니다. 신인 감독일 때는 컨트롤을 제대로 못하니까 더 그럴 거라고 했어요. 하지만 저는 두 시간 안에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고 했죠. 사실 그런 고민들이 그 영화의 스타일과 템포를 만든 걸 겁니다. 다 쓴 뒤 대사를 혼자 맞춰서 읽어봤더니 2시간20분이 넘게 나왔어요. ‘범죄의 재구성’을 보면 대사가 안 들리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화면이 존재하는 한 대사가 계속 나오죠. 그게 애초부터 생각한 방법이었으니까요. 편집도 무척 빠르게 했구요. 그렇게 진행했기에 ‘범죄의 재구성’은 극장의 청소부 아줌마만 서둘러주시면 충분히 하루 7회 상영을 할 수 있는 영화가 됐죠.(웃음)
“느그들 한국은행으로 들어가던 그 시간에 한국은행으로 전화가 왔어.” “그게 누군데요.”(‘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사 천호진이 이문식에게 설명.)
- ‘범죄의 재구성’은 플래시백이 생명인 영화입니다. 제목 자체가 그렇죠. ‘저수지의 개들’과 비슷한 구성의 복잡한 구조를 지닌 작품이잖아요. 그런데 ‘범죄의 재구성’ 뿐만 아니라 ‘타짜’ 역시 구조가 일반 극영화와 다릅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지 않고 계속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서 이야기를 하잖습니까. 플래시백(과거회상장면)을 사용하더라도 영화에서 묘사되는 플래시백들끼리는 시간적 순서대로 보여지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두 작품은 플래시백들의 시간적 순서마저도 계속 뒤섞입니다. 순서대로 늘어놓는 것은 재미가 없다고 느끼시는 편입니까. 많은 이야기를 효율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이야기의 경제성 때문에 그런 면도 있는 것 같은데요.
“감정을 쌓아가기에는 시간적 흐름을 따르는 게 훨씬 더 편하죠. 하지만 그렇게 하면 2시간 안에 다 못 담아요. 순서를 바꿔놓으면 관객이 혼자서 맘 속으로 이야기를 쌓아가게 됩니다. 그런 기본적인 필요에 의해서도 작품 구조가 그렇구요, 또 한 편으론 관객이 사고하면서 영화를 보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쪼개지고 점프되는 걸 보면서 관객은 그 빈 간극들을 맞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쓰면 제 자신도 즐겁구요. 전 그런 복잡한 구조가 있더라도 관객들이 다 이해할 수 있다고 봅니다.”
- 스타일상으로 플래시백을 좋아하시기도 하시죠?
“그럼요. 플래시백이라는 방식에 대해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제가 좋아했던 누아르 영화들이 다 플래시백을 갖고 있거든요. ‘범죄의 재구성’ 역시 그래요. ‘자, 그러니, 이제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 같은 스타일이죠. ‘타짜’는 ‘자, 한편!’이라고 말하면서 또다른 이야기를 비추는 식의 영화구요. 제 여자친구가 그건 ‘섹스 앤 더 시티’의 스타일이라고 하더군요. 그 영화가 ‘한편(Meanwhile)!’ 이러면서 진행되는 작품이잖아요. 그런 게 기본적으로 작품에 경쾌함을 불어넣는 것 같아요. 이 영화는 무엇무엇에 대한 영화입니다, 지금부터 이 장소에서 출발합니다, 뭐, 그렇게 말하는 듯한 영화들이 좋습니다. ‘친절한 금자씨’를 제가 좋아했던 게 내레이션이 너무 좋아서였어요. ‘금자는 그때 무척 슬펐다’라는 내레이션이 나오면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죠. 아, 좋겠다. 슬픈 장면을 직접 안 찍어도 되고.(웃음) 옛날 이야기 해주듯 하는 영화들을 좋아합니다.”
“화투하면 대한민국에서 딱 세 명이야. 경상도에 짝귀, 전라도에 아귀, 그리고 전국적으로 나!”(‘타짜’에서 백윤식이 제자인 조승우에게 화투판의 최고 실력자 세 명을 소개하면서.)
- 비유를 하자면 무협지적 세계관이랄까요(웃음), 강호에 은거하는 최고 고수끼리의 대결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와 똑 같은 구도에 대한 언급이 ‘범죄의 재구성’에도 나온다는 거죠. 위조에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는 휘발유(김상호)가 경찰 앞에서 “대한민국에 그 정도 위조하는 사람이 딱 세 명 있거든요? 부산에 하나, 충청도에 하나, 그리고 여기 저!”라고 말하는데 이 대사는 ‘타짜’의 김선생 대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이런 구도를 영화로 그려내는데 매력을 느끼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번째 영화로 만들려고 오늘 서점에 가서 생각해낸 이야기도 결국 그런 이야기네요.(웃음) 장르는 달라져도 본질은 같은 건가 봅니다. 사실 ‘타짜’는 인물들의 돈에 대한 욕망보다 최고 실력자와 겨뤄보려는 욕망이 더 큰 영화입니다. 고니에게는 아귀와 겨뤄보고 싶다는 기질이 있는 것이잖아요. ‘범죄의 재구성’도 마찬가지죠.”
“좆만한 새끼들이 지들이 최고인줄 알고 날뛰잖아? 그래서 내가 한 방 먹여준 거야.”(‘범죄의 재구성’에서 박신양이 형의 납골함 앞에서 독백.)
- 말씀하신대로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혁의 행동 원리 중 하나가 그런 심리임을 드러내는 대사가 나오죠.
“두 영화 모두 무협지적이라는 지적에 동의해요. 다만 무협지라고 하면 좀 볼 품 없어 보이고, 서부극이라고 하면 더 좋아 보이긴 하겠죠.(웃음)”
“이때쯤 네가 그걸 알아야 되는데. 내가 누구냐? 화투를 거의 아트의 경지로 끌어올려서 내가 화투고 화투가 나인 물아일체의 경지, 응? 혼이 담긴 구라, 응?”(‘타짜’에서 백윤식이 조승우 앞에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며.)
- 두 편의 영화에서 사기꾼과 타짜들은 최고의 실력자로 묘사됩니다. 그래서인지 고수라는 단어가 유달리 많이 등장하죠. 하다 못해 ‘범죄의 재구성’의 형사까지 “나 이래 봬도 고수다. 고수한테는 고수 대접을 해줘야지”라고 말을 합니다. ‘타짜’의 고니가 “선생님은 대한민국에서 랭킹 몇 위쯤 돼요?”라고 묻자 평경장이 “당연히 내가 일등이지, 임마”라고 답한다든지, ‘범죄의 재구성’에서 형사를 잘 따돌리라고 당부하는 김선생에게 인경이 “걱정 마. 나, 삼류 아냐”라고 대꾸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이구요. 그런데 다양한 장르에서 두루 뛰어난 성과를 낸 하워드 혹스의 영화들을 일종의 ‘전문가 영화’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는 영화 속 인물이 악인이든 좋은 사람이든, 소위 전문가에 대한 일종의 존중이나 존경 같은 것을 담아 애정 어린 스케치를 하니까요. 비슷한 맥락에서 감독님 영화도 전문가 영화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비열하고 좋지 못한 인간들이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인물들의 전문가적 솜씨에 대한 찬탄 같은 것이 종종 느껴지니까요.
“사기꾼과 도박사를 놓고 그런 이야기를 하니까 좀 웃기긴 한데, 제가 기본적으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을 가장 존경하는 것 같습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그래요. 영화를 통해서 그런 것들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캐릭터에는 기질도 있지만 직업도 있잖아요? 저는 텔레비전 드라마 ‘하얀거탑’이 무척 재미있었는데, 제 눈에는 등장 인물들이 진짜 의사처럼 보였거든요. 사실 처음 인터뷰 대상이 되었을 때도 기자들의 세계가 궁금해서 ‘몇시에 출근하세요?’ ‘하루에 몇 장이나 써야 돼요?’라고 제가 더 많이 물었어요.(웃음)”
“동생이 죽어서 슬프시겠어요.” “누구나 한 번 태어나면 죽는 거잖아요. 저는 개인적으로다가 그래요. 기쁜 것도 싫구 그렇다고 슬픈 건 또 더 싫구. 그냥 걸거치는 것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걸랑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염정아가 동생의 죽음에 대해 위로하자 박신양이 대답.)
- 삶에 대해 ‘범죄의 재구성’에서 창호가 말한 것처럼 생각하십니까.
“그 대사가 표면적으로 의미하는 바와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운 생각을 갖고 있어요. 저는 사람이란 살면서 일희일비해야 한다고 보거든요. 어쩌면 일희일비 하지 말자는 견해는 삶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 것인지도 몰라요. 제가 제 인생에서 처음 배웠던 사자성어가 새옹지마였는데, 그 말은 결국 인생이 무섭다는 걸 알라는 말이잖아요? 그럴 때 저는 오히려 인생이 무서우니 좋아할 때라도 좋아하면서 그렇게 감정을 쏟아내고 살자는 거죠. 그래야 좀더 평탄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창호의 그 대사는 사실 일희일비 하자는 내용일 수 있습니다. 평탄하게 살고 싶다는 거니까요.”
(이 기사의 후반부는 7월11일 ‘이동진의 영화풍경’에 연이어 게재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