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학원강사모여라 원문보기 글쓴이: mondaq
학원과는 다르고...환경이 다르지만..경영의 신 마쓰시다 고토스케와 그의 회사를 볼때
보면...여러가지 생각이 듭니다.
기업은 사람이라..라고 명언을 남겼는데...그것이 의미하는 것은...여러 가지 일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기업도 사람이고..학원도 진정한 자산은 사람들의 열정과 헌신속에 있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빌게이츠의 MS사의 성장사를 보면..변화를 읽고..그에 대해서 빠르게 대처했으며, 그 속도를
가능하게 한 것은...돈도 있었지만...중요한 것은 사람을 열정과 헌신을 끌어냈다는 거죠.
변화를 읽고...사람을 모아서..빛과 같은 속도로 시장에 대응하여..시장을 장악하는 전략...
사람이 모이고..사람이 들이 미친듯한 열정과 헌신의 마음을 끌어내는 것..
그게 뭘까? ...
미래는 아마도...품질,기술 보다는 ..변화에 대한 빠른 대응이..관건일 거 같네요.
===============================================================================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성공 비결은 모든 기업들의 섭리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간단히 소개해 드리자면
빌게이츠의 미래로 가는길 책에 나오는 이야기
IBM 은 퍼스널 컴퓨터가 개인에게 자리잡기 전까지는
최고의 기업이었으나, 개인용 컴퓨터의 성공이 안될 것으로
확신하고 대형 컴퓨터 생산에만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나중에 IBM 은 개인용 PC 의 빠른 보급으로 인해
구조조정을 실시하게 되고, 결국에는 부도위기까지 이르른다.
하지만 모토롤라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게 된다.
그 이후 IBM 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는다.
- 컴팩의 회사의 경우 인재가 새운 하나의 기업이다.
각 유능한 회사에서 일하던 인재들이 서로 한대모아 세운 기업이다.
엄청난 급성장을 기록한 회사이다.
이런식으로 모든 기업의 발전사를 다 알고 있다.
이것이 빌게이츠의 주된 성공 비결이다.
그리고 빌게이츠는 자신이 개발한 것이 하나도 없다.
윈도우 부터 시작해서 베껴쓰기 황제다.
DOS 에는 IBM 에서 개발한 PC-DOS NORTON 에서 개발한 도스
등등 종류가 등등했으나, 나중에는 마이크로 소프트가 베껴쓰기에
성공해서 DOS를 개발하자마자 불티나게 판매가 된다.
ㅋㅋㅋ 우스운 이야기지만 대단한 사람이다.
윈도우 3.1까지의 체계를 거쳐 WIN95를 생산하지만 빈축을 많이 샀다
MAC OS 를 그대로 본따온 모양이었다.
오류도 처음 만들어서인지 엄청많았고, 대단했다.
하지만 끝없는 도약으로 현재의 운영체제를 만들어냈다.
오피스도 한 회사를 인수하면서 마이크로소프트란 이름을 걸고
판것이다.
익스플로러가 판 치기 전 벌써 넷스케이프가 엄청나게 잘 나가고 있었는데
여기서 초를 친것도 마이크로소프트다.
엄청나지 않은가? 윈도우를 쓴다는 명목하에 익스플로러를 넣어놓고
나중에 급기야 넷스케이프는 호환 조차 잘 안되게끔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익스플로러를 현재는 가장 많이 사용하게 된것이다.
===============================================================================
들어 가면서.. ..
마쓰시타 고노스케, 그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마쓰시타 전기를 일으켜 세운 사람이다.
물론 이 하나만으로도 많은 사람들에게 충분히 존경 받을만하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일본 사회 내에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단지 존경 받을 만한 인물에 머물지 않고 국민적 영웅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일까? 어떻게 경영자에서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바로 그의 출세 과정에 있다.
마쓰시타는 유년기부터 온갖 고생을 다하고 노력과 연구를 거듭한 끝에 자신의 힘으로 마쓰시타 전기 산업 등의 기업을 발전시켜 소득 1위 자리에 올랐다. 국민 들은 그에 대해 그런 이미지를 이미 가지고 있었는 듯 하다. 그것이 바로 물자 부족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던 일반 서민들에게 용기를 주었다. 나도 열심히 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꿈을 심어 주었다. 그야말로 전후 부흥기의 국민에게 희망을 가져 다 주는 영웅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전후 사회이후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등장해 그가 죽은 지금까지 최고의 경영자라 불려지고 있는 그에 대해 지금부터 이야기 해보려 한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어린시절.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1894년 11월 27일에 와카야마시에서 태어났다. 마쓰시타는 국민학교 4학년이 막 되었을 때,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여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불행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국민학교도 다 마치지 못한 마쓰시타는 그때까지 살았던 시골을 떠나 오사카에서 견습점원으로 취직을 했다. 이렇게 해서 어린 마쓰시타는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던 것이다. 처음 마쓰시타가 들어간 곳은 화로 가게였는데 다음해에 가게 사정으로 자전거 가게로 옮겨서 6년을 거기서 생활했다.10세 때부터 15세까지 자전거와 힘께 지냈다.
1910년 오사카 전등(현재의 關西 전력)의 견습공이 되었다. 이것이 고노스케 소년과 전기의 첫 만남이었다.
3.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업적.
직공 생활을 얼마간 하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독립하여 화로 가게와 자전거포ㆍ전구회사 등을 10여년간 전전하며 일한 끝에 2평짜리 전기용품가게를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2평짜리 가게를 마련하게 되기까지 어린 마쓰시타가 겪은 고생은 말로 다할 수 없는 극심한 것이었다. 그러나 노력 끝에 보람이 생겨 그의 2평짜리 전기용품 가게는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보람의 바탕이 되었다.
마쓰시타가 그 조그만 가게에서 판매한 물건들도 전선ㆍ플러그ㆍ소켓 등 일반 가정에서 흔히 사용하는 전기용품 이었다.
그 가운데서 마쓰시타가 가장 많이 팔았던 것은 소켓이었다.
작은 가게를 꾸리며 성실하게 저축도 해나가던 어느 날, 마쓰시타는 어느 집에 전기수리를 나갔다가 우연히 그 집 자매가 말다툼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소켓 하나를 놓고 자매 가운데 언니는 전등을 꽂겠다고 우기고 동생은 전기인두를 꽂겠다며 서로 다투는 것이었다. 자매가 싸우는 이유를 알게 된 그는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저렇게 싸우지 않으려면 한꺼번에 두 사람 모두가 사용할 수 있는 쌍 소켓이 있어야겠는걸? 그래, 맞아,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쌍 소켓을 만들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거야?'
이렇게 생각한 마쓰시타는 자신의 가게로 돌아와, 그 동안 익혀온 기술로 쌍 소켓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이 가능한지 시험제작에 들어갔다.
마쓰시타가 만든 시험용 쌍 소켓은 그대로 팔아도 될 만큼 우수한 것이었다. 그는 서둘러 특허출원을 마치고 쌍 소켓을 판매하기 위해 많은 양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쌍 소켓 판매에 대한 좋은 성과는 예상했던 것이었지만 그 반응이 의외로 빨랐다. 대리점을 하겠다고 선금을 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마쓰시타의 쌍 소켓이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외에도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불황이 시작된 1923년, 관동 대지진이 일어난 해에 자전거 가게에서 일하면서 생각해 두었던 자전거용 전등을 생산했다. 이 것 역시 대성공을 거두 워 1927년 처음으로 내셔널 상표를 붙인 각형(角型)램프를 고안하여 히트 상품이 되었다. 이때 건전지 메이커의 협력을 얻어 1만 개를 선전용으로 무료 증정하는 PR 전략도 펼쳤다.
1929년에는 사명(社名)을 “마쓰시타 전기 제작소”로 바꾸는데, 그 후 2년 뒤 절호의 찬스가 도래 한다.
1931년, 당시는 아직도 라디오가 희귀했기 때문에 도쿄 방송국(현재의 일본 방송 협회=NHK)에서는 라디오를 싼 가격으로 보급하기 위해 표준형 수신가 콩쿠르를 열렸다. 이때, 마써시타 전기 제작소가 만든 제품이 당당히 1등에 당선된 것이다. 마쓰시타는 그 이름마저 ‘당선호’라는 브랜드로 이 라디오를 대량 생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사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종합 전기 메이커로서 지위를 굳히게 되었다. 마쓰시타 제품은 그 후 직입식 플러그, 세 발 달린 휴대용 라디오, 세탁이 끝나면 자동으로 세탁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세탁기용 자명종 등 발명은 끝날 줄을 몰랐다. 어떤 물건이든 마쓰시타의 손만 거치면 새롭게 개량되어 실용신안출원이 가능하게 되었고, 생산되는 물건은 하나같이 날개돋친듯 팔려나갔다.
1933년에는 조직을 재빨리 사업부제(事業部制)를 채용하여 사업의 전문•세분화에 의한 독립 채산 체제를 갖추었다. 그 이래로 오늘날까지 마쓰시타 전기 산업에서는 이 체제를 전통으로 고수하고 있다.
1935년에는 조직을 법인화하고 “마쓰시타 전기 주식회사”로 개칭하면서 스스로 사장에 취임하여 라디오를 중심으로 한 전구 등의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이윽고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무선 기기, 레이더, 항공기등에 이르는 군수품을 생산하였는데, 그로 인해 패전 후에는 GHQ로부터 재벌 지정을 받아 공직에서 추방당했다. 패전 때 이미 재벌로 지정될 만큼 대기업으로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1947년에는 마쓰시타 노조의 항의 운동에 의해 공직 추방이 해제되어 실업계로 복귀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할 44세에서 52세의 나이를 전쟁과 추방이라는 불운 속에서 지냈다는 점은 사람들은 잊어버리고 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그러나 많은 고난과 역경을 지낸 그라 그런지 그는 불운 속에서도 잘 견디며 공직 추방 해제 뒤 다시 발명에 눈을 돌려 마쓰시타가 소득 1위에 오른 1955년 이후 수많은 전기 회사가 설립되어 흑백 텔레비전,전기 세탁기, 전기 냉장고라는 이른바 ‘3종의 신기(神器)’시대가 도래 했을 때 마쓰시타 전기 역시 이러한 가정 전기 제품 대약진을 거듭했고, 가전 제품을 연속적으로 개발하여 대량 생산, 대량 판매를 추진하였다. 또한 수출 판매망을 확대하여 ‘파나소닉’브랜드로 세계적인 메이커로 발전 하는 등 그의 산업을 더욱 융성 시켰다.
마네'라는 말은 일본어로 '모방'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마쓰시타는 모방에 천재적인 재질을 가지고 있다 해서 사람들은 그를 '마네시타'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처럼 작은 발명들이 모이고 모여, 또 대히트가 연속되어 드디어 세계 37개국에 450여 개의 계열회사를 거느린 마쓰시타그룹이 탄생한 것이다. 이제 그 그룹은 파나소닉ㆍ내쇼날ㆍ테크닉스 등 귀에 익은 상표만도 1만 4천 여 종의 각종 전기제품을 생산하고 있고, 연간 매출액만도 6조억엔을 넘어서는 세계적 대재벌이 되었다.
마쓰시타는 기업 발전 외에도 주목 받는 업적이 하나 또 있다.
그것은 바로 ‘경영의 신’이라 불리 우는 마쓰시타의 경영 방식 이었다. 그 경영력을 뒷받침한 것은 ‘영업의 마쓰시타’라 불리는 판매 네트워크 인데 마쓰시타 자신을 비롯하여 마쓰시타 전기 그룹 사람들은 판매 대리점을 친절하게 지도해 주었다.
1979년에는 85세의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정치를 개혁할 인대를 양성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마쓰시타 정경숙’을 열어 이사장 겸 숙장으로 취임하였다 이 마쓰시타 정경숙 출신의 국회 의원은 신당 붐을타고 지금은 수십 명에 이르고 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만년 철학자 또는 개혁 제창자로 살다가 1989년 4월 17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그는 이미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이뤄놓은 수많은 업적들은 아직도 일본 전반, 아니 일본 제품이 수출되는 수많은 국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4. 국민적 영웅 “마쓰시타 고노스케”.
맨 앞장에서도 말했지만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기업인으로 드물게 국민적으로 영웅 취급을 받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영인이 국민적 영웅이 될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그의 입신 출세 이야기 이다.
우선 그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9살 때 이미 심부름꾼으로 취직한 그 인만큼 고등 교육은 꿈에도 꾸지 못할 것이었다.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중퇴, 그런 그가 성공을 한 것이다. 그것도 대 재벌이라는 큰 타이틀을 걸고 말이다.
그리고 그가 어려 서부터 몸이 약했다는 점도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작은 몸매에 여위어서 볼품없는 그는 겉 모습뿐 아니라 병력 또한 많아서 육체적으로도 그리 좋은 상태는 아니었다. 이렇듯 출신 성분이 없는데다가 육체적으로도 약했던 사람이 크게 출세 했다는 점에서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전국시대의 영웅 ‘ 도요토미 히데요시’랑 비교 되면서 더욱 현재의 일본에서 있어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 받게 되었다.
두 번째, 성공에 이르는 과정이 깨끗했다는 것이다.
성공하여 거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은 대체로 상업적 재능이나 정치적 수완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국민 대중을 착취하여 큰돈을 벌었다는 인상을 주기가 쉽다.
사질 전후에 마쓰시타와 버금가는 자본을 축적한 기업을 이룬 창업자는 몇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마쓰시타 처럼 국민적 영웅으로 칭송 받고 있지 못하고 있다. 왜 일까? 그 이유는 그들 대부분이 철도, 부동산이나 석탄 산업 등 정부의 인가나 보호 보조에 의존한 것이다. 그 때문에 사업의 추진이 강인하였다든지, 정계와의 유착이라든지 어두운 배경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그에 비해 주로 가전 제품을 생산한 마쓰시타는 국민에게 가깝고 친근한 존재로 다가왔다.
기술과 경영, 양면의 개혁자로서 마쓰시타는 멋진 아이디어를 용기 있게 추진하였고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면서 자신의 부를 축적하였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세 번째, 전후의 이른바 ‘일본식 경영’을 만들어 낸 점이다.
이것은 쇼와 초기의 대공황 시절에 보여준 종신 고용으로 설명 지을 수 있다.
이런 마쓰시타의 종신 고용은 전일본으로 파급되어 전후의 ‘일본식 경영’으로 발전 되어간다. 이런 마쓰시타의 경영 방식이 사람들에게 뿌리깊게 인식되어서 일까? 아니면 전후의 일본이 종신 고용을 관습화 하였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종신고용이 오랜 “일본적 경영 전통”이라 오해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상식이다.
사실 다이쇼에서 쇼와에 걸쳐 이론은 노동자가 같은 직종에서 회사를 옮기는 비율이 세계에서 가정 높았다고 한다. 일본만큼 간단히 해고할 수 있고 종업원이나 회사를 바꾸는 나라는 세상에 없다는 통계가 남아 있다. 1939년 이른바 ‘공장법’이 개정될 때까지 해고에 대한 아무런 제재 조치가 없었으며 이에 그치지 않고 이런 것을 오히려 긍정하는 이론까지 만들어졌을 정도 였다고 한다. 이런 일본의 기본 전통을 바꾸고 새로운 전통을 새운 사람이 바로 마쓰시타 였다.
1930년 세계적으로 대공황이 일어났다. 이것은 일본에까지 침투해 많은 실업자를 나았다. 그러나 그렇게 세계적으로 힘든 시절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자기 회사의 종업원을 1명도 해고하지 않고 반나절 조업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종업원들 역시 휴일을 반납하고 회사의 제품을 들고 판매에 나서는 등 회사와 노동자가 하나가 되어 보기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기업이 종업원의 인생을 책임 진다는 발상이 실현된 것이다. 이것이 전후에 들어서서 전업종에 퍼져 나가 이른바 일본식 경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네 번째, 마쓰시타는 기업인 외에 경영 이념을 논하는 철학자로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전후 얼마지나지 않아 마쓰시타는 PHP운동을 발안하고 실시하였다. 편리한 가전 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싼 가격으로 판매하면경제는 발전하고 기업은 돈을 벌고 종업원은 높은 임금을 받으면서 고용이 보장되고, 판매 대리점에 대해서도 장기 계약을 맺어 전면적인 지원을 해줄 수 있다. 마쓰시타는 빠른 시기에 이러한 그룹 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스스로의 활동 자금을 스스로 얻어서 처음의 활동을 영원히 발전시킬 수가 있다. 세상을 위해 행하면 돈은 저절로 굴러 들어 온다.’ 이러한 경영적 자각은 철저하기까지 하다.PHP 연구소를 주식회사로 만들어 이익을 올리게 한 것도 마쓰시타 자신의 독특한 철학과 거기에 기초한 실천이다.
그리고 마쓰시타는 만년에는 목소리를 아아듣기 힘들어 고노스케의 발언에 익숙한 비서가 통역을 하지 않으면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지만, 그래도 ‘일본은 더 발전시켜야 한다.’는 정열을 잃지 않았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이른 시기에 판매 대리점의 지도 등으로 기업 경영자를 육성하였지만 최후에는 경영자로서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면에서도 일본을 개혁하는 인재를 육성할 필요를 통감하고 ‘ 마쓰시타 정경숙’을 만들었다.
이렇게 살아있는 내내 국민과 국가를 생각한 그이 독특하고도 앞선 생각들은 일본의 국민적 영웅으로 평가 받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5.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인덕 경영”.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위의 업적에서 보았듯이 소비자 구미에 맞는 수많은 제품을 생산한 걸로 유명하다. 그러나 제품 생산 외에도 사람들에게 인정 받고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마쓰시타 만의 경영 전략이다.
마쓰시타는 이 시대 경영자가 갖춰야 할 것은 정보와 지식만이 아니라며, 인간적인 매력, 즉, 인덕의 중요함에 대해 이야기했다. 덕으로 다스리는 경영, 이것이야 말로 21세기 최첨단의 경영 철학이다.
그의 이런 경영 철학들은 현재에도 많이 사용되고 있는데, 그의 경영 철학을 몇 가지 살펴 보면, 그는 우선 시대의 흐름을 읽어야 한다고 했다.
시대의 흐름은 종적 사회에서 횡적 사회로 전이되고 있다. 풍부하고 정보가 많은 횡적 사회에서는 개성과 자립이 요구되는데, 다양성이야말로 가치 있는 상황이다. 이에 대한 의식변화와 발 빠른 대응이 절실히 요구되며, 지금 보다 한단계 더 높게 생각하며 돈 만들기에 급급해 뛰어다니기 보다는 상품 만들기에 주력하면 불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또 점점 고도화 되고 있는 전문적 지식에 있어 부하직원 들이 훨씬 만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는 상황에서 경영자는 더 이상 정보나 지식만을 믿고 선두에 설 수 없으므로 인각적 매력, 즉 인들을 지닌 리더가 되어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세 번째, 마쓰시타는 바람직한 인간경영의 틀을 만들라고 하였다.
그는 사업하는 기업인에 있어 ‘손님’보다는 ‘팬’을 만들면서 경영을 하라고 하였다. 팬이 된 사람들은 회사를 열심히 홍보해 준다. 그렇게 되면 기업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게 되는데,이런 팬들은 제품과 더불어 인간적인 매력 또는 기업으로서의 매력에 끌리므로 그런 점에 착안하여 ‘팬 만들기’에 주력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손님 이외에 부하직원의 말에 귀를 귀울이라고 하였다. 경영자가 부하직원의 말에 귀를 기울이면 직원들은 일을 하고자 하는 의욕이 생긴다. 그리고 직원들 스스로 공부하고 새로운 정보를 가져온다. 직원들에게 자주 질문하고 관계관심을 보이는, 마음을 열고 인간적 를 맺는 경영자야 말로 존경 받을 수 있다고 하였다. 아무리 위대한 인간이라도 개인의 지혜에는 한계가 있다. 지혜가 모여 조화를 이룰 때 최대의 힘을 발휘하고 인류의 번영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의 지혜를 높이면서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것을 경영자는 깊이 새겨 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 경영자다운 경영자가 되기 위해서는 높은 인덕을 지녀야 하는데 여기서 인덕은 올바른 인간관을 자각하고, 중지를 모으면서 순수한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다섯 번째, 사원을 참여 시켜 헌신하게 하라고 하였다.
경영은 살아 움직이는 것으로 시시각각 변화한다. 일을 추진해 나가기 위해서는 머리 속 이론 만으론 안 된다. 업무현장에서 땀 흘리고 눈물 흘리며 노력을 되풀이하는 과정에서 지혜가 생가기 힘이 붙는다는 것을 잊지 말고 경영자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온 기본이념이나 비전을 정열을 가지고 직원들에게 철저히 교육 시키라고 하였다. 그리고 또 인간은 칭찬 받으면서 감격하고 발분하게 됨으로 경영자는 인재를 육성하려면 사적인 감정을 버리고 직원들의 장점에 눈을 돌려 적시적절 한 칭찬과 위로를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또, 직원은 경영자의 거울임에 경영자의 태도가 직원 전체에게 그대로 반영된다. 경영자는 권한은 위임해도 좋지만, 귄위는 위임해서는 안 된다. 리더에게 있어 귄위가 있어야만 직원들에게도 힘이 생기게 마련인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마지막으로 조직이 한 방향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견실한 경영을 위해 경영규모를 적정하게 유지해가는 것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조직을 유연한 형태로 두며,한편으론 적극적으로 신규부문을 일으켜 새로운 성장에 눈을 떠 의욕 있는 직원을 독립시켜 자율경영에 참여 시키는 것 또한 좋은 생각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업 본체의 덩치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보다 튼실하게 만들며, 정보 제공에 있어 투명한 경영을 통해 회상의 경영을 솔직히 들어내야 한다. 드러냄으로써 사람이 모이고 정보가 모이고 지혜가 보인다. 나아가 앞에서도 말했듯이 팬이 생긴다. 드러냄으로서 점점 더 강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이렇게 몇 가지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경영 방침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그가 요구한 것은 어찌 보면 단 하나이다. 덕을 가지고 경영한다. 손님에 있어서나 직원에 있어서나 사회에 있어서나 덕으로서 진실됨으로 그들을 대한 다면 경영은 반드시 성공한다는 것이 마쓰시타의 생각이다.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미친 영향.
기업인으로서 경영인으로서 우리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 주었던 마쓰시타는 현재의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우선 첫번째로, ‘행복을 파는 장사’라는 발상이다.
종래 일본에서의 장사란 돈을 버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인 일로 인식되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그런 사고로부터 벗어나 장사란 천하만민을 행복하게 하는 것, 따라서 일이란 즐거운 것, 회사는 보람 있는 곳이라고 주장했다. 이른바 기업 전체를 공동체로 하여 거기서 생산하여 판매하는 상품이 가족을 편리하게 하고 세상을 행복하게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생 철학으로서 입신출세 지향이 촉진되었다는 것이다.
맨손으로 출발해 일본 최고의 재벌로 변신한 마쓰시타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자신들 역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입신출세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입신출세의 꿈, 이른바 저패니즈 드림은 전후의 성장시대를 통하여 일본인의 마음에 정착했다 해고 과언이 아는데 아이러니 한 것은 이를 널리 퍼뜨린 사람이 다름아닌 초등학교 중퇴라는 아주 낮은 학력을 가지고 있었던 마쓰시타 고노스케라는 것이었다.
세 번째, 마쓰시타는 “일본식 경영”이란 것을 남겼다. 그리고 이것은 널리 퍼짐으로써 이 나라에 ‘회사 인간’이 양성되고 ‘직연 사회’가 태어났다. 대공황 시절 사원들을 마구 해고하는 다른 회사들과 달리 마쓰시타는 끝까지 한명의 사원도 해고 하지 않은 체 대공황을 헤쳐 나왔다. 이런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주장하는 종신 고용제는 ‘회사’라는 커뮤니티에 평생을 전인격적으로 귀속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하였는데, 이런 것을 기업 측도 이용하여 기업에 대한 충성심을 충동질함으로써 ‘회사 인간’은 어쩌면 당연스레 일본 사회 속으로 파고 들었다.
네 번째, 마쓰시타 고노스케가 경영자로서 많은 이상을 실현 하면서 철학자 또는 개혁 제창자로서도 발언하게 되었다는 데에서 전후의 일본에 ‘경영자는 위대하다.’라는 풍조가 일어났다. 마쓰시타 처럼 현역 경영자가 철학자이며 개혁 제창자로서 위대한 사람으로 인정되어, 뭐든 의견을 들어 보자고 귀를 곤두세우는 풍조가 많은 것은 세계적으로 상당히 드문 모습이었다. 마쓰시타는 특히 자기 회사의 이해를 떠나 높은 위치에서 발언을 계속 하였는데, 기업의 성장 발전이 국가와 국민을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각계 각층으로 침투되면서
경영자란 천하는 두루두루 살필 줄 아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마쓰시타 고노스케의 한계.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쇼와 시대를 대표하는 경영자로 살다가 쇼와 시대가 끝난 1989년 세상을 떠났다. 그가 남긴 업적은 실로 대단하지만 그의 그런 업적은 현재로 오면서 한계에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그 한계의 첫번째는 규격 대량 생산이었다.
마쓰시타는 1931년 ‘당선호’라는 라디오를 생산할 때부터 규격 대량 생산을 하였다. 이런 대량 생산은 싸고 질 좋은 물품을 다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전후 일본사회에서 충분히 인정 받을 만한 경영 전략이었다.
그러나 현재와 같이 개성이 중시되면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의 물품은 인기가 없게 되었으며 부가가치가 높아진 만큼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아지면서 마쓰시타의 대량 생산체제는 한계에 부딪히고 있다.
두 번째로 일본식 경영의 한계이다.
특히 종신 고용제의 관행은 국제적 대경쟁 시대에 있어 상당히 불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쇼와 시대 분명 종신 고용제는 직원들에게 있어 회사에 충성하게 함으로써 회사와 개인을 성장시켰지만 현재에 와서는 젊은 층보다 기업 내에 고령자가 많아지면서 기업의 부담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당시 회사형 인간으로 회사에 목숨 걸었던 직원 들이 현재에 와서 큰 상실감에 젖어 있다는 것 역시 큰 한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세 번째로 일본적 근면의 철학에 대해 다시 한번 돌이켜 봐야 할 때인 것 같다.
효율성 있고 근면하게 일을 하여 생산을 늘림으로써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준다는 이런 사고 방식은 분명히 훌륭하다 그러나 효율 근면주의의 대표였던 마쓰시타 고노스케는 ‘공급자로서의 마쓰시타 전기 산업은 반드시 최고의 제품을 제공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비자의 선택을 별로 염두해 두지 않았다는 점에서 현재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
파나소닉이라는 브랜드로 잘 알려진 마쓰시다가 3년에 걸친 구조조정과 조직개편을 완료하고 본격적인 기지개를 켜고 있다. 마쓰시다 혁신의 의미를 중국 최고의 병서인 손자병법을 통해 살펴보자.
최근 일본에서는 마쓰시다(松下電器産業)의 혁신이 화제다. 2002 회계연도에 2천억엔 영업손실이라는 최악의 성과를 기록했던 마쓰시다가 단 일년 만에 흑자 전환을 이루자, 마이너스에서 플러스로 반전되는 영업이익률 추이가 알파벳 ‘V’와 닮았다 하여 ‘V자 회복’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그림> 참조). 물론 장기불황의 늪을 벗어난 일본 경제의 전반적 상승세를 탄 것이라 볼 수도 있다. 그러나 핵심 사업의 상승세와 함께 기세를 올리고 있는 샤프, 캐논 등과 대조적으로, 마쓰시다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 대기업으로 꼽히는 소니는 영업이익이 하락세이며, 도시바는 주력인 낸드 플래쉬 메모리 산업 전망이 불투명하다. 디지털 가전을 중심으로 사업 역량을 강화하고, 기업 체질의 변화를 시도한 마쓰시다의 혁신이 대기업 혁신 성공 사례로서 주목 받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다.
마쓰시다 혁신병법을 찾는다.
기업의 성공은 종종 전쟁의 승리에 비유되곤 한다. 시장이라는 전쟁터에서 경쟁자와 끊임없이 공격을 주고받는 기업의 상황이 전쟁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의 병법서로 잘 알려진 손자병법에서 기업의 성공 비결을 찾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다. ‘대량생산의 구태를 떨치지 못했다’,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무거운 조직이다’ 라고 평가되던 마쓰시다가 히트 상품을 빠르게 출시하는 날렵한 기업으로 변화할 수 있었던 비결을 손자병법을 통해 찾아보자.
병법 1. 지형을 최대한 활용하라 - 제조강점 십분 활용
손자는 지형의 특성을 파악하고 그를 최대한 활용하라고 했다. 지형을 여섯 가지로 구분하고 각각의 지형을 유리하게 활용하는 법에 대해 설명한 것을 보아도 지형의 활용은 승리를 이끌어내는 중요한 요소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현재의 강점을 알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하는 기업이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확보한다.
90년대 등장한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조류는 아날로그 가전의 왕자인 마쓰시다가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급박하게 흘러갔다. 그러나 90년대 후반, 디지털 컨버전스의 시대가 예고됨에 따라 마쓰시다는 가전과 디지털 기술이 융합된 디지털 가전의 시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마쓰시다 측의 표현을 빌리자면 ‘50년에 한번 올까말까 한 기회’가 온 것이다.
( 18개월 - 54개월 - 90개월 -18년마다 변화되는 정 - 반 - 합의 원리- 시대의 변화는 이렇게 온다..
이 변곡점에서..단점이 장점이 된다. )
‘대량생산에 집착하는 구식 기업’이라 평가되던 마쓰시다가 새롭게 내놓은 디지털 시대 핵심우위 전략은 제조에서 탈피하는 것이 아니라, 특유의 제조역량을 더 강화하는 것이었다. 경쟁자인 소니가 제조부문을 분리하며 미디어 컨텐츠 쪽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긴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또한, 여러 일본 기업이 생산 거점을 해외로 이전한 것과 대조적으로, 마쓰시다는 셀 생산을 비롯한 새로운 생산 방식을 도입하고, 고도의 생산기술 연구를 바탕으로 일본 내 생산기반을 더욱 강화했다. 비메모리 반도체 중 하나인 시스템 LSI(고밀도집적회로)에는 위험할 정도로 과감하게 투자하여 대규모 생산 체제를 갖추었다.(극양은 극음과 통한다 ) 규모의 우위에 바탕해 있으나 유연성, 기술, 속도 측면이 강화된 제조기업, 마쓰시다는 이것을 ‘超(super) 제조기업’이라 말한다.
마쓰시다의 ‘超 제조기업 전략’은 디지털 컨버전스 시대의 개막과 함께 빛을 발하고 있다. R&D부문과 생산부문의 긴밀한 공조 아래, 제품기술은 생산부문으로 수월하게 이전되었으며 세계 최고의 생산기술을 자랑하는 국내생산거점은 한번도 생산한 적 없는 신개념의 제품을 어떤 해외 공장보다 정확하게 생산해냈다. 제품 개발 및 생산 노하우의 철저한 보안 유지도 가능했다. 게다가 컨버전스 제품에 있어 핵심 부품이 되는 시스템 LSI 기술로 개발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물론, 부품의 가격경쟁력과 품질을 바탕으로 제품 경쟁에서는 더욱 유리할 전망이다.
반면 경쟁자인 소니는 디지털 TV와 DVD 레코더 분야에서 마쓰시다에 한발 뒤진 모습이다. 제조 기반을 소홀히 한 것이 그 원인이라 한다. 제품연구와 설계를 담당한 사업조직이 자체 제조부문을 갖지 못해 신제품 생산을 조율하는 데 차질이 생겼을 뿐 아니라 주요 부품을 자체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니가 중요성을 과소평가했던 제조역량이 마쓰시다에겐 승리를 이끌어 내는 유리한 지형이 되었던 셈이다.
병법 2. 명확한 편성이 핵심이다 - 사업조직 간 중복 없애고 분권화
손자병법에 따르면 군법의 핵심은 정공(정면공격)과 기공(기습공격)을 변화무쌍하게 구사하는 것에 있다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각각의 하위조직이 전군의 작전 범위 안에서 일관되게 움직이되, 전장의 변화에 자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군의 편성과 지휘체계를 명확히 하는 데 그 비법이 있다고 손자는 말하고 있다. 각 조직이 각자 빠르게 움직이면서도 전군이 일사불란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상치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모순된 조건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부 조직 간의 중첩이나 모호한 부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상부의 명령을 기다리며 지체하는 시간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마쓰시다는 연결 기준 연간 매출이 7조 엔이 넘는 거대 기업인 만큼 그룹 내에 사업 중복도 많았다. 예컨대 마쓰시다전공과 큐슈마쓰시다전기는 똑같이 카네비게이션 제품을 만들었는데, 이들은 같은 브랜드를 달고 있을 뿐 제품 사양과 내장 소프트웨어까지 모두 달랐을 정도다. 이러한 사업중복은 불필요한 경쟁을 유발시켜 전사 자원의 낭비를 초래했고, 본사는 각 부문의 세세한 상품 전략에까지 개입해야 했다. 의사결정이 지체되자 사업조직 별 변화 대응은 느려질 수 밖에 없었다.
2001년, 마쓰시다는 산하에 속한 4개 자회사의 상장을 폐지하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하여 각 사업조직 간의 중복 영역을 모두 정리하였다. 구조조정이 완료된 마쓰시다는 14개의 사업본부 체제를 갖추고 각 본부의 사업영역을 분명히 구분하였다. 다른 사업본부와 중복되는 사업이 없으므로 사업본부는 본사의 조율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분권화를 통해 빠르고 독립적인 의사 결정 시스템을 만든 것이다. 성과 지표를 통일하여 이를 지원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 과거에는 각종 지표를 통해 사업본부의 실적을 평가했으나 현재의 사업본부 평가 지표는 CCM(Cost of Capital Management: 마쓰시다 고유의 성과 지표, EVA와 유사함)으로 통일되었다. 일정 수준의 이윤만 낸다면 기타 세부적인 운영에 대한 본사의 개입은 최대한 줄이겠다는 것이다.
병법 3. 속공으로 승기 잡아라 - 기능체제 재편으로 제품출시속도 향상
손자는 거센 물결이 빨라서 돌을 뜨게 하듯, 속공으로 승기를 잡으라고 했다. 속공으로 상대의 허를 찔러 승기를 잡으면 유리한 고지에서 쉽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조직개편이 완료될 무렵인 2002년 4월, 마쓰시다는 DVD 레코더인 ‘DIGA 출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신제품 출시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조직혁신으로 구축된 새로운 기능체계의 스피드를 테스트하는 무대였던 것이다.
마쓰시다는 금번 혁신 과정에서 제조와 판매 일치의 사업부제를 폐지하고, 사업부 산하의 판매 기능을 본사 소속의 마케팅 본부로 분리해냈다. 이어 사업부를 대체하는 새로운 사업 조직인 사업본부를 강화하고, 사업본부가 제품 기획에서 생산에 이르는 과정을 총괄하도록 했다. 덕분에 지역별 제품라인업, 개발 및 설계 일정, 생산 일정을 비롯한 각종 계획안 수립 작업에 속도가 붙었다. 또한 본사 산하의 제품 R&D 기능을 사업본부 중심으로 재편하면서 제품개발의 리드타임도 줄어들었다. 생산 부문 역시, 새롭게 도입한 셀 생산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사양의 다양한 제품을 짧은 일정 안에 무리 없이 생산해 냈다.
DIGA가 기획되어 출시되기까지 걸린 시간은 6개월이다. 통상 신제품 기획에서 출시까지 1년이 걸리는데, 마쓰시다는 이 기간을 절반으로 단축한 것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DIGA는 2003년 3월, 전세계 시장에 동시 출시되며 마쓰시다 부활의 신호탄을 쏘았다. 지역별 제품사양, 운송시기 등의 차이를 꼼꼼히 고려하며 제품출시를 총지휘한 사업본부 시스템이 진가를 발휘한 것이다. 소니가 대응 모델로 역공을 펼치긴 했지만 출시는 마쓰시다보다 반년 정도 늦은 뒤였다.
동시출시를 통해 마쓰시다는 전세계 주요 시장을 선점했을 뿐 아니라 후속 모델 개발에 있어서도 소니보다 시간적으로 유리한 입장에 섰다. 이제 동시출시전략은 마쓰시다의 모든 신제품에 적용된다 한다. 새롭게 구축된 기능 체제의 속도감 있는 운영에 자신이 붙은 것이다.
병법 4. 사기(士氣)로 이겨라 - 조직원의 사기 높이는 V 상품
손자는 전쟁이란 사기(士氣)로 하는 것이라고 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병사들이 있어야 이긴다는 것이다. 혁신의 성공도 마찬가지다. 혁신 활동을 통해 단기적 성과를 개선할 수는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성공은 직원 개개인의 마음가짐에 달려있다. 직원 개개인의 생각과 자신감이 변화하지 않으면 혁신 효과가 지속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직원 개개인의 마음은 무엇을 계기로 바뀌는가? 바로 그들의 업무가 성공으로 이어지는 성공체험을 통해서 바뀐다.
현재 마쓰시다는 전사 경영성과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상품을 V상품으로 정해서 개발 및 홍보, 판매를 지원하고 있다. V 상품전략은 전사적인 히트상품 개발을 촉진하는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긍정적인 조직 문화를 형성하는 데에도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V 상품으로 선정된다는 것은 각 사업본부의 성과를 인정받는 것을 의미하므로, 조직원들 스스로 업무에 대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쓰시다 V자 회복의 본질’을 저술한 다카라베 세이이치(財部誠一)는 닛산의 부활을 일찌감치 예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해 마쓰시다의 부활도 공언하고 있는데, 그의 논지는 간단하다. 히트 상품을 내면서 직원들 개개인의 생각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마쓰시다는 오랜 동안 ‘2등주의’를 표방해 왔다. 위험부담이 많은 신제품 출시보다는 선발주자가 먼저 내놓은 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저가로 판매하는 것을 강점으로 삼아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 혁신을 계기로 마쓰시다의 2등주의는 옛말이 될 듯하다. 마쓰시다 직원들은, 회사의 신제품이 히트하는 모습, 자신이 담당했던 신제품이 V 상품으로 인정 받는 경험을 통해 최근의 전사적 변화의 움직임을 일선에서 체감하며 자신감을 회복하고 있다. 무사안일의 대기업병에 시달리던 마쓰시다에 활기가 찾아온 것이다.
혁신에도 완결성이 필요하다
손자는 전쟁의 승리란 여러 가지 조건이 모두 갖추어져야 가능하다고 말한다. 지형을 활용하는 능력, 상대의 허를 찌르는 작전, 일사불란한 지휘 체계 및 용맹한 군사가 모두 갖추어져야 이길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의 혁신도 마찬가지다. 기능의 변화, 조직 체제의 재구축과 같은 외형적 변화가 기업이 변함을 의미하진 않는다. 외형적 변화와 함께 전략과 조직 문화의 개선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혁신이 완결되는 것이다.
마쓰시다는 새로운 환경에 적합한 기업 체질을 만들기 위해 핵심우위 및 조직체제 측면에서 근본적인 개선과 변화를 시도했다. 이러한 변화가 히트 상품 출시라는 분명한 성과로 이어지자 직원 개개인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2% 대에 머물고 있는 낮은 영업이익률과 소니에 열세로 평가되는 브랜드 가치 등 마쓰시다가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쓰시다 혁신을 성공적이라 평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인원감축과 사업정리에 그친 다른 기업의 혁신에 비해, 마쓰시다 혁신은 기업 내외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완결성을 갖추고 있었다. 지금의 혁신이 향후 발전의 원동력이 되기에 장기 전망을 밝게 보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