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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국익수호연합 원문보기 글쓴이: 權進士
朝鮮 陽明學의 哲學的 特質- 霞谷 鄭齊斗의 工夫論을 中心으로
崔一凡 (成均館大)
차 례
1. 서 론
2. 王陽明의 致良知와 任情縱欲 문제
3. 心物二元의 문제와 하곡의 重層的 理氣 構造
4. 任情縱欲의 克服과 無暴氣 工夫
5. 결 론
1. 서 론
이 논문의 목표는 하곡 霞谷 鄭齊斗(1649-1736)의 공부론을 분석함으로써 조선 양명학의 특질을 살펴보는데 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공부론은 양명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다시 말하면 양명학의 철학적 내용은 공부론의 토대 위에 수립되어 있다는 것이다. 왕양명이 젊은 시절(21세)에 주자의 격물치지 공부를 시험하기 위해 대나무를 격물하다가 두통에 시달렸다는 일화는 양명학이 단순한 철학적 사색과 다르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거니와 후에 龍場의 깨달음을 거쳐 50세에 제출한 致良知敎는 그가 일생 동안 체험한 공부론의 결정이었다.
하곡은 조선을 대표하는 양명학자로서 주자학이 교조화되던 시대에 사문난적의 비난을 무릅쓰고 양명학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중국의 양명학을 답습하고 묵수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조선 철학의 전통 속에서 중국의 양명학과는 구별되는 조선의 양명학을 창의적으로 수립한 뛰어난 철학자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하곡의 양명학을 하곡학이라고 부른다.
하곡학의 특질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그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양명학과는 달리 하곡학에는 理氣論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하곡이 양명의 致良知 공부론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곡은 理를 死理, 生理, 眞理 등으로 나누고 氣 역시 客氣와 正氣 등으로 구분하여 독특한 理氣論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공부론 상에 있어서도 양명 공부론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는 致良知에 대해서 "비록 매우 정밀하기는 하지만 그 폐단에 혹 任情縱欲의 근심이 있을 수도 있다"고 하여 "任情縱欲이야말로 양명학의 병통"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 이 문제에 대한 기존의 연구로는 김교빈의 논문을 들 수 있다. 김교빈은 하곡학의 특질이 '주자학과 양명학의 주체적 극복'에 있다고 전제하고, 구체적으로 하곡은 物理를 기본으로 하는 주자학을 극복하기 위해 生理를 주장하고 다시 양명학의 任情縱欲의 가능성을 극복하기 위해 眞理를 추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김교빈의 논문은 하곡에 있어서 임정종욕의 문제 의식이 理氣의 重層的 구조를 수립하게 되는 계기라고 밝혔을 뿐, 하곡이 임정종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수립한 공부론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기론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히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필자가 보기에 하곡학의 특질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기 위해서는 하곡의 공부론과 이기론의 구체적 의미와 관계가 보다 명료하게 분석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이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본 논문에서는 먼저 왕양명의 치양지교와 하곡이 제기한 임정종욕의 문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리고 임정종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곡이 제시한 공부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어서 그의 공부론이 어떻게 이기론과 연결되어 있는지를 밝힐 것이다.
2. 王陽明의 致良知와 任情縱欲 문제
앞에서 밝힌 바와 같이 하곡은 왕양명의 치양지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였다.
내가 양명집을 보니 그 도가 간요하고 매우 정밀하여 마음으로 깊이 좋아하였다. 신해년 6월 동호에 가서 잘 때 꿈 속에서 홀연히 왕씨의 치양지가 매우 정밀하기는 하지만 그 폐단이 혹 임정종욕의 근심이 있을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하곡은 이어서 '이 네 글자는 참으로 왕학의 병이다' 라고 설명을 덧붙였는데 네 글자란 바로 임정종욕을 가리킨다. 임정종욕이란 글자 그대로 '감정에 맡겨 人欲을 방치한다'는 의미이다. 즉 치양지 공부를 잘못하면 인욕을 방치하는 폐단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왕양명의 공부론은 용장의 깨달음 이후 誠意 공부로부터 致良知 공부로 성숙되었다. 그런데 성의 공부나 치양지 공부를 막론하고 그 실질적인 내용은 모두 자신의 마음에서 천리를 보존하고 인욕을 제거하는 "存天理, 去人欲"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하곡은 '인욕을 방치할 가능성'을 치양지 공부의 폐단으로 제기한 것일까?
이른바 용장에서의 깨달음이란 格物窮理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즉 格物이란 대상 사물의 이치(物理)를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마음에서 인욕을 제거하는 것이며, 窮理란 자신의 의념에서 끊임없이 인욕을 제거하여 완전히 천리를 보존하는 경계에 도달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격물궁리의 의미를 확정한 후 양명은 주자가 격물치지 공부를 중심으로 {대학}을 해석한데 대해 誠意 공부를 중심으로 대학을 해석하게 된다. 즉 양명은 47세 때에 {大學古本}을 판각하고 아울러 서문을 지으면서 "대학의 요체는 성의일 뿐이며 성의 공부는 격물에 있고 성의의 궁극은 지선에 그치는 것일 뿐"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52세에 양명이 개작한 {고본대학} 서문에서 {대학}의 요체는 誠意에서 致知로 전환하게 된다. 양명에게 있어서 致知는 곧 致良知이며, 이는 양명의 공부론이 치양지로 귀착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의로부터 치양지 공부로의 전환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양명에 의하면 心과 意와 物의 개념과 관계는 다음과 같이 규정된다.
몸의 주재는 心이고 心이 발한 것이 意이니 意의 본체는 곧 知요, 意의 소재는 곧 物이다. 만약 意가 事親에 있다면 事親이 一物이다.---그래서 내가 心 밖에 理가 없고 心 밖에 物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誠意의 功은 단지 格物에 있다.
이로써 보면 格物 공부를 통해서 誠意에 도달하는 것은 心이 發한 意에서 人欲을 제거하여 (去人欲= 格物) 천리를 보존(存天理=誠意)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誠意를 致知 즉 致良知로 전환한 것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위의 인용에 나타난 바와 같이, 知는 意의 本體이며 意는 知의 作用이므로, 誠意를 致知 즉 致良知로 전환한 것은 공부의 소재가 意(=作用)로부터 知(良知=本體)로 轉移한 것을 의미한다. 왕양명은 제자 陳九川이 치지의 공부법에 대해서 묻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대가 가지고 있는 한 점의 良知가 곧 그대 자신의 準則이다. 그대의 意念이 붙어 있는 곳에서 그것은 옳은 것을 옳은 것으로 알고 그른 것은 그른 것으로 아니 다시 조금도 속일 수 없다. 그대가 다만 良知를 속이려 하지 말고 착실하게 그것에 의거해서 행하면 선은 곧 보존되고 악은 곧 제거될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시원하고 즐거운가! 이것이 바로 格物의 참된 비결이며 致知의 실다운 공부이다. 만약 이 참된 기틀에 의하지 않으면 어떻게 格物하겠는가? 나도 근년에야 이처럼 분명히 깨달았다. 처음에는 良知에만 의존하는 것이 부족하지 않을까 의심했지만 자세히 보니 조금의 결함도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양명이 격물 공부로부터 치양지 공부로 전환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격물 공부란 心이 발동한 意念 상에서 善惡을 분별하여 善한 意念은 보존하고 惡한 의념은 제거하는 공부이다. 그런데 의념 자신은 이미 발동된 것이어서 의념 자신의 선악을 분별할 수 없으므로 반드시 의념을 초월하여 의념의 선악을 판단할 주체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양지란 바로 의념의 선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주체이며, 치양지란 바로 스스로 선악을 판단하는 주체를 수립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양지란 선악의 기준을 객관적으로 설정하여 그것에 의해 의념의 선악을 비추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양지 자체가 곧 선악 판단의 주체요 준칙이다. 그러므로 양지를 이루면(치양지) 이전에는 의념 상에서 선악을 대상화하여 분별했던 것과는 달리 양지 자체가 자연스럽게 선은 보존하고 악은 제거하는 경계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양지가 바로 천리요, 천리가 바로 양지인 경계이니, 양명이 말한 것과 같이, 더 이상 의념을 대상화할 필요가 없는 簡易하고 直截한 공부인 것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양지란 바로 인식 주체(心=知)가 곧 天理이며, 더 이상 천리를 대상화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치양지 공부는 바로 天理를 體認하는 공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치양지 공부의 성공 여부는 바로 어떻게 천리를 올바르게 체인하는가의 문제이며,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면 어떻게 심의 본체를 올바르게 체인하는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하므로 양명과 그의 제자들 역시 문제를 삼지 않을 수 없었다. 양명의 제자 顧東橋는 치양지 공부의 문제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마음의 본체는 본래 밝지 않음이 없으나 氣質에 구속되고 사물에 가리어 어둡지 않은 경우가 없습니다. 학문과 사변으로 천하의 이치를 밝히지 않는다면 善惡의 기틀과 眞妄의 구별을 자각하지 못하여 '감정에 맡기고 제 마음대로 생각하여'(任情恣意) 그 폐해가 말로 다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고동교가 지적한 문제는 바로 하곡이 지적한 임정종욕과 같은 성격의 것이었다. 사실 양지를 인식 주체인 심의 본체라고 한다면, 양지는 인식 주체인 심이 대상화할 수 없는 심 자체이므로 양지를 객관화하여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고동교가 지적한 '善惡의 기틀과 眞妄의 구별을 자각하지 못 한다'는 문제는 바로 양지를 대상화할 수 없는데서 발생하는 것이었다. 선악의 기틀과 진망의 구별을 자각할 수 없다면, 양지가 아닌 인욕을 천리라고 오해하여 '任情恣意'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열려 있으므로, 치양지 공부가 아닌 학문사변의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양명의 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이제 천하의 이치를 궁구한다고 하면서 돌이켜 마음에서 구할 줄 모른다. 소위 선악의 기틀과 진망의 구별을 내 마음의 양지를 버리고 어디에서 체찰할 수 있는가? 그대가 말한 氣拘物蔽라는 것도 良知를 拘束하고 良知를 隱蔽한 것일 뿐이다. 지금 그 은폐를 제거하고자 하면서 치양지에 힘쓸 줄 모르고 양지를 대상화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마치 눈이 나쁜 사람이 약을 먹고 눈을 치료하려 하지 않고 밝음을 밖에서 추구하는 것과 같다. 任情恣意의 해로움 역시 이 마음의 良知에서 天理를 精察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보면 왕양명은 고동교가 제기한 문제가 마음과 천리를 二元化하는데서 발생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왕양명이 보기에 마음의 본체가 곧 천리(心卽理 혹은 良知卽天理)인데, 천리를 마음의 대상으로 삼아 학문사변을 통해서 추구한다는 것은 마음과 천리를 이원화하는데서 기인하는 오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왕양명은 '任情恣意의 해로움 역시 이 마음의 良知에서 天理를 精察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왕양명이 마음과 천리의 이원화를 경계한 것은 "네가 마음에서 天理를 찾는 그것이 바로 理障이다"라고 제자들에게 경계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왕양명이 보기에 천리를 대상화하는 한 天理 마저 장애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양명의 치양지 공부의 관건은 바로 천리(=양지)를 대상화하지 않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선악 판단의 直覺的이고 자연스러운 기틀로서의 양지를 체인하는 것이야말로 치양지 공부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곡이 제기한 임정종욕 문제의 소재는 무엇이며 자신의 학문 체계 속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을까?
3. 心物二元의 문제와 하곡의 重層的 理氣 構造
앞에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하곡이 양명학의 폐단으로 지적한 임정종욕의 문제는 이미 왕양명과 그의 제자들 간에도 논의가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왕양명은, 치양지 공부가 '任情恣意'의 위험성을 내포할 수 있다는 顧東橋의 우려에 대해, 마음과 천리를 이원화하지 않을 것을 말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곡의 경우 자신이 제기한 임정종욕의 문제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었던 것일까? 임정종욕의 문제가 제기된 {霞谷全集} 卷九 [存言]下에서 우리는 단지 문제제기만을 볼 수 있을 뿐 이와 관련한 하곡 자신의 구체적인 진술은 발견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存言] 中에서 實體(=心의 本體, 良知)를 잘못 인식하는 유폐에 대해서 하곡이 다음과 같이 서술한 내용을 볼 수 있다.
'---實體를 心이라 하고 虛勢를 理라고 하여 心과 理를 나누니 이는 心과 理, 知와 行을 二元化하는 것이며, 이것은 모두 流弊이다. 그런데 그것이 流弊인 줄 모르고 올바른 實體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本體에 대해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득이 虛勢를 근본으로 삼는다. 또 폐단에 흐른 자들은 그것을 가리켜 實體라고 하니 虛勢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저 虛勢는 心體에 一貫되지 못하니 內外를 二元化할 수밖에 없다. 內外를 이렇게 二元化하고도 그 유폐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實體이며 道理의 근본이며 정당한 功夫라고 오해하여 道體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곡이 心과 理, 知와 行의 二元化를 流弊로 지적하고 있으며, 이러한 유폐가 실체를 올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허세를 근본으로 삼기 때문에 발생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왕양명은 교동교가 제시한 任情恣意(=任情縱欲)의 폐해를 심의 본체인 양지의 체인에 관한 문제로 해석하였다. 다시 말하면 심의 본체를 바르게 체인하지 못하여 인욕을 양지로 알게 되는 폐단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위의 인용을 통해서 하곡 역시 임정종욕의 문제를 왕양명과 같이 본체 체인의 정당성 문제로 해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본체를 올바르게 체인하지 못할 때 임정종욕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그것은 곧 虛勢를 實體로 오인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곡이 제시한 虛勢라는 개념은 그의 글 중에서 [生理虛勢說]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生理라는 개념과 대립하고 있다. 이미 선행 연구들이 밝혔듯이 하곡이 중층적 구조로 설명하고 있는 理의 개념에는 物理, 生理 그리고 眞理의 구분이 있는데, 이 중에서 虛勢란 곧 物理를 가리키는 개념이다. 虛勢의 의미는, 다음과 같이 하곡이 주자의 理를 虛勢 혹은 物理라고 비판하는 글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주자는 條通하는 것을 理라고 하는데 이러한 理는 비록 사물에는 두루 해당된다고 할 수 있지만 단지 사물의 虛條空道일 뿐이며 本領宗主라고 할 수 없다. 聖人은 氣의 主宰로서의 明體를 理라고 하였으니 능히 仁義禮智할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주자는 氣道의 條路를 理라고 하였으니 氣道의 條路에는 生理도 없고 實體도 없어서 죽은 물건과 같다. 참으로 그런 理는 人心神明에 없으며 단지 虛條일 뿐이니 저 枯木死灰와 같은 것을 人心神明과 性道가 같다고 하여 大本性體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로써 보면 하곡은 '氣道의 條路'에 불과한 객관 사물의 理와 능히 인의예지할 수 있는 人心神明의 理를 구별하여 전자를 虛條空道라 하고 후자는 本領宗主라고 하여 엄격히 구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하곡은 朱子의 理를 단지 氣의 條理(=物理)에 불과하다고 규정하는 한편 자신이 말하는 生理 혹은 眞理는 仁義禮智의 도덕 실천이 가능한 주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실천이 가능하다는 의미는 하곡의 리가 기와 독립되어 단지 도리 혹은 법칙이 아니라 능동성을 발휘하는 良知(=도덕심, 측은지심)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곡은 "理는 氣의 靈通處이니 神이 그것이다"라고 하였고 또 '理는 心의 神明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하곡의 生理나 眞理가 바로 대상에 대해 능동적(=주체적. 외적인 법칙이나 규정에 의거하지 않음)으로 도덕 판단을 하는 良知와 같은 개념임을 가리킨다. 그렇다고 해서 霞谷學에서 氣의 존재가 부정되고 理가 단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곡 자신이 말하듯이 '發하는 것은 氣요 發하게 하는 것은 理'로서 서로 形而上과 形而下의 구분은 분명하되 '生氣 속에 理體가 존재한다'는 하곡이 말이 시사하듯이 生理는 본래 生氣와 함께 존재하는 理氣合一 혹은 理氣不離의 관계인 것이다.
이와 같이 理氣를 不離 혹은 合一의 관계로 규정하는 것을 우리는 霞谷學의 특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하곡의 理氣論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우주론적 추론이나 혹은 존재론적 관점이 아니라 工夫論 혹은 境界論의 관점에서 수립된 것이었다. 그것은 하곡의 호연지기에 대한 해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호연지기는 바로 도의에서 발출한 기운으로서 이것을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형이상의 義理와 형이하의 氣는 엄밀히 나뉘지만 실제로 浩然之氣를 체험하는 주체자에게는 이러한 분석이 허용되지 않고 義理가 氣이고 氣가 곧 義理인 境界만이 존재할 뿐이다.
하곡의 이기론이 공부론에 입각한 것이라면 그의 공부론이 가장 명료하게 설명된 곳은 {맹자} 浩然章을 해석한 [浩然章解]이다. 하곡은 맹자를 해석하면서 浩然章에 대해 浩然章圖를 포함해서 모두 5편의 浩然章解를 저술하고 게다가 浩然章雜解를 지어 총 6편의 글을 남겼다. 이것은 하곡이 浩然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의 특별한 관심이란 다름 아닌 不動心 工夫 혹은 無暴氣 工夫에 대한 것이었다. 우리는 하곡의 無暴氣 공부에 대한 서술을 통해서 그가 우려한 任情縱欲의 폐단을 극복할 수 있는 공부법을 발견할 수 있다.
4. 任情縱欲의 克服과 無暴氣 工夫
앞서 살펴 본 바에 의하면 任情縱欲의 폐단은 良知(=本體)에 대한 잘못된 體認에서 기인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꾸어 말하면 人欲을 良知로 오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人欲을 良知로 오해할 수 있는가? 하곡은 맹자의 不動心 공부를 해석하면서 이 문제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孟子는 不動心에 도달할 수 있는 방법으로 "持其志, 無暴其氣"를 제시하고 다시 浩然之氣를 기르는 방법으로 "必有事焉, 而勿正心, 勿忘勿助長"을 제시하였다. 이어서 宋人의 " 苗助長"의 비유를 통해서 그것을 설명하였는데, 하곡은 이 " 苗助長"의 비유와 "持其志, 無暴其氣"의 의미를 연결해서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버려두고 김매지 않는 것은 할 일을 잊는 것이고, 뽑아서 조장하는 것은 마음에 작정해서 기필코 氣를 강제하는 것이니, 김매지 않으면 기르지 않을 뿐이지만 뽑는다면 生理를 해쳐서 끊어버리게 되니, 그 해로움은 반드시 생명을 잃는데 이를 것이다. 告子는 義를 외적인 것이라고 여겨 그 마음에서 잡을 것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의 마음에 있는 것은 억지로 不動心을 작정한 것일 뿐으로서 이는 血氣에서 움직인 것이니, 이미 本源을 잃어 浩然之氣를 생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부득불 억지로 잡아 강제로 不動心을 期必하니, 이것이 이른 바 助長이라는 것이다. 강제로 (志를)잡는 것은 性體를 도리어 은폐할 뿐 아니라 그 생명의 근원(生氣)을 흔들어 막아 끊어 버리게 되니, 그 해침은 여기에서 극에 달한다.
맹자는 호연지기는 義를 集積함으로써 길러질 수 있다고 하고, 고자가 義를 모르는 것은 義를 외적인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라고 갈파한 바 있다. 위에서 하곡은 이를 부연하여, 告子가 義를 외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에 마음속에서 本性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를 모아서(集義) 浩然之氣를 기르고 不動心의 경지에 도달하는 방법을 알 수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告子의 마음에 보존된 것은, 내면에서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출되어 集積된 義가 아니라, 다만 부동심에 도달해야겠다고 작정한 인위적인 의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이다. 孟子의 苗助長의 비유는 告子가 義를 외적인 것이라고 규정한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告子가 義를 외적인 것으로 보고 義의 근거를 외부에서 찾는 것은 마치 모를 심고 나서 강제로 뽑아서 키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이러한 강제적인 의지는 氣에서 발동한 것인데, 이때의 氣는 浩然之氣가 아니라 다만 血氣 또는 客氣일 뿐이다. 왜냐하면 告子가 義를 외적인 것이라고 규정하는 이유는 그가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의를 集積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따라서 義를 集積하여 浩然之氣를 발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이와 같이 기왕에 本性에서 義가 자연스럽게 발출한다는 것을 몰랐다면 그가 말하는 心은 결코 本心이 아니라 단지 血氣가 動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득불 不動心하려고 억지로 氣를 강제한 것일 뿐이며, 이것이 바로 助長이다. 이렇게 억지로 조장하면 性體를 은폐할 뿐 아니라 도리어 生氣마저도 흔들어 끊을 위험이 있어서 매우 해롭다는 것이 하곡의 해석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하곡은 맹자의 "持其志, 無暴其氣"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그렇기 때문에 공경히 그 志를 지킨 功은 반드시 作爲하여 그 氣를 해치지 않는 경지에서 나와야 지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氣를 해치지 않는 것이야말로 志를 지키는 所以이기 때문이다. 告子는 이 두 가지가 하나의 일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不得於心, 勿求於氣"라 말하여, 억지로 志를 지키다가 氣를 해쳐도 돌보지 말라고 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닐까?"
이로써 보면 하곡은 無暴氣의 공부가 단순히 持志 공부에 수반되는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無暴氣 공부를 통해서 持志 공부가 완성된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얼듯 보기에 持志 공부와 無暴氣 공부를 각각 별개로 생각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으니, 하곡 자신이 강조한 바와 같이 하나의 일(一事)이다. 하나의 일이라는 것은 持志와 無暴氣의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종속함을 의미하지 않고, 相互 因待하는 不相離의 관계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하곡이 지적한 바와 같이, 浩然之氣는 "集義所生者", 즉 義를 集積함으로써 발생하지만 일단 발생한 浩然之氣는 道義와 짝하여 志를 더욱 강하게 하는 기능이 있다. 여기에서 義의 集積은 물론 내면에서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본성의 자연스러움을 따르지 않고, 단지 의도적 혹은 인위적 강제를 행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助長이며 本心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출하는 浩然之氣와는 다른 일종의 血氣를 강제하게 된다. 이 때 발생한 血氣는 本性을 은폐할 뿐 아니라 生氣마저 끊을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하면 浩然之氣가 本心에서 유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종속될 뿐 아니라 道義를 짝하여 志를 강화하는 작용이 있다면, 혈기는 인위적 의지에 의해 발생했지만 일단 발생한 후에는 도리어 본성을 은폐하고 생기를 끊는 작용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孟子의 苗助長의 비유는 告子가 義를 외적인 것이라고 규정한 오류를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하곡은 수양 공부상에서 理氣不相離의 妙用이 있음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志를 지키면 氣는 반드시 따라오게 되어있는데 또 氣가 전일하면 志를 움직인다고 말한 것은 무엇인가? 志는 본래 氣를 움직이지만 志를 지키지 않고 氣를 해치면 氣의 혼란이 도리어 그 志를 해친다.(마치 졸병들이 난을 일으키면 장수도 제압할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 志가 義理를 잡아 浩然之氣를 발생하면 그 氣의 강대함은 도리어 道義를 짝하게 된다.(마치 졸병들이 왕성하면 장수도 더욱 강해지는 것과 같다) 이것이 理氣不相離의 妙이다.
이상에서 하곡이 제기하고 있는 理氣不相離의 妙는 첫째, 志는 본래 氣를 움직이는 것이지만 만약 志를 잡지 못해서 氣를 해치게 된다면 氣가 도리어 志를 해치게 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志가 義를 잡으면 浩然之氣를 발생하게 되는데 이 浩然之氣는 다시 道理와 짝해서 志를 더욱 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志가 氣(=浩然之氣)를 발생한다고 해서 氣가 志에 단순히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작용상에 있어서는 오히려 氣가 志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종의 相互因待 관계이며, 이는 理氣가 不相離하기 때문에 성립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우리는 하곡이 말하는 氣에는 이중성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는 志가 義를 잡았을 때 발생하는 浩然之氣이고, 다른 하나는 志가 義를 잡지 못했을 때 그로 인해서 해침을 당한 氣이다. 하곡은 氣가 해침을 당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告子는 心이 굳세지 않으면 단지 그 志만을 지킬 뿐 다시 氣의 해로움은 구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는 心이 내적인 것이어서 氣와는 상관이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氣를 해친다는 것은 작위적으로 해치는 것이다. 예컨대 告子가 억지로 (不動心을) 作正하여 氣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 그것이다.
이는 孟子 浩然章에서 告子가 "不得於心, 勿求於氣"이라고 말한 데 대해서 霞谷이 해석한 것이다. 다 아는 바와 같이, 公孫丑가 孟子와 告子의 不動心의 차이를 질문하자 맹자는 告子의 不動心이 "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의 방법에서 나왔다고 말하였다. 이어서 孟子는 자신의 不動心은 "持其志, 無暴其氣"의 방법에 의하며, 특히 "나는 浩然之氣를 잘 기른다"(我善養浩然之氣)고 답하였다. 霞谷이 주목한 것은 바로 여기에서 孟子의 不動心이 無暴其氣, 浩然之氣 등 氣의 문제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霞谷에 의하면, 不動心의 방법은 心이 理를 얻는 것인데, 心이 理를 얻는다면 자연히 浩然之氣를 발출하고, 浩然之氣는 또한 道理와 짝하여 더욱 心을 굳세게 한다는 것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다. 그러므로 孟子가 말한 "持其志"는 바로 '心이 理를 얻기 위한' 방법 또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無暴其氣"에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하곡에게 있어서 공부의 관건은 바로 氣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곡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理體는 본래 理體로서 變移가 없는데 그것이 處한 곳에서 包膜이 걷히지 않고 막고 있으며, 氣質과 物欲이 가리고 있어서 근원을 어지럽힌다.---(그러므로) 氣膜이 깨끗해지면 大本은 회복된다. 이는 寂感의 體用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곡의 理는 능히 仁義禮智를 발휘할 수 있는 靈通性, 能動性을 갖고 있다. 그런데 그 能動性이 발휘되지 못하는 것은 단지 氣의 방해를 받기 때문이다. 이 때의 氣는 理體의 작용으로서의 氣가 아니라 理體를 가리는 氣質과 物欲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하곡의 공부론은 바로 기질과 물욕 또는 '動氣嗜慾'과 '作意作氣'의 相火를 다스리는 것에 핵심이 있다.
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霞谷은 告子의 "不得於心, 勿求於氣"을 , 만약 '心이 理를 얻지 못한다면, 다만 계속해서 志를 지킬 것이지 氣의 해로움에 대해서는 돌아볼 필요가 없다"라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그리고 氣를 해롭게 하는 것, 즉 暴氣를 "작위적으로 해롭힘"(作爲而害之)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를 "의도적으로 억지로 기필함으로써 힘으로 강제하여 氣를 요란하게 하는 것"(着意强正彊探力制以撓其氣者)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의도적으로 억지로 기필함"(着意强正)의 "기필"(正)은 바로 맹자가 말하는 "勿正" 혹은 "勿正心"의 "正"을 가리킨다. 따라서 勿正이란 '기필하지 말라'는 의미로서, 즉 不動心을 인위적으로 의도하지 말라는 뜻으로, 혹은 浩然之氣를 인위적으로 기르려 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이해될 수 있다.
하곡이 持志 공부는 반드시 無暴氣의 공부를 통해서야 완성된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義의 集積이 本性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는 것은 浩然之氣를 통해서야 증명되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浩然之氣를 동반하지 않는 義는 한갓 공허한 관념에 지나지 않으며, 자칫 조장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혈기를 일으켜 본성을 은폐하고 생기를 끊는 위험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5. 결 론
지금까지 하곡의 공부론을 통해서 그의 양명학의 특질을 살펴보았는데 그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곡은 일찍이 양명학에 임정종욕의 폐단이 있을 수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 문제는 비단 하곡이 지적하였을 뿐 아니라 이미 왕양명과 그의 제자들 간에도 논의된 바 있는 문제였다. 즉 고동교는 치양지 공부에 任情恣意의 폐단이 있을 수 있다는 문제를 왕양명에게 제시하였으며 양명은 이에 대해 치양지 공부에 철저하면 자연히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답한 바 있다. 왕양명은 양지를 대상화하지 말고 정밀하게 치찰하면 任情恣意의 폐단은 극복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치양지 공부의 핵심은 直覺的이고 자연스러운(외적인 법칙에 의지하지 않는) 도덕 판단의 주체를 확립하는데 있으며, 그것은 바로 양지를 대상화하지 않아야 가능한 것이므로 왕양명의 답변은 문제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질문의 본질을 돌이켜 보면, 任情恣意의 폐단을 문제 삼는다는 것은 양지를 대상화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므로 이에 대해서 단지 양지를 정밀하게 致察해야 한다고 답한 것은 반드시 원만한 답이라고 할 수는 없다. 良知를 對象化하지 않는 문제는 단지 논리적인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 상당한 체험의 경계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王陽明 자신도 龍場에서 心卽理, 心外無物의 道理를 깨우친 후에도 십수년의 세월이 지나서야 비로소 치양지 공부에 익숙하게 되었음을 토로한 것을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하곡 역시 23세에 임정종욕의 폐단을 문제삼은 것은 바로 그의 양명학 공부가 아직 체험의 경계에 도달하기 전이었기 때문일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하곡은 양명학 공부가 순숙한 경계에 도달한 후에는 任情縱欲의 폐단 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기 보다는 주로 致良知의 자연스럽고 直覺的 境界에 도달하는 공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곡은 致良知의 자연스럽고 直覺的인 경계를 心과 物(또는 心과 理)을 二元化하지 않는 境界로 보고 주자의 理氣論을 二元論이라고 비판하였다.
心과 物의 二元化에 대한 하곡의 공부론적 해석이 잘 드러난 곳은 바로 {孟子} [浩然章解]이다. 하곡은 맹자를 해석하면서 浩然章에 대해 浩然章圖를 포함해서 모두 5편의 浩然章解를 저술하고 게다가 浩然章雜解를 지어 총 6편의 글을 남겼다. 이것은 하곡이 浩然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이 있었음을 시사하며, 그의 특별한 관심이란 다름 아닌 不動心 工夫 혹은 無暴氣 工夫에 대한 것이었다.
아는 바와 같이 맹자의 不動心은 告子의 그것과는 달리 義와 道를 짝한 浩然之氣로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것이었다. 즉 告子의 不動心이 外的인 義에 근거하여 이루어 진 것임에 반해서 맹자의 부동심은 義의 근거를 내면에서 자각함으로써 외물에 이끌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도달한 것이었다. 맹자가 호연지기를 이루는 공부를 '必有事焉 而勿正 心勿忘 勿助長'의 자연스러운 경계로 표현할 수 있었던 근거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곡이 맹자의 부동심 공부론을 주목한 것은 바로 맹자를 통해서 양명학의 致良知 공부를 해석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즉 하곡은 맹자의 '持其志 無暴其氣' 공부에 주목하여 '持其志'를 致良知로 보고 '其氣'를 良知의 자연스런 발출을 沮害하는 人欲으로 해석함으로써, 人欲의 충동이 없다면(=無暴氣) 良知는 자연스럽게 발출하여 致良知 공부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하곡에 있어서 기의 발동이란 두 가지 의미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양지(=천리)의 발동을 따라 자연스럽게 함께 발하는 生氣(=元氣)이며, 다른 하나는 천리가 적정한 상태를 잃음으로써 홀로 발동하는 氣(=客氣, 相火)로서 이러한 기가 발동하면 양지는 은폐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곡은 왕양명이 별로 거론하지 않았던 '氣의 공부'에 대해서 中醫學의 君火相火論과 客氣論까지 수용하여 다양하게 전개한 것이다. '暴氣를 없앤다'거나 '氣의 暴露를 막는다'는 의미로 해석되는 無暴氣 공부는 心과 理의 二元化를 극복하는 공부론으로 정리된다. 暴氣란 단순히 人欲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對象化하는 일체의 意識을 포함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가 良知(=天理)를 하나의 인식 대상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천리를 실천하기에 앞서 天理는 이러이러한 것이라는 意念을 갖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마음에는 앞서 형성된 의념에 따라야 한다는 作爲가 발동하게 되어 心과 理를 二元化하게 된다는 것이다. 霞谷이 重層的 構造의 理氣論을 구축하게 된 배경은 이와 같이 그의 관심이 양명학의 공부론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王陽明이 그랬듯이 霞谷 역시 朱子의 宇宙論的 理氣論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致良知 공부론에 입각하여 '良知卽天理'의 의미에서 眞理 또는 生理를 논하였다. 그러므로 공부론의 관점에서 霞谷學이 陽明學과 다른 특질은 바로 孟子 浩然章 해석에서 나타난 無暴氣의 공부론이라고 할 수 있다. 하곡은 致良知의 任情縱欲 弊端의 가능성을 극복하는 문제에 대해, 단지 致良知論 만으로 설명했던 王陽明과는 달리, 理氣論을 통해 새로운 관점에서 접근함으로써 重層的 理氣論, 中醫學 理論의 受容 등을 통해 陽明學의 철학 내용과 범위를 보다 다양화하고 넓히는데 성공하였으니 이것이 곧 霞谷學의 특질이라고 할 수 있다.
朝鮮陽明學的哲學特質
- 霞谷以鄭齊斗的工夫論爲中心 -
崔一凡 (成均館大)
1. 序 論
本論文的目的在于通過分析霞谷鄭齊斗(1649-1736)的工夫論來初步了解朝鮮陽明學·王陽明哲學和特質. 衆所周知, 工夫論是陽明學的根基, 也就是說, 陽明學的哲學內容是以工夫論爲基礎建立起來的. 王陽明年輕時(21歲)爲試驗朱子的"格物致知"工夫以大樹爲格物而引起頭痛的逸話表明陽明學和單純的哲學思考不同. 之後, 通過對龍場的認識, 50歲時提出的致良知敎是他一生體驗工夫論的結晶.
霞谷作爲朝鮮陽明學的代表, 面對朱子學敎條化式時代斯文亂賊的非難亦堅持自己的信念. 但是, 他沒有單純踏襲, 墨守陽明學, 而是在傳統朝鮮哲學中創立了和中國陽明學所不同的朝鮮陽明學, 是一位傑出的哲學家. 緣于此, 我們將霞谷的陽明學稱爲霞谷學.
我們可從兩大方面發現霞谷學的端初, 1) 輿陽明學不同, 在霞谷學中理氣論占有重要的位置. 2) 霞谷對陽明的致良知工夫論提出了異議, 卽霞谷將理分爲死理·生理·眞理, 同時, 將氣分爲客氣和正氣, 展開了獨特的重層的理氣論. 外對于可稱爲陽明工夫論結晶的致良知"論述的非常精密, 但有可能導致任情縱欲的弊端. 所以, 曾强調"任情縱欲正是陽明學的病痛" 對此問題金敎斌在他的論文中作了基本闡述. 金敎斌以霞谷學的特質在于" 朱子學和陽明學的主體性克服"爲前提, 具體說就是霞谷克服以物理爲基 的朱子學, 主張生理, 爲重新克服陽明學的任情縱欲的可能性而追求眞理的主張.
但是, 金敎斌針對霞谷這一問題只是闡述了任情縱欲的問題意識是樹立理氣重層 造的契機, 對于解決霞谷的任情縱欲的問題而樹立的工夫論具體指的是什 , 以及 和理氣論有着 樣的聯系幷沒有論述.因此, 依筆者來看, 爲具體的闡明霞谷學的特質, 首先應更明確的分析霞谷的工夫論和理氣論的具體含義和關係.
爲解決以上的問題, 在本論文中首先將論述王陽明的致良知敎和霞谷所提出的任情縱欲問題, 其次, 爲解決任情縱欲的問題, 將具體闡述霞谷所提出的任情縱欲問題, 然后將闡明工夫論是如何和理氣論相關聯的.
2. 王陽明的致良知和任情縱欲問題
如前所述, 王陽明的致良知和任情縱欲問題. 霞谷對王陽明的致良知提出了以下的問題.
我讀了陽明集后, 對于其對道的論述之簡要和精密而感到高興, 辛亥年6月, 在東湖睡覺時, 偶然在夢中醒悟到王氏的致良知雖然非常精密, 但却有可能任情縱欲的弊端.
接着霞谷補充道"這四個字是王學的病", 這四個字正是任情縱欲. 任情縱欲正如字面之意"依隨感情, 放縱欲望." 也就是說如不能正 把握致良知工夫, 就有可能發生放置人欲的弊端. 王陽明的工夫論自對龍場的醒悟后, 完成了從誠意工夫論到致良知工夫的成熟. 但不論誠意工夫還是致良知工夫, 其實質內容是在自己的心中保存天理, 去除人欲, 卽"存天理, 去人欲"
可爲什 霞谷指出'放置人欲的可能性'是致良知工夫的弊端?
所謂對龍場的醒悟是指對格物窮理的新的認識. 卽格物幷不是分析對象參照物的移置, 而是在自己的心中去除人欲, 窮理是指在自己的心中不斷地去除人欲, 達到完全保存天理的
境界. 在確定了格物窮理的含義后, 陽明以朱子格物致知工夫爲中心解釋[大學]中, 以誠意工夫爲中心解釋了大學. 卽陽明在47歲時(板刻)了{大學古本}, 接着寫序文時指出"大學的要諦僅僅是誠意, 誠意工夫在于格物, 誠意的窮極止于至善" 但是, 52歲時陽明在改作的{古本大學}序文中將{大學}的要諦從誠意轉換爲致知. 對于陽明來說, 致知就是致良知,
這表明陽明的工夫論歸結于致良知. 那 從誠意轉換爲致知工夫的意義是什 ?
根据陽明的理論, 其對心輿意和物的槪念的關係作了以下的規定.
身之主宰便是心, 心之所發便是意, 意之本體便是知意之所在便是物. 如意在於事親則事親便是一物-所以某說無心外之理, 無心外之物-誠意之功只是個格物. 這樣看來, 通過格物工夫達到誠意就是在心之所發的意中去除人欲(去人欲=格物), 保存天理(存天理=誠意)的意思. 那 , 從誠意轉換爲致知卽致良知的意義是什 ? 如引用中所示, 知是意的本體, 意是知的作用, 由誠意到致知卽致良知的轉換是指工夫的所在是從意(=作用)到知(良知=本體)的轉換. 王陽明對其弟子陳九川提出的致知的工夫法問題作了如下解答.
爾那一點良知, 是爾自家底準則. 爾意念着處, 他是便知是非便知非, 更瞞他一些不得, 爾只不要欺他, 實實落落依着他做去, 善便存, 惡便去, 他這裏何等穩當快樂, 此便是格物的眞訣, 致知的實功, 若不 着這些眞機, 如何去格物, 我亦近年體貼出來如此分明, 初猶疑只依他恐有不足, 精細看無些小欠闕13)
在這里, 我們可以 到陽明提出的格物工夫轉換爲致良知工夫的含義.所謂格物工夫, 是指在心之所發的意念中, 區別善惡, 保存善的意念, 去除惡的意念. 但是, 意念本身已經被發動, 所以, 不能辨別意念本身的善輿惡, 必須超越意念, 不能沒有判斷意念的善輿惡的主體.良知正是自覺判斷善和惡的主體, 而致良知正是指樹立自覺判斷善輿惡的主體的意思.
外, 良知幷不是客觀的設定善輿惡的基準幷以此作爲判斷意念的善輿惡, 而是指正是良知本身是判斷意念的善輿惡的主體, 準則. 這樣實現良知(致良知)后, 輿先前在意念上將善輿惡對象化進行區別不同, 良知本身自然的就達到了存善去惡的境界. 卽良知正是天理也, 天理正是良知的境界, 正如陽明所說的再沒有將意念對象化必要的簡易, 直截的工夫.
如前所述, 良知是指認識的主體(心=知)就是天理, 不必再將天理對象化. 因之, 致良知工夫可以說就是指體認天理的工夫. 那 , 致良知工夫成功輿否正在于如何正 地體認天理, 從 一個側面可以說就是指如何正確地體認心的本體的問題. 這個問題非常重要, 因此, 陽明及其弟子門當然不能不將其作爲硏究的問題. 陽明的弟子-顧東橋對致良知工夫問題提出了如下的論点.
人之心體本無不明而氣拘物蔽鮮有不昏非學問思辨以明天下之理則善惡之機眞妄之辨不能自覺任情恣意其害有不可勝言者矣.
在這里顧東橋提出的問題正是霞谷指出的輿任情恣意性質相同的問題.事實上, 如果將良知作爲心之本體, 良知就是不能將認識主體-心對象化的心本身, 是將良知客觀化從而不能辨別眞實和假象. 顧東橋所指出的'不能自覺善惡之機, 眞妄之別'正發生于不能將良知對象化. 不能自覺善惡之機, 眞妄之別, 而將非良知的人欲誤解爲天理, 那 就時時有'任情恣意'的可能, 因此需要非良知工夫的學問思辯.
但是, 對此陽明作了如下的解答.
"今必曰窮天下之理而不知反求諸其心則凡所謂善惡之機眞妄之辨者舍吾心之良知亦將何所致其體察乎吾子所謂氣拘物蔽者拘此蔽此而已今欲去此之蔽不知致力於此而欲以外求是猶目之不明者不務服藥調理以治其目而徒 然求明於其外明其可以自外而得哉乎任情恣意之害亦以不能精察天理於此心之良知而已"
依此來看, 王陽明認識到了顧東橋提出的問題發生于心輿天理的二元化上, 在王陽明看來, 心的本體就是天理(心卽理 或 良知卽天理), 將天理作爲心的對象而通過學問思辯來追求正是將心輿天理二元化所引起的.
那 , 王陽明指出的正是'任情恣意的害處就是因爲不能在心的良知中精察天理'王陽明警戒的心輿天理二元化正是他要弟子門警戒"爾却去心上尋個天理, 此正所謂理障"
在王陽明看來, 如將天理對象化, 那 就連天理也會成爲障碍. 依前所述, 可以看出陽明的致良知工夫的關鍵正在于不能將天理對象化. 換句話說就是體認判斷善惡的直覺性, 自然之机的良知正是致良知工夫的核心. 那 , 霞谷提出的任情恣意問題之所在是什 , 在其學問體系中如何解決這一問題 ?
3. 心物二元問題和霞谷的重層的理氣構造
如前所述, 對于霞谷提出的作爲陽明學的弊端任情恣意的問題, 王陽明和他的弟子們已經討論過, 對于弟子顧東橋 心的致良知工夫潛含'任情恣意'的危險, 王陽明提出了不能將心輿天理二元化. 那 , 霞谷又是如何認識其所提出的任情恣意問題的 ? 在{霞谷全集}卷九
[存言]下中, 我們只能 到他曾提出了這一問題, 却 不到他對此問題的具體的闡述.
但是, 在[存言]中對實體(=心之本體, 良知)的錯誤認識的流弊, 霞谷有所闡述. 如前所述, 所謂任情恣意(=任情縱欲)的弊害就是輿作爲心的本體·良知的體認有關的問題. 換句話說就是不正 體認心的本體, 將人欲看作良知的弊端問題. 那 前面引用的霞谷的'不知其流弊, 而任爲是正 的實體的原因'正是'將人欲誤解爲良知的原因', 換句話可以說就是輿'任情縱欲 弊端的原因'相同的意思. 那 看一下霞谷對此問題的論述.
'實體看作心, 將虛勢看作理, 從而將心理分開, 這是將心輿理, 知二元化, 這就是所有的流弊. 但却不知其是流弊, 認爲是正 的實體的原因是什 ? 那是因爲對本體沒有認識.所以, 不得已將虛勢看作是根本, 而其流弊者却指其爲實體, 將虛勢看作是根本, 虛勢不能將心體一貫, 從而不能不將內外二元化, 將內外如此二元化, 還不知其流弊, 仍認爲那就是實體, 道理的根本, 正 的工夫, 這樣 然不能不和道體越來越遠了.
從上面, 我們可以發現一個特別的槪念, 卽虛勢. 霞谷認爲所有流弊的根本在于虛勢, 在于不能體認心的本體, 而將心和理二元化.
我們可以發現霞谷認爲心和理, 知與行的二元化是流弊, 流弊是因爲對實體沒有正確認識, 將虛勢看作根本. 如前所述, 王陽明對于顧東橋提出的任情恣意(=任情縱欲)的弊害是從心的本體-良知的體認方面來解釋的, 換句話說, 對心的本體沒有正確體認, 會發生將人慾看作良知的弊端.通過以上的引用我們可以看出霞谷和王陽明一樣將任情恣意的問題解釋爲體認的妥當性. 卽對本體不正確體認, 就會發生任情縱欲的問題, 那是將虛勢誤認爲實體的問題. 霞谷提出的虛勢槪念正象他在[生理虛勢說]一文中示唆的, 和生理槪念是相對立的. 象以前的硏究所揭示的霞谷的重層構造說明的理的槪念中將物理, 生理和眞理作了區分, 這里, 虛勢指的正是物理這一槪念, 虛勢的含義通過以下霞谷對將朱子的理看作虛勢或物理的批判可以了解.
朱子以其所有條通者謂之理雖可以謂之該通于事物然而卽不過在物之虛條空道耳茫然無可以爲本領宗主也夫聖人以氣主之明體謂之理其能仁義禮智者是也朱子則以氣道之條路理者謂之理氣道之條路者無生理無實體與死物同其體苟其理者不在于人心神明而只是虛條則彼枯木死灰之物亦可以與人心神明同其性道而可以謂之大本性體者歟.)
從此可以看出, 霞谷將不過是'氣道的條路'的客觀事物的理和能 仁義禮智的人心神明的理相區別開來, 將前者稱爲虛條空道, 而後者爲本領宗主, 兩者嚴格的區別, 換句話說, 霞谷提出朱子的理只不過是氣的條理(=物理), 同時, 將其所說的生理或眞理看作是可能爲仁義禮智的道德, 實踐的主體.
可能爲道德實踐的含義是霞谷的理和氣相獨立, 不只是道理或法則, 是能發揮能動性的良知(=道德心, 惻隱之心). 因此, 霞谷曾說"理者氣之靈通處是也.") 也說過"理者心之神明" 這是霞谷的生理, 眞理正是與對于其對象進行能動的(=不依據主體的. 表面的 法則)道德判斷的良知相同的槪念. 但幷不是說在霞谷學中否定氣的存在, 只適用理. 正如霞谷所說, ' 發者氣也發之者理也') 形而上與形而下的區別雖然分明, 但'生氣中存在理體' 這正如霞谷所示唆的生理本來是和生氣竝存的理氣合一或理氣不離的關係.
有鑑于此, 我們可以說理氣不離或合一的關係是霞谷學的一個特質. 但是, 霞谷的理氣論, 正如前面所說, 不是宇宙論的推論或存在論的觀點, 而是在工夫論或境界論的觀點中樹立起來的. 那是通過對霞谷的浩然之氣的解釋來了解, 浩然之氣正是從道義中發出氣運, 論理的分析的話, 形而上的義理與形而下的氣雖嚴密的區分, 實際上, 對于體驗浩然之氣的主體來說, 這樣的分析幷不準許, 義理是氣, 而氣只在義理的境界中存在.
如果說霞谷的理氣論立足的是工夫論, 他的工夫論得以最充分說明的是{孟子}中解釋浩然章的[浩然章解]. 通過解釋{孟子}, 著述了包括浩然章圖在內的5篇浩然章解, 加上浩然章雜解共6篇. 這說明霞谷對浩然章有着特別的靑 , 所謂特別的靑 不是別的, 正是不動心工夫或無暴氣工夫. 我們可以通過霞谷對無暴氣工夫敍述發見其克服任情縱欲弊端的工夫法.
4. 任情縱欲的克服和無暴氣工夫
如前所說, 任情縱欲的弊端是因對于良知(=本體)的非正確體認所可能引起的. 換句話說, 將人欲誤認爲是良知, 那 爲什 會將人欲誤認爲是良知? 通過解釋孟子的不動心工夫, 霞谷仔細的說明了這一問題.
如大家所知, 孟子將做到不動心的方法提示位"持其志, 無暴其氣", 再將生起浩然之氣的方法提示爲"必有事焉, 而勿正心, 勿忘勿助長." 接着, 通過宋人的" 苗助長"的比喩對其進行了說明. 霞谷將"助長"的比喩和"持其志, 無暴其氣"連繫起來, 作了如下解釋.
舍之而不耘者 忘其所有事? 而助之長者 作正于心 至於必硬制其氣者也 不耘則失養而已 ? 則反而暴其生理而絶之 其害之又甚焉 有必喪之已矣 告子以義爲外 不知集於其心 其存於心者不過强正之而已, 動於氣者也. 旣亡其本源 無以生是氣矣 則其所作于氣者 不得不强持把捉硬制以期不動 所謂助之長也 强持之 於性體反有所蔽 阻撓其生生之根而塞絶之 其賊害至此而極矣
孟子認爲"是集義所生者非義襲而取之也---我故曰告子未嘗知義以其外之也" 在上面, 霞谷對此進行了補充說正因爲告子只從表面上看待義, 所以不能掌握在心中依本性自然的將義集積而生起浩然之氣, 到達不動心的境地的方法. 所以在告子的心中, 不可能有依內在的本性自然發出的集積的義, 只有爲到達不動心不過爲人爲的意志. 孟子的 苗助長的比喩是爲了說明告子的外在的義是誤謬卽告子從表面上看待義, 從外部尋 義的根據正如播下種子後, 强制 苗以期成長一樣.
這 强制的意志是從氣中發動的, 這時的氣不是浩然之氣, 只是血氣和客氣 因爲告子將義看作是外在的, 他不能依本性自然的將義集積, 隧之不能將義集積而發生浩然之氣. 因此, 他所說的心到底不是本心而只過是動的血氣. 所以爲了不動心不得不强制氣, 這正是助長. 這樣勉强的助長只能隱蔽性體, 還有連生氣也會動搖而斷的危險, 非常有害.
從此觀點, 霞谷對孟子的"持其志, 無暴其氣"作了如下的解釋
我故以爲凡爲敬守其志者之功必須出於無所作爲而害其氣乃爲至也 其無暴其氣者乃亦所以爲持其志故也然則其不知二者之爲一事也而曰心勿求氣至於强持力制以害其氣而不顧焉者豈不爲失之耶.
從此我們可以看出霞谷認爲無暴氣的工夫不是與持志伴隨的結果, 而是通過無暴氣工夫完成持志工夫. 炸看, 這好象是將無暴氣工夫和持志工夫各自不同的問題, 但實際上是霞谷强調的
一事. 一事的意思不是指持志和無暴氣其中一個從屬于 一個, 而是指兩者相互因待的不相離的關係.
卽正如霞谷所指出的, 浩然之氣는 "集義所生者" 卽雖通過義的集積而發生, 但浩然之氣有和道義結合, 使志更强化的機能 這里義的集積當然是依隨內在的本性自然生起的. 但是, 與此相反, 不依隨本性的自然, 只是意圖的或人爲的强制就是助長, 是對與自然而發的浩然之氣不同的一種血氣的强制. 這時, 血氣不單隱蔽性體, 還有連生氣也會動搖而斷的可能. 換句話說, 浩然之氣是從本心導出, 不只是從屬, 而有和道義結合將志强化的作用, 那 , 血氣是依意志而發生, 一旦發生, 隨之會隱蔽本性, 割斷生氣. 孟子的 苗助長的比喩是爲了指出告子將義看作是外在的誤謬. 霞谷將修養工夫上的理氣不相離的妙用作了如下說明.
志之所持氣必次焉然而又氣壹而動志者何也志本動氣其志不持而暴其氣焉則其氣之亂反又害乎其志(如卒徒亂而帥不能制)集此志之義以生浩氣則其氣之剛大反又配乎道義(如卒徒盛其帥益强)此理氣不相離之妙歟.
以上霞谷提出的理氣不相離之妙指的, 首先, 志雖本來運作氣, 但如果 不住志就會危害氣, 而氣隨之會危害志. 其次, 志如能 住義就會發生浩然之氣, 這一浩然之氣再和道理結合使志更强化.
換句話說就是雖然志引發氣(=浩然之氣), 但氣不單純從屬于志, 從作用上說氣也會影響志, 兩者是相互因待的關係, 在這里 理氣不相離而成立的. 那末, 這里, 我們可以發現霞谷提出的氣中有着二重性, 一個是當志 住義時發生的浩然之氣, 一個是當志 不住義時而遭到危害的氣. 霞谷將氣遭到危害的理由作了如下的說明.
告子以爲(…)於心有不固只可持其志不必更求乎其氣之害也 盖以心爲內而不管於氣也(…)暴氣者謂作爲而害之也如告子之着意强正彊探力制以撓其氣者是也.
這是霞谷對于孟子的浩然章中告子所說的"不得於心, 勿求於氣"的解釋. 如大家所知, 當公孫表問及孟子和告子的不動心之間的差異時, 孟子回答道告子的不動心是從"不得於言 勿求於心, 不得於心 勿求於氣"的方法中而來. 接着孟子說自己的不動心是依"持其志, 無暴其氣"的方法而來, 特別說了"我善養浩然之氣" 霞谷注意的正是與孟子的不動心, 無暴其氣, 浩然之氣等氣相關聯的. 依據霞谷, 不動心的方法是心得其理, 心得其理 則浩然之氣自然發動, 浩然之氣又和道理一起使心更强, 這在上面已提及. 那 , 孟子所說的"持其志"正是'心得其理'的方法或過程. 但是, 問題正在于"無暴其氣", 因爲正如前面所說, 對于霞谷工夫的關鍵正在于氣, 因此, 霞谷作了以下闡述.
理體本爲理體, 無變移, 其所處之地未經包膜而阻 , 正因爲氣質和 物欲的阻 使根源變汚.(…) 那 氣膜淸而大本斯復 氣膜淸而大本復者斯乃寂感之有體有用者乎.
如前所說, 霞谷的理具有發揮仁義禮智靈通性, 能動性, 但其能動性不能發揮只因氣的妨害. 這時的氣不是理體所作用之氣, 而是阻 理體的氣質和物欲. 那 霞谷的工夫論正是治理氣質和物欲以及'動氣嗜慾'和 '作意作氣'的相火的核心.
如前所說, 霞谷解釋道告子的"不得於心, 勿求於氣"如做不到心得其理則只能堅持志, 沒有必要回頭去看氣的危害. 還有對于氣的危害, 卽暴氣規定爲"作爲而害之"詳細解釋就是"着意强正彊探力制以撓其氣者." 這里"着意强正"的"正"正是孟子所說的"勿正" 或 "勿正心"的 "正".那 勿正的意思卽不要人爲的意圖不動心或也可解釋爲不要人爲的引發浩然之氣.
霞谷所說持志工夫必須通過無暴氣工夫來完成ㅈ的理由正在于此. 義的集積在本性中自然而起是因只有通過浩然之氣才能證明.
換句話說, 如沒有浩然之氣相伴, 義不過是空虛的槪念, 稍有不愼就可能會引發血氣, 隱蔽本性, 割斷生氣.
5. 結 論
目前爲止通過霞谷的工夫論分析了陽明學的特質, 簡述如下, 霞谷早已提出了陽明學可能有任情恣意的弊端, 這一問題不單霞谷提出過, 王陽明和其弟子之間也討論過, 卽顧東橋曾向王陽明提出了致良知工夫中可能會有任情恣意的弊端問題, 陽明對此作了如下回答, 道致良知工夫如果徹底的話就可以自然克服此問題. 又道如不要將良知對象化, 精密的致察就會克服任情恣意的弊端.
事實上, 致良知工夫的核心在于樹立直覺的, 自然的(不依据外在的法則)道德判斷的主體, 而這只有不將良知對象化才有可能, 王陽明的回答沒有問題.
但回頭看以下這一提問, 任情恣意的弊端是因爲對"不將良知對象話"的意思沒有正 理解, 對此, 提出的必須精密的致察的方法也不見得是圓滿的答案. 不將良知對象話不單是倫理性的理解問題, 而是要求相 的體驗的境界. 對此, 王陽明自己也是在醒悟了龍場中的心卽理, 心外無物的道理后, 有經過了數十年才吐露熟悉了致良知工夫, 從這一点可以有所覺察.
霞谷亦是在23歲時提出任情恣意的弊端, 我們也可以覺察到是因爲他的陽明學工夫還沒有達到體驗的境界. 因爲霞谷的陽明學工夫在達到純粹的境界后幷不是對任情恣意的弊端問題直接的擧論, 而主要對達到致良知的自然, 直覺的境界的工夫進行了敍述. 霞谷將致良知的自然, 直覺的境界的工夫看作心和物(及心和理)非二元化的境界, 批判了朱子的理氣論是二元論.
對心和物二元化的霞谷的工夫論解釋在{孟子}[浩然章解]中得到了充分的體現. 通過解釋{孟子}, 霞谷著述了包括浩然章圖在內的5篇浩然章解, 加上浩然章雜解共6篇. 這說明霞谷對浩然章有着特別的靑 , 所謂特別的靑 不是別的, 正是不動心工夫或無暴氣工夫. 如大家所知, 孟子的不動心和告子的不同, 是義和道相伴自然的生起浩然之氣. 卽輿告子的不動心是依據外在性的義生起的相反, 孟子的不動心是將義的依據內在性的去自覺, 不被外物所引誘, 而自然的達到.
裝孟子的浩然之氣工夫以'必有事焉, 而勿正, 心勿忘, 勿助長'自然的境界來表現正在于此.霞谷之所以關注孟子的不動心工夫論是因爲可以通過孟子解釋陽明學的致良知工夫, 卽霞谷關注孟子的'持其志 無暴其氣' 工夫, 將'持其志'看作致良知, 將'其氣'解釋爲沮害自然而發的良知的人欲, 如沒有人欲的沖動(=無暴氣), 良知就可以自然而發, 達到致良知工夫. 對霞谷而言, 氣的發動的意思可以分兩方面來解釋, 其一, 隨良知(=天理)的發動自然而發的生氣(=元氣);其二, 天理失去適正的狀態而個別發動起的氣(=客氣, 相火), 這 氣一旦被發動就會隱蔽良知. 這樣, 霞谷對王陽明沒有 擧論的'氣的工夫'從中醫學的君火相火論到客氣論展開了多樣化的論述. 可以解釋爲'去除暴氣'或'阻止氣的暴露'的 無暴氣工夫可通過克服心理二元化的工夫論來. 暴氣不單意味着人欲, 是包括一切可對象化的意識的槪念. 例如, 我們如果將良知(=天理)作爲一 認識的對象, 那 我們在實踐天理之前會先有天理是如此如此的意念. 然后在那一瞬間, 在我們的心中隨着已形成的意念將發動作爲, 從而導致心理二元化. 霞谷構築重層的構造的理氣論的背景是因爲他關注陽明學的工夫論, 如王陽明, 霞谷亦對朱子的宇宙論的理氣論沒什 興趣而只立足于致良知工夫論, 在'良知卽天理'中論述眞理以及生理. 那 從工夫論的觀点而言, 霞谷學輿陽明學所不同的特質可以說正是在孟子浩然章中的無暴氣工夫論. 霞谷對于克服任情縱欲弊端可能性的問題輿單純從致良知論來說明的王陽明不同, 是通過理氣論, 從新的觀点出發, 通過重層的理氣論, 中醫學理論的受容等方面, 將陽明學的哲學內容和范圍成功的進行了更多樣化, 更廣泛的硏究. 可以說這正是霞谷學的特質. (박동매 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