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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이유들
2. 인간에 의해서 부여 되는 신앙의 의미들
요즘 부활절을 앞두고서 한국교회가 분주해지고 있다. 각 교회들마다 여러 행사들로 준비하면서 부활절 맞이에 한창 열심들을 내는 것 같다. 또 교회들이 연합을 하거나 각 교단별로 연합 행사들도 예전과 다를 바 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매년 부활절을 맞을 때마다 이처럼 교회들은 바빠지고 더욱 특색 있게 하면서 부활절 의미를 더 뜻 깊게 보내려는 열기가 그칠 줄 모른다. 이런 점에서 참으로 귀한 부분이고 감사할 이유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하게 부활절 때마다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주인공이 있다. 그것은 달걀, 즉 삶은 계란이다. 거기다가 언제부터인가 계란을 가지고 각종 그림을 그리고 성경의 중요한 개념들을 기입하고, 그러면서 부활절 달걀 예술이라 할 정도로 발전을 이루어 오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요즘에 이르러서는 포장까지 그럴 듯하게 해서는 선물용으로 까지 발전을 하기에 이르렀다. 맨 처음에는 삶아서 그냥 주던 것이 이 정도까지 발전을 한 것이다. 그런데 올해는 달걀 값이 비싸짐으로 해서 거기에 상업까지 더해지고 있다.
인간의 삶은 이런 점에서 발전을 이루어 간다는 점을 잘 보여 준다. 하지만 인간의 삶의 이면에는 발전인 것 같지만 파괴도 따른 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인류의 세계는 양면으로 존재함을 잘 알 수 있다. 이것이 죄인 된 인간의 한계이다. 무슨 한계인가 존재와 상실이다.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교차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부활절 행사가 인간들의 필요와 행위에 의해서는 발전을 이루어가는 형태이다. 하지만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의미와 본질에서는 점점 멀어지는 상실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배경에 대해서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교회의 본질로부터 멀어지게 하는지 그 두 번째 이유에 대해서 말해 볼까 한다.
왜,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 두 번째로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요즘 다시 명성교회 사태가 붉어지는 것 같다. 변칙적 방법으로 하남에다 개척을 해서 목회를 하는 아들교회와 합병 형태로 세습을 하고자 한다는 문제가 한국교회와 사회를 뒤흔들고 있는 것 같다.
본인이 왜 처음부터 김삼한 목사를 비유로 드느냐? 인간이 부여하는 신앙의 의미가 얼마나 어리석고 허무한 것인지를 말하기 위해서이다. 먼저 양해를 구할 것은 존경 받는 어른이시지만 글에서는 존칭을 생략한다.
김목사는 우리 한국 개신교에 비교적 좋은 목사로 인정되고 알려졌다.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렇게 소개되어 왔다. 다른 대형교회 목사들과 달리 여성과 스캔들도 없을 정도로 깔끔한 성향을 보임으로 비교적 괜찮은 목사로 정평이 나 있는 것으로 안다.
물론 요 몇 년 사이 건축헌금 비용 남용과 이 세습의 문제를 빼면 말이다. 본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런 식으로 얼마나 우리 교회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좋은 이미지들을 심었느냐 하는 것이다.
조용기 목사, 김삼한 목사를 비롯한 내노라하는 부흥 강사들 등, 그런데 얼마나 그 분들이 이처럼 무너지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지 못하고 한국교회를 실추시키는 행보들을 하고 계신가 하는 것이다.
왜? 세습에 목을 걸려고 하는가? 이는 본인이 세우고 키워서 교회 왕국을 건설해 놓았는데, 이것을 남에게 줘야? 이것이 근본 마음인 것이다. 즉, 아까운 것이다. 이것이 가리어지는 것은 한국교회와 명성교회 성도들이 너무 귀한 존재로 만들어 놓았고 하나님과 같은 권위를 주었기 때문에 그 힘이 막강하여 감히 그 생각들을 못하는 것이다.
만일 김목사께서 한국교회를 한국사회에 든든히 세우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 그 분의 신앙의 본질이라면, 가장 이름 없고 약한 자 같은 목사에게 자신의 목회를 이어 2대 목회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살아계셔서 자신과 똑같이 하나님의 교회를 이끌어 가는지를 한국교회와 사회가 보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비단 김목사 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대형교회 목사들께서 그렇게 하실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사탄은 결코 그렇게 되도록 놔두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지금 시대는 사단이 무저갱에서 놓임을 받아 극렬하게 마지막 발악을 하는 때로 그 힘이 막강하여 주님의 교회들을 흔들어대고 짓밟는 시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의로운 분, 존경하는 대상, 경건한 목회자로 칭하지만 결코 그 모습이 끝까지 가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어리석은 인간들이 자기 입맛과 자신의 감정 충족을 위해서 스스로 대상들을 만들어서 스스로 칭찬하고 추앙하고 존경하다가 어느 날부터 그를 향해서 공격을 하는 자들이 되어 있더란 말이다.
이것이 우리한국교회의 특징이 되고 있다. 성경은 사람을 존경의 대상으로 만들지 말고, 특별한 의미 부여를 하지 말라고 했다. 게다가 스스로 너무 선생 되지 말고 존경 받으려고 하지 말라! 라고 했는데 온갖 이유와 꺼리를 만들어서는 말씀을 변경 시켜서라도 자신들의 눈과 입맛에 맞는 대상들로 만들었다가 어느 때 어떤 사건으로 식상해지니까 바로 죽여 버리는 인간의 속성이 반영되는 것이다.
성경대로 살려고 해야 한다. 교회가 성경대로 진행을 해야 한다. 그것은 말씀에 명한대로 자신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려고 애를 쓰고 노력하라는 의미이다. 그러자면 편법이나 마술을 부리면 안 된다.
그런데 사람들이 성경은 시대에 동떨어지고 현실에 너무 안 맞는다는 이유와 무엇보다도 자신들과 직접 관계되는 감정 몰입을 위해서 새롭게! 새롭게! 의미들을 부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약의 북왕국 이스라엘의 길이다.
남왕국 유다에 성전이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사 관계로 계속 예루살렘으로 왕래를 하니까 이스라엘 왕이 우려가 필요가 되어서는 이스라엘 각지에다 성전대용으로 산당들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처음에는 순수하게 시작했고 좋은 의도대로 출발을 했다. 물론 이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행보였다. 더 큰 죄악은 산속에 지어지다보니 얼마나 죄짓기 좋은 장소인가?
이상한 예배 형태로 발전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지역의 이상한 신들의 예배 형태를 닮아가면서 자녀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고 바치고, 온갖 해괴한 성적 타락이 문란하게 일어났던 것이다.
죄는 처음부터 잘못 되었고, 그 가운데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강한 악행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다. 가장 큰 문제는 완전히 진리로부터 멀어지고 떠나서 다른 길이 되고 만다는 사실이다.
성경의 내용과 의미, 신앙의 의미나 예배 형태가 각종 생활 유형들, 이것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들의 생활인 것이다. 이것은 세상살이와 상관없이 그대로 지켜지고 보호되어야 하는 영적 의미들이다.
세상에 맞고 안 맞고의 문제가 아니다. 반드시 지키려고 하면서 보존되어야 만이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그 같은 의식을 통해서,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 되는 신앙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 예배 형태나 신앙 유형이 세상, 혹은 세상의 다른 종교나 다른 유형들과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구별 된 자들로 표하고 있다. 이 때 구별은 다른 것이다. 비슷하고 닮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다. 유사한 것도, 같은 것이 더더욱 아니다.
그런데 오늘 날 교회는 믹서를 해가고 있다. 그것이 무엇 때문에 그러느냐 하면, 인간의 자기만족에서 비롯되는 현상이다. 인간이 무언가 스스로 해 봄으로써 어떤 의미를 느끼고 신앙을 해석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더군다나 인간은 자신이 느끼면, 혹은 마음이 동하면 그것을 가지고 의미 부여를 하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감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 내면적 유혹이다. 인간의 안으로부터 일어나는 무언가 갈구하고 느끼려 하는 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갖고 있는 어떤 사물이나 의식에 대한 수용 기준으로써 판단인 것이다. 이스라엘은 이러한 감성이 끊임없이 하나님께 도전했고 반역을 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므리바 사건이나 송아지 예배 사건은 대표적 배경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스스로 계신 존재이다”라고 말씀을 해 주셨지만 이것이 인간 안에 인간이 갖고 있는 호기심, 어떤 존재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고 수용하는 그것에 만족이 안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스스로 무언가 해보고 직접 하는 행위를 통해서 느끼고자 해서 송아지를 만든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늘 말하기를 중동 소아이사 고대근동의 신들을 비유해서 말했던 것이다. 그들은 볼 수도 있고, 만질 수도 있고, 그러므로 의미가 풍부한데 우리는 음성만 있고, 무겁게 요구만 한다고 불평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 하나님께 통치를 받는 것보다 중간에 “인간 왕이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인간은 감정과 의지의 소유욕이 이성적으로 경험이 될 때 비로써 무언가 말하려고 하는 존재인 것이다.
이러한 바탕이 지금도 여전한 것이다. 성경대로 행하면 되는데 그렇게 하려니까 인간 내면, 인간 안에 적절하게 하는 매치가 잘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 식으로 하는 무언가를 교회에 접목을 해서 그것을 자신들이 직접 신앙이라고 해야 직성이 풀이는 것이다.
이것은 전형적으로 죄로부터 타락한 인간 경향이 하나님을 반역하는 기질로써 나오는 것이다. 자신이 느끼고 해보고 싶은 열망을 통해서 무언가 신적 요소와 의미를 더하려 하는 인간 기질인 것이다.
이것이 계속해서 새로운 종교를 만들고 기존의 교회를 타락시켜가는 인간들의 행위인 것이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전형적인 행위 중심 신앙이다. 이러한 배경에 의해서 점진적으로 교회가 변질 되어 가는 것이다.
부활절, 주님이 살아나신 날이고 우리의 첫 열매가 되시는 증거를 보이신 날이다. 삶은 달걀을 통해서 부활의 의미를 느낀다는 이유는 바로 인간의 마음이 충족되는 모티브인 것이지 그것은 하등에 부활절과 상관이 없다.
이것을 부활절에 행사를 하는 것 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문제는 이것이 해가 거듭할수록 먹고 자라고 해서는 거대한 의미로 자리를 잡아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행하는 일에 정성이나 수많은 종교적 의미를 가하고, 그것이 평가의 기준이 되려고 하는 것이다.
성탄절도 마찬가지이다. 교회마다 성탄절 행사가 수 십 년 동안 행해져 왔고, 그것이 교회의 영적 자산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그러한 형식과 외형이 교회 자산으로 자리를 잡아 가니까 산타가 주요한 인물처럼, 혹은 실제 인물처럼 교회 안에서 설교가 될 정도로까지 의미 부여를 하는 시대로 나오고 만 것이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 기독교의 이름아래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거기에다가 자신의 감정을 충족시키고, 자신에게 종교적 의미를 가져다주는 그러한 현실을 새롭게 추구하는 힘이 가미되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 교회적으로 만들어 가는 종교 몰이인 것이다. 이런 것을 잘함으로써 사람들이 몰리게 하는 인간의 열광인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저마다 종교성이 강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무속 경향, 신비감의 경향, 최면이나 어떤 마술성 등과 같은 호감을 선호하는 마음들이 꿈틀 거리는 존재들이다.
여기에 교회들이나 지도자들이 성경적 신앙으로 바르게 끌고 가면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샤머니즘적 기질들이나 이 같은 무속적 기질들을 모두 다 빼내고 성경적 인간들로 만들어 가야 하는데 이렇게 하면 재미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종교적 신비감과 열광하게 하는 무언가 그럴 듯한 배경으로 인간들이 원하는 종교성으로 몰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의미 부여이다. 끊임없이 느끼도록 해주는 신비감이자 매치되게 하는 의미 몰이인 것이다.
지금은 그 부활절이 이상한 방향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직접 겨냥해서 부정하게 하는 힘으로 작용되려 하고 있다. 사람이 죽었다가 3일 만에 살아났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워낙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깨트릴 수가 없으니 그것이 바로 달걀인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차지하도록 하여 세월이 흐를수록 주님의 부활, 우리의 부활 신앙은 희석되는 것이다. 바로 성탄절이 오랜 역사에서 그리스도의 탄생의 의미를 무의미하게 역할을 하고 산타를 성탄절의 중심으로 끌어 왔듯이 말이다.
부활절의 달걀이 바로 그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이 의미부여를 하는 신앙의 의미는 현대에서 새롭게 형성되어가는 인위적인 신앙으로 가미되는 새로운 형식인 것이다. 그러면서 그것은 기존의 성경적 신앙의 산물을 약화시키거나 배제 시기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애매모호한 신앙행위로 유도하는 고사시키기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세월 중요한 위치에 그대로 두고서 세월이 지나면서 그 본 빛이나 뜻을 퇴색되도록 해가는 사탄의 사악한 방법인 것이다.
사람을 세워놓고 데코레이션(진열) 처리로 사람 바보 만드는 조직적 행보와 똑 같은 것이다. 사탄은 인간의 영적 무지와 잘못 된 열망들을 유혹하는 기재이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거짓의 아비라고 성경이 소개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가 교회 안에 침투해 오는 사탄의 기질을 가진 무리들이 송아지예배를 원하고, 그러한 종교적 영웅 행위로 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으게 하는 유혹으로 인하여 성경적 신앙 유산이나 예배적 배경을 몰아내는 도구들로 사용하여 기독교가 점진적으로 무너지게 하는 방법을 구사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적인 행위와 의미 부여들에 의해서 역사 속의 수많은 교회들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진 것이다. 중세 교회가 무너진 가장 큰 배경도 바로 인간들이 부여하는 신앙의 의미들이었던 것이다.
현실에서 자신들이 직접 새롭게 함으로써 기독교의 신앙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변화를 시도하려한 인간적 의미부여가 중세교회의 타락을 부추기고 탈선한 배경의 핵심이었던 것이다. 역사에서도 이러한 중세의 교회의 길을 걸어가는 교회들이 생성되었다가 소멸되었던 것이다.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신앙배경이 바로 당나라와 함께 시작한 경교였다. 아리안 족들들 통해서 동방 기독교인 네스토리우스파를 통해서 세워진 당나라 시대의 기독교로 경교로 알려졌다. 아마도 인도의 복음을 전한 도마의 라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고조 이연의 차남이었던 이세민의 수하에서 당나라 기독교는 시작되었고, 당나라 건국 시작과 함께 시작 되어 국교까지 되었다. 우리 민족사 입장에서 본다면, 당나라 기독교는 고구려 침략에 일정한 관계가 있어서 배척될 수 있지만 어떻게 중국 역사에서 기독교 국가로써 가장 빛나는 국가 기반을 하게 되었는가? 라는 차원에서 생각해 볼 바가 있다는 사실이다.
당나라 건국과 시작 된 경교는 당나라를 안정 된 국가와 강국의 면모로 대내외적으로 부강하고 가장 화려하고 뛰어난 국가 체계를 이룩하였던 특별한 왕국이었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다. 이것이 꼭!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중국 역사에서 독특하게 기독교 색체로 시작한 나라이기에 우리는 한 가지 차원에서 눈여겨보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역사 속에서 기독교가 들어 간 곳은 달라졌고, 그 같은 현상은 지금 현실에서도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선한 신과 악한 신이 다스리는 장소나 인간의 인격이 다름을 드러내고 있는 증거이다.
그런데 그 교회들이 영구하지 못하고 사라진다는 점이다. 그러한 배경이 무엇인가? 지금의 우리 기독교에 교훈이 된다는 사실이다. 이 점을 우리 한국교회가 눈 여겨 볼 필요가 있음을 일깨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러니까 선교 2세대로 들어오면서 교회 기반 내의 인간들이 교회의 영적 자산들을 모방하고 흉내를 내면서 변형을 시키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들이 신앙의 의미를 가미해 가는 것에서 일어나는 변형되는 신앙 유형들이다.
이것이 교회 안에 힘을 행사하면서 정작 교회 기반의 본과 중심 되는 신앙기반들을 무너트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사탄적인 성질이 똬리를 틀고 앉기 때문에 당연히 교회 본연의 영적 자산들을 싫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 안의 가라지적 성질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당나라의 경교도 바로 이러한 현상에서 5대 째 국교로 내려오던 경교가 사라지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특히 이연의 차남 이세민 때 경교는 힘차게 뻗어나가면서 당나라에 종교의 중심으로 올라서기 까지 했던 것이다.
기독교의 득세로 한 때 다른 종교들이 핍박을 받기에 이르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랬던 경교가 당시 지도자들이었던 아리안 족들이 중심이 된 군대가 전쟁에 참여를 하여 승리를 하고 돌아오면서부터 당나라 황실과 타협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는 교회 타락으로 이러지면서 신앙에서 세속의 힘이 교회 의미들을 새롭게 만들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세상의 힘과 어떤 형태로든 결합이 되면, 그 세상의 힘이 교회를 통해서 자신들의 입지를 확보하려하여 요구를 하게 되고, 거기에서 교회가 거기에 호응을 하여 새로운 의미들을 만들어 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서 경교는 순수한 교회적 힘을 잃어가게 되니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다른 종교들과 접목이 되면서 교회 안의 용어들이 세속적인 의미들로 바꾸어지고 채워져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이 같은 세속의 힘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되면 교회 독특한 용어들이 부담되고 골 아프게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자신들이 알고 있고 있고 이해하는 용어들로 설교를 하거나 대화를 하면 잘 받아들이고 설교 잘한다고 칭찬을 하게 되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이다.
거기에서 실력 문제로 목사를 흔들어 되는 것이다. 동시에 교회지도자들 또한 이 같은 세속의 경향에 길들여지고 그에 가까운 개념으로 무장 된 이들이 채워지기 때문에 교회 영적 자산들이나 사용하는 개념들이 급속도로 세속화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는 현실로 나아가는 근본적인 배경이다. 이것은 지상의 교회가 영원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 촛대를 옮겨가시는 심판의 배경으로 연결 되는 현상인 것이다.
하지만 천국은 침노한다고 했지 않는가? 교회가 영적으로 바로 서 있고, 오랫동안 하늘의 맛나를 누리는 영적 축복을 누리려면 영적 자산을 잘 지키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자면 교회 안에 신실하고 경건한 무리들이 형성되어서 이 같은 인간적인 요소들이 주도하지 못하도록 치리의 기관이 살아야 한다.
세속의 힘에 농락되어 외적인 크기와 수가 많음이 아니라 숭고한 신앙의 본 유산이 성경대로 잘 지켜지도록 그 시대의 교회들이 각성해서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와 몸 된 교회를 사수하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사명이며,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신실한 교회로써 자기 사회를 살리고 구하는 영적 기관으로써 하나님께 귀하게 사용되고 쓰임 받는 영구적인 한국교회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이를 바라고 원해서 오늘은 교회가 교회되지 못하는 이유로써 인간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신앙의 의미 부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말하며 기술하고자 해 보았다.
우리 한국교회는 본인의 이 글을 참고하여 너무 행사들을 인간들이 만족하는 방향으로 몰아가지 않기를 바라고, 예배가 너무 인간중심으로 흐르는 현재 한국교회 환경을 다시 점검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기를 요청하여 역설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