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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의왕시 다문화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온새미로(김정숙)
<동학과 전봉준에 관한 시 모음>
경고장
-채상근
단군 조선 이래로 쭈-욱 내려오는 밥 먹기와 똥싸기는 거국적인 성스러운 운동으로써 이는 반전주의자들의 휴머니즘의 기조를 이루었고, 이 땅에 자유와 평화를 말로만 떠들던 사람들도 몰래 숨어서 해온 기똥찬 운동인 것으로 이를 더욱더 성스럽게 이어받아 계승해야 함은 물론이려니와 다음의 경고사항에 대하여 명심할 것.
첫째, 밥 먹기에 대하여
동학혁명 이래로 손 안 놀리고 해골만 굴려서 쌀밥을 먹고 있는 자와 많이 먹겠다고 욕심을 보이는 자, 숟가락을 동강 부려뜨려 놓는 자, 젓가락 한 짝을 몰래 숨겨놓은 자들이 똥을 싸겠다고 할 때는 아구창을 떼어다가 항문에 붙이겠다.
둘째, 똥싸기에 대하여
사일구혁명 이래로 밑 안 닦고 닦은 척 어기적거리는 자와 똥 싸고 안 싼 척 하는 자, 자기 똥은 안 쿠린 척 남의 똥만 쿠리다고 피해 다니는 자들이 밥을 먹겠다고 할 때는 모조리 항문을 떼어다가 볼때기에 붙이겠다.
덧붙여서, 물질이 만인을 지배하려는 이 시대에 밥 먹기와 똥싸기에 바쁜 나머지 밥 안 먹고 똥 싸려는 사람이 없도록 정신 차릴 것. 그리고 뻔질나게 먹고 싸는 것은 본인 자유 의사에 맡긴다.(단, 똥개들 앞에서는 너무 뻔뻔스럽게 굴지 말 것)
대숲, 그 진실의 소리
-배 한 봉
대숲에 가면 이런 소리가 들린다.
"뭐락꼬? 그기 참말이가?"
당나귀 귀가 된 신라 경문왕도 이 소리 들었을까. 마누라 밉다고 밤마다 뱀각시들이랑 지내다가, 짐승 업보 받아 뱀각시처럼 긴 당나귀 귀가 된 그도 이 비밀의 자물통이 영영 안 풀릴 거라고 믿었겠지. 복두장이가 설마 이걸 폭로할 거라고 생각이야 했을라고. 하지만 근질거리는 입을 겨우 참아 온 복두장이, 죽을 때가 되자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 그러면서 대숲에 가서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당나귀 귀…" 냅다 소릴 질러버린 거지. 그때부터 대숲은 민초들이 속 답답해 할 때마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당나귀 귀…" 이렇게 소릴 질러 진실을 알려 줬던 거지. 동학혁명 때 전봉준이가 죽창을 든 것이나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쇠스랑을 든 것이나 모두 이런 진실의 소리가 늘 울려 퍼지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나. 이제 곧 21세기라고, 첨단 지식정보사회가 된다고 여기서 손뼉 치니 저기서 손뼉 치고 마구마구 휩쓸려 깨춤 추는 판을 보고, 혹은 고관대작들의 현대판 당나귀 귀를 보고 누가 복두장이처럼 대숲에 가서 냅다 소릴 질러버린 것일까. 차마 큰 소리는 못 내고 소근소근 귀엣말을 한 것일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당나귀 귀…" 아직도 신라 때의 복두장이 목소리가 대숲을 울리고 있다.
김제에서
-변준석
그저
너른 들녘이고 싶었습니다
따가운 햇살 아래
일렁이며 익어가는 저 벼포기들처럼
제 마음
고개 숙이며 여물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평등한 사랑이고 싶었습니다
동학년 그날의 함성으로
하늘 끝 닿은 피 묻은 그리움으로
지평선 되어 눕고 싶었습니다
줄포마을 사람들
-송수권
옛날, 할아버지 살던 줄포마을은 그렇지, 한틀 지게를 엎어놓으면 꼭 맞는 말일지도 몰라. 두 개의 산맥이 지게 목발처럼 내려앉아서 지게 고작처럼 휘어들더니, 바다의 중동을 자르고, 애타게 만나질 듯 만나질 듯 마주친 두 개의 재네 대궁지처럼 물 속에 자물리고 있더란다. 보름 사릿물이 오늘 때쯤은 지네발로 두 대궁지가 달싹달싹 일어서는 것이 눈에 역력하더란다.
또 바다는 蓮꽃 시벙글어, 지듯, 풍월 도사의 손끝에서 떨어진 부채마냥 폈다 오물리면서 마치, 할아버지의 째진 말총 갓 구멍으로 드나드는 겨울 호리바람처럼
피꺽피꺽 여러 마리 산새를 울리기도 하더란다.
언제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산농민의 상놈의 도둑놈의 떠돌이의 반생으로, 동학군이 날개가 잘리면서 어느 안핵사에게 호되게 걸려, 혀를 뽑힌 채, 한패거리들로 숨어와 터를 잡았더라는데 할아버지가 보기는 잘 본 모양이었다.
그래서 근동에서는 씨종에다 씨文書를 가진 벙어리 쌍것들로 구메 혼인에도 가마에 흰 띠를 못 얹혔다지만, 그래도 귀 떨어진 엽전 하나는 꼭꼭 때워쓰는 착한 사람들이더라는 것이다.
한번은 읍내 장터거리 그 쇠전머리 윷판막의 말뚝을 뛰어올라 반벙어리 장쇠아범이 혀를 집게로 뽑혀도 쌍놈의 말은 쌍놈의 씨로 남는 법이여, 그라믄 쓰간디. 그래도 우리 동학장이들의 바구미같이 바글바글 끓던 그때 그 장날이 멋이었당깨. 이러고서는 한참 외장을 놓더라는 것이다.
아 동헌 마루를 우지끈 부수고 알상투를 끌어내어 수염을 꼬시르고 깨를 벗긴 채 볼기를 쳐 三門 밖으로 내쫓았더니 그래도 양반 때는 알았던지 옴팡진 씨암탉처럼 槍 끝에 안 걸렸드랑가. 뚝 소리 내고 떨어졌당깨. 옴마. 그란디 한 여편네가 엎어지드니만, 옴마. 이 작것. 이 작것. 우리 딸니미 잡아먹은 갓끈 달린 이 작것 하드니만 치마폭에다 싸들고 줄행랑을 쳤드랑깨. 혀는 뽑혀도 말은 바로 허지만 말이여. 내가 그 달딴 녀석 아닌가 말이여. 알긋써. 이러더니란다.
그런데 참 묘한 것은 늘 조금때쯤 바다는 복날 개 혓바닥 빠지듯이 그 길게 뽑힌 혀를 두 지네 대궁지 사이로 밀어넣고는 혀 뽑힌 줄포마을 사람들처럼 궁궁을을 궁궁을을 궁궁을을 맨날 이러더라는 것이다.
황포묵
-송수권
오목대에서 나는 쥐눈콩이
전주 비빔밥을 만들었다지
그 비빔밥에 오늘은 황포묵이 먹고 싶다
변산반도 지척으로 눈도 퍼붓는데
계화장 지나 부안 김제 지나 전주 남문시장 밖
어느 허술한 집 상머리에 둘러앉아
그 비빔밥에 황포묵을 들고 싶다
따순 짐 나는 순대국도 한 그릇
치자물을 띄우면 황포묵, 그냥 두루치기면 녹두 청포묵
황포묵 청포묵 그 구수하고 텁수룩하고 못난 잔치 음식들
오늘은 변산반도 지척으로 눈이 쌓이는데
계화장터 지나, 부안장 지나 말목장터
그때 동학군 떨거지들 흰 옷에 털벙거지 한잔 술 곁들고
낯선 사람들끼리 쥐코 밥상머리 둘러앉아
함께 들었듯
그 구수한 황포묵을 들고 싶다.
공주에서
-김용화
은모래 강변
미나리꽝
우금고개 넘어오는
동학군 말밥굽소리
쌍수정 선잠 깬 백학 한 쌍
날개를 친다
봉황산은 결코
철마를 허용할 수 없던
콧대 높은 자존심
일락산에 붉은 해가 지면
곰나루 여울목
불곰 한 마리 어흥댄다
사상에 대하여
-김남주
새로운 사상은
썩고 병들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제는 어떻게 손을 써볼 수가 없는 그런 세상에서 태어난다
이를테면 동학이 그러했다 반봉건싸움에서
새로운 사상은 그 초년에는
거리와 시장의 우스갯소리가 되기도 하고
사문난적이라 박해의 과녁이 되기도 한다
반역의 씨앗이 그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들은 그것을 멀리하고
굶주린 이들이 그것을 가까이 한다
사상은 노동의 대지를 그 밭으로 삼는다
처녀들은 깊숙한 곳에 호미를 그것으로 파묻고
사내들은 억센 주먹으로 그것을 지킨다
밤이 그들의 옷이고 별이 그들의 미래다
고난의 긴 세월 낡은 껍질과의 싸움에서
새싹의 기운은 이기고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지천으로 그 가지를 뻗는다
사상의 꽃이 아름다운 것은
민중의 피로 그것이 개화하기 때문이다
그 열매가 아름다운 것은
한 사람이 아니라 한 두사람이 아니라
만인의 입으로 그것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용흥리 석불
-곽재구
전라도 정읍땅 고부마을은
그 옛날 서당 훈장질하던 봉준이가
살구도 심고 녹두도 심고 곶감도 꿰며
살아가던 땅이었지요
그곳에서 십리 길 용흥리 산중에는
호랑이 담배씨 사러 가던 꽁꽁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제일 보기 흉한
돌부처 한 분이 살았겠지요
작둣날에 썰리듯 머리가 뎅겅 떨어져 나간
부처님 앞에 백일기도 드리고 애 낳은 아낙네들
무장 고부땅에 자운영 꽃만큼이나 널렸는데
하루는 은선리 산중에서 숯막치고 살던
강덥석이라는 고자 사내가
참숯으로 부처님 머리통을 새겨
떨어진 목 위에 올려놓고는
그만 쉰두 살에 아랫도리가 벌떡 일어서고 말았지요
갑오년 동학란 때는 강덥석이도 동학군이 되어
전주성 구경까지 자알 했ㄴ느데
봉준이가 죽은 뒤
동학군으로 나선 용흥리 사람들 다 어디론가 떠나고
참숯으로 만든 부처님 머리통도
그때쯤 사바세상을 훌쩍 떠났는데
조선 해방이 되던 그해 팔월에는
백산 아래 살던 석수장이 하나가
돌로 빚은 부처님 머리통 하나를 슬쩍 올려놓았지요
성도 이름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그 사내의 나이가
그때쯤 쉰두 살이 되었다는 것은 아는 사람은 물론 없었지요
잡혀가는 전봉준
-김영환
"......동학의 수괴는 모두 회유하여
본국으로 보낼 것..."
차라리 그곳에서 죽었어야지요
모진 고초 어찌 당하시려구요
송장배미, 白山竹山 모두 숨죽이는데
탄원서 쓰고
민족자치론 주장하면서
조선총독이라도 맡으셨더라면요
그 피, 그날의 역사 어찌 되었을까요
아 살아 계셔서
국민훈장 동백장 받고
국수 먹으러 그곳에 가셨더라면요
전봉준
-강서일
백년이 지나도록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는 노래만 들었을 뿐
꼿꼿이 선 채로
두 무릎뼈 직각으로 꺽이며
주름진 산하 노려보던 그 눈빛
동아줄의 그 어둠.
백년이 지난 오늘까지
모르고 또 모르고 있었다니
오오 적보다 두려운
벌겋게 녹슨 마음의 지층이여,
1994 계유년 오늘까지
우리는 그대의 미련한 적이니
마음껏, 마음껏 우리의 목을 치시라
전봉준가
-김정숙
어화가자 어화넘자 마른 손엔 죽창 들고 피 묻은 손엔 곡괭이 들고
백산, 원평 고부들에 찌르레기 찌르르 강아지풀 도르르르
조병갑을 효수하여 썩은 정치 징치하고
이서배를 몰아내어 알곡, 양곡 주인에게 돌려 주자
어화뛰자 어화둥둥 궁궁을을 을을궁궁
가슴으로 주술 외며 살자살자 인간주의 가자가자 평등주의
지상평화 전라낙원 보국안민 민족주의 광제창생 민중주의
5월 하늘 전라도는 푸르구나 푸르구나 전라우도 전봉준아 전라좌도 김개남아
탐관오리 불량양반 수세, 잡세 고리채로
배부르게 먹은 놈 을 솎아내어 뽑아내어
살자구나 살자구나 미끈미끈 살자구나
마한의 피와 백제의 온화함이 육자배기 가락 속에서 여무는 곳
슬프고도 슬픈 땅 고부관아 터지도록
꽹과리 북장구 상모야 돌아라 높이높이 돌아라
황톳길 한이 붉은 슬픈 남쪽으로
가자가자 인내천아 청포장수 너도가자
대꽃 2
-전봉준 -
-최두석
전봉준의 토담집 봉창의 한지가 바람에 울고 있었다. 이 울음은 조선 모든 초목의 이파리에서 공명하여 논밭에 잠든 손을 깨워 일으켰다. 콩밭 수수밭 고구마 넝쿨을 헤치고 손은 서릿발 선 논둑을 걸어 맨발로 봉중의 사립을 밀었다. (열린 문으로 수십 인의 농군이 뛰쳐 나갔다.) 손이 봉준의 헛간에서 두엄을 치고 여물을 써는동안 농군들은 고부 관아를 점령했다. 넘실대는 만석붓물이 아니더라도 분노의 봇물은 터뜨려 동네동네를 뒤덮어 흘렀다. 이 물결을 이끌고 봉준은 부안, 정읍, 고창, 무장, 영광.....
전봉준
-황동규
1
손금 접어두고 눈 오는 남루
寒天에 법도 없고 겁도 없는 논
땅 위에 깔리는 허연 눈가루
마음에 짓밟는 형제의 손.
2
눈떠라 눈떠라 참담한 시대가 온다.
동편도 서편도 치닫는 바람
먼저 떠난 자 혼자 죽는 바라
同列에 흐느낄 때 만나는 사람.
서울로 가는 全琫準
-안 도 현
눈 내리는 萬頃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琫準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 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 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 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 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 갈 것을
우리 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목숨 타오르겠네
琫準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발췌-<시마을에서>
<고구마에 관한 시 모음> 이준관의 '고구마를 캐는 사람과 만나다' 외
+ 고구마를 캐는 사람과 만나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삶이라는 것도
저렇게 고구마처럼 땅에 묻혀 있는 것이다.
땅바닥처럼 쩍쩍 갈라진 손으로
그는 고구마를 캔다.
자신의 삶을 캔다.
토막날까 조심하면서.
어느새 서쪽 하늘에는
그가 캔 황톳빛 빨간 고구마,
저녁놀 뜨고,
아이가 하나 그 고구마 베어먹으며
길에 서 있고,
그는
흙이 다 된 맨발을
서쪽 하늘에 저벅저벅 남기고 간다.
(이준관·시인, 1949-)
+ 고구마 밭에서
흙무덤 속에서만
너는 살아 있는
살아 있는 한
너는
흙무덤 속이 고향이다.
고향 사람들은
줄기줄기
새끼줄에 꿰듯
정을 뿌리로 하고 산다.
고구마는
고향 사람들을 닮아
정으로 매달려
뿌리를 흙에 묻고 산다.
(진의하·시인, 전북 남원 출생)
+ 고구마 푸대
폭설로 길 끊어지기 전 고구마 푸대를 짊어진 채
어느 아비의 마음이 급한 산길을 달려 아들이 공부하는
암자로 올라가 아궁이를 지펴놓고 내려가나
벌써 산길 끊어졌다.
(조정권·시인, 1949-)
+ 고구마
온양 봉곡사에 가서 고구마를 먹었다
오랫동안 눈 맞추던 부처님 무릎과
능엄경 몇 구절에서도 고구마 냄새가 났다
장소가 장소인데도 고구마를 건너가지 못했다
봉곡사 솔밭을 빠져나온 나는
길가에 꼬부리고 앉아 있는 개망초 무리를 보고
큰 위안을 얻었다
아무래도 내 본향은 이 자리 근처인 모양이다
(안수환·시인, 1942-)
+ 한국의 고구마는 억울하다
줄줄이 엮어 불리기
비슷한 무리들끼리 뭉치기
실마리 하나만 끄집어내면
우르르 끌려나오는 덩어리들
그래서 툭하면 비유되어
한국의 고구마는 억울하다
맛도 좋고 영양도 풍부하나
너무 자주 거론되다보니
흠집만 커져 단맛은
줄어가는 듯도 하지만
넘치는 혈연 학연 지연으로
수확량은 갈수록 늘어만 간다
(임영준·시인, 1956-)
+ 고구마 복음
성탄 이브, 싸락눈 치는 읍내 사거리에
고구마 익는 내가 캐럴을 타고 진동한다.
드럼통 안 이글거리는 열기에도
연신 된 입김을 쏟는 청년이 굽는 것이다.
날 선 냉기에 더욱 푸르러진 푸성귀,
비린내마저 냉동되어 버리는 냉동 갈치,
바람 스쳐 더욱 오그라든 끝물 사과며
홍시를 파는 좌판들의 코도 발씬거릴 무렵,
문득 청년은 양푼에 고구마를 가득 꺼내
아이쿠 뜨거워, 손을 털며
아이쿠 뜨거워, 손을 털며
어쩌려고 하나씩 죄다 나누어준다.
사거리를 종종 치며 건너는 촌로들은
멈칫멈칫 돌아보며 얼굴이 환해지는데,
구두를 닦는 노인, 가죽배를 미는 총각까지
그것 하나씩 두 손으로 받아 들고
그것 함부로 껍질을 까지도 못하고
무슨 복음이라도 되는 양 가슴에 감싸니,
맨날 도회지의 작은댁 가기에 바쁜
하느님도 이 광경을 어떻게 돌아보았는지
때마침 싸락눈의 마음을 돌려선
날 저물며 함박눈으로 펑펑 바꾸더라니
(고재종·시인, 1959-)
+ 할머니와 고구마
정갈하게 동백기름 바르시던
할머니 모습 자꾸자꾸 그립다
정읍땅 양지바른 모퉁이에서
완행열차 끄트머리 얻어 타고
쪼그리고 앉아 있다가
우리 집 구석방으로
함박웃음 머금고 할머니 따라온
고구마 얼굴 보니
정숙이를 정석이라고 부르며
사내 동생 보게 했다고
초등학교 때까지
나를 업고 다니셨다는 할머니
저녁때가 되면 으레
고구마 옷 벗기시면서
애들아 쌀 아껴야 한다 하시던 모습
톱톱한 막걸리 한 사발같이
정이 철철 넘친다
성긴 눈발 펄럭이는 동짓날
나이 한 그릇 퍼먹는데
오매!
징허게 우리 할머니 보고 싶다
(김정숙·시인, 1960-)
+ 고구마 이삭
아내는 극성스럽다.
점심시간 한 시간의 여유에
인근 고구마 밭에 이삭을 주우러 갔다.
손가락만한 작은 것 호미에 찍힌 것
어쩌다 흙 속에서 보물처럼 찾아낸
실박한 놈까지 봉투에 한가득
아내는 환한 웃음을 웃는다.
"이만큼이면 한참은 먹겠는걸"
흙이 잔뜩 묻은 손으로 큰 보물인 양
자랑하는 아내의 대견스런 모습에
그렇게 내가 한마디 거든다.
없는 살림이 그렇게 아내를
억척스럽게 만든 것 같아
늘 한쪽 마음이 시리다.
전라도 땅은 예로부터 황토배기라서
고구마가 달고도 실팍하다.
어릴 적에는 점심은 의례
고구마로 데우기 부지기수 이였다.
그 지겨웠던 고구마가 요사이는
무척 비싼 고급 주전거리가 되었다.
부지런한 아내 덕에 한동안은
맛있는 고구마를 먹게 생겼다.
그 맛있는 고구마를 생각하며
쩝쩝 입맛을 다신다.
(우보 임인규·시인이며 소설가)
+ 고구마를 캐다
송편소를 하기 위해 캔 고구마
넝쿨과 붙어있던 곳에서
눈물 같은 하얀 진액을 왈칵 쏟더니
이내 까맣게 딱지를 만들며
스스로 상처를 아물이고 있다
어미와 막 헤어진 상처,
생명창조의 흔적 배꼽이다
흠칫
첫울음이 고여 있는
나의 배꼽도 따라 욱신거리는 것이
어머니가 있었다는 증거이다
나도 탯줄이 잘렸을 때
저 고구마처럼 스스로 상처를 말렸을까
그렇지 않다
낳아 자족하기까지 살피다 자른
또 하나의 탯줄
심장 한 편에
고구마 진액처럼 말라붙은 딱지가
가끔 신경통처럼 쑤신다.
이제 고구마를 잃은 넝쿨은
둘둘 말려 밭둑에 걸쳐 있다가 거름이 되거나
소, 말의 먹이로 쓰일 것이다
시들어 가고 있는 줄기가
쪼그라진 어머니 젖꼭지 같다
고구마를 쪘다
햇볕이 가득한 고구마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와스스 쏟아질 것 같은 뙤약볕
어둠 속에 저 빛을 모으기 위해
사막을 허둥댔을
어머니의 구멍 난 고무신 같은 넝쿨.
(오영록·시인, 1959-)
+ 고구마 타령
접시에 올라앉은
두루뭉수리
못생긴 전라도 고구마가
뽀루퉁한 입술 오물거리며
한 많은 노래를 부른다.
아가씨 아가씨
맘씨 고운 아가씨
대만산 바나나 대신
저희들을 먹어줘요
똥도 매끄럽게 잘 나오는
전라도 황토땅 물고구마
제일 예쁜 놈 골라
꽃잎 같은 고운 입술로
탐나게 맛있게 먹어줘요
값도 싸고 배도 부르고
저희들을 먹으면
새참 때 쪼르륵 소리도 안 나지요
털난 창자 속
굽이굽이 구절양장 찾아가서
소슬한 달빛이 될래요
어허둥둥 내 사랑
이쁜 춘향이 눈물이 될래요.
아가씨 아가씨
맘씨 고운 아가씨
미국 초콜레트 비스케트 자시지 마시고
프랑스 봉봉 과자
아메리카 흑인 핫도그 자시지 마시고
우리네 전라도 함평땅
달디단 고구마
한입에 반둥중 덥썩 물어
탐나게 맛있게 먹어줘요
오지게 신나게 먹어줘요
덥썩 깨물어줘요
부드럽게 부드럽게 생켜줘요
단숨에 배꼽 밑까지
쑥 내려갈래요.
파리야 파리야
방정맞은 파리야
서러운 개떡 숭년에
건방지게 먼저 날아온 파리야
우리를 먼저 맛보지 말아라
꽃잎 같은 입술은 어디 가고
방정맞은 파리만 찾아오느냐
어진 흥부님 어디 가고
놀부네 딸년들만 퉤퉤
본체만체 돌아서느냐,
예쁘게 생긴
발그족족 살오른 함평 고구마
한입 깨물어 베어먹으니
어느새 식어버렸네.
내 참!
(문병란·시인, 1935-)
+ 고구마
일천구백 육십 년
슬그머니 어머니가 내놓은
찐 고구마 먹는 날은
저녁밥이 없었다
팍 시어버린 초승달 같은
김치 한 종지가 전부였다
울퉁불퉁 고구마 싫어하는 나는
먹기도 전에 먼저 목이 메어왔다
짐짓 모르는 척
물 한 그릇 건네준 어머니,
슬픔에 체하지 말아라 하셨다
제일 작은 걸로 골라먹은 나는
물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
내 몫의 나머지를 흙 속에 파묻었다
고구마 먹은 나무와 꽃들은
어쩜 그리 잘도 자라는지
내 머리 위에 훌쩍 올라섰고
창백한 가을처럼 나는 자꾸 쓰러졌다
그때 어머니가 건네준 고구마가
내게 약봉지 같은 것인 줄 몰랐다
일부러 밥 건너뛰고
한 개만 먹어도 속이 든든한
고구마 주신 이유를 이제 알았다
삶은 고구마 껍질째 한 입 베어 물고
젓가락으로 김치 집어든 어머니
너도 어여 먹어봐라 하며
오늘도 씨알 굵은 놈 하나 던져주시니
고구마 같은 눈물이 뚝 떨어졌다
(김종제·교사 시인, 강원도 출생)
+ 고구마를 캐면서
넝쿨을 젖히고 거두어낸 뒤
이랑이랑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옹골지고 *오달진 덩저리가 묻힌 데마다
땅거죽이 빠각빠각 터져 있음을 보았다
맑은 햇살 아래에 드러난 뒤
굵은 것일수록 살가죽이 갈기갈기 찢겼음을 보았다
깊고 어두움의 땅 속에서
얼마나 푸르고 짙푸르게 하늘을 그려왔던가
얼마나 담차고 줄기차게 어둠과 맞서왔던가
그 동안 응어리져 살아온 탓인지
이랑이랑 끊임없이 알차게 솟구치는 열기로
고구마를 캐는 데에도 헉헉 숨이 찼다
땅이란 본래부터 비어있는 여인
봄이 비바람을 견디어야 가을이 되듯이
굳세고 질긴 피땀의 줄기로 땅을 뒤덮어 버리고
굵은 씨알을 기르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 오늘에서야
젖가슴의 그리움과 피땀의 향기, 그 차이를 알았습니다
(구재기·시인, 1950-)
*옹골지다 : 실속 있게 속이 꽉 차다.
*오달지다 :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 고구마 꽃
고구마는 꽃을 달고
세상에 나온 일이 없다고 합니다.
고구마는
잎과 줄기와 알몸
그뿐.
보릿고개 파묻고 자라는
뿌리에 젖줄 물려
꽃을 틔어 웃는 날은
서릿발에 밟히고
자식이 많다 보니
제 몸 가꿀 겨를이 있겠어요.
오롯이
내리막길 온몸이
붉은 숯등걸 무르익어
치매의 속살이 하얗도록
검게 타버린 세월만 캐내었지요.
이상 기후변화로
계절의 변심이 몰고 온
고구마 꽃이 피었다고 합니다.
어머니도 병동에서
고구마 꽃처럼 피었습니다.
덜컹, 과거는 여위고
현실은 덩굴에 매달려
시들어 갑니다.
이제, 당신은
파내버린 두렁마다
붉은 욕창이 한창입니다.
(최남균·시인, 1967-)
+ 군고구마
아파트 앞 신호등 곁에서
앳된 청년이 군고구마 좌판을 벌였다
드럼통 주위엔 온통 나무 타는 연기로 가득하고
이리저리 돌려 눕히며 이쑤시개로
검은 연기자국이 얼룩덜룩한 고구마의 허리 조심스레
찔러보는 청년의 얼굴도 얼룩덜룩하다
청년 앞에 놓여 좀처럼 속을 드러내지 않는
세상도 아마 저렇게 매캐한 연기 투성일 게다
앞과 뒤, 깊은 속까지 적당하게 익힌다는 것이
잘 익어 먹기 좋게 된 삶을 금방 눈으로 알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 생으로 불 속에 던져졌던
나도 저랬다 밤낮으로 뒤척거리며
따끈하게 익어 접힌 봉지를 열 수 있기를
푸른 신호등이 켜질 때 달짝지근한 발길
건널목을 건너갈 수 있기를
하지만 나는 너무 오래 뜨거운 통속에서 뒹굴었다
단 한 번의 흥정도 없이
구겨진 지전 같은 겨울 벚나무 아래 주춤거리는
내 몸에선 바삭거리는 소리만 떨어지고
허리를 굽힌 손톱달이 쿡, 쿡,
숯덩이가 된 나를 찔러보고 있다
(권애숙·시인, 경북 선산 출생)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