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징검다리
두부장수가 울리는 종소리가 강추위로 얼어붙은 골목을 지나가고 있
었다. 사시사철 하루도 빠짐없이 아침밥 때에 맞추어 울리는 종소리였
다. 그 종소리는 주부들의 아침 일손을 서두르게 하고 늦잠 자는 아이들
을 깨우는 오래된 풍물이기도 했다.
"새우젓 사아아려어, 명란젓."
두부장수의 종소리가 사라져가자 짝을 이루듯 새우젓장수의 목소리
가 뒤를 이었다. 쉴 대로 쉬어 패이고 잠긴 그 탁한 외침은 종소리와는
달리 추위에 얼어붙어 있었다. 깊은 겨울밤에 울리는 찹쌀떡장수의 슬
픈 가락처럼 그 쉰 외침에는 삶의 고달픔과 힘겨움이 서리서리 엉켜 있
었다.
"언니, 언니이, 빨랑 문 열어요, 문!"
이런 다급한 외침과 함께 나무로 짠 대문이 심하게 흔들렸다. 그 바람
에 초인종을 대신하고 있는 깡통이 따라 흔들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초인종이 귀해 거의 모든 집들은 빈 깡통에다 자갈을 대여섯 개씩 넣어
대문에 매달아 두고 있었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온갖 깡통들은 그
렇게도 쓰이고 있었다.
"누구 왔어요?"
"언니, 나예요, 나. 빨랑 문 열어요. 나 얼어죽어요."
"어머, 고모! 웬일이에요, 이 추운 아침 일찍이."
한인곤의 아내는 황급히 한쪽 문에 달린 쪽문을 땄다.
"아이구, 왜 이리 추워. 사람 동태 되겠네."
쪽문을 들어서는 한인곤의 여동생 한정임은 파랗게 얼어 있었다.
"그렇잖구요, 영하 14도라는데. 춘천에서 오시는 길예요. 지금?"
"아니오, 오빠 일어나셨어요?"
"지금 한밤중인걸요."
"무슨 늦잠이에요. 오빠답지 않게."
한정임은 올케가 열어주는 마루문으로 종종걸음을 치며 올라섰다. 유
리창마다 성에꽃이 가득 피어나 있었다.
"국회의원 되더니 맨날 술에 취해 통금이고 뭐고 없으니 늦잠보 될 수
밖에요, 옛날 오빠가 아니에요."
한인곤의 아내가 입을 삐죽 하며 고개를 저었다.
"치이, 국회의원들이 맨날 술이나 마시고 늦잠이나 자니까 나라가 이
꼴이지. 근데 날씨가 왜 이 모양이야."
"누가 아니래요. 어서 애들 방에 들어가 몸부터 녹이세요. 신혼 재미
는 좋으세요?"
"신혼 재미나마나, 육군 대위 따라 사는 게 어떤지 언니도 잘 아시잖
아요. 그것도 촌구석에서."
아직 잠들어 있는 조카들의 이불 밑에 발을 넣으며 한정임은 하소연
하듯 올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순간적으로 올케의 동정을 사두는 것
도 필요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알아요. 박봉에 셋방살이에, 그 고생은 해본 사람이나 알지요."
한인곤의 아내는 시누이를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언닌 시집 잘 와서 시아버지가 뒤를 봐주셨잖아요. 전 그 반
대라니까요."
한정임은 동정심을 더 자극하고 들었다.
"그래요, 그 박봉으로 시집까지 도와야 할 처지면 여간 어렵지 않을
텐데. 저어......, 아버님께 좀 도움을 청하면 어떻겠어요?"
"저도 그래저래 천안에 갔다 오는 길인데 아빠도 형편이 어려운 눈치
였어요. 선거 때 오빠한테 너무 많은 돈을 썼잖아요."
한정임은 한 번 더 자극을 가했다.
"어머, 천안서 오세요? 아버님 어머님은 다 무고하시구요?"
한정임은 올케가 과장된 표정 속에 감추려고 하는 경계의 빛을 놓치
지 않았다.
무슨 경제적 도움을 받으려고 온 줄 아는 그 눈치에 한정임은 그만 비
위가 상했다. 그러나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웃음을 지었다.
"네, 다 무고하세요."
"어머, 밥 타겠어요. 좀 벗고 눠서 몸을 푸세요. 곧 오빠 깨울게요."
방을 나가는 올케의 뒷모습을 한정임은 묘한 눈길로 쳐다보고 있었다.
한정임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농담이나 하며 속말을 꺼내지 않았다.
밥상머리에서 행여나 오빠의 기분을 언짢게 할지도 몰랐고, 더구나 올
케 앞에서 자신이 초라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밥상을 물리고 오빠
가 담배를 피워 물자 한정임은 자리를 고쳐 앉았다.
"저어......, 오빠, 양서방 일 좀 어떻게 해주세요."
한정임은 힘겹게 말을 꺼내면서 오빠가 시집가기 전과는 전혀 다르게
타인처럼 느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한테 남편 일을 부탁할 때와
는 너무나 다른 기분이었다. 부모와 형제의 차이가 이런 것인가 싶어 한
정임은 가슴이 오싹해졌다.
"왜 양 서방이 시키던?"
한인곤이 더디게 웃음을 피워내며 여동생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에요. 그 사람 속맘은 어떤지 모르지만 그런 내색을 한 번도 한
일이 없어요. 괜히 오해하지 마세요."
한정임은 불쾌한 기색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아까의 거리감에다가 모
독감까지 겹쳐졌던 것이다.
"그래, 대위 사모님께서 빽 쓰러 자발적으로 나섰다 그거지." 한인곤
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씨익 웃고는, "정임아, 나도 네 맘 다 안다 허
지만 군인으로 당당하게 크게 되려면 전투부대 근무 경력을 쌓아야 해.
그게 직업군인의 정도야." 그는 다정하면서도 무게 있게 말했다.
"그런 원칙이나 상식은 저도 다 알아요. 그치만 안 그러고도 출세하는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잖아요. 전 그 시골 전방에선 더 못살겠어요."
"이런, 몇 개월이나 됐다고 그리 엄살이냐? 좀더 참고 지내라. 첫 고
비 넘기면 거기도 살 만해진다."
"오빠 남 얘기하듯 하지 마세요. 남들은 없는 빽도 만드느라고 혈안이
되어 편하고 좋은 보직 찾아 떠나는 판인데 저는 있는 빽도 써먹지 못하
고 생고생 사서 하라는 거예요? 오빠하고 아빠가 그렇게 떠밀지 않았으
면 전 양 대위한테 시집 안 갔을 거라구요."
한정임은 울먹거렸다.
"허 참, 별소릴 다 듣겠구나."
한인곤은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여동생의 말이 찡하게 가슴을 울리
고, 전방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도 했다. 더구나 선거 때 얼
굴이 새카맣게 타도록 열성을 다 바쳤던 여동생의 모습이 선하게 떠올
랐다.
"이거 읽어보세요."
한정임은 손가방에서 쪽지를 꺼내 오빠 앞에 놓았다.
"이게 뭐냐......?"
"애비 보거라.
가내 두루 평안하냐. 큰 변통이 없는 범위 내에서 양 서방 일을 좀 거
들어주어라."
한인곤은 그 짧은 편지에서 아버지의 육성을 듣고 있었다.
"이거 참, 대통령 빽보다 더 무서운 빽을 짊어지고 왔구나. 대학 나온
머리 잘 쓰고 있다."
한인곤은 어이없이 웃었다.
"피이, 오빠가 날 무시하니까 별수 있어요. 원리원칙만 찾아대고."
한정임은 그제서야 곱게 눈을 흘겼다.
"국회의원들이 괜히 망가지는 줄 아니? 그래, 도대체 어디로 옮겨 달
라는 거냐?"
"육본이든 특무대든, 좋고 편한 자리를 오빠가 더 잘 알잖아요."
"특무대는 4 .19 이후에 없어졌고, 이젠 방첩부대다."
"이름만 바뀐 것, 그게 그거잖아요."
"알았으니까 돌아가서 양 서방보고 편지하래라. 네가 또 구워삶겠지
만, 양 서방 의사가 어떤지 확실하게 알아야 하니까."
"오빤 참 답답해." 한정임은 생끗 웃고는, "이 정도로 끝나는 걸 고마
워하세요. 맨날 돈 도와달라고 덤비면 어쩔 거예요" 하며 손가방을 들고
일어났다.
"아이고, 두 번 고마웠다간 사람 잡겠다. 어서 가거라 친정 걸음 자주
해서 좋을 것 없다."
한인곤은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이것이 혈육으로서 당연한 것인지,
공인으로서 부당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점심 나절이 되어 마다고 하는 여동생에게 차비를 주고 한인곤은 집
을 나섰다. 햇살이 퍼졌는데도 날씨는 얼굴이 따끔거릴 정도로 매섭게
추웠다.
이거 가난한사람들 정말 살기 어렵겠는데. 정치 잘못한다고 난리들
인데 날씨까지 왜 이 모양인가 그래.
한인곤은 혀를 차며 택시를 잡았다. 그런 걱정은 군인 시절에는 전혀
해보지 않았던 거였다. 어디를 가나 '정치하는 놈들'이란 말이 예사로
오가는 인심 속에서 자연히 그런 데까지 신경이 쓰이고 있었다. 현재의
'정치 불신'은 극에 달해 있었다. 보름 전에 실시한 지방의 시. 읍. 면장
선거에서는 투표율이 40퍼센트가 넘는 곳이 거의 없었고, 그나마도 집
권당을 제치고 무소속이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그건 단순히 정치 불
신만이 아니라 다시 확인하는 민주당의 위기였다. 맨 끝으로 실시된 서
울 시장 선거에서도 투표율이 30퍼센트 대에 머물러 금세 '3할 시장'이라
는 야유가 시내에 떠돌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당에서는 투표율 저조를
갑자기 추워진 날씨 탓이라고 돌리고 말았다.
"정부가 반년 동안에 한 것은 경무대를 청와대로 바꾼 것뿐이다."
시중에 새로 퍼지기 시작한 말이었다. 그러나 그 야유마저 엄밀히 따
지자면 그 공은 윤보선 대통령의 것이었지 장면 총리의 것이 아니었다.
새해부터 그 호칭을 바꿔 부르기로 결정한 것은 대통령이었다.
눈을 내려감은 한인곤은 무엇이 얹힌 기분으로 된신음을 물었다.
"손님은 아주 시절이 좋은 것 같습니다 그려."
운전수가 말을 걸어와 한인곤은 무겁게 눈을 올려 떴다.
"왜, 아저씨는 시절이 안 좋으신가요?"
한인곤은 어디 민심을 들어보자 싶어 이렇게 대꾸했다.
"아이고, 말도 맙쇼. 시절이 다 뭡니까요, 죽지 못해 이 짓 하는 거지요."
운전수는 잔뜩 찡그린 얼굴로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벌이가 나쁩니까?"
"아, 벌이도 나빠졌지만 더 큰 문제가 택시강도 아닙니까. 매일 밤 세
네 건씩 일어나는 택시강도사건 신문 보셔서 잘 아시죠? 그게 신문에
난 것만 그렇지 괜히 귀찮고 골치 아파 신고 안 한 건 그보다 몇 배가 많
다구요. 돈 털리고 거기다 재수 옴 붙었다 하면 목숨까지 빼앗기는 판이
니 이게 어디 사람이 해먹을 짓입니까. 이거 갈수록 태산이니 정권 괜히
바꿨어요. 안 그래요?"
"예, 문제는 문제지요. 이거 뭐가 잘못된 건지 원......."
"그야 뻔하잖아요. 정치하는 놈들이 다 고등사기꾼들이니까 그렇지
요. 말로만 국민, 국민 해가면서 밤낮없이 제놈들 권력 싸움이나 해대고
있으니 나라가 엉망진창, 안 망할 수가 있어요. 내가 해도 이보단 잘하
겠어요."
"예, 예, 저 앞에 정거해 주세요."
택시에서 내리는 한인곤의 귀에는 고등 사기꾼들이라는 열받친 말이
쟁쟁하게 울리고 있었다.
한인곤은 '서시오'의 빨간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리다가 한곳에 시
선이 머물렀다. 교통위반을 적발하는 속칭 '빨간 딱지'를 꺼내든 교통순
경이 택시 운전수에게 삿대질을 하고 있었다. 운전수가 굽실거리는 고
갯짓을 하고 어쩌고 하더니 택시는 곧 떠나고 교통순경은 아무 일도 없
었다는 듯 빨간 딱지 뭉치를 주머니에 넣었다. 신속하게 거래가 이루어
지고, 그 빨간 딱지 사이에는 돈이 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한두 번 보
아온 것이 아니라서 한인곤은 슬그머니 눈길을 돌렸다.
그 순경은 분명 현행범이고, 부정 공무원이었다. 그러나 그런 부정행
위는 그 한 사람의 옷을 벗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최근에 노선
합승을 상대로 각 경찰서마다 수백만 환씩 갈취한 사건이 드러났다. 그
런데 경찰 간부들은, 말단 파출소의 한 달 운영비가 30여만 환씩 드는데
국가에서 나오는 돈은 3만 환뿐이니 도대체 우리보고 어쩌라는 거냐고
대드는 형편이었다. 나라 살림이 그 지경이니 무슨 말을 더 할 것인가.
한인곤은 한숨을 몰아쉬며 길을 건너기 시작했다.
교통순경들의 부정행위도 그 돈을 혼자서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경찰
서의 운영비를 충당하려고 위에서 책임액을 할당하고, 그 액수를 제대
로 해내지 못하면 무능자로 몰려 한직으로 자리가 바뀐다는 사실이 신
문에 공공연하게 보도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런 나라꼴은 다 부패하
고 타락한 정치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지난 3. 15 부정선거에 동원된 정
치자금이 밝혀진 것만 수백억이었고, 그 권력의 비호 아래 활개친 기업
들이 자진 신고한 탈세액만도 또 수백억이었다. 그런데도 새 정부가 혁
명재판이란 것을 하면서 '재벌들을 처벌하면 경제 위축이 우려된다'고
그들을 감싸고 나섰으니 나라가 바로 될 리 만무하고, 민심이 등을 돌리
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한인곤은 또 된신음을 어금니로 깨물며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갔다. 현
관에서부터 으리으리하게 치장한 음식점 안에는 일요일인데도 빈자리
가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았다.
"예약하셨습니까?"
"오재섭 의원이라고......."
"아 예, 저쪽 방에 와 계십니다."
한인곤은 오재섭과 악수하며 낯선 남자를 빠르게 훑었다.
"자아, 두 분 인사하시지요. 한 의원님, 이분은 제가 말씀드렸던 임상
천 사장님이시구요, 임 사장님, 이분이 바로 한인곤 의원님이십니다."
오재섭이 세련된 몸짓으로 양쪽을 소개했다.
"아,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 임상천이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 올
리겠습니다."
임호태의 아버지 임상천은 이마가 식탁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예, 첨 뵙겠습니다. 한인곤이라고 합니다."
차돌 같은 인상에 비해 너무 굽실대는 것이 한인곤은 과히 달갑지 않
았다.
"따지고 보면 임 사장님은 한 의원님하고는 인연이 아주 깊습니다. 다
름이 아니라 임 사장님은 군납사업가이시기 전에 6. 25에 참전한 육군
장교였거든요. 부상으로 제대를 하셔서 그렇지 동기 분들은 지금 다 장
군으로 계십니다."
오재섭이 한인곤에게 담배를 권하며 말했다.
"아, 그러시군요."
한인곤은 호감을 나타냈다. 그러나 한쪽 감정은 직감적으로 꼬이고
있었다. 오재섭의 그 말은 단순한 소개가 아니라 은근한 압력이었다.
"임 사장님은 사업가로서도 빈틈없이 성실하시지만 인간 관계에 있어
서도 아주 신뢰가 두터운 분입니다. 원내에서 보증수표로 인정받고 있
으니까요."
"아, 예......."
한인곤은 '보증수표'라는 말을 곱씹었다. 그 말이 이상하게 비위를 건
드렸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종업원들이 나가자 오재섭이 다시 말을 이
었다.
"임 사장님, 군복 사업 준비는 다 끝났습니까?"
"그럼요. 제작공장 시설은 작년에 벌써 완료했고, 결정만 떨어지면 바
로바로 생산할 수 있도록 대기상태에 있습니다."
임상천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재빨리 대답했다.
"한 의원님, 거 금년부터 실시되는 군복 국산화 사업 말입니다. 임 사
장님께서 그 사업에 참여하실 계획을 세워왔습니다. 그게 국방위 소속
사업 아닙니까. 한 의원님께서 힘이 좀 돼주십사 하고......."
오재섭은 목소리만큼 은밀한 눈길을 한인곤에게 보냈다.
"글쎄요, 저 같은 초선이 무슨 힘이 있다고......."
한인곤은 오재섭의 술수에 걸려든 것인지, 그의 말마따나 요로에 사
람을 많이 알아두는 것이 재산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저어, 반대만하지 않아도 도와주는 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이
렇게 인사드렸으니 곧 따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전 의리 하나로 살
아왔습니다."
임상천이 또 머리를 깊이 숙였다.
성북동 골짜기를 휩쓸어 내리는 북풍은 그야말로 살을 에는 칼바람이
었다. 남천장학사는 그 매서운 바람보다 더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
기숙생들은 책을 덮고 하나같이 풀이 죽어 서성거렸다. 겨울방학이 끝
나면서 제각기 짐을 싸야 할 그들은 그 다음 거처를 마련할 일에 쫓기고
있었다. 애초에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장학사 생활을 하게 된 그들
로서는 극심한 가뭄 피해까지 입어 굶주림에 빠진 집에 기대할 것이 아
무것도 없었다. 거처를 마련하는 길은 단 한 가지, 가정교사 자리를 구
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 일은 가지 끝에 하나 달려 있는 감을 돌팔
매질로 떨어뜨리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을 동
원해 그 자리를 구하려고 불안하고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선오 학생, 선오 학생, 전화 받어."
"예, 예, 누구래요?"
김선오는 다급하게 방에서 뛰쳐나오며 물었다.
"잘 모르겄는디. 못 듣든 여자 소리여."
김선오의 다급함에 비해 태평스럽기 그지없는 수위 영감의 대꾸였다.
못 듣던 여자 목소리! 순간 김선오의 마음은 활짝 밝아졌다. 박자영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럼 광고를 보고 걸려온 전화일 것이 분명했다.
"여보세요, 전화 바꿨습니다. 김선오라고 합니다."
김선오는 긴장 속에서 최선의 예의를 갖추려고 했다.
"안녕하셨어요, 안자경입니다. 오랫동안 못 뵈었네요."
김선오는 그만 맥이 풀렸다. 의대생 안자경의 전화는 뜻밖이었지만,
빗나간 기대를 상쇄할 만큼 반가운 사람은 아니었다.
"아 예, 어쩐 일로 전화를 다 하시고......."
"신문광고 봤는데, 혹시 동명이인 아닌가 해서......."
"아닙니다. 제가 맞습니다."
김선오는 의식 속에서 아까의 기대가 번쩍 되살아나고 있었다.
"어머, 그러시군요. 그 일로 좀 봤으면 좋겠는데, 시간이 어떠신지......."
"예, 저는 빠, 아니 아무때나 좋습니다."
김선오는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가려는 '빠를수록 좋다'는 말을 황급
히 바꾸었다.
"그럼 이따가 오후......."
김선오는 전화를 끊고 나서야 자신이 너무 허겁지겁 덤빈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얌전하고 차분한 안자경의 말이 그런 생각을 들게 하
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형편이니 그런 것 저런 것 따질 겨
를이 없었던 것이다.
"뭐야, 희소식이야?"
신문쪽지에 꽁초를 까고 앉았던 윤이 김선오를 치켜보았다.
"응, 만나보자는군."
"허! 역시 대학 차이나네."
"알게 뭐야. 이 선배 꼴 날지 모를 일인데."
김선오는 결과를 알 수 없는데다 번거롭기도 해서 안자경과의 관계를
그대로 덮어버렸다.
"참 미치고 환장할 일이야. 아니, 전라도사람들이 즈이들 애비 에미를
잡아먹었나 즈이들 재산을 뺏기를 했나. 왜 서울 것들은 우리 전라도 사
람들을 못 잡아먹어 그 안달이지? 김형은 순진하게 전라도라고 하지
말고 충청도라고 해 호적등본 때오라는 것도 아니고, 곤충도 생존을 위
해 보호색을 갖는데 우리도 그 정도 전략은 세워얄 것 아냐."
기숙생들의 가정교사구직이 급해지면서 이규백은 자신이 전에 겪었
던 일을 털어놓았다. 그 이야기에 모두 열 받치고 분노했지만 결국에는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글쎄, 그 이유 없는 차별이나 냉대가 말할 수 없이 분하고 억울하긴
한데, 그런 방법으로 했다가 들통나는 날에는 정말 전라도사람들이 나
쁜 것으로 누명을 뒤집어쓰게 된다구."
"화아 이거,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한강에 빠져죽는 사람
심정 이제야 알 것 같네."
인생살이 사연도 구구해 한강 인도교에서 투신자살하는 사람들이 많
아 인도교 양쪽에는 '잠깐만 참으세요' 하는 빨간 글씨의 푯말이 서 있
을 정도였다.
"힘내, 이것저것 억울해서라도 한판 멋들어지게 살 날을 기다려야지."
김선오는 윤의 어깨를 툭 쳤다.
"모르겠어, 그런 날이 올라는지."
윤은 쓰디쓴 얼굴로 말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김선오는 약속시간보다 30분이나 이르게 화신백화점 옆 송아지다방에
도착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서야 김선오는 스스로 머쓱해졌다. 그건
시계가 없어서라기보다 궁색하고 다급한 자신의 마음의 표현이었다.
한기로 몸을 부르르 떨며 김선오는 난로에서 먼 빈자리에 가서 앉았
다 톱밥난로는 나이 지긋한 남자들의 차지가 되어 있었다. 난로를 에워
싸다시피 한 그들은 엉망인 정치에 대해서 열을 올리고 있었다. 사람 모
이는 장소에서는 으레 있게 마련인 그런 열변에 김선오는 귀를 닫았다.
무슨 탁견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리 떠들어댄다고 정치가 달라질 리
도 없었던 것이다.
"왜 모두 국회의원 될라고 그리 두 눈에 쌍심지를 켜는지 아냐? 국회
의원이 되는 그 순간부터 특별예우만 100가지가 넘게 생기는 거야. 평
민에서 특권층으로, 인생이 확 바뀌는 거지. 허지만 의원님 감투 쓰려면
만석꾼 재산을 지녀야 해. 아니, 만석꾼 재산 탈탈 털어먹고도 의사당
문턱 넘지 못한 자들이 어디 한둘이야. 그런데 판검사는 머리 하나만 가
지면 되거든. 신분이 달라지기로는 판검사도 국회의원에 못지 않아 아
니, 4년마다 표를 구걸해야 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더 낫지. 국회의원이
낙동강 오리알 되면 그것처럼 비참한 꼴이 없지만 판검사는 법복을 벗
어도 최소한 변호사님 이시니까 말야."
어느 선배의 말이었다. 그러나, 곧 손에 잡힐 것 같았던 그 길은 한사
코 멀어져 가고 있었다. 공부에만 몰두해도 어려운데 가정교사까지 하
다 보면 그 길이 언제 열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더구나 새 개정안
은 응시자의 연령을 만 30세로 제한하고 있었다. 고등고시에 목숨 걸고
있다가 그 규정에 걸려 신세 망치게 된 사람들이 수두룩할 거였다. 자신
인들 그런 신세가 안 되리란 보장이 없었다.
김선오는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와락 쓸어내렸다. 상상만으로도 그
생각은 너무 끔찍스러웠다.
"이 애비가 무일푼으로 논 장만해 나갔디끼 맘 강단지게 묵고 공부혀
라. 글먼 니넌 누구보담도 먼첨 판검사 된다. 사람에 강단진 맘은 쇠도
녹이고 태산도 떠 옮기는 법잉께."
서울로 떠나기 직전에 할아버지 산소 앞에서 아버지가 당부한 말이
었다.
아버지......."
김선오는 손을 깍지끼며 신음처럼 아버지를 불렀다.
양식이 다 떨어져 이제 죽도 끓일 수가 없게 되었으니 비싼 고리채를
내는 것보다는 논을 한 마지기 처분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동생의 편지
가 온 것이 보름 전이었다. 그런 동생의 의견을 묵살하고 무조건 고리채
를 내라고 했던 것은 아버지 영혼 앞에 죄짓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논을
파는 것은 아버지를 파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떼칠 수가 없었다.
고향을 떠나오면서 어서 성공해 아버지한테 크게 효도해야 한다고 다짐
했었는데, 그건 아버지께 논을 100마지기쯤 사드리는 것이었다. 100마
지기의 논을 가진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고 흡족해 할 것인지를 상상
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벌떡거리고 힘이 솟았던 것이다.
"어머, 먼저 와 계셨군요."
"아 예, 오다 보니까......."
김선오는 생각에서 깨어나며 벌떡 일어섰다.
"저어......, 고시 공부도 힘드실 텐데, 무슨 변동이 생기셨나요?"
안경자의 조심스런 물음이었다.
"예, 변동도 큰 변동이 생긴 셈이죠."
김선오는 그동안에 일어난 변화를 간추려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낮
고 침울한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다들 어렵게 되셨군요." 안경자도 그늘진 얼굴로 커피를 한 모금 마
시고는, "제 남동생이 중3짜리가 있는데 마침 선생님이 필요하던 참이
었어요. 근데 한 가지 문제가 있어요." 그녀는 좀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무슨......?"
안경자를 쳐다보고 있는 김선오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듯싶었다.
그녀의 말에 따라 김선오의 마음은 맑았다 흐렸다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동생이 서울에 있는 게 아니라 광주에 있거든요. 어차
피 서울의 고등학교로 진학시킬 예정이고, 중3 공부는 다 끝난 거나 마
찬가지니까 서울로 올려보내라고 해도 아버지가 반대세요. 당신이 옆에
끼고 마지막까지 감독하시겠다는 거지요. 제가 동생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할 것 같고, 동생이 공부에 열중할 것 같지 않고, 둘 다 안 믿으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동생도 의사가 되어 당신의 뒤를 잇기를 바라시니까,
개가 의대를 가려면 고등학교 3년 내내 가정교사를 붙여야 돼요."
"난 또 무슨 일인가 했습니다. 당장 내려갈 테니 아무 걱정 마세요."
김선오는 허리춤을 추키며 속시원하게 말했다. 앞으로 3년 보장이라
는 언질이 그를 흥분시키고 있었다.
"어머, 정말이에요?"
안경자가 활짝 반색을 했다.
"그럼요, 언제 가면 됩니까?"
김선오는 자신의 말대로 당장 떠날 것 같은 기세를 보였다.
"저희야 빠를수록 좋지요."
"그럼 내일 중으로 떠나지요."
"어머, 그래 주시면 너무 고맙지요. 그럼 제가 바로 오늘 밤에 아버지
께 전화드려 놓겠어요. 보수는 서울의 최고급으로 해서요."
안경자는 긴 숨을 내쉬며 홀가분한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이 절 마음에 들어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이건 꼭 겸손만이 아니었다. 새로 시작되는 일에 불안감이 없지 않았
고, 소개를 좀 잘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깃들어 있었다.
"어머, 지나친 겸손은 교만이라는 말이 있던데요. 고등학교, 대학교,
학과 모두가 저의 아버지가 최고로 꼽는 일류인데 마음에 안 들 리가 있
겠어요. 더구나 제 동생하고는 선후배 사이가 되는 거니까 아버지가 더
좋아하실 거예요. 대선배님 앞에서 새까만 후배가 꼼짝달싹 못할 테니
까요. 제가 오히려 큰 체하게 생겼어요."
안경자는 '생김도 남자답다'는 말은 슬쩍 감추었다.
"너무 과찬이군요."
"근데요, 종원이 개가 좀 골칫거리예요. 늦게 본 아들이라 오냐로 키
워서 그런지 어쩐지 국민학교 때부터도 재앙 궂고 공부보단 딴 데에 더
정신을 팔거든요. 머리는 있는데 집중력이 없는 게 탈이에요."
"그거 사내답고 좋지 않습니까. 그 나이에 공부만 파는 것도 비정상일
수 있지요. 기본적으로 머리가 있으니까 그 담은 저한테 맡겨두세요. 공
부도 요령이고 재미니까요."
김선오는 아주 자신 있게 말했다. 괜한 허풍이 아니라 중3짜리 하나
틀어잡고 공부시킬 방법은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공부에 마음잡게만 되면 아버지가 너무 기뻐하실 거예요. 같은 고향
사람 중에서도 김 선생님 같은 분을 모시게 되어 안심이고 참 다행이에
요. 그럼, 낼 떠나시려면 채비하셔야죠."
"예, 병원으로 찾아가면 되겠지요?"
"네, 그러세요."
안경자와 헤어져 추위 속을 걸으며 김선오는 가슴이 훈훈해지고 있었
다. 같은 고향 사람이라 안심이고 다행이라는 안경자의 말이 그 어떤 난
로보다 뜨겁게 열을 내고 있었다. 이 의지할 데 없고 고적한 도시에서
결국 새 삶의 길을 열어준 것은 고향의 인연이었다. 그러나 김선오는 자
신의 앞날이 막막하기만 했다. 징검다리, 그것도 단 두 개의 돌을 번갈
아 앞에 놓아가며 건너야 하는 징검다리가 자신의 일생일 것만 같았다.
그는 자신의 생각에 그만 가위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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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래님의 한강
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2권)ㅡㅡㅡ 24. 징검다리
익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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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10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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