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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 교회의 가능성을 시도해보며
2010년 6월 19일 언재(焉哉) 한성수 전남 순천시 순천하늘씨앗 교회
들어가는 말
펴는 말
대안교회의 출발 의도
대안교회의 선례들
대안교회의 구조적 문제
대안교회의 신학적 문제
대안교회의 전망은?
나오는 말
들어가는 말
내가 대안교회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품어보기 시작한 것은 2002년 7월-2005년 6월 기간 미국의 뉴욕 만하탄에서 뉴욕한인교회 제 14 대 담임 목사로 봉직하고 있었을 때였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서 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님이 돌아가신 직후, 뉴욕지역에서 문익환 목사님 추모예식을 거행하고자, 몇 사람들이 마음을 모아 그 행사를 진행시키는 과정에서, 나는 당시 뉴욕지역에 있던 500여개의 한국인 교회들 가운데 적어도 300개쯤 되는 교회의 담임 목사님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문익환 목사님 추모예배를 드리자고. 눈보라가 유난히 심했던 1994년 1월 27일 밤에 만하탄 120가 헏즌 강(Hudson River) 가에 있는 기독교회관(The Interchurch Center)에서 열렸던 문 인환목사님 추모 예배에는 200여명의 조문객들이 몰려왔다. 그 가운데서 목사님들은 20명도 채 안되었다. 500여개 한국인 교회들 가운데 이른바 진보성향의 목회를 하는 교회는 내 기억으로는 10개도 안 되었다. 나는 그때 깊이 탄식을 했다. 한국에서 기독교인 인구가 25% 라면, 미국에선 한국인 동포들의 기독교인 인구는 대략 75% 정도로 추정한다. 그만큼 기독교 교회가 사람들의 삶에 직접간접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뜻이겠다. 그런데 그 많은 교회들이 모두 보수성향들 뿐이라면, 한인 동포 사회를 위해서도 건강한 현상이 아니라고 여겨졌다. 당시에 한국인 목사님 한 분이 미국연합감리교단(The United Methodist Church=U.M.C.)의 감독(監督: Bishop)으로 출마하여 뉴욕연회에 들린 일이 있다. 나는 그 분께 간곡히 한 말씀 드렸다. 만일 감독이 되어 뉴욕연회로 파송되어 오실 수 있다면 (그분은 실제로 최초의 한국이 감독으로 당선되었으나, 뉴욕지역에는 오지 않았음), 적어도 롱아일랜드 그레이트 네크(Great Neck) 지역에 있는 뉴욕한국인교회와 만하탄(Manhattan) 콜럼비아 대학 건너편 115지역에 있는 뉴욕한인교회, 이 두 교회만이라도, 진보적인 교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도록 도와달라고. 그러나 정작 몇 년 뒤에 내가 뉴욕한인교회에 담임목사로 부임하였으나, 그곳에서 3년간의 목회는 내 평생 목회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극심한 좌절을 안겨주었고, 내가 떠난 뒤에 그 교회는 도로아미타불 강력한 보수성향의 교회로 변질되었으며, 뉴욕한국인 교회는 전임자가 돌아가신 지금 젊은 목사가 와서 매우 근본주의적인 오순절계통의 교회로 탈바꿈하고 말았다. 문동환 목사님께서 설교하신 만하탄 선한목자교회도, 김민웅 목사가 설교한 뉴저지 길벗교회도, 그리고 내가 설교했던 뉴욕한인교회도 헏즌 강(Hudson River) 양쪽에서 삼각편대를 지으면서 진보와 자유의 보루를 지켜보자고 서로 부질없는 다짐도 해보았지만, 지금은 모두 자유혼의 깃발을 내리고 말았다. 교회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탄식을 하면서, 나는 대안교회를 꿈에 떠올려보았다.
나만이 겪는 문제라면 내가 못난 목회자임을 인정하고 내 탓이요 하고 말면 그만이지만, 둘러보니 목사들이 다들 신음하듯이 끙끙대고 있거나, 혹은 격에 안 어울리게 오만하여 병들어 있는 모습들로 가득 차 있다고 보였다. 나는 한 목사의 성향에 좌지우지되어 이토록 무력하게 좌절되고 무너지는 한국인 교회들의 현상에 깊이 절망했다. 개신교회의 한계는 결국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달린 문제인가? 아니, 개신교회에선 설사 목사가 어느 방향으로 회중들을 인도하고 돕기로 작심해도, 이른바 장로님들을 비롯한 기득권 교인들이 난공불락(難攻不落)의 성채를 쌓고 있는 제도적 문제점들을 극복하지 못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는 한, 대안교회는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내가 롱아일랜드 가든 시티(Garden City)에서 개척한 한국인 교회는 처음에 너무도 순탄하게 잘 성장하더니, 왼 걸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 양의 방북 사건을 계기로 나는 졸지에 빨갱이 목사라는 딱지를 받게 되었고, 그 때 단 하나 있던 장로를 비롯한 교인들이 모두 다른 교회로 떠나간 뒤에 8년 동안을 해프 타임(Half-time) 봉급을 받으며 그 작은 교회에서 악전고투 목회하였다. 이제 와서 뒤돌아보면, 사실 그 8년이란 세월은 내 생애에서 가장 낭비된 기간이었고, 내 작은 자존심 하나에 목을 매단 고통스러운 형벌의 기간이었다. 나는 목회의 길을 포기하고 컴퓨터 사업이나 하면서 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는 사업가로 나설 각오도 하였으나, 내가 신학이란 것을 공부한 세월이 너무도 억울해서 그 지겨운 목사 노릇을 쉽게 떠나지 못하고 버텼다. 쥐구멍에도 볕들 날 있으리라는 희망 하나로 견디면서. 그러나 쥐구멍에 볕은 끝내 들지 않았고, 내가 그 구멍을 빠져 나온 뒤에야 비로소 쥐 소리를 내지 않게 되었다. 산을 보고 움직여 이리 오라고 해서 산이 움직이지 않으면, 내가 산을 향해 걸어가야 하는 것이 그 것이 기적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1996년부터 2000년 까지 4년 동안 뉴욕의 롱아일랜드 포트제퍼슨(Port Jefferson)이라는 매우 작지만 아름다운 항구 도시에서 주일 평균출석 인원 약 200명 쯤 되는 백인교회 (흑인은 단 1명)에서 담임목회를 했다. 처음엔 나의 성실한 목회 스타일에 교인들이 대환영과 호응을 해주어서 그 교회 백여 년 역사에 처음 부임한 동양인 목사로서 상당한 자부심을 맛본 기간을 즐겼다. 그 지역 백인교회치고 교사 3명에 학생 12명이었던 교회가 내가 목회한 4년 동안에 교사 10명 학생 50여명의 교회학교로, 그리고 젊은 부부들만도 20여명 새로운 교인들이 증가한 일은 그야말로 기적처럼 소문이 났었다. 문제는 아무리 새로운 설교를 해도 교인들의 성향은 요지부동, 알고 보니 그들의 세계관이나 신앙은 전혀 바뀌지 않았고, 그들의 확고한 신념체계에 위안과 칭찬이나 반복해야 안전지대에서 만족했고, 조금만 그들의 비늘을 건드리면 냉정하게 화를 내는 역린(逆鱗)을 지닌 사람들임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목사는 그들에게 악세서리일 뿐이었다. 드디어 내가 동성애 권리에 대한 설교 한 번 하고 나서, 그 교회 중심적인 여성과 겪었던 기묘한 반감이 나로 하여금 그 교회를 떠나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마침 위스콘신(Wisconsin)주에서 그 지역 감리사로 있던 정희수 감리사 (지금은 쉬카고 지역 감독으로 당선되어 봉직중임)의 소개와 초청을 받아들여, 매디슨(Madison)에 있는 매우 진보적인 교회로 부임하였다. 출석교인은 한 60여명 밖에 안 되는데 동성애자들이 15명쯤은 되는, 그 중에도 5명 정도는 전국 총회에 나가서 동성애자 권익을 위한 데모를 했다가 수갑을 차고 연행도 당했던 상당히 거센 사람들이 있어서, 미국 전역에서도 소문난 교회였다. 아마도 한국인 목사들 가운데 동성애자들이 활발한 교회에서 목회를 한 선구자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나였다. 나는 동성애자는 아니지만, 동성애자들과 좋은 관계를 지녔고, 그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목회는 힘들었지만 목사가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보람과 감사함을 즐겼다. 그 덕택인지 당시의 여자 감독이었던 쇄론 레이더(Sharon Rader) 감독은 나를 밀워키(Milwaukee: 인구 180만의 미국 19번째 큰 도시) 남쪽에 있는 상당히 큰 교회로 파송을 결정하였는데, 마침 뉴욕에서 무지개집(Rainbow Center)을 운영하고 있는 아내(여금현 목사)와 헤어져 지내는 것이 싫었고, 무엇보다도 미국 동부지역 최초의 한국인 교회로 상당히 전통과 진보적인 평판이 있는 뉴욕한인교회라는 곳에서 나를 담임목사로 청빙하였기에, 연회 감독이 반대하는 중에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 뉴욕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3년 동안 내 생애 가장 잊을 수 없는 목회에 좌절을 겪고, 미국인 교회로 다시 파송되기 직전 나는 목사노릇을 청산하기로 작심하고 한국에 돌아와 지리산 밑에 둥지를 틀었다. 만하탄에서 벌어졌던 반전(反戰) 대모에 참여했던 나는 기어코 이라크(Iraq) 전쟁을 일으킨 부쉬(George Bush) 행정부의 만행에 분노하면서, 그런 전쟁을 떠받드는 미국의 교회 현실에 그만 절망하고 말았다. 내가 이런 미국에서 그리고 할머니 할아버지들만 가득한 미국인교회에서 더 이상 무슨 설교를 하며, 그러자고 그 수많은 시간을 고통스럽게 신학공부 했느냐는 자조(自嘲)어린 무력감과 깊은 회의에 빠졌다. 더 이상 미국인 교회에 가서 속편한 목회로 밥벌이나 하는 것은 아마도 더 이상 보람을 느낄 수 없으리라는 내 인간됨에도 스스로 의문이 생겼다. 목사직을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2005년 7월 나는 한국으로 되돌아와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전라남도 순천에 하늘씨앗교회(2005년 1월 31일 창립)라는 새로 생긴 교회가 있어서, 전임자 홍순관 목사가 첫 담임목회자로 10개월간 봉사하고, 은퇴를 하게 되자, 마침 지리산 밑에 와서 구름이나 바라보고 심심하면 노고단에나 오르락내리락하며 비교적 만족한 세월을 보내고 있던 내게 담임 목사로 청빙이 오게 되었다. 내가 이 교회의 청빙을 받으면서 내건 조건이 대안의 길을 가는 교회였다. 순천 여수 지역에만도 수백 개 교회가 이미 있는데, 그들 가운데 또 다른 한 개의 교회가 새로 생기는 것은 내게는 별로 의미가 없었다. 복음화 비율이 전국에서도 가장 높다고 소문이 난 이 지역, 특히 보수 성향이 강해서 최근까지도, 아니, 지금도, 천주교회는 물론 기독교장로교단 조차도 이단(異端:Heresy)이란 딱지를 붙이는 풍토가 이 지역의 교회 성향을 말하는 곳에서, 대안의 길을 가는 교회가 가능한지 한번이라도 시도는 해보아야 하지 않겠느냐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원래 이 지역에서 대안운동을 지향하려는 시도는 그 전해 2004년 내가 지리산 아래로 귀국하려는 현지 조사차 전라남도에 들렸다가, 순천에 계시는 송기득 교수(전 목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와 홍순관 목사 그리고 나 3명이서 뭔가 순천지역에 대안의 모임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구두(口頭)로 약속을 한 것이 그 시발점이 된 것이다. 송기득 교수는 이미 새로운 모임에 대한 청사진을 다 그려놓고 있었는데, 그분이 내민 문서에는 교회의 갈 길, 그 모임의 활동이나 구조적인 문제 등을 나름대로 당신의 머리 속에서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계해 놓고 있었다. 그분의 정열적이고도 참신한 아이디어에 호응하여, 뉴욕에 돌아간 나는 우선 인터네트 웹 싸이트에 “나온사람(NaOnSaRam)”이란 기묘한 명칭 등록을 서둘러 했다. 뉴욕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8천여 권의 책(내 평생 모은 책이라 버리고 올 수는 없었고)을 싸가지고 2005년 6월에 지리산 아래 구례(求禮)로 우선 임대 아파트를 얻어 한국으로 나왔는데, 그 동안에 이미 새로운 역사는 시작되었다. 순천 성남교회에서 목회자와 장로들 간의 분쟁이 이유가 되어 평신도 10여명이 그 꼴이 보기 싫다고 교회를 뛰쳐나와 자기들끼리 새로 교회를 개척하고 담임 목사를 찾는 과정에서 홍순관 목사가 적임자로 초청을 받은 것인데, 약속을 했던 3 사람 가운데 홍 목사가 먼저 교회로 나갔으니, 뒤에 남은 송기득 교수와 내가 입장이 묘하게 되었다. 송기득 교수는 하늘씨앗교회와는 별도로 신학 사랑방이든 무슨 강좌 형식으로라도 모임을 만들자고 주장하였지만, 나는 우선 이미 생긴 하늘씨앗교회라도 제대로 잘 성숙해 진보적 기독교 운동의 길을 가도록 홍순관 목사님을 뒤에서 돕자고 주장했다. 그런데 불과 6 개월 만에 내게로 그 하늘 씨앗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이 온 것이다. 송기득 교수는 좋아라고 내 등을 떠밀며 격려하여 주었는데, 이제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 사실 깊은 반성과 부족감에 나는 별로 마음이 편치는 못하다. 짧지도 않은 지난 4년 세월, 하늘씨앗교회를 대안교회로 밀고 나온 내가 과연 하느님과 사람들 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약속을 드린 예수님 앞에서 무슨 염치로 조금만 시간을 더 주시라고 해야 하는가?
펴는 말
대안교회의 출발 의도
대안(代案: Alternative)이란 말 자체가 이미 선택을 전제로 한 말이 아닌가? 대안 교회는 사실 새로운 기독교 운동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미 있는 교회를 무너뜨리고 새로 탄생시킬 그 무엇으로 대안을 내거는 것은 아니다. 이미 있는 교회에 순응하고 잘 지내는 사람들을 흔들어서 이쪽으로 넘어 오라고 초청하는, 어쩌면 공세적인 전도를 염두에 둔 그런 적극적 개념에 근거한 운동이 아니다. 현재 다른 교회들을 선택하고 그런 교회에서 나름대로 잘 지내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은 내가 말하는 대안 운동은 아니다. 대안은 선택을 위한 공존을 각오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시작해야한다. 하늘씨앗교회가 가는 길은 물론 여의도 순복음 교회나 명성교회나 혹은 그와 비슷한 교회들이 가는 길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순복음 교회에 잘 다니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나설 생각은 없다. 그런 교회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 선택에 걸맞게 행복하게 신앙생활 잘하면서 살아야 될 책임까지도 있는 것이다. 말이 약간 빗나가지만, 이명박 대통령을 선택한 사람들은 그분이 하는 짓들을 감내할 운명에 처하여도 할 말이 별로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님을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그분의 정책에 찍소리 못하고 입을 닫고 있으면, 그 삶이 무엇이 되는가? 선택할 수 없는 일, 달리 선택할 대안이 없으니까 저항 운동을 벌이고, 심하면 퇴진이든 탄핵이든 과격한 길까지도 각오해야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나라가 아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가면 된다는 옛말이 오늘에는 교회에도 해당한다. 이 나라가 싫다고 모두 이민을 갈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교회는 저 싫으면 다른 교회로 갈 수 있어야 되는 것인데, 문제는 이 교회 저 교회 다 다녀보아도 거기가 거기고 근본적으로 대안이 되지 못하면, 우리네 인생 예수님 때문에 피곤해지는 것이니, 교회에야 말로 대안이 필요한 곳이다. 다른 교회로 옮겨가면 지옥에 간다든지 이단교회라서 구원이 없는 길로 가는 것이라고 협박하듯이 어르면, 이는 교인을 어리석게 만들어 영원히 다스리고 싶어 하는 욕심을 드러낸 것이든지, 혹은 정통교리 수호보다는 제 밥그릇 챙기는 강아지 소리로 들어야 할 것이다.
대안 교회는 그러므로 교인이 오면 그의 선택을 감사히 마중하고, 떠나가면 조용히 너그러운 마음으로 보낼 일이지, 자기네만이 가장 잘 하는 것이라고 새삼스레 교리논쟁 속으로 교인들을 휘몰고 갈 일이 아니다. 대안운동을 굳이 다원화 사회가 직면한 다원주의의 틀에서 볼 수 있을 만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굳은 신념을 지니지 못해서, 정통이라는 사람들이 만만한 먹잇감 정도로 공격의 칼날을 치켜들고 달려들 때, 평화적인 대응을 할 수 있는 논리적, 학문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대안운동이 힘을 잃고 스스로 무너지고 말 것이다. 정통 수호에는 이미 남들이 오랜 역사를 통해서 검증받아 잘 준비해둔 해답들을 비교적 덜 노력해도 일단 달달 외우고만 나서도, 최소한 교리적 투사의 자격을 얻겠지만, 대안의 설명은 대체로 새로운 시도를 하는 내용이나 실천이 들어 있으므로 이것 저것 방어를 위한 다방면적 공부를 필요로 하는 변증적 측면들을 갖추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공격은 쉽지만 방어는 어려운 것이다. 도둑은 하나라도 지키는 사람은 열 명이 되어야하는 이치와 같다. 정통은 별로 많은 공부를 필요로 하지 않지만, 대안은 상당한 내공을 쌓을 때까지 마음 졸여가며 실력을 길러두어야 한다. 아무나 대안의 길에 나서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에 대안이 필요한 것인지를 명백히 해두어야 한다. 나로서는 인간화의 길이 대안의 출발점이다. 그런 주장의 배경에는 현대교회가 얼마나 비인간화의 길에 서 있는지를 묻는 뼈아픈 질문이 있음을 전제로 한다. 인간화란 화두(話頭)는 참으로 간단명료하지만, 그 내용을 깊이 살펴 생각해보자면, 송기득 교수가 지은 상당히 방대한 두께의 “인간” 이란 책이 1984년에 나온 지 벌써 26년이 되었어도 아직 끝난 이야기는 아니다. 평생을 예일(Yale)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조직신학교수로 명성을 떨쳤던 데이비드 켈시(David H. Kelsey) 박사가 내어 놓은 그분 일생의 역작 “기이한 존재: 신학적 인간학(Eccentric Existence: A Theological Anthropology)"란 책도 그가 은퇴한 후에나 출판한 것을 생각한다면, 인간학이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신학은 곧 인간학“ 이란 명제를 퍼뜨린 불트만(Rudolf Bultmann) 같은 분의 통찰력이 옛날에도 이미 알 만한 사람들은 다들 알고 있었던 문제였으나, 감히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어놓기가 힘들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생물학적 시원에서부터 꾸준히 인간화 되어온 존재들이요,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그 순간이 바로 인간화의 첫 걸음이요, 성서적으로 말하면 에덴(Eden)동산에서 쫓겨 나온 아담(Adam)과 이브(Eve) 이래 비로소 참 인간의 길을 향해 걷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다. 동물로 태어나서 인간이 되어가는 존재가 참으로 사람의 길이라, 인간화(人間化)란 참된 인간상을 향한 꾸준한 수행으로서 비로소 개나 돼지가 아님을 성취해나가는 길이다. 더러는 에덴으로 되돌아가는 복락원(復樂園)이야말로 실낙원(에덴에서 쫓겨남)의 반대요 구원의 길이라고 하지만, 나는 복락원을 무책임한 비인간화의 길이라고 여긴다. 그러니까 예수를 믿는 일은 예수를 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길이다. 약간 비약하면 참 인간의 길이 곧 참 신의 길이기도 하다는 고전적인 변증도 되고.
그래서 대안교회는 이른바 초대교회(初代敎會)라고 성경 사도행전 4장에 나오는 그 소박한 양태의 교회를 지향할 수 없다. 그런 것들은 비록 아름다운지는 몰라도, 이미 잃어버린 옛 꿈은 될지언정 현실적인 대안이 되기가 매우 어렵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에덴을 나온 것은 이미 인간들이 각자 다양한 현장에서 살아갈 운명을 짊어진 것이니, 어떤 형태로든 너무 정제된 간소화가 힘든 세상이 바로 오늘의 우리들에게 하느님께서 아름답게 살아가라고 주신 세계인 것이다. 이것은 최근에 법정(法頂) 스님 별세와 더불어 새롭게 강조된 “무소유(無所有)” 의 길과는 좀 다른 뜻에서 간소화에 반대하는 것이다. 효율성을 강조하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모토에 걸맞게 강 언덕을 깎고 강 바닥을 파내어 인공적으로 아름답게 호수들로 만드는 4대강 사업인가 뭔가 하는 것이 얼마나 간소한 토모건축 공학적 사업인지는 몰라도, 생물들은 본시 복잡계가 만들어낸 존재들이라 복잡한 환경에서 살아가도록 된 것, 인간도 너무 간소화의 길을 가면 생명력을 잃고 비인간화 되어가는 것이다. 직선의 효율성이 아니라 곡선의 비효율성이 더 아름다운 이유는 생명에 닿아있기 때문이다. 프랙탈(Fractal)이론은 복잡해보아도 자연계를 상당히 잘 묘사하고, 토목공학은 대체로 시멘트로 싸바르는 유클리드 기하학 정도 수준이다. 현대교회, 아니, 기독교회 자체가 직선화의 길을 너무 오래 걸어온 업보는, 결국 교회의 공동화다. 시간의 직선성 위에 세운 기독교가 역사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공간의 곡선성 위에 살아가야할 인간의 우주 공간적 요소를 경시한 것이 이제 속속 문제꺼리로 등장하고 있다. 이 시대의 부지런한 여성신학자 현경(玄鏡) 교수는 그녀의 책 제목을 “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거야” 라고 매우 아리송하게 붙였는데, 나는 그 책을 미쳐 다 읽기도 전에, 그 한 마디 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감탄하였다. 사실 대안교회는 성서의 구원론에 별로 깊은 관심이 없다. 아니, 성서가 말하는 구원에 대한 앵무새나 구관조(九官鳥)같은 반복이 아니라,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백조는 죽을 때나 한번 운다던가, 기독교인의 외침도 그래야 할 것이다. 기존의 교회가 금과옥조로 여기면서 교인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버리는 마술(魔術)을 발하는 대속(代贖) 구원론(救援論)에 자못 식상한 것이다. 오직 창조적임으로서만 비로소 참인간의 생명력으로 살아갈 우리들에게, 진선미(眞善美) 해묵은 역할론이 너무 학문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들로 인간을 치장하는 것에 저항하는 것이다. 우리가 따르기로 한 예수님은 진선미(眞善美) 가운데 성서는 진의 사람이라고 혹은 선의 사람이라고 하지만, 우리가 보기로는 미의 사람이었다. 그리고 우리도 정작 원하는 것은 아름다운 사람이지 선한 사람은 아니라고 선언하여 대안의 길을 나서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안교회의 선례들
개신교의 고질병인 교단 분열도 사실 자세히 생각해보면, 대안 운동이 낳은 것이다. 안에서 치고 받으며 싸움질 하느니 차라리 딴 살림 차려서 나가자고 새로운 교단이 생기고 또 생겨서, 한국에서는 장로교회 교단만도 여러 수 십 개(혹은 100개도 넘는다고도)나 된단다. 대한 기독교 감리교회도 지난 해 감독 선거를 두고 일어난 분열이 쉽게 가라앉지 못 해서, 지금 장기간 내홍(內訌)으로 들끓고 있는데, 차라리 새로 교단 차려 나가고 갈라서는 것이 낳을 것도 같다. 모두 대안이 없어서 야단들인 것이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것 같아도 인생 자체가 대안 부족으로 속으로는 곪아터지기 직전까지 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한국의 이혼율이 전 세계에서도 상위에 올랐다는데, 내 생각에는 대안만 있으면 현재의 이혼율보다 더 높아질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부부간에 누가 죽을 지경이 되는 말든 어찌했든 이혼만 안 하면 괜찮은 부부생활인가? 그래서 이혼이 그 대안인 것이다. 그러나 대안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어쩌면 대안 타령 자체가 이미 뭔가 병들어 있는 현실을 전제로 하는 선택의 문제를 제기할 뿐이라, 만일 대안 운동을 욕하려거든 대안운동이 안 나와도 좋을만큼 학교든 교회든 개인의 결혼생활이든 그 자체를 개선하는 길이, 대안에 대한 또 다른 대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명심해야 한다. 그러니 대안 운동 그 자체는 욕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대안 운동이야말로 피를 덜 흘리고 싶다는 평화운동인 것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나 존 칼빈(John Calvin) 등이 일으킨 16 세기의 종교개혁(Reformation) 도 사실상 대안운동이 아닌가? 아니 좀 더 멀리 가보면 예수님께서 펼치신 하느님 나라 운동이야말로 유태종교에 대한 대안 운동이 아니었던가? 다만 대안 운동이 선택이 아니라 강제로 진행된다면 그 또한 심각한 문제다. 실제로 칼빈의 종교개혁은 그 운동 자체의 대안성이 오히려 강권적인 폭력성으로 변해버린 통탄할 상황을 낳기도 했다.
대안운동은 언제나 기존의 체제 쪽에서 본다면, 자기들 밥그릇을 덜어가는 위험한 운동으로 보이기 때문에, 많은 대안 운동이 피흘림을 피할 수 없었던 불행한 역사적 과거를 만들어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사실 그분의 혁명적인 대안 운동이 낳은 억울한 피흘리심인데, 이를 거룩한 피흘림으로 둔갑시켜 버린 곳에 이른바 대속신앙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대안 운동은 바울의 대안 운동 속에서 상당히 엉뚱한 방향으로 증발해 버린 느낌을 준다. 대안 운동은 그러므로 언제나 성공적인 것은 아니다. 루터(Luther)의 종교개혁이란 대안 운동도 나중에 독일 루터교회 속에서 그 동력이 경화되어 매우 경직된 정통의 길을 가다 못해, 지금은 독일 교회가 텅텅 비어버린 매우 서글픈 현실로 내달은 것이니, 대안 운동이라고 해서 무엇이든 대안의 길은 다 좋은 길이라고 주장할 수는 물론 없다. 모든 대안 운동은 언제든 새로운 대안 운동으로 뒤바뀔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자들에겐 이런 대안운동이 언제나 자기들의 입지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여겨지기에, 저 악명 높은 이단(異端: Heresy)이 등장한다. 그러니 모든 대안 운동은 우선적으로 이단들이다. 이단아가 될 자신이 없으면 교회에 관한 한 대안운동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사실상 이단(異端)에 반대되는 정통(正統: Orthodoxy) 이란 말도 이단들 때문에 강화된 자리보전을 위한 변증적 입장선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일단 정통을 내세우는 사람들의 얼굴 표정에는 정통 수호라는 비장함과 함께 숨길 수 없는 비정한 엄혹성, 그러면서도 은근히 속에서 차오른 두려움을 숨긴 우울한 표정을 지닌다. 대안 운동은 당연히 자유로움과 새로움에서 오는 신바람이 있는가 하면, 정통 보수 운동은 속박과 구태의연함을 지켜내려는 칼바람을 지니고 있다. 일본에서 일어난 무교회(無敎會) 운동도 매우 신선한 대안 운동이었는데 그 초점이 교회의 구조적 모순을 없애려는 데 있다면, 한국에서 일어난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의 강좌 같은 것은 그 초점이 교회의 신학적 새 지평을 제시한 것으로, 아마도 한국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래 가장 창조적인 종합(Syncretism)을 이룬 한국적 신학의 대안일 것이다. 대안교회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면서 대안종교에 대한 관심도 점점 높아져왔다. 유렆의 대형 카톨릭 성당이 평소 미사에는 100 명도 채 안 나오다가도, 틱 나트 한 스님이나 달라이 라마 같은 스님들이 오면 온통 성당이 메이게 사람들이 몰려든단다. 탄식만 하거나 부러워만 하지 말고, 무엇이 우리들 속의 문제인가를 진지하고 정직하게 성찰해야할 일이다. 어느 교단 교리 문답집에는 인간의 삶의 목적이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하느님의 영광(榮光: Glory = doxa)이 오히려 독사(毒蛇)가 되어 사람을 물어 죽이는 일은 없었던가? 심하게 말하면 인간을 영광스럽게 만들어주지 못하는 하느님은 이제 좀 놓아드리는 것도 좋을 성싶다. (cf. 길히성: 하나님을 놓아주자!) 대안교회의 길은 인간화의 선언에 기초한다. 사람을 오히려 못쓰게 만들어 버리는 현대교회는 없는가? 그래서 대안의 외침이 자연히 솟구쳐 오른 것인데 우리는 이런 솟구침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는 것이다. 어떤 종교도 조직화되면 대체로 힘 있고 돈 있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판을 치게 되고, 천대받고 서러운 사람들을 점점 변두리로 내몰리는 현상을 반복하는 것 같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내어 쫓는다는 말은 경제학에서만 통하는 것이 아니라, 신학에서도 통하는 가보다.
대안교회의 구조적 문제
순천하늘씨앗교회의 대안교회의 길은 우선 그 구조적 문제부터 시작했다. 나는 한국교회의 근원적인 병통중의 하나인 장로(長老:Elder), 권사(勸士: Exhorter), 집사(執事: Deacon)라는 이른바 신령직 제도의 혁파를 내걸었다. 미국장로교회에서는 대학생도 장로로 선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늙은이들만 뽑히는 것이 장로가 아니다. 더구나 그런 장로들은 모두 임기제의 규제를 받아서 대개 3년이면 물러나고 새로운 장로단이 구성되도록 선출하는데, 한국에서는 한번 장로면 영원히 장로라, 내돌리는 명함 카드나 무덤 앞에 세운 비석에도 아무개 장로라고 버젓이 새겨둔다. 미국에서 수입한 장로교단이건만, 장로제도는 한국에 와서 유교적 권위주의의 폐단을 적극 엄호하여, 일단 개교회에서 선출이란 형식은 거치지만, 정작 중요한 절차는 노회나 지방회에서 안수(按手)로 성별하여 다시 각 교회로 파송함으로써, 안수 받은 목사와 형식상 동급의 권위를 부여한다. 그래서 장로로 피택(被擇)되는 과정에 담임 목사가 행사하는 막대한 권한을 넘어서기까지는 그토록 겸손한 척하던 사람도, 일단 장로로 안수만 받고나면 그날부터 목사와 대등한 권한을 지녔다는 자부심에 차올라 대체로 목사파대 장로파의 분쟁과 투쟁의 주역들로 부상한다. 이는 목사가 지닌 권위와 영광에 대한 부러움과 시샘을 넘보는 평신도들의 출세지향적 상승운동의 길인데, 높은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오심을 그분의 운동 동선이라고 선언한 성경의 말씀(빌 2:5-11)과도 어긋나는 반동의 길임은 물론이다. 내가 소속된 미국연합감리교단에는 장로제도가 없건만, 미국에 있는 한국인 감리교회에선 한국적 전통입네 뭐네 하면서 기어코 장로제도를 두고 있다. 목사가 왼팔 오른팔 만들어 자기 호위병으로 삼는 데는 장로를 선택하는 제도만큼 손쉽고 중요한 것이 없으며, 목사는 장로들을 당회원으로 거느린 당회장 자리에 대한 자부심을 절대로 포기하지 못한다. 평소엔 목사님 목사님 하면서 굽신거리다가도 자기 이익이 걸린 문제에 부딪히면 목사 내쫓는 힘은 장로밖에 없다는 듯이 돌연히 권력형 인간으로 변해버린다.
게다가 물심양면으로 장로 되기가 얼마나 힘든지, 지금은 청와대에 계신 어느 개신교 장로님도, 장로되기 전에는 그 자신이 이미 현대그룹 회장이란 높으신 신분임에도, 주일마다 새벽에 교회에 나와서 주차장 차량 정리를 2년이나 잘 했다고 널리 칭송을 받아 마침내 장로에 당선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비화다. 이렇게 힘든 장로 되기란 필연코 장로 된 특권을 동반하여, 보통 평신도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는 종교귀족으로 승진하는 것이다. 대안의 길은 이런 교회안의 비민주적인 불평등 서열주의를 혁파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교회 안의 모든 운영은 민주적 절차로 선출한 운영위원회에서 결정하도록 조직을 새로 세워야만 되었다. 평신도 중심 운영제도에는 반드시 목회자를 운영에서 제외시켜야 되는 전제를 달고 있다. 개신교에는 담임목사의 권한이 너무 비대해져 버렸다. 나는 교인이 일천 명 이상 되는 교회의 목회를 해본 적이 없어서, 자칫 이솝 우화에 나오는 신포도 타령이 될 것 같기는 하지만, 대형교회의 담임 목사를 하면서도 비인간화의 길을 가지 않는 분이 있다면, 그런 분들은 예수님보다 훨씬 뛰어난 분들이라고 감히 생각한다. 예수님이야 고작 열두 명 제자들 밖에 더 두셨는가? 그나마 한 명은 배신자이고. 그러니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면서, 빵 튀기로 5병2어 기적도 베푸시고, 죽은 사람도 살려내시고, 풍랑도 제압하시던 그 놀라우신 능력으로 어찌 고작 열두 명밖에는 추종자들을 모아들이지 못하신 것은, 예수님의 능력에 이상이 있지 않은 이상, 목회는 본질적으로 대형화의 길을 가면 목회자 자신이 제왕이 된다는 하늘 뜻을 말씀하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가 비인간화 된 주제에 인간화의 언설들을 풀어낸다면, 이를 일러 사기(詐欺)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신비한 능력의 소유자라고 과장과 허의의 선전을 하지 말고, 다만 성실한 성경교사 정도로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다. 나는 젊은 날 10년 동안 학교 강단에서 물리학과 수학을 가르쳐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교사의 길에 대하여 매우 감격스러운 기억들을 지금도 지니고 있는데, 교사의 행복은 가르치는 대로 눈이 떠져가는 학생들을 보는 그 기쁨과 감격을 세상의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자부심에 있다. 참으로 다행인 것은 해마다 학생들이 자꾸 바뀌어서 새로운 제자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라는 곳에서는 제 아무리 명성을 떨치는 교사라도 한 3년 하고 나면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뻔한 소리를 다람쥐 체바퀴 돌리듯 반복해야 하니,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나타나는 교인들 앞에서 변함없이 버티고 있는 교사로 상대하는 최악의 관계를 10년이고 30년이고 지속해가는 그야말로 악몽인 것이다. 그래서인가 목사들은 가르침의 사역을 매우 권위적인 오만에서 시작하는 경향이 있다. 교인들이 깨닫는 것이 많아져서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인가, 교인들을 몽매한 상태로 묻어두기를 원하는 가르침의 태도를 보이는 경우를 흔히 본다. 교회를 다닌 지 30년 된 교인이나 30개월 된 교인이나 별 차이가 없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목사들의 영적인 수준이란 것을 도대체 무엇으로 측정한단 말인가? 그러나 목사의 성경에 대한 지적인 수준이 교인들의 수준에도 미달이면, 문제가 매우 심각하다고 보아야 한다. 어느 누구도 목사의 수학 실력을 대학교수인 교인의 수학 실력과 비교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가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기본적인 신학에도 미흡한 채로, 영적인 실력만 자랑한다면 그건 거짓이고 허위를 감추려는 속임수일 뿐이다. 도대체 그런 영적인 능력이란 것이 무어란 말인가? 오래 한 교회에 함께 있는 교인들은 목사의 실력이 지닌 바닥을 대체로 짐작한다. 그런데 왜들 목사님들이 한 교회에서 말뚝 박아놓고, 은퇴 후에도 원로목사 대접까지 받으려고 안달들인가? 비인간화된 종족이 아니고는 감히 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예수님도 고작 3년 목회하시더니 그만 떠나가 버리셨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제자들도 그리움과 죄책감에 목이 메어 “우리 죄를 혼자 짊어지시고 죽으셨다”고 눈물어린 고백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라 할지라도 한 30년 제자들과 같이 계셨더라면, 그 제자들 모두 가리옷 유다처럼 되어 버렸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싶다. 인간이란 대체로 그런 것이다. 죽을 때 잘 죽고, 떠날 때 잘 떠나지 않고도 성인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목사의 담임 임기제를 선택하지 않고 대안교회가 될 수는 없다. 하늘씨앗교회에서는 애당초 담임목사 임기를 2년, 그리고 재신임을 반복할 수 있다. 2년 임기의 너무 야박함은 물론, 취임 후 2년이면 고작 교인들과 이제 마음을 열어 대화를 시작할 시간인데, 재신임여부를 묻는 것이 지나치다고 해서, 교인 총회에서 개정한 것이 담임목사 임기 3년이다. 내 생각 같아서는 서울 향린교회처럼 한 6년 하면 좋겠지만, 교인들 쪽에서 보면 서로 마음이 맞지 않는 목회자와는 단 1년도 더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나, 교회는 교인들을 위한 기관이지 목사를 위한 기관이 아님을 감안하여 임기 3년으로 정해졌다.
하늘씨앗교회에서 담임목사는 가르치는 일 밖에는 달리 책임질 일도 없고, 참으로 할 일 많지 않은 자리다. 교회 운영에 직접적으로는 참여하지 않으니, 정치력을 구사하는 권력의 맛을 포기하고 그 대신 동서고금의 수많은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는가를 연구하고 공부하는 재미가 보통 쏠쏠한 게 아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면 목사 자신이 끊임없이 공부하여야할 그 책임만으로도 벅찰 수 있다. 교인 심방은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최대한 삼가기로 한다. 문제가 없는 교인들이라도 자주 심방하여 성령 안에서 사귐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면, 교인들은 양(Sheep)이요 목사는 목장견(Shepherd dog) 쯤 된다는 점을 각오할 일이다. 원래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은 너무 가깝지도 않고 너무 멀지도 않은 판단의 거리가 필요하다. 너무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너무 쌀쌀맞지 않도록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과제다. 교인들의 헌금 상태를 점검할 이유도 필요도 없고 (누구를 장로 깜으로 추천할 필요도 없으니), 교회 출석을 안 해도 일일이 그때마다 문안드리지 않는다. 새벽기도회도 폐지, 십일조도 폐지, 주일 오후예배도 폐지, 금요철야예배도 폐지, 생각 같아서는 전도부도 폐지하고 싶지만, 전도라기보다는 교회를 알리는 홍보와 찾아온 분들을 영접하는 정도로 전도부서의 역할을 재조정했다. 하늘씨앗교회에서는 교육부와 선교부가 가장 중요한 부서이지만, 사실 그 부서가 하는 일이 또한 가장 힘이 들기도 하고 돈도 제일 많이 쓰는 부서다. 예배와 친교에 주력하여, 주일에 만나는 교인들끼리의 분위기는 자랑이 늘어질 정도로 좋다고들 한다. 예배 형식은 시끄러운 것을 피하고, 될 수 있으면 조용히 명상과 기도하는 시간을 늘이고, 재주 있는 사람들이 없으니 형편이 안 되어 국악 찬송은 마음은 원이로되 못하고, 설교는 되도록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 여러 가능성을 설명하는 방법을 강조한다. 예배 전 성경공부 시간은 오전 10:00시-10:45, 예배시간 전체만큼이나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일단 엄포(?)를 놓기는 주일 예배전 성경공부 시간에 참석하지 않고서는 어디에 다니면서 하늘씨앗교인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이 예배 전 성경공부 시간을 강조한다. 금년 들어 교회 창립 이후 처음으로 5월 어느 날엔가 예배 후 친교 시간에 드디어 막걸리 병이 친교실에 등장하여 많은 교인들을 놀라게 했는데, 사실 나도 좀 충격을 받았다. 미국 같았으면 대부분의 알콜 중독자 치료클럽(Alcoholic Anonymous)란 프로그램이 교회시설을 빌려 진행하고 있는데, 말도 안 되는 탈선이라고 할만하다. 한국 개신교회 대부분이 술과 담배에 대해서 유난히 신경질적인 민감성으로 반대하는데, 어찌 교회당 안에 막걸리가 등장함을 용인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우린 적당한 자제를 전제로 어쩌다 친교실에 막걸리를 내놓는 것에 크게 소동을 떨지 않을 수 있었다.
대안교회의 신학적 문제
세계와 기독교 변혁을 위한 연구소(이하 세기연) 실장 정강길이 지은 놀랍도록 용감하고 탁월한 통찰력의 산물인 “미래에서 온 기독교” 는 이 시대 한국 교회가 낳은 값진 소산이지만, 일반 교회에서 과연 이 책을 제대로 수용할지는 의문이다. 하늘씨앗 교회로서는 이 책을 읽은 교인들치고 기분 나쁘다고 항의성 질문을 해온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것은, 이미 송기득 교수의 강의에서 충분히 담금질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좋다. 하늘씨앗교회는 정강길은 물론 한국 신학계와 교회에서 존중 받아 마땅한 분들을 수시로 초청하여 그분들의 전문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배운다. 문동환 목사, 조화순 목사, 박형규 목사, 민영진 목사, 양재성 목사, 김준우 목사, 류상태 목사, 김순현 목사, 임의진 목사, 김민해 목사, 김홍술 목사, 정병진 목사, 송기득 교수, 한완상 박사, 차옥숭 박사, 이정순 박사, 구미정 박사, 홍영기 박사, 정강길 실장 등, 이른바 이름이 알려진 분들을 지난 4년간 꾸준히 초청하여 배움터를 넓혀오고 있는 중이다. 당연히 명사 숭배에 대리 만족을 하는 교회라는 소리를 들을만한데, 우리로서는 사실 계획적인 행사를 벌이면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열등감을 극복하고 남들이 퍼붓는 이단(異端) 공격에도 담대할 자신감이 필요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는 배타적인 목사가 저지를 맹목적 억압교육을 지양하고 폭넓은 각 분야의 스승들로부터 배우려는 개방성을 지향하기 위한 것이다. 이분들의 이름만 들어도 하늘씨앗교회가 지향하는 길이 짐작될 것이다.
대안교회가 당면하는, 아니, 극복해야할 고비는 대체로 두 가지 면에서 온다. 우선은 조직면에서 대안이요, 다음은 신학면에서 대안이다. 처음 고비는 잘 준비하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음을 우리는 경험했다. 그러나 다음 고비, 신학적인 요소는 매우 어려운 구비고비를 넘어야 하는데, 그런 면에서 목회자의 고민이 깊고도 넓다. 신학은 교회를 위한 학문이라는 진부한 말씀은 이미 오래전에 독일의 어느 저명한 신학자가 외친 말인데, 그의 저작은 대체로 교리적이라 명령하는 내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교회는 마땅히 이러저러 해야 한다는 처방적(prescriptive) 주문이 많아서, 그런 신학은 이른바 교의학(Dogmatics)라고 해서, 대체로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진리의 소리로 들린다. 그러나 그런 진리 주장이 우리의 삶을 흥겹게 하고 신나게 만드는 것만은 아니다. 교회가 신학에 복종해야 하는가 신학이 교회에 봉사해야하는가가 판단하기 어려운 분기점을 공유하고 있다. 대안교회의 조직을 정비하는 데는 목사의 전문성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교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해야한다, 재정을 투명하게 공개해야한다, 목사의 역할을 축소해야한다, 등등 체제개혁에 대한 실천은 평신도들 스스로 이미 그 병폐나 장단점들을 이미 잘 알고 있어서, 보편적인 상식선에서도 충분히 재구성할 수 있었다. 문제는 신학이다. 왜 신학을 대안적 자세로 다시 읽어야하는가? 그냥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테두리 안에서 신앙생활을 지속할 수는 없는 것일까? 목사의 신학적 전문성을 정말 믿어도 되는 것일까? 진짜 이 목사가 이단의 괴수요 숭배자 집단(cult)의 수괴가 아니라고 어찌 믿을 수 있는가? 미국이나 독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왔다고 남다른 실력 자랑을 해대는 목사들이 천지에 널린 판에, 과연 그들에게서 배울 것이 있으며, 또 굳이 아니꼽게 생각하지 않고도 진실로 그들에게서 배울 마음이 드는가? 하늘씨앗교인들의 교육에서도 기성교회에서 머리에 밴 성서문자주의를 극복하는데 한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감사한 말을 하는 교인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좋은 성경 교사가 좋은 수학 교사와 다른 점이 있다. 수학을 잘 가르치려면, 수학을 배울 학생에게 대한 선생의 관심이 진정임을 느끼게만 만들어주면, 그 다음은 오직 그 선생이 수학을 정말 잘 아는 지식이 넓고 깊고, 그 내용을 쉽고도 요령있게 설명할 줄만 알면 된다. 그러나 성경은 그 내용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그것을 가르치는 선생의 삶에서 증거 되기를 바라는 점이 다르다. “원수를 사랑하라!” 는 말은 예수의 입에서 나오면 진리가 되지만, 사기꾼의 입에서 나오면 거짓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교사는 콩을 심으면서 팥이 나온다고 주장해도 학생들이 그 말을 믿을 만큼 되지 않고서는 좋은 성경교사가 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성경교사는 거의 숭배자집단(cult)의 지도자에 가까울 만큼 신뢰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그런 성경교사가 정말로 숭배자집단의 괴수가 아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목사는 아무나 하면 안 된다고, 정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지 않고서는 함부로 나설 일이 아니라고 해도 좋다. 그렇지만 그걸 누가 증거할 수 있는가? 그 증언은 사실 배우는 사람들, 즉 교인들의 삶에서 증거 되어야 한다. 교인들이 교회의 제자는 되어도, 예수의 제자는 못 되는 평신도 훈련이란, 그래서 사악한 의도라고 까지는 않아도, 무지한 오해라고는 해도 좋을 것이다. 순천하늘씨앗교회에서도 아직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제목들은 유보하거나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미루어 두고 때가 되면 다루자고 후일을 기약하고 있다. 대안교회라고 해서, 흔히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교리들을 조목 조목 반박하는 것으로 운동성을 길러내려는 것은 방법론적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무엇이 아니라고 자꾸만 주장을 거듭하면 마침내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게 된다. 공격을 하면서 어느 틈에 공격을 받는 쪽의 것들을 내 안에 불러들이는 이상한 반대학습이 배어든다. 내 편의 장점만 강조하는 것이 좋다. 대속론(代贖論: Atonement theory) 같은 것을 자꾸만 부정하려는 것보다는, 원문을 그대로 두고도 새롭게 해석해내는 창조성을 발휘하는 것이 좋겠다. 도올(檮杌) 김용옥 박사가 매우 탁월한 솜씨로 도마복음서 (Nag Hammadi Text)의 한글 역해서를 내어 놓아서, 새로운 기독교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데, 나는 좀 회의적이다.
이미 존재하는 정경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온갖 제설이 난무해도 기독교는 별로 흔들리지 않고 보수화의 길을 잘도 걸어왔다. 도마 복음서의 로기론(Logion)정도로 새로운 생명력을 얻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다. 사실 로기온 자체로만 본다면 기독교 성경은 중국의 논어나 중용 혹은 도덕경, 불교의 금강경이나 화엄경에 비교해도 지혜문학의 가치로는 솔직히 빛이 바랜다. 나는 종교의 생명력을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의미 발견에 둔다. 요즈음 한국 불교계의 문수 스님이 이병박 정권의 4대강 살리기 사업에 반대하는 뜻으로, 그리고 민주적인 소통을 재촉하는 간절한 메시지로 이른바 소신(燒身) 공양(供養), 즉 분신자살을 감행하였다. 어떤 점에서 한 사람의 삶은 그 스스로 책임질 일이지만, 죽음은 살아있는 사람들이 책임질 일이다. 한 사람의 죽음이 남은 사람들에게, 적어도 가까운 친척이나 친지들에도 아무런 의미도 주지 못하면, 그런 죽음은 개죽음, 아니, 개죽음만도 못한 죽음이다. (개죽음은 누군가에게 보신탕감이라도 되겠지만, 사람의 죽음이 아무런 의미도 남기지 못하면 송장치우는 수고만 강요한다는 점에서 개죽음만도 못한 쓸모없는 죽음이란 말이다). 문수 스님은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였기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대하여 제대로 의미 발견을 못하면 그 죽음이 개죽음이 될 것이다. 그분의 죽음을 개죽음으로 만들면 살아있는 자들의 수치다. 예수님의 죽음은 스스로 선택했다기 보다는 죽기 싫어하면서도 죽임을 당했기에, 남은 제자들이 그 죽음을 해석할 책임에 나섰고, 여기에서 기독교가 발생했다. 대속론은 오해된 고백에 근거한다. 예수의 주검을 삼킨 묘지는 기독교의 산실이 되었다는 기묘한 생사의 교차가 의미 깊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가엾게 죽은 사람들, 원통하게 죽은 사람들, 그들 모두가 죽음 저 넘어 다른 세계가 존재하지 않으면 이 세상에서 정의(正義)의 문제를 해결할 길이 없다는 길희성 박사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는 되나, 별로 매력적이지 못하다. 나는 죽음은 이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서만 영원성을 발휘하는데, 그 길을 정의의 길이라기보다는 사랑의 기억이 낳는 영원성의 길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도 사랑해주지 않는 사람의, 기억되지 못한 의미 없는 죽음은 진정 동물적 죽음만도 못하다. 사람은 죽으면서도 더욱 인간화의 길을 가야하는 존재다. 죽음에 대한 초월을 이루지 못한 인간은 아직 동물적이다. 종교의 능력을 드러내는 분수령이 바로 이 죽음의 시간을 생명의 시간으로 어떻게 잘 변혁시키는 가에 달렸다고 나는 믿는다. 죽음의 공포가 덮쳐 와도 내 생명을 지탱하여온 신념을 굽힐 수 없다는 삶의 힘이 있다면 그 순간 죽음은 생명에 도로 삼키어지는 것이다.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 있느냐?” 예수를 내 삶의 모델, 본받을 분으로 여기면, 왜 구세주가 안 되는가? 예수님의 지혜가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 죽음이 문제다.
대안교회의 실천적 문제
정강길의 저서에서 잘 비교해 놓은 진보 성향의 교회가 갖추어야할 요소들이 나열되어 있는데, 순천하늘씨앗교회에서는 그런 모든 내용쯤은 바로 우리교회에 대한 설명이라도 되는 듯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정강길의 현상학적 분석이 그려낸 이론적 주문에 앞서 우리는 이미 실천적으로 행동해왔다고 자부한다. 우리의 프락시스(Praxis)가 정강길의 테오리아(Theoria)를 앞서 걷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감히 주장하건데 대안교회의 신학적 전환은 이론이 실천을 뒤따라와야 한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느 교회가 이론으로 잘 무장하고 시작을 해도, 막상 실천에 옮겨가려면 새삼스런 어려움이 겹겹으로 밀려온다. 일단 작은 실천으로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나서 그 실천이 주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실천이란 주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사랑의 행위인가? 신앙인의 목표는 결국 자신의 인간적인 완성-그것이 무엇이든-을 위한 구도적 열정이 도달하는 만족스런 상태를 말하는가? 정강길의 현실 교회 진단은 조목조목 우리들 앞에 실제로 드러난 기독교의 모습으로 이렇게 나열 된다:
① 이천 년 기독교가 저지른 오류와 비극에 전혀 반성하지 않는 기독교
② 이원론에 기반되어 비역사적인 아편적 행태로 드러나는 힘의 기독교
③ 이해되지 않아도 ‘교리’는 무조건 믿고 고백해야 한다고 말하는 기독교
④ 성경을 문자적으로 맹신하고 초자연주의를 사실로 가르치는 기독교
⑤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강요하며 이웃종교와 문화에 배타적인 기독교
⑥ 악에 대한 심판을 빌미삼아 공격적 폭력과 전쟁을 정당화하는 기독교
⑦ 여성안수를 반대하고 여성 비하를 정당화하는 가부장적 기독교
⑧ 반민주, 반생명, 반평화를 위해 예수와 성서를 팔아먹는 기독교
⑨ 약자를 억압하고 강자를 지지하는 법과 제도에 찬성하는 기독교
⑩ 생명과 평화를 말살하는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를 지지하는 기독교
⑪ 잘못된 신비와 영성 및 초자연적인 기적 체험을 강조하는 기독교
⑫ 교회를 세습하고 교인수와 교권에만 탐닉하는 목사들의 기독교
이런 조목들에 대하여 강렬한 저항감으로 일어설 수 있다면, 과연 새로운 기독교가 될 수 있는가? 새로운 기독교는 없어도 좋다. 정말로 이런 조목들에 대하여 정직하게 살펴 보건데, 더 이상은 이런 기독교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결의에 차오른다면 말이다. 그러나 말은 이렇게 내걸지만, 이런 일들이 한 사람의 탁월한 수련이나 함양으로 이루어지는 것일까? 나는 예수 운동의 필요성은 개인이 상대하기에는 사탄(Satan)의 능력도 시대와 더불어 복잡하게 진화하여, 이제는 모든 기관이나 기구들이 내적으로 품고 있는 폭력적 악령의 정신으로 싸움을 걸어오기에,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그래서 숱한 단점이 끊임없이 드러나도 여전히 교회에 기대를 걸 수밖에는 없다는 것이 내 입장이다. 교회는 이제 낡아서 전부를 허물어 버리고 사흘 안에 다시 짓겠다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뜻을 겸허히 다시 숙고해야한다. 허물어 버리기도 전에 스스로 무너져 내릴 것같은 불길한 예감 앞에서도, 아직은 조금만 더 시간을 달라고 조른 포도원 지기처럼(눅 13:8), 우리는 다음 철에라도 열매를 맺는 무화과나무를 기다리면서, 대안교회라도 시작해보자고 나선 것이다.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시종노릇을 하는 대형교회에서 가장 나쁜 형태의 어용신학이 횡행하고 있다. 성경 어디에 자본주의를 칭찬하는 내용이 있는가? 성경을 문자적 사실로 이해하기 시작하면 모든 전쟁도 다 나름으로 합법적인 이유가 있고, 더구나 하느님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 인간의 잔혹한 행동을 합리화할 수 있다. 히브리 성경 모세 오경은 그래서 가나안 원주민들의 입장에서 읽어볼 마음을 지녀야한다. 오늘날 이 세계에서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향해 저지르는 폭력을 지켜보면서, 히브리 성서의 내용들이 자꾸만 떠오른다. 에짚트에서 억압에 눌려 살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눈물겨운 외침이 유태인들의 종교적 바탕이었다면, 어찌 오늘날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향해서 엄청난 살육을 자행하는 이스라엘 사람들 자신이 에짚트로 변해버린 현실을 설명할 수 있겠는가? 미국이 저지르는 제국주의적 만행은 전 세계에서 가장 악질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거늘, 어찌하여 한국의 대형교회 강단은 숭미(崇美) 사대주의에 젖어 매 주일마다 교인들 세뇌에 분주한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전 주한 미군사령관이 퍼부었던 말처럼 “들쥐 떼” 같은 무리들인가? 미국에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전도자들 치고 저질 오락성 설교자 아닌 자들이 드물어, 그들만 보고 미국의 기독교 수준을 평가하면 잘못이겠듯이, 한국에서도 텔레비전에 나오는 목사들 설교를 들으면서 한국 기독교회를 전체적으로 이해한다면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한국 교회에서 벌어지는 부도덕함과 화려함과 부패한 정도는 아무래도 일부만의 문제라고 회피해 가기엔 너무 만연된 개독교(?) 공해가 너무 심각하다. 개신교 목사들에 관한 한 해결의 길이 없다고 느껴진다. 차라리 천주교로 통합되어 버렸으면 좋겠다는 반동종교개혁을 희망하고 싶은 내 마음이 스스로 비참하다. 목사의 길에 들어선 것을 후회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문익환 목사님 같은 분을 생각하면서 나 자신을 달래기도 했다. 모든 목사들을 부끄럽게 만드셨고, 많은 목사들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주신 문익환 목사님!
대안교회의 전망은?
대안교회라는 것을 표방한지 4년, 나의 목회는 이제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과연 이런 방식이 사람들(교인들)에게 무슨 유익함이 있을 것인가? 하늘씨앗교회가 2년 전에 기독교 대한 복음교단에 가입을 신청했다가 거절을 당했을 때, 우리는 복음교단을 원망하지 않았다. 우리 교회의 운영내규가 복음교단 헌법과 너무 차이가 많아서 수용할 수 없다는 통고는 항의할 이유도 없고 그들의 판단은 정직했으니, 우리로선 당연하다고 체념했다. 그러나 한국에 유니테리언 유니버살리스트(Unitarian Universalist) 교단 같은 (한국에서는 그들을 이단종파로 규정) 자유로운 교단이 없고, 그렇다고 우리 교회 하나만으로 교단을 형성할 수도 없어서, 지금 여러 가지로 궁리중이다. 하느님의 이끌어 주심을 기다리고 있다. 대안교회 연합회를 구성하자는 김홍술 목사의 주장에는 동의는 하지만, 아직 대안교회라고 나설 만한 교회들이 별로 많지 않은데, 지금은 교단보다는 각 지역 교회를 길러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단독교회로 각자의 길을 잘 가면 되지, 굳이 교단을 만들어야 하는가? 단독교회는 운동성에서 이 시대에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한다. 교회가 무슨 압력단체처럼 외치고 투쟁할 일이 많은가? 종교는 정치와 분리되어야 한다는 말에 반대하는 것이 대안교회가 가는 길이다. 어차피 보수 강경 노선의 대형교회들은 이상하게도 종교와 정치의 분리를 남 먼저 외치고는 실제로 가장 가증스러운 정치행동을 벌이고 있는 현실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고 있다. 차라리 정직하게 말해서 종교는 정치와 분리될 수 없다. 정치행위는 하지 않지만, 교회의 강단은 충분히 정치적 이쓔에 대한 비판의 나팔을 불어야 한다. 그래서 교단이 필요하다. 사탄의 세력들이 조직적이면 하느님 나라도 조직적 대응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비폭력 저항이라도 힘이 없다. 외로운 투사는 언제고 지쳐서 제풀에 쓰러지고 만다. 서로 상처를 싸매주고 아픈 곳을 보듬어 주며, 기쁨과 슬픔을 공유할 이웃이 없이는 하느님 나라라도 이 땅에 내리지 못할 것이다.
대안교회의 전망은 솔직히 어둡다. 어차피 기성교회들의 미래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인데, 이미 각 교회에서 부는 바람의 방향을 감지는 했지만, 그들도 어찌할 수 없는 시대의 변화 앞에서 마지막 애달픈 노력들을 경주하고 있다. 독일, 불란서 등 유렆 교회들을 조롱했던 한국교회가 그들이 신주처럼 모셔온 미국교회들조차 지금 하향곡선을 급하게 그리고 있는 현실 앞에서, 썩은 냄새만 풍기는 거대 무덤으로 변할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한 때 잘 해먹은 목사들이 자식들에게 교회를 세습하기까지 했지만, 앞날은 별로 밝지 못하다. 왜 그런가? 한국적인 질병이 아니라, 미국이 앓고 있는 질병을 한국은 앓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일까? 그러니 이제라도 대안교회의 길을 해보는 데까지는 해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대안교회는 어두운 전망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분을 새롭게 해석하는 창조적 신학을 바탕으로 전통적인 교회 체제를 전면 개편하면서, 새 시대의 새로운 교회 되기를 모색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세기연(세계와 기독교 변혁을 위한 연구소)이 홀로 애쓰는 모습이 애처롭지만, 한 젊은이의 혼신의 투쟁이 이 만큼이라도 주목을 받는 이유는 정강길이 누리는 삶이 세기연에 미쳐있기 때문에 여기 오늘 우리들이 모인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이는 되는 일이 없다. 내가 희생을 못하는 존재라면 누군가의 희생을 기억이라도 해줄 수 있으면 된다. 내가 죽을 수는 없다면 남의 죽음이라도 의미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인간화의 길이다. 문제는 순천이든 서울이든 어디서든지 하다못해 단 하나라도 대안교회가 제대로 두발로 설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그 시작이다. 제발로 아직 서지도 못하는데 머리 속에서 마라톤 이론을 가르친다고 당장 무슨 기적이 일어날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대나무 밭에 개들이 와서 똥을 싸질러대면, 당장은 냄새나고 더러울지 몰라도, 비온 뒤에 돋아날 우후죽순(雨後竹筍)이 실하지 않겠는가? 지금은 땅 밑에서 눈에 띄지도 못하고 기어 다니고 있지만 뿌리라도 꾸준히 뻗어나가는 생명력을 잃지 않고 살아 있으면, 대나무 밭은 장차 수많은 죽순으로 돋아오를 희망이 있을 것이라 다짐하자. 대안교회는 홀로 잘난 맛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어디서든 동지가 생겨나서 누룩처럼 이 땅을 발효시킬 힘들이 연대되지 않으면, 어떤 대안교회도 대안이 되지 못했음을 고백하고 대나무 밭에 가서 눈물을 쏟아야 할 일이다.
나오는 말
나는 대안 교회라는 것을 실험해오면서, 때로는 희의를 때로는 흥분을 느끼면서, 이제 순천하늘씨앗교회에서 그 가냘픈 가능성의 온상을 열어 보인다. 아직 어디 다른 곳에 옮겨 심을 만한 성장이나 성숙이 안 된 묘목처럼, 아직은 불안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실패를 각오하면서라도 감히 대안교회의 길에 동참할 도반들을 기다린다. 행여 이 묘목들이 어딘가 다른 토양에선 쑤욱 쑤욱 자라날 날이 있을 것인지는 어쩌면 오늘 대안교회를 지키고 있는 우리들의 문제가 되었다. 모든 운동이란 재미가 없으면 안 된다. 운동은 놀자판을 겸해야한다. 잘 놀자면 신명이 나야하는데 무엇으로 신명나게 만들 수 있을까? 인생은 결국 누구와 함께 걸어 보았느냐에서 짙은 보람과 신바람이 나는 것이다. 대안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의심쩍은 눈총을 각오해야 되고, 심하면 막되어 먹은 욕설도 들을 수 있기에, 홀로 감당하기엔 대체로 자신감이 잘 서지 않는 길이다. 그 길은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지켜주시는 길이라고 믿음 좋은 능력을 말하기 보다는, 하느님과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지들 혹은 주변의 사람들이 지켜준다는, 믿음직스러운 동료애가 둘러싸고 있어서 감당하기에 지치지 않는 길이다. 홀로 잘난 척하지 말자. 홀로 잘 되는 것은 사실상 잘 된 것이 아니다. 너무 거창한 사명감이니 소명이 어쩌느니 떠벌일 일이 아니고, 작은 기쁨도 소중하게 여기고, 교인들과 더불어 즐기는, 아니 되도록 교인들을 달달 볶아대지 않는 작은 배려를 간직하고 지내면, 목사도 편하고 교인들도 편하다. 어떤 경우에도 교회나 교인들을 휘몰아 경쟁의 대열에서 신앙으로 승리하자는 응원가 부르지 말자. 안 그래도 경쟁 사회 속에서 피곤하게 살다가 지쳐서 돌아온 교인들을 믿음을 미끼로 다시 경쟁시키는 짓은 하지 말자. 경쟁은 사탄의 단골 메뉴다.
나의 목회 30년을 되돌아보면, 어느 교회에서도 이른바 교회 성장에 대성공을 해본 적이 없다. 두 차례나 교회에서 쫓겨나듯이 교회를 떠났으나, 나는 그런 교회에서도 언제든지 더 눌러 앉아 있을 수는 있었다. 그 이유가 주로 신학적인 개방성, 혹을 급진성 때문에 교인들을 불안하게 만들었다는 점이었으니, 내가 사서 한 고생이었지만, 그런 경우에는 사과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었기에,순순히 교회를 떠나는 것이 옳다고 여겼던 것이다. 나를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는 교인들이 항상 절대 다수였지만, 내 성격상 늘 내 쪽에서 선선히 사임하고 그런 교회들을 떠났다. 그랬기에 나중에 다시 만난 그 교회 교인들 가운데 존경을 얻었다고 자부한다. 내 평생에 잘 하는 짓이 하나 있다면, 그야말로 갈 바를 잘 몰라도 떠나는 것 하나는 참 잘 한다고 내 아내도 나를 칭찬인지 비난인지 모를 말로 나를 그려주었다. 지금 섬기고 있는 순천하늘씨앗교회가 나로선 가장 오래 목회를 하고 있는 중인데(지금 5년째), 동시에 지금이 가장 쉽게 목회를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욕심을 모두 내려놓았기에 마음은 편하다. 목사의 삶도 인생인데, 온통 봉사 희생 등으로만 칭찬할 일이 아니다. 삶은 즐겨야한다. 삶은 환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는 것이 옳다. 교인들도 나처럼 감사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살아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러기에 때로는 불의의 세력들에 대하여 준엄한 항거를 하자고 외치기도 한다. 대안교회는 휘파람 불며 즐겁게 갈 수 있는 동지들의 사랑과 믿음을 나누는 아름다운 자유의 길이다. 지리산에 살게 된 뒤로 타종교(주로 불교) 사람들과도 즐거운 교분을 맺고 수시로 만나 아름다운 교제를 이루고 있다. 지리산 화엄사, 실상사, 조계산 송광사 선암사 스님들과 잘 지내고 있고, 구례 성당 신부님과도 만남이 이렇게 소중할 수가 없다. 몇 년 전 성탄절에는 하늘씨앗교회 교인들 19명과 화엄사 예불도 참석해보고, 불자들과 차를 마시며 종교간 대화는 물론 불자들과 함께 “기쁘다 구주 오셨네” 하고 절에서 부른 찬송도 아름다웠지. 불교인들의 너그러움과 우리의 진실함이 합하여 그때 교인들이 속이 후련해지는 자유함을 느꼈다고 소감을 말해준 하늘씨앗도 있었다. 대안교회를 섬기는 자세는 항상 발걸음은 교인들보다 반 발자욱이라도 뒤에 서는 것이 좋고, 노래는 항상 먼저 시작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 비로소 자유롭다. 자유! 그 빛나는 예수의 길! (끝)
언재(焉哉) 한성수(韓盛洙) Sungsoo Hans Hahn
1944년생 충청북도 제천
부산공업고등학교 기계공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리대 물리학과 졸업(1967년)
감리교 신학대학 학사편입 졸업(1979년)
Yale University Divinity School (STM 1985년)
Union Theological Seminary in New York (M.Div. 1996년)
서울 덕성여자 고등학교 교사 1년,
대성학원(물리), 종로학원(수학) 강사 10년
1985년 U.M.C. New York 연회에서 준회원 목사 안수
1996년 U.M.C. New York 연회에서 정회원 목사 안수
롱아일랜드 한인교회, 겨자씨교회,
Port Jefferson U.M.Church in Long Island, N.Y.
University Church in Madison, Wisconsin,
뉴욕한인교회 등에서 목회 20년
현재 순천하늘씨앗교회 담임목사(6년차)
번역서: 성경을 해방하라(John Spong)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Walter W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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