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에서 최대 강역을 통치하였던 발해의 지도이다.
한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발해의 역사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30년만에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국한 발해이다.
그 발해는 228년동이나 고구려의 땅보다 1.7배나 넓은 한민족 사상 최대의 강역을 통치하였다.
여러 세력이 왜곡 축소시켜온 발해역사는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남의 역사로 서서히 밀려나고 있다.
중국은 아예 발해를 당나라 지방정부였고 중국의 소수민족 말갈의 국가였다고 선언했다.
우리나라의 많은 역사학자까지도 발해를 중국의 소수민족인 말갈의 국가로 치부하고 있다.
1997년 12월 31일 고구려의 후예 대조영이 발해를 건국한지 1300년을 기념하여
뗏목 '발해 1300호'가 러시아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 내항을 웅지를 품고 출발했다.
대장 장철수, 선장 이덕영, 촬영 담당 이영호, 통신담당 이현규 이 네 사람은
1997년 이 모험을 준비했다. 1,300년 전 대조영이 건국한 해동성국 발해를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 뗏목은 겉모양부터 별난데다 앞돛에 새겨진 도깨비를 닮은 문양까지 낯선 것이어서
유난히 러시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그 문양은 도깨비가 아니라 치우(蚩尤) 장군의 얼굴이었다.
치우는 발해의 와당(기와) 유물에도 등장할 정도로 발해인들의 존경을 받았던 전설적 인물이다.
기자조선 전 신씨조선의 14대 왕으로 역사서 “한단고기” (桓檀古記)에 민족의 수호신으로 기록돼 있다. 겨울의 거친 동해바다를 뗏목에 의지해 간다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항해 5일째부터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 매서운 추위가 발해 1300호를 덮쳤다. 그러나 이들은 의연하게 악조건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모험은 계속됐다.
항해 12일째인 1월 11일엔 마침내 38선을 넘어 우리 해역으로 들어왔다. 그렇다고 끝은 아니었다.
발해 1300호는 울릉도를 지나 부산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우리 해역으로 들어왔다는 약간의 안도감도 잠시,
중대한 고비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동쪽으로 흐르는 동해의 강한 해류와 폭풍우가 발해 1300호를 계속해서
동쪽으로 밀어냈다. 덕분에 발해 1300호는 자꾸만 부산과는 정반대인
일본 오키제도 쪽으로 향했다.
발해 1300호와 장철수 대장에게 마지막 시련이 찾아왔다.
남아있는 항해기록과 장철수 대장의 일기에 따르면 당시 발해 1300호는 오키제도의 도고섬 근처에 도달했다. 성난 바람과 파도는 발해 1300호를 계속해서 도고섬 쪽으로 밀어붙였다. 한국 해경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일본 순시선은 궂은 날씨 속에 구조에 나섰다. 하지만 발해 1300호는 파도 속에 묻혀 사라졌다.
이튿날 아침까지 수색은 계속됐고, 바다에서 표류하던 두 명의 대원이 발견됐다.
그러나 한 명은 구조된 뒤 숨졌고, 다른 한 명 역시 그 사이 싸늘한 시신으로 변했다.
그렇게 장철수 대장과 발해 1300호는 1998년 1월 23일의 고비를 끝내 넘지 못하고 산화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점차 잊혀져 가고 있는 발해의 영광을 찾아나섰던 뗏목 1300호였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의 모습이다.
발해를 내외로 부흥시킨 3대 임금인 대흠무(大欽茂)가 수도를 이 상경용천부로 옮겼다.
도성은 당나라의 서울 장안성을 본뜬 것이 사실이나
그 건물은 고구려 건축이었음은 그 유적에서 출토된 기왓장의 문양이나
크기가 고구려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으로 미루어 추정할 수 있다.
분명 발해는 우리의 역사였다.
고구려를 망친 당나라는 유민의 반발을 막고자 왕족 한 사람을 세워
요동땅에 조선군왕(朝鮮郡王)이라는 괴뢰정권을 세웠다.
이 소고구려국에서 걸걸중상(乞乞仲象)이라는 고구려 유민(遺民)이
고구려 세력을 업고 반란, 당나라 진압군을 무찌르고 소고구려를 기반으로
발해국을 세우고 걸걸중상의 장자인 대조영(大祚榮)을 초대왕으로 추대했다.
이로 미루어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은 반론의 여지가 없다.
고구려가 멸망하고 많은 고구려 유민들은 당나라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야 했다.
걸걸중상과 아들 대조영도 말갈족과 함께 당나라에서 오랑캐로 여겨져 차별 받고 있었다.
말갈은 6-7세기경 만주 동북부 지역과 한반도 북부에 걸쳐 살더 여러 민족을 말한다.
고구려 때 말갈족은 대부문 고구려에 복속되어 간접 지배를 받았다.
그래서 말갈족의 대표 걸사비우가 죽은 뒤 대조영을 따라 발해의 건국에 참여하게 된다.
대조영은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가 고구려 옛 땅인 동모산에 자리를 잡고 도읍했다.
대조영이 동모산을 도읍으로 삼은 이유는 적을 방어하기 유리한 지형이였기 때문이다.
698년 대조영은 국호를 진으로 하고 즉위하였다.
당나라도 713년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이라는 칭호를 주었고 이때 부터 나라 이름은 발해로 바뀌었다.
발해는 소수의 고구려인이 다수의 말갈인을 다스리는 나라였다.
고구려인이 40% 말갈인이 60%정도라고 예측하고 있다.
2002년부터 중국은 '동북변강역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이라는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를 줄여서 동북공정이라고 하는데 중국은 만주 지역이였던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역사를
발굴 정리하여 중국의 역사에 편입시키려는 것이다.
즉 고구려는 중국내 소수 민족이 세운 지방 정권이라고하며 발해는 당나라가 대조영을 군왕으로
임명한 말갈족으로 이루어진 지방 정권이라고 얘기하고 있다.
동북공정은 중국영토 안에서 이루어진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만들기 위함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해인들이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느냐 이다.
발해의 문왕은 외국에 보내는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 왕 이라고 했다.
여기서 고려는 고구려를 말한다.
일본이 발해에 보낸 국서에도 발해 왕을 고려왕이라고 부르고 있다.
<속일본기>라는 일본 역사책에는 발해에서 간 사신을 고려 사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발해왕들은 스스로 자신들을 고구려의 계승자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외국에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발해는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으며 돌궐과 신라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맺었다.
대조영이 동모산에 도읍한 후 나라의 힘이 강해지자 무왕은 수도를 상경으로 옮겼다.
여러 번 수도를 옮겼지만 상경은 가장 오랫동안 발해의 수도였고 멸망 때 까지 수도로 남는다.
발해는 대조영이 건국한 후 150년 뒤인 9세기 초에 전성기를 맞이 한다.
발해는 고구려 문화와 당나라 문화를 받아들여 독특한 문화를 발달 시켰다.
특히 선왕 때 당나라는 발해를 '바다 동쪽의 번영한 나라'라는 뜻으로 '해동성국'이라고 불렀다.
발해는 유물이 많지 않아 발해의 역사를 알기는 어려움이 많다.
문왕의 둘째 정혜공주와 넷째 정효공주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여러 가지 유물과 벽화
비문이 발견되어 발해를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문왕은 두 공주가 어린 나이에 죽자 슬픔에 정사를 돌보지 못할 정도 였다.
두 공주의 무덤을 살펴 보면 발해의 한문 수준은 상당히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불교을 이어받아 불교을 숭상했다.
불상, 석등, 연꽃무늬 기와를 보면 불교가 널리 퍼졌음을 알 수 있다.
발해의 신분은 성이 있고 없음으로 구분 되었다.
지배층의 왕족은 대조영의 후존인 대씨였다.
귀족은 고씨, 장씨, 양씨, 이씨의 성을 가졌다.
성을 가진 고구려 유민과 걸사비우 무리가 지배층이였다.
성이 없는 말갈인들이 평민, 노비, 부곡민으로 피지배층을 형성했다.
부곡민은 평민보다는 낮고 노비 보다는 높은 신분으로 개인에게 매여 있기는 하지만
주인이 풀어주고 평민이 되기도 했다.
대조영이 발해를 세운지 230년 동안 발해는 발전을 거듭했으나 926년 멸망했다.
거란은 몽골의 초원 지대에서 일어나 갈수록 강성해 졌으며 발해를 위협했다.
거란이 수도 상경 용천부를 포위하자 발해의 왕 대인선은 며 칠 버티지 못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발해는 강력한 국가 였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갑작스럽게 역사에서 사라진다.
첫댓글 역사란?
어제 강의를 들으면서 곰곰히 상념하게 되었습니다.
발해가 멸망하지 않았으면,,,,.
우리 대한민국은 만주벌판,
아시아 대륙의 넓은 국토를 가진 강대국이었을거라고,
깊게 숙고하는 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