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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그 옛날 경강(京江)의 첫 나루인 광나루에는 천호대교와 광진교가 나란히 놓여 있다.
한양도성을 나온 나그네와 물류가 강원도 충청도로 나가는데 꼭 건너야 하는 광나루다.
일제 때 광나루에는 경강에서 세번째 다리 광진교가 놓였고 그후에 들어선 천호대교와 함께 물류를 실어나르는 기능을 대신한다.
그 광나루의 어제와 오늘을 정리한 내용을 '서울 정도 600년사'에서 옮긴다.
광진(廣津), 즉 광나루는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나가는 첫번째의 나루터이다.
조선왕조가 성립되고, 이성계를 비롯한 막료들이 한양으로 천도를 하면서 가장 역점을 두었던 것은 수리와 조운시설이었다.
옛부터 한강을 차지한 집단이 한반도의 중앙을 차지할 수 있었다는 말이 나올 만큼 한강은 한반도의 허리요,
한강의 나루터는 한양의 심장이었다.봉이 김선달이 대동강의 물을 팔아먹을 것이 아니라 한강의 물을 팔아먹었다면 더 큰 인물이 됐을지도 모를 일인데, 그는 평양기생이 좋아 평양에 안주했기 때문에 한강에 착안을 못했다.
지금 광나루에 나가 보면, 한강에서도 가장 구식이고 좁아서 쓸모가 없는 광진교와, 그래도 옛 냄새를 풍기는 버드나무집이 남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옛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달라지고 말았다.
광나루는 한강의 남북을 연결시켜 주는 길목으로 일찍이 상고(上古) 시대부터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다.
신석기(新石器) 시대에는 북쪽에서 이주해 온 민족의 일부가 지금의 강동구 암사동 일대에 수혈식(竪穴式) 주거시설을 만들고
살았다. 광나루 건너편 암사동의 신석기 시대의 유적지가 바로 이것이다.
암사동의 유적은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한강변의 흙이 씻겨 내려가면서 나타났고, 1970년대와 1980년대에 서울대학교에서
이곳을 여러 해 동안 발굴하면서 많은 수혈식 움집 터가 나타났다. 또 여기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됐는데, 신석기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유물로써 수렵생활을 나타내는 동물을 잡아먹기 위한 화살촉이라든가,
물고기를 잡기 위한 낚시바늘이나 그물에 달았던 그물추 같은 것이 나타나기도 했다.
고구려에서 갈라져 따로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온조왕은 처음에는 지금의 서울지방인 하북에 위례성을 쌓았다가
그후 지금의 강동구 천호동 일대인 하남으로 위례성을 옮기고 본격적인 국가활동을 시작했다.
더구나 하남지방은 토지가 비옥하고 교통이 편리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당시에는 민족의 이동이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광나루의 교통로의 역할을 매우 컸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백제가 나라의 기틀을 잡고 북방민족과 대치하면서부터 광나루는 군사작전의 요충지가 됐고 또한 선진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외교 문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고구려와 백제가 대립하여 특히 장수왕은 남하정책을 펴나가면서 백제로 들어가는 길목인 이 곳으로 군대를 대거 투입하기도 했다. 서기 396년에는 고구려의 광개토 대왕이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광나루를 건너 백제 도성까지 육박했고,
서기 475년에는 장수왕이 3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루를 건너 하남 위례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사살하니 백제는 한강 유역을 버리고 금강 유역을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어 나갔다.
신라와 고구려가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이 된 곳도 바로 광나루이다.
신라 진흥왕 때, 이 지역을 자치하고 한산주를 설치하면서 이 곳은 신라의 대북방 진출의 교두보 역할을 했다.
고구려의 온달 장군이 전사한 곳도 바로 광나루의 뒷산인 아차산성에서였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온달 장군의 얘기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온달은 고구려 평강왕 때의 사람으로 그 용모가 기이하게 생겨 우스우나 마음만은 착하였다.
그는 집이 몹시 가난하므로 항상 걸식하여 어머니를 봉양하였고 다 떨어진 옷과 낡은 신발을 신고 시정으로 왕래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를 보고 바보 온달이라고 하였다.
이때 평강왕의 어린 공주가 울기를 잘하므로 왕은 희롱하는 말로,
"또 공주가 울고 있느냐? 너는 울기만 하여 내 귀를 요란스럽게 하니, 커서도 사대부의 아내가 될 수는 없으리라,
꼭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겠다." 고 했다.
평강공주가 자라서 16세가 됐을 때, 왕은 공주를 상부의 고씨에게 시집 보내려 했는데 공주는 대답하기를,
"아바마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꼭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 하옵더니
지금 무슨 까닭으로 먼저 하신 말씀을 고치시나이까. 필부도 오히려 식언을 하려고 아니하옵는데,
황차 지존하신 분의 말씀으로 어찌 그러할 수가 있사오니까." 하며 대항하였다.
공주는, "아바마마께서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을 어찌 희롱하는 말이라 하여 일조일석에 고치시옵니까." 하며
온달에게 시집가기를 고집하였다.공주는 귀중한 팔찌 열 개를 팔목에 차고 궁궐을 나와 온달의 집으로 향했다.
온달의 늙은 어머니는 공주를 보고 말하기를,
"내 아들은 가난하고 누추한 아이요, 귀인이 가까이 할 바가 못 됩니다.
지금 그대의 향기로 보나 그 부드러운 손으로 보나 천하의 귀인 같은데 누구의 댁에서 오셨는지요.
내 아들은 굶주림을 참지 못하여 느릅나무 껍질을 벗기려고 산으로 갔습니다. 부디 댁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공주는 그를 찾아다니다가 산에서 내려오는 온달을 만났다.
"소녀는 아바마마의 뜻대로 온달님을 지아비로 모시고자 찾아 다녔습니다."
"이곳은 어린 여자가 다닐 곳이 못 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사람이 아니고 귀신일 것이다.
내게 가까이 오지 말라!" 하며 온달은 공주를 쫓아보냈다.
그러나 공주는 굽히지 않고 그들 모자를 찾아가 설득했다.
"옛 사람의 말에 한 말의 곡식이라도 찧을 수가 있고, 한 자의 베라도 꿰맬 수가 있다면 오히려 족하다 하였습니다.
진실로 한마음 한 뜻이라면 기필코 부귀를 누려야만 같이 살 수 있겠습니까."
온달은 공주를 맞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후 온달은 공주의 내조를 받으며 왕의 군사를 따라 배산의 들에서 적을 맞아 싸웠는데
온달은 선봉이 되어 공을 세웠고, 영양왕이 즉위하자 왕에게 아뢰어
한강 이북의 땅을 회복하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신라로 쳐들어갔다.
온달은 기필코 문경과 조령의 서북 땅을 회복하기 전에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싸움터로 나갔다.
온달은 신라군과 아단성, 즉 아차성 밑에서 싸우다가 적의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그런데 출상을 하려고 하니 관이 움직이질 않았다.
이에 공주가 아단성에 이르러 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장군님! 이제 죽고 사는 것은 결판이 났사오니 마음 놓고 돌아갑시다."
그러자 비로소 관이 움직여 출상할 수가 있었다.
문경과 조령을 회복하겠다던 온달은 광나루에 이르러 이 곳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다.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곳에 있다고 해서 얻어진 이름인데
[동국여지승람] <한성부 산천조>에 보면 한강물이 광주 지경에 와서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된다고 하여 광진의 위치가 광주 땅 도미진의 하류, 삼전도의 상류임을 말하고 있다.
또 <경기도 양주목(楊州牧)조>에 보면, 광진의 또 다른 이름이 양진(楊津)이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양진, 즉 버드나무 나루의 이름은 강 기슭에 버드나무가 많이 있었던 데서 연유한 것이다.
지금도 광진교 북단에는 버드나무가 늘어선 길숲이 있고 그 숲 속에 장어구이로 유명한 버드나무집이 있다.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광진은 한강 이북과 중부지방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로써 큰 역할을 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격하러 안동지방으로 출정할 때 이곳을 도하하여 문경 새재를 넘기도 했다.
광나루의 산수 풍경은 매우 아름다웠다.
팔당에서 들어오는 물이 동호(東湖), 즉 지금의 옥수동에서 돌아서 나가는데,
들어오는 물이 잘 보이고 나가는 물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바로 명당이라고 했다.
세종 때의 문인 서거정(徐居正)은 이곳에서 본 강 좌우의 경치를 시 <廣津村墅晩眺詩>로 남겼다.
천지간의 좋은 풍경 강호상에 들어오는데
천리나 넓은 안개가 수묵화를 펼쳐놓았구나.
갈매기 날아가는데 수면이 밝았다 어두웠다
푸른 하늘 저 끝엔 산이 보이다 말다 하네.
고환의 소나무 국화는 옛날 선비 서성대던 길이요
몽리(蒙里)의 뽕나무 삼밭은 오랜 옛날의 한마을이라네.
한 걸음 두 걸음 보고 또 보노라니 해 벌써 서산에 지려는데
비 지난 뒤의 꽃기운이 젖처럼 윤기 흐르누나.
광나루에는 또 조선왕조에 들어서면서 고려 말의 많은 현신들이 은거해 왔다.
이같은 사실은 고덕동 암사동 둔촌동 등 광주군 일대에 걸쳐 그 자취를 엿볼 수가 있다.
고덕동의 동명이 고려 말 이양중(李養中)의 높은 덕을 기리는 데서 유래했다는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고려 말에 벼슬이 형조우참의에 이르렀으나 이성계의 조선 개국을 반대하여
이곳에 와서 은거하며 절개를 지키다가 한때 귀양살이를 했다.
태종은 이양중과는 옛 친구로서 즉위와 함께 그를 검교한성좌윤(檢校漢城左尹)으로
승진하였으나 그는 쉽게 응하지 않았다.
한때는 태종이 친히 거둥하여 이곳에 나가 이양중을 찾으니 그는 평민의 복장으로
거문고를 가지고 태종을 맞이하여 병술을 기울이며 서로 즐겼으나 벼슬은 끝내 사양하였다.
그의 이러한 절개를 기려 그가 죽은 후에는 인근 암사동에 있던 구암서원(龜岩書院)에 이집(李集) 등과 함께 제형되었다.
또 이양중 뿐만 아니라 그의 아우 이양몽(李養蒙) 역시 고려 말에 대신 판도판서를
지내다가 형과 함께 숨어 살았는데 태종이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 원적산(圓寂山)에 들어가 숨어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이양중 일가는 높은 절개를 지니고 있어 주위로부터 덕이 높은 인물들로 추앙을 받았고
그 사실이 동명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광나루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한양이 도읍지가 되면서 더욱 붐비기 시작했다.
도성민은 물론 광주를 비롯한 여주 충주 등지의 백성들이 도성을 드나들기 위해선 이 나루터를 건너야 했던 것이다.
조선조 시대 중엽까지만 해도 교통은 육로보다 수로가 더 편리했다.
각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도로를 넓게 만들지 않았는데 그것은 적이 쉽게 쳐들어올 수 없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충주를 비롯해서 강원동 춘천 인제 화천까지 오직 수로만이 편리한 수단이어서
이쪽에서 올라오는 배는 광진에서 꼭 쉬어가게 돼 있었다.
이들은 광진에서 배를 멈추고 광진참을 들었다.
그래서 광진에는 객주집이 들어서고 기생들이 모여들어 오가는 길손의 마음을 낚기도 했다.
자주 광나루를 지나며 주위의 산수 풍경을 사랑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어하던
서거정은 만년에 그의 소원이 이루어져 이 광나루 마을 조용한 곳에 집을 마련하고
농민 어민들과 이웃하여 세정을 멀리하기도 했다.
또한 동방주자(東方朱子)라고 일컬었던 퇴계(退溪) 이황(李潢)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낙향할 때,
이 광나루에서 배를 띄우고 떠났는데 이때 서울 장안이 사흘 동안 비었다고 한다.
이유인즉, 퇴계 선생이 서울을 떠난다고 하니까 장안의 고관 선비들이 그를 전송하며
떠나감을 아쉬워했으며 한강변에 있는 제천정(濟天亭)에서 주연을 베풀었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 퇴계 선생이 배에 오르자 선비들도 배를 띄워 멀리 팔당 근처까지 그의 뒤를 따랐다고 한다.
광나루에 광진교가 세워짐에 따라 광나루의 나루터로서의 기능은 쇠퇴해 갔다.
광진교는 1934년 8월에 착공, 2년 여의 공사 끝에 1936년 10월 준공됐다.
이 철교는 한강에 두 번째로 놓인 다리였다.
지금은 그 많은 한강 다리 가운데서 가장 낡고 오래 된 철교로서 1.5톤 이하의 소형차량과 보행자만 통행을 시키고 있다.
또한 한때 시민의 큰 위락시설이던 광나루 수영장도 강물의 오염에 따라 폐쇄됐다.
이제 광나루에는 옛날 모습이라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 오직 팔당으로부터 들어와 동호로 굽이쳐 흐르는 강물이 있을 뿐이고 그 강물을 바라보는 버드나무집에서의 경관이 남아 있을 뿐이다.
광나루역 2번 출구로 나가 강변을 따라난 낭만의 길을 15분 정도 걸어가다 보면 광진정보도서관을 만난다.
그 광진정보도서관을 맞은 편에는 광나루 터임을 밝혀주는 '광나루 터' 표석을 서 있다.
광나루는 서울시 광진구 광장동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양진, 광장, 광진, 광진도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한강의 중하류에 위치한 광나루는 교통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광나루는 부산으로 향하는 도로의 길목에 위치했다.
광나루는 서울 주변의 중요한 나루터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백제가 북방 민족과 대치하면서 광나루는 군사 작전의 요충지였고
선진 문화를 수용하기 위한 외교-문화의 통로였다.
또한 신라가 발전하면서 불교문화가 이 나루터를 통해 수용되었고 철기문화가 이 나루를 통해 전해졌다.
조선시대에는 광나루에 관리를 두어 강원도, 충청도, 경기도 등지에서 서울로 운송되는 세곡을 관리-감독했다.
한양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문화가 집결되면서 광나루를 오가는 행인들도 많아졌다.
그에 대해 태종 14년(1414)에 관리를 통해 광나루의 관리, 범죄를 저지르고 도피하는 자,
반역을 도모하는 자 등의 출입을 감시하게 했다.
그 당시에 광나루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의 연결 지점일 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강폭이 넓고 물이 많아 지속적인 관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광나루를 담당하는 관리의 임무는 많아졌다.
이에 대해 세종 때 개설된 삼전도를 계기로 세조는 광나루의 업무를 삼전도에 분할했다.
삼전도의 개설로 광나루의 기능은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일반인의 왕래는 계속되었다.
광나루에는 4척의 나룻배와 사공들이 있었고 사공들은 국가에서 땅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정치질서가 문란해지면서 양반들이 토지와 배를 빼앗아 광나루는 점점 부실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유지가 되었으나 1936년 광진교가 설치되면서 광나루는 기능을 잃었다.
현재는 광진교, 천호대교가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주므로 나루터의 기능은 상실하였으나
3번국도와 강변도로가 지나고 있어 여전히 교통이 좋은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