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윈 말 타고 삼전도 가는 길에
가을바람은 갓을 기울게 하고,
맑은 강엔 나는 기러기 잠겨 있는데,
지는 해가 돌아오는 까마귀를 보내고 있구나.
-서거정
니마삼전도(羸馬三田渡)
서풍취모사(西風吹帽斜)
징강함거안(澄江涵去雁)
낙일송환아(落日送還鴉) ……
-사가정(四佳亭) 시집 '삼전도도중(三田渡途中)'
가을은 풍경을 더 아름답게 그린다. 그래서, 강가의 풍경은 가을 물이 담뿍 들수록 좋다.
석양 무렵에 몽촌으로 향하는 삼밭나루의 길에서 서거정도 가을이 그린 강가의 경치에 취해 버리고 말았다.
한강 풍경을 시로 읊은 서거정
조선 초의 문신이며 학자인 서거정(徐居正:1404∼1473)은 강을 그렇게나 좋아했다.
특히, 가을의 강을. 그래서 그는 가을이면 강가를 잘 찾았다.
그는 벼슬에 있을 때도 아차산 아래 광나루에 농가를 마련하고, 그 남쪽 한강변의 풍경을 즐기며 시를 썼다.
말년에는 아예 한강가에 머물러 여생을 보냈다. 한강의 큰 홍수가 있던 해에 강가에 있던 그의 농가가 그만 물에 떠내려갔다.
그는 남은 가구를 소에 싣고 강 남쪽의 제부촌(諸富村)으로 잠시 옮겼다. 그러나, 강가의 풍류를 잊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강변 마을인 몽촌(夢村)으로 식구들을 옮겨 놓고 나랏일을 보던 중에도 틈틈이 자주 왕래했다.
건곤(乾坤)이 갈리어 한강물 이루어
천리이듯 넓어 한 폭의 수묵화.
해오라기 나는 곳엔 물빛이 밝았다 어두웠다
푸른 하늘 저 끝엔 산이 보이다 말다 하누나.……
건곤납이일강호(乾坤納二一江湖)
천리혼성수묵도(千里渾成水墨圖)
백조거변수명멸(白鳥去邊水明滅)
청천진처산유무(靑天盡處山有無)……
-사가정 시집 '광진촌서만조(廣津村墅晩眺)'
서거정은 강가의 집을 그리는 마음을 이렇게 시심(詩心)으로 달래곤 했다.
그는 몽촌에 오면 머리를 식혔다.
어지럽고 복잡한 세상을 잠시 잊고 한가로운 농촌 생활로 돌아와 시상(詩想)에 잠겼다.
달 있는 밤이면 마을 뒤 '망월봉(望月峰)'이라는 낮은 봉우리에 올라 달을 보며 노래를 읊기도 했다.
망월봉은 지금의 올림픽 공원 안 몽촌토성 옆에 있는 산이다.
서거정이 묵으면서 시를 읊었다는 몽촌은 '꿈말'이라 불리던 마을. 지금은 강동구 방이동 일부가 됐다.
^한강물이 유유히 흘렀던 몽촌
서거정이 읊은 시는 물 냄새를 물씬 풍긴다.
'강물', '수묵화', '해오라기', '물빛', '맑은 강' 등 '강(江)'에 관한 낱말들은 우리 머리 속에 시원한 강바람을 가득 안긴다.
지금의 강동구 방이동이 몽촌이라? 이 곳으로 한강이 지났다?
이런 곳에서 '한강의 시'가 나왔다? 지금의 상황으론 도무지 그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서울의 기적을 낳았다는 한강(漢江).
한강은 한자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가끔 큰물을 이루고 그 물길을 확 바꾸어 버리기도 하였다.
집 앞으로 흘러가다가 집 뒤로도 흘러가 보았다.
어제의 강북(江北)을 오늘의 강남(江南)으로 만들고, 작년의 물 속을 올해의 뭍으로 만들곤 했다.
몸집을 폈다 오무리기도 하면서 뭍과 물을 번갈아 연출해 냈다. 한강에서 그런 변화를 자주 보인 곳이 지금의 잠실 근처와 여의도 일대이다.
이러한 사실은 옛 지도들에 잘 나타난다.
물론, 이런 외도(外道)는 비록 한강만이 아니었다. 낙동강도 그랬고, 금강도 그랬다.
사람들은 그러한 강의 외도를 막아 보자 했다. 그래서, 강 양쪽에 둑을 쌓아 강줄기의 정도(正道)를 그려 주었다.
지금의 잠실역이나 신천역 주변 일대는 지금의 여의도처럼 하나의 섬이었다.
이름은 '물 가운데의 섬'이라는 뜻의 '하중도(河中島)'.
서울 남동쪽의 한강물의 본줄기는 옛날에는 잠실벌의 남쪽으로 돌아 흘렀고,
그 북쪽, 지금의 뚝섬 남쪽으로는 '새내' 즉 '신천('新川)'이라는 이름의 샛강이 흘렀다.
따라서, 옛날의 한강 강줄기는 지금의 올림픽공원 자리의 몽촌으로도 지났다.
지금의 위치로 보면 한강 본줄기는 올림픽대교 남단에서 강동 세무서 앞과 잠실 시영아파트, 진주아파트 등을 지난다.
거기서 잠실 전신전화국을 거쳐 석촌호수를 지나고 종합운동장 옆을 돌아 청담교와 탄천 하구를 거쳐 한강 본류로 흘러들었다.
그렇다면, 이렇게 흘렀던 한강이 왜 지금의 위치로 이사를 갔을까? 장마 때문이었을까?
70년대 초 이 일대를 '영동(永東)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 단지를 만들 때,
잠실 남쪽의 본래의 한강을 메워 없애고, 그 북쪽의 샛강으로 물이 흐르도록 했다.
결국 한강은 사람들이 그려 놓은 선을 따라 지금과 같이 흐르게 되었다.
강남 개발에 박차를 가했던 그 당시, 시(市)에서는 잠실 남쪽의 공유 수면 매립 공사에 착수,
1970년 4월엔 잠실 남쪽으로 흐르는 한강 물길을 막는 데 성공했다.
한강의 물이 지금처럼 잠실 북쪽으로만 흐르도록 한 것이다.
이로써 옛날의 작은 내에 불과했던 신천(新川)은 한강의 새 물길로 승격(?)하고,
갈대들이 우거졌던 모랫벌인 하중도는 지금의 여의도와 같이 섬이 아닌 육지로 되어 강남의 노른자위 땅으로 변해 버렸다.
그러나, 난 싫다, 난 옛날이 좋다, ……당시에 한강의 한 도막이 반기(反旗)를 들었다.
바로 지금의 석촌호(石村湖).
한강 물길을 바꾸려 지금의 뚝섬 바로 남쪽으로 물을 보내자, 석촌호 부분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이 그대로 남았다.
계속 물이 빠지지 않자, 시에서도 그냥 그 곳을 호수를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옛 한강의 고집스런 몸 토막 석촌호는 이래서 지금도 이렇게 외쳐 댄다.
'한강이 옛날에 이 곳을 지났노라, 내가 한강 본줄기의 한 도막이다.'
석촌호의 동호(東湖)와 서호(西湖)의 소리없는 외침이다.
지금의 잠실 남쪽, 송파, 석촌 일대가 옛날의 강가였음은 옛 지도에 잘 나타난다. 또 행정동명의 변화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엔 지금의 잠실동과 신천동은 경기도 양주군 고양주면(古陽州面)의 일부였고, 일제 때는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이었다.
1955년에는 4월 18일, 동제(洞制) 실시에 따라 신천동, 잠실동, 지금의 광진구에 있는 자양동을 합하여
'신천(新川)'과 '자양(紫陽)'에서 한 글자씩 따 '신양동(新陽洞)'이란 행정동을 만들었다.
대개 지금의 잠실 일대를 옛날의 광주(廣州) 땅으로 알지만, 천만이 말씀이다.
강북(江北)이었던 이 곳이 옛날에 광주군이 될 리가 없다. 양주(楊洲) 땅일 때도 있었고, 고양(高陽) 땅일 때도 있었다.
한강의 큰 물줄기로 변해 버린 그 옛날의 '새내'는 원래 '샛강' 즉 '사이의 강'의 뜻이다.
이것이 엉뚱하게 '새로운 내'의 뜻으로 뜻옮김되어 한자의 '신천(新川)'이 된다.
지금의 지하철 성내역 부근의 동이름 '신천동(新川洞)'도 이 내가 낳은 이름이다.
^뱃사람들 여흥으로 송파 산대놀이가 태어나고
'송파 산대놀이'도 이 일대 한강이 낳은 부산물(?)이다.
서울 송파구 일대 강가에서 행해졌던 이 민속놀이는 뱃사람들로부터 전수된 것이다.
강원도, 충청도 등에서 한강 물줄기를 타고 뗏목 상인들이 물건을 가득 싣고 내려온다. 저걸 사들여라, 장사해 돈을 벌자,……
"떼꾼 양반. 먼 길 오시느라 수고했시다. …암 그럼, 물건값이야 든든히 쳐 드리지."
송파 강가의 경강상(京江商)들이 달려들어 낚아채듯 물건을 사들였다.
강가에 그득 쌓인 이 물건들, 어떻게 다 팔아 돈을 버나?
손님을 끌어 모으자, 놀이판을 벌여서라도 사람들을 모으자, 이래서, 서울 '애오개 산대놀이' 등을 모방하여 놀이를 개발했다.
송파 산대놀이가 벌어지는 날, 도성 사람들은 이 곳까지 와서 구경을 왔다. 물건들도 듬뿍 사 갔다.
좋은 구경도 하고, 물건도 싸게 사고……. 역시 물건 파는 데는 '행사'가 제일이야.
산대놀이가 행해졌던 송파, 현재 잠실 근처, 석촌호 주변에 조성된 '송파나루공원'에서는 지금도 자주 전통 민속 축제가 벌어진다. 역시 이 일대는 '놀이 문화'와 특별한 인연을 가지고 있나 보다.
지금 송파 지역, 몽촌 지역에는 그 옛날처럼 한강은 흐르지 않는다. 그러나, 떠들썩한 석촌호 근처의 여흥(餘興)이 있다.
이 곳 강가의 민중놀이 전통은 이처럼 제법 끈질김이 있어 좋다.
이 바람에 석촌호의 두 호수는 지금도 아마 그 옛날 한강의 뱃사공 추억이 더욱 새로울 거라.
<이 글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장의 '서거정이 글로 그린 한강의 가을정취'를 옮겨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