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의도(汝矣島)와 서강(西江) 사이의 한강줄기 가운데 암석과 모래로 덮어진 섬.
서호팔경(西湖八景)의 하나였던 율도명사(栗島明沙)의 명물인 밤섬.
밤섬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마포언덕에서 바라보면 마치 밤알을 까놓은 것 같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역사서인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攷)>에 따르면 밤섬은 '가산(駕山)' '율주(栗洲)'라고도 쓰였다.
그러나 이 밤섬은 조선시대 왕실에서 지정한 뽕나무재배단지였다.

밤섬이 1968년 2월 한강개발의 명목으로 폭파되었다.
밤섬을 폭파하게 된 것은 여의도에 제방을 만듦에 따라 한강물의 흐름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
첫째 목적이었고 다음으로는 폭파 부산물인 돌을 제방공사에 쓰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여의도와 밤섬은 현재와 같이 500m 이상의 거리를 두게 되었다.
폭파 공사로 밤섬은 중심부가 파헤쳐지고 9개의 작은 섬으로 나누어졌다.
밤섬은 폭파된 이후 수 십년이 흐르는 동안 형태의 변화를 겪게 된다.
상류 쪽 작은 섬에 퇴적물이 쌓이면서 점차 커져 크기가 비슷한 두 대의 섬이 되었다.

밤섬에 관련된 과거의 기록을 살펴보면 1451년 문종 1년에 밤섬(栗島) 안에서는 백성이 개간하여 경작하는 것을 금하고
오직 뽕나무만 심어서 그것이 자라거든 섬 안의 심을 만한 곳을 가려서옮겨 심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1475년 성종 6년에는 '연희궁(衍禧宮) 아차산(峨嵯山) 낙천정(樂天亭)의 세 잠실(蠶室)에 심은 뽕나무 묘목을
제사(諸司)로 하여금 나누어 받아서 율도(栗島)에 옮겨 심게 하고 옮겨 심은 뒤에는 제사(諸司)에서 스스로
뽕나무 묘목을 준비하여 해마다 심게 하며 그 숫자를 회계(會計)에 기록하여 해마다 상례(常例)로 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섬 안에 사는 사포서(司圃署) 봉상시(奉常寺) 제용감(濟用監)의 노예로 하여금 나누어 받아서 지키게 하소서.
그리고 만일 마음을 쓰지 아니하여 말라 죽게 하면 그 사(司)의 관리를 아울러 죄주고 또 병조(兵曹)로 하여금 4산(四山)의
예(例)에 의하여 간수하는 군인 3명을 정하고 뽕나무를 베는 자도 소나무를 베는 예에 의하여 과죄(科罪)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 외 다른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 세조 때 성현이 지은 <용재총화> 권 10에 "밤섬에는 많은 뽕나무를 심어서 해마다 누에철이
되면 잎을 따서 누에를 쳤다. 옛날에 서울 장안에 서너 대감집에서만 누에를 쳤지만 지금에 와서는 대감집뿐 아니라
가난한 집에서도 누에를 치지 않는 집이 없기에 뽕잎 값이 뛰어오르고 비싸서 뽕나무를 심어 이득을 보는 사람이 많았다고 했다.

「명조실록」11년 4월에 나타난 밤섬주민의 생활상을 보면 수도 서울에 있으면서도 이곳의 한강물이 워낙 깨끗하여
이주전까지 식수로 직접 마셨다고 하며, 외부로의 왕래가 뜸해 남의 이목을 덜 의식한 듯 섬주민의 생활방식이
대체로 자유분망하여,남녀가 서로 업고 업히고 정답게 강을 건너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않아 동성동본이고 반상이고
따지지 않고 의논 맞춰 살면서 조금도 괴이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하며, 마씨, 인씨, 석씨, 선씨 등 희귀성을 가진 대가족들이
특히 많이 집단거주하면서 은행나무 고목(당산목)과 부군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였다고 한다.
「한국지명총란」에는 "순조때까지는 뽕나무를 심었고 고려때에는 죄인을 귀양보내던 섬으로 이용되었으며 도선장으로
백사장을 건너 인천으로 가는 간로(間路)가 된다」고 설명되고 있다. 이곳에는 부군신을 모시는 사당을 만들어 17대를 살아온
62가구 443명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 어업과 도선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5백여년전부터 배를 만드는 기술자들이 이곳에 정착, 조선업에 종사하기도 했었다. 이곳 주민들은 馬씨, 判씨, 石씨, 宣씨등 희성의 소유자들로 한강물을 그대로 마시며
거의 원시공동사회체제속에서 생활을 영위했다.「대동지지」에 "밤섬은 서강 남쪽에 있는 한 섬인데
섬전체가 수리(里)의 모래로 되어있으며 주민들은 부유하고 매우 번창한 편이다"라고 하였다.
당시만 해도 밤섬은 한강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십리 백사장과 기암괴석의 절경이 아름다운 섬이었고,
한강에 물이 적을 때는 여의도와 백사장으로 연결돼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하니 상상만 해도 설레이는 풍경이다.

또한 정조 때 한성부의 역사와 모습을 기록한 <한역지략>에 "마포남쪽에 있는 밤섬은 약초모종을 내고 뽕나무를 재배하는
곳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후기까지도 이곳에는 뽕나무밭과 약초밭이 계속 남아 있었던 같다.
오래 전만해도 밤섬은 한강의 해금강이라고 불릴 정도로 수십리 백사장과 기암괴석의 절경이 아름다운 섬이었고,
한강에 물이 적을 때는 여의도와 백사장으로 연결돼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뽕나무 재배단지였던 밤섬에는 이전까지 78가구 6백여명의 주민이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지금 밤섬에는 뽕나무가 곳곳에서 자라고 있다.
밤섬을 떠난 옛 주민들이 자신들의 고향을 기억하기 위해서 뽕나무를 심어달라고 요청해서
특별히 심은 뽕나무이다. 그 밤섬 뽕나무는 옛 주민들의 가슴에 가득한 추억을 기리는 상징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다.

밤섬은 1968녀 2월 10일 여의도개발의 일환으로 폭파되어 당시 62가구 443명의 원주민은 마포구 창전동과 우산 산중턱으로
집단이주하였으며, 밤섬은 시간이 지나면서 한강에 의하여 퇴적물이 쌓이고 억새, 갯버들 등 친수식물이 자생하였다.
1988년 4월 LG그룹에서 2,970만 원을 들여 갈대·갯버들·버들강아지·찔레 등 5만 8000포기의 식물을 심었다.
1999년 8월 10일에는 자연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되었다. 이에 따라 섬 출입이 전면 통제되자
여의도 순복음교회 앞 한강변에 철새를 조망하기 위한 한강조망대를 조성하였다.
천연기념물인 원앙 1종과 밤섬 번식조류인 흰빰검둥오리, 개개비, 해오라기, 꼬마물떼새 등이 살고 있다.
철새 5,000여 마리가 찾아온다.
식물은 버드나무·갯버들·용버들·물억새 등 108종, 어류는 붕어·잉어·뱀장어·누치·쏘가리 등 28종이 서식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도심속의 ‘철새도래지’로 부각되어 1999년 8월 10일 서울시가 「생태계보전지역」으로
지정·고시하여 특별 보전해오고 있다.
2012년 6월에는 람사르 습지로 지정되었다.
도시 한가운데 자연 그대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습지 밤섬이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생태공원으로 변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