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1676~1759)이 1740년에 난지도(蘭芝島) 일대의 모습을 그린 <금성평사(錦城平沙)>이다.
<금성평사(錦城平莎)>는 겸재 정선이 금성촌(현재의 성산동)과 난지도 모래벌을 양천현아 동쪽 망호정(望湖亭) 부근에서
바라보고 사생한 것이라 한다. 금성산 일대와 그에 연결된 와우산 남산 선유봉 증미산 탑산 등을 원경으로 처리하여
난지도의 모래벌을 화면 중앙에 펼쳐놓았다. 원래 난지도는 모래가 아름다운 십리 백사장으로 매우 낭만적인 곳이었다고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당시인 영조 16년(1740)에는 난지도가 강 가운데로 깊숙이 밀고 들어온 모래섬들의 집합체였던 모양이다.
친구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은 낚시꾼이 귀가 중 금성촌 쪽을 돌아보는 겸재 정선의 그림 <금성평사(錦城平莎)>에
시(詩) 금성평사(錦城平沙)를 붙였다. 황혼에 잠긴 망호정(望湖亭)주변의 울창한 버들숲이 참으로 환상적이다.
금성평사(錦城平沙)
- 이병연(李秉淵)-
난간에 스며드는 저녁 빛은(欄頭來晩色)
십리 석양호에 이어져 있어(十里夕陽湖)
붓을 들고 잠시 생각하다가(拈筆沈吟久)
평사낙안도를 그려냈습니다.(平沙落雁圖)
금성산이 난지도 뒤 모래내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금성평사’라 했다고 한다.
그 금성산이 있던 자리가 지금의 성산동이다.
상암 월드컵경기장과 하늘공원 등이 들어선 난지도(蘭芝島) 일대의 260여년 전 모습이다.
원래 이곳은 모래내와 홍제천 불광천이 물머리를 맞대고 들어오는 드넓은 저지대이다.
한강 폭이 호수처럼 넓어지므로 ‘서호(西湖)’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곳이다.
이 세 개천과 대안의 안양천이 실어오는 흙모래는 늘 이곳에 모래섬을 만들어 난지도가 이렇게 생긴 모래섬이다.
그 모양은 홍수를 겪을 때마다 달라져서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여 일정치 않았던 모양이다.
오리섬(鴨島)이니 중초도(中草島)니 하는 이름들이 난지도의 다른 이름으로 기록되고 있는 것도 이 모래섬이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현상일 것이라고 한다
난지도로 모래를 실어오는 모래내와 홍제천 사이에 이 그림에서 모래섬 뒤로 보이는 마을터가 금성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을 금성산이라 부르게된것은 조선 중종(재위·1506∼1544) 때 충청병사를 지낸 김말손(金末孫)이 본래 강 이쪽 양천 두미에
있었던 금성당(錦城堂) 불상을 강 건너로 옮겨 강가 야산에 금성당이 세워지고 금성산의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금성평사>에는 성산동 쪽으로는 잠두봉(절두산)에서 망원정(望遠亭) 금성당에 이르는 한강 북쪽 강변의 경치를 모두 그리고
그 뒤로 노고산 와우산 등을 그려놓았다. 난지도는 난초와 지초가 자라고 철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 있던 아름다운 섬이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새들의 먹이가 되는 수생 동식물 또한 풍부해 겨울이면 고니 떼와 흰뺨검둥오리 등 수만 마리의 철새들이
날아드는 자연의 보고였다.
그렇게 아름다운 풍광 난지도의 절경이 1970년대부터 크게 변한다.
1977년 3월에 성산동에서 강 건너 양화동까지 성산대교가 놓이기 시작하고 1978년에는 난지도에 쓰레기장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성산대교는 1979년에 완공되었고 난지도 쓰레기장은 15년 동안 쓰레기가 쌓여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그 결과 샛강이 메워져서 난지도는 육지가 되었고 마침내 2002년 5월에는 쓰레기산에 월드컵공원이 들어서게 되었다.
밤낮없이 차량의 물결이 물밀듯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 성산대교 이쪽저쪽의 소란스러운 모습과 돛단배들이 한가롭게 지나고 있는
겸재 정선 당시의 난지도 주변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 뽕나무밭(桑田)이 벽해(碧海)가 된다는 옛말을 바로 실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