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염창탄(鹽倉灘) 서쪽 깍아지른 절벽 위에 예전에 효령대군의 임정(林亭)이 있었다.
그 후에 한산군(韓山君) 이덕연(李德演)과그의 아우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이
늙어서 물러 나와 정자를 고쳐 짓고 이수정이라 하였다."-<양천군읍지>에서
염창탄 석벽은 증산(甑山),지금의 중미산이라 부르는 염창공원 부근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안양천이 감돌아 흐르는 두미암(斗尾岩) 위였다.지금은 이곳에 치성단(致誠壇)이 생기면서
도당산이라고 불린다.
이덕연의 본관은 한산(韓山)으로 목은 이색(李穡)의 후손이다.
고려 말 이색(李穡)의 9대손으로 형 이덕연은 음서로, 동생 이덕형은 과거시험을 통해 선조 말부터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이덕연의 자가 윤백(潤伯) 호가 이수옹(二水翁)이다.
이덕연 형제의 5대조 할머니가 효령대군의 외동따님이었기 때문에 효령대군의 임정이 있던 땅을
물려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산해는 <이수정기>에서 이수정의 연혁을 밝히고 있다.
나의 종계(宗契)인 이군 덕연(李君德演)이 양화진(楊花津)의 남쪽 언덕에다가 정자를 하나 지어 백로주(白鷺洲)와
서로 마주 보게 해놓고 이름을 이수정(二水亭)이라 하였다. 물이 양화진으로 흘러드는 것이 두 곳이 있는데,
이는 대개 이 적선(李謫仙)의 시(詩)에서 “이수는 백로주를 끼고 둘로 나뉘었다.[二水中分白鷺洲]”라는 구절을 취한 것이다.
이군의 왕조부(王祖父) 상국공(相國公)이 일찍이 이곳을 점지하여 장차 조그만 정자를 지으려 하였다가 이루지 못했으니,
이곳에다 정자를 지은 것은 선조의 뜻을 계술한 것이다.
군이 젊어서 과거공부를 익혔으나 누차 장옥(場屋)에 불리하였고 결국 음사(蔭仕)로 현령이 되었다.
얼마 후에 사임하고 돌아와 이 정자에서 노년을 보내면서 산수를 즐기겠다고 하였다.
군의 아우 보덕공(輔德公)이 바야흐로 조정에서 현직에 올랐으므로 동생을 찾을 때가 아니면 도성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으니,
이것이 어찌 권귀(權貴)한 자의 문에 드나드는 것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겠는가.
대체로 산수(山水)가 사람의 이목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사람이 똑같이 느끼는 것이지만, 실지로 마음에 얻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례로 영숙(永叔)은 마음에 얻어 술에 부쳤고 자첨(子瞻)은 마음에 얻어 글에 부쳤으니,
모두 산수에 전의(專意)한 것은 아니다. 지금 군은 아끼기를 전적으로 하고 즐기기를 독실히 하였다.
심지어 언어로 표현할 수 없고 문자로 기술할 수 없으며, 그림으로 묘사하기 어려운 것을 혼자서 마음에 터득하여
스스로 흥겨워서 춤이 절로 나는 경지는 속인(俗人)과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하루는 군이 나를 찾아와서 말하기를,
“네 계절의 경치가 한가지가 아닌데 사람들은 모두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뜨는 달만을 으뜸으로 삼습니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것은 겨울에 있습니다.”하였다.
아, 군이야말로 참으로 즐길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자라 하겠다.
내가 생각건대, 검은 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하얀 눈이 공중에 흩날리면 들녘과 물가가 모두 은세계가 되고
새 그림자와 사람의 흔적이 모두 끊어진데다 긴 강은 얼어붙고 옥봉(玉峯)은 하늘이 들고 있는 것만 같아진다.
얼음 같은 달이 구르는 듯 뛰는 듯하여 만리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을 때 문을 열고 바라보면 천지와 육합이
비어서 밝고 티끌 하나라도 그 사이에 흠집을 남기는 일이 없어서 황홀한 그 상황이 마치 이 몸이
수정궁(水晶宮) 속에 있으면서 달 속의 항아(姮娥)와 대화를 나누는 것만 같을 것이다.
아, 군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이러한 내용을 가지고 보덕공에게 가서 말하면,
그가 반드시 대단히 칭찬하면서 감탄하기를,
“산수에 대하여 아는 자는 우리 형이고 우리 형을 아는 자는 아계(鵝溪) 이 모(李某)이다.”
라고 할 것이다. 이것을 기문(記文)으로 쓰지 않을 수 없다. 내 집이 노량강(鷺梁江) 위에 있으니,
서로 바라보면 겨우 10여 리에 불과하다.
세모(歲暮)가 되어 얼음이 두껍게 얼어붙거든 설마(雪馬)를 타고 내려가서 이수정(二水亭) 위에서
하룻밤 자고 바라보이는 경림옥수(瓊林玉峀)에 대하여 낱낱이 주인을 위하여 부(賦)를 지어볼 것이다.
만력(萬曆) 을사년 중춘(仲春)에 아계 병생(鵝溪病生)이 기문을 짓다.

그 옛날 이수정이 있던 자리에는 아파트가 들어섰다.그 한켠에 염창정이라는 정자를 지었다.
염창정은 염창동 현대아파트 102동과 동아아파트 202동 사이 한강가에 있다. 이 정자는 주민들의 공모로 염창정으로 정한다.

염창정 북쪽에 마을 주민들의 치성단(致誠壇)을 마련하였다.예로부터 이 치성단이 있어 도당으로도 불리던 곳이다.
이산해는 그 기문에서 "이덕연의 할아버지가 이곳에 정자를 지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그의 손자가 이룬 것"이라 했다.
이덕연은 평소 "네 계절의 경치가 한 가지가 아닌데 사람들은 모두 봄에 피는 꽃과 가을에 뜨는 달만을 으뜸으로 삼는다.
하지만 내가 즐기는 것은 겨울에 있다"고 할 정도로 이수정의 겨울 풍경을 매우 아름답게 생각하였다.
효종 때의 대신 미수 허목(許穆)은 이덕연의 증손 이완(李浣)이 이수정의 시화첩을 가지고 오자 발문을 써 주었다.
허목은 벼슬을 그만두고 서울을 떠나면서 한강을 건널 때 본 이수정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효종 9년 가을에 나는 사은(謝恩)하고 한강에서 배를 타고 양화도(楊花渡)로 내려가 나루터에서 묶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새벽 안개는 아직 걷히지 않았고 해는 막 뜨기 시작하여 수풀 사이로 듬성듬성 스며들고 있었다.
남으로 바라보니 고목나무와 푸른 절벽은 반공(半空)에 떠 있는 것 같고 희미하게 보일락 말락 한 것은 이수정이다.
내가 배를 타고 이 정자를 지나 다닌 것이 오늘만은 아니었으나 강 위에 자욱하게 낀 운무(雲霧)가 이렇게
좋은 경치를 이룬 것은 오늘 본 것이 가장 아름다웠다.

서강이 흘러 안양천을 만나면서 그 강은 파강(巴江)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서쪽으로 흐른다.
파강 남녁 언덕은 가히 절경이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 언덕은 우화대(羽化臺)라 불리던 곳이다.
염창탄(鹽倉灘) 서쪽 깍아지른 절벽 석벽이 바로 우화대이다. 그 절경에 이수정을 지은 것이다.
이덕연과 이덕형 형제가 관직 생활을 시작할 무렵 정권을 장악한 북인은 다시 대북(大北) 소북(小北)으로
나뉘어졌고 광해군 때 권세를 장악했던 세력은 경상우도 사림과 이산해(李山海)를 중심으로 한
대북세력이었다.당시 이들 형제는 정치적으로 북인, 그 중에서도 소북계열이다.
이들은 대북 인사들의 인목대비 폐위와 영창대군 살해 등 지나친 권력 독점에 대하여 다소 비판적이었다.
형 이덕연은 관직을 사직하고 철원에 은거한 반면 동생 이덕형은 직접 반대의 입장에 서지않고 왕의 뜻에
따르거나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며 관작 생활을 이어 나갔다.
이후 이덕형은 광해군 말년에 도승지로 발탁되면서 그의 측근 심복이 되었다.그러나 나라의 어지러운 세태가
극도에 달하자 병을 이유로 사직하려고 소를 올렸지만 허락받지 못하였다.그러던 중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은 율곡학파인 서인이 주도하고 퇴계학파인 남인이 이에 묵시적으로 동조하면서 성공시킨 정치적
혁명이었다.광해군의 측근에서 그를 보좌하고 있던 이덕형은 인조반정이 발생하자 반정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당당하게 힐문하였다.이어 선조의 왕손인 능양군(陵陽君)이 주체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반정을 인정히였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던 광해군을 지키기 위해 인조에게 "옛 임금을 죽이지 마소서!"라고 간청하였다.
서슬 프른 반정군 입장에서는 목숨을 빼앗아야 할 대상이었으나 당당하게 광해군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선 것을 본 인조는 그를 진정한 충신이라고 인정하였다.이어 반정을 의심하는 인목대비에게 능양군에게
어보(御寶)를 내리도록 설득하여 인조가 무난하게 왕위를 잇도록 하는데 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반정군에게 숙청을 당하지 않았으며 이괄의 난 때 반란군을 진압하고 병다호란 때는 왕을 남한산성까지
호종하는 등 국가의 중대사에 많은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