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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항해 : 안재오 박사의 유튜브 철학 교실
Unit 20-1 단원: 로크의 경험론과 본유 관념의 문제
제1장 : 근대 인식론의 창시자로서의 로크
근대 영국의 경험주의는 J. Locke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지식의 습득에 관해서 경험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서양의 철학적 전통처럼 로크 또한 지식과 의견 또는 믿음을 구별했습니다. (knowledge vs opinion or belief) 객관적 앎 vs 주관적 앎
이 때, 인간의 지식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인식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는 예를 들어 같은 시대의 뉴턴 물리학에 해당합니다.
그는 인간의 오성(understanding)의 관점에서 지식의 가능성을 추구했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지식은 이성(reason) 혹은 오성(understanding)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 “순수 이성 비판”을 쓴 임마누엘 칸트의 선구자로서 로크는 인간의 지식의 근원, 확실성, 한계를 명확히 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지식 이론에 관한 로크의 근본적 관점은 본유적 관념의 비판(criticism of innate ideas)에 있고 반면 칸트의 관점은 초월적 관념 즉 신(神), 자유의지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비판에 있었습니다. (criticism of God, free will and immortality of soul)
로크는 경험적 관념을 지식의 원천으로 확립한 반면, 칸트는 지식의 가능성을 오성과 감성의 필연적인 결합에서 보았습니다.
Locke : empirical ideas vs Kant : necessary combination of understanding (=Verstand) and sensibility (=Sinnlichkeit). ※ 사실 칸트의 종합은 루소에 의해서 선취(先取)된 바 있습니다.
그러므로 로크는 인간 지식에 대한 비판, 즉 근대 인식론의 비판의 창시자로 명명될 수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로크의 주저 “인간의 오성에 관하여” (AN ESSAY CONCERNING HUMANE UNDERSTANDING, 1689 이하 “에세이”로 지칭됨)의 많은 부분이 데카르트 철학의 중요한 개념인 본유관념에 (innate ideas) 대한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관념(idea)을 세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철학의 항해 Unit 19-1 : 데카르트의 절대적 의심과 본유관념 및 실체 개념 참조)
Descartes에 의하면 모든 관념은 나의 생각이며 "정신적 사건"이지만, 각각의 관념들의 기원은 다르다고 합니다. 그는 관념들을 그 기원에 따라 3가지로 분류했습니다,
① 본유관념(innate ideas) : 이것은 나의 본성 (my nature) 에서 유래하고 ② 감각적 관념(sensory idea) : 외부적인 것 (=경험)에서 유래하고, ③ 인위적인 관념(inventive idea) : 이는 나의 의욕이나 상상에서 유래합니다.
이 세가지의 관념들 중에서 데카르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곳은 ① 본유관념(innate ideas)입니다. 그 이유는 ② 감각적 관념(sensory idea) 과 ③ 인위적인 관념(inventive idea) 는 오류-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또 “본유적: innate” 이란 말은 ”내재적: immanent“ 과 거의 같습니다. 즉 본유관념은 사유하는 자아에 내재하는 관념이기 때문에 오류일 수가 없습니다. 아니 이 관념들은 참과 거짓을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그냥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서 외부 관념이 형성되거나 판단될 수 있는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해야 합니다.
데카르트 사상은 서구의 전통적인 사상과 맥을 같이 하는데 감각적, 외부적 지식은 오류일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내가 볼 때, 사물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이해는 순수하게 나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됩니다. 이는 그것이 본유적(혹은 내재적) 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1철학에 대한 성찰, 1641년)
정신적 사건인 관념과는 달리 “실체“ 란 개념은 정신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개념입니다. ”제1철학에 대한 성찰, 1641년“에서는 실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없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실체 개념을 응용하여 ① 사고 실체(=정신) ② 연장 실체(=공간) ③ 무한한 실체(=신)을 상정했습니다.
또 “사물이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생각이 무엇인지” 하는 것은 본성(whatness)을 말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것이 바로 실체 개념입니다. 실체 (SUBSTANCE) 곧 ”OUSIA“ 라고 합니다.
우시아(OUSIA), 실체(substance), 본질(essence) 또는 무엇임(whatness)는 철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의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데카르트가 ”제1철학에 대한 성찰, (1641년)“ 에서는 실체 개념을 상세히 규정하고 있지 않지만 본성(whatness, essence)를 말하고 있고 따라서 실체까지 언급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선천적, 본유적 관념(innate ideas)은 데카르트 철학 이후 서구 사회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적용되었습니다.
선천적, 본유적 관념(innate idea)에 대한 로크의 철저한 반대는 특히 그 용어가 그 당시 크게 –잘못되게- 유행한데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관한 담화" Discourse Concerning the Nature of Man 을 출판한 제임스 로데 (James Lowde, 1640년-1699년)는 윤리와 종교의 영역에서 선천적, 본유적 관념(innate ideas)이라는 용어를 효과적으로 사용했습니다. 로크는 그를 "천재적인 작가"로 불렀습니다.
James Lowde : “Discourse
Concerning the Nature of Man“
로데에 따르면, "본래적이고, 각인되고, 인상적인 개념들"은 사람들이 그것들을 실제로 사용하기 전부터 그 영혼에 이미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예를 들면 도덕적인 행동을 하기 전에 이미 도덕의 관념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이죠? 그런데 이런 (도덕의) 관념들은 배우거나 경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난다” 즉 본유적(本有的), 천성적(天性的) 혹은 선천적(先天的) 이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타고난 관념- 본유관념- 이 덕(Virtue)과 도덕(Moral)을 가능케 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미덕과 윤리는 타고난 생각, 즉 영혼에 각인되고 감동받은 관념에서 비롯된다고 합니다.
정의(Justice) 개념과 황금률 (Golden Rule)등도 선천적인 관념이라고 생각되는데 여기에 로크는 강하게 반대를 했습니다. 로크는 당시 미지의 문화에 대한 여러 가지 인류학적인 관찰 기록을 토대로 윤리적, 도덕적 본유관념, 선천 관념을 반박 했습니다.
가령 예를 들어 당시 카리브인들은 자식의 불알을 거세했는데 이는 살찌워서 잡아먹기 위해서 였다고 합니다. 로크의 견해는 만약 선천적인 도덕과 인륜 관념이 인간의 정신에 각인되어 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냐는 것입니다. 따라서 로크는 인륜이나 도덕 혹은 정의 등도 모두 후천적인 가르침이나 학습을 통해서 획득된다는 경험주의적 관점을 취하고 있습니다.
선천적인 도덕에 대한 로데의 문제는 서구 기독교의 가치를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간주하는 윤리적 절대주의를 주장한 것입니다. 로크는 이런 절대적이고 독단적인 가치관에 반대했습니다.
제 2장 동일률과 모순률에 대한 로크의 이해
오늘날 우리는 도덕과 종교의 본유적, 선천적 관념에 대한 로크의 반대에 쉽게 동의할 수 있습니다.
도덕과 종교에 대한 본유적, 선천적 관념은 도덕적, 종교적 절대주의를 낳습니다. 그리고 도덕적 문화적 절대주의는 오늘날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오늘날은 문화 상대주의 혹은 다문화주의가 표준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도덕적인 선천적 관념에 대한 비판에 더하여, 로크는 그 당시 역시 선천적인 관념으로 인정되었던 관념 혹은 원리들을 비판했습니다: 동일률과 모순률 같은 논리적인 규칙과 “2 + 3 = 5” 혹은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이다 같은 수학적 규칙도 당시는 본유관념 혹은 선천적인 명제로 인정되었는데 로크는 이를 반대한 것입니다.
수학의 예는 여기서 더 논하지 않겠습니다.
로크는 동일률과 모순률 등의 논리적인 원칙도 선천적인 규칙이 아니다 혹은 “본유관념이 아니다” 라고 하는데 이는 상당한 어려움을 야기 합니다.
그 당시에는 동일률(약자 PI: principle of identity) 과 모순률 (약자 PNC : principle of non-contradiction) 등은 선천적 관념 혹은 규칙의 예라고 여겨졌습니다. 모순률(矛盾律)은 정확히 말하면 비(非)모순률 혹은 무(無)모순률이라고 해야 합니다. 즉 모순을 범하면 안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언어 편의상 그냥 모순률이라고 하겠습니다.
본유적(innate)과 비슷한 말이 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그냥 내재적(immanent) 혹은 선천적(a priori), 천성적(天性的) 이라는 말들과도 같습니다.
본유관념이란 태아의 DNA에 입력되어 있는 정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는 본유관념이 영혼에 입력 혹은 각인되어 있다고 봤으나, 유전자 생물학과 뇌과학이 발달된 오늘날은 유전자 정보라고 보는 편이 이해하기에 편합니다.
임마뉴엘 칸트의 용어 선천적 ("a priori") 은 "모든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인" 또는 "경험하기 이전의" 등을 의미입니다. Locke는 소위 논리학의 두 가지 원칙, 즉 PI와 PNC가 당시 본유관념으로 상정된 것을 반대합니다.
존재하는 것은 있다, 동일한 사물이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What is is, It is impossible for the same thing to be and not to be. (에세이)
로크는 논리의 법칙을 칸트의 선천적인 ("a priori") 나 그 자신의 표현인 본래적인 ("innate")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간이 배우지 않으면 PI와 PNC를 알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로크 역시 이들 법칙들은 보편적으로 승인된다고 했습니다. 당연한 이야기죠?
하지만 로크는 “보편적으로 승인된다고 해서 그 규칙들이 본래적이다 (innate)라고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는 가령 2 + 3 = 5 라는 수학 규칙도 보편 타당한 규칙이기는 하지만 선천적, 본래적으로 아는 것은 아니다 라고 합니다.
2 + 3 = 5 가 본래적, 선천적 규칙이 아니다 라는 로크의 말에 동의할 수 있습니다. 수의 관념은 후천적, 경험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들은 -로데가 말하는 것처럼- “영혼에 자연적으로 각인되어 있지는 않다. 왜냐하면 "아이들이나 바보들"은 그 법칙들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이들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세이)
라고 로크는 주장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논리 법칙 즉 PI와 PNC의 의미를 한번 알아봐야 합니다.
제 생각에는 PI와 PNC에 대한 이론적, 명제적 지식 즉 “A는 A이다” 라는 동일률이나 “A이며 동시에 not A 일수 없다 는 모순률” 은 로크의 말처럼 학습을 통해 얻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원칙들을 배우지 않고도 이러한 원칙들을 실제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즉, PI와 PNC에 대한 이론적, 명제적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원칙들은 이미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뒤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바로 양자택일의 논리를 의미합니다.
※ 명제적 지식(propositional knowledge) 명제 즉 문장화된 지식 흔히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거의 이런 지식입니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벌써 이러한 법칙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원칙들은 암묵적으로 알려진 것으로 간주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조차도 이 법칙을 배우지 않고도 이미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아이가 "그것은 빵이다"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빵이 아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이런 말을 하면 그는 비난을 받을 것입니다.
모순률 적용의 다른 경우를 보겠습니다.
① 나는 간다. ② 나는 가지 않는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상황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둘 다를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①과②가 동시에 가능하다 라고 하면 모순이 발생합니다. 이를 철학은 모순률이라고 개념화한 것입니다. 모순률은 이런 경험적인 사실들을 일반화, 개념화한 것입니다.
모순률은 바로 현실의 반영입니다. 따라서 모순률은 존재의 법칙 혹은 현실의 법칙이라고 해야 합니다. “동일한 사물이 존재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불가능하다” 라는 형식화된 모순률은
앞에서 든 사례 즉 “① 나는 간다. ② 나는 가지 않는다” 와 같은 경우를 일반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어린이들까지도 이 두 문장이 모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규칙을은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 동일률, 모순률은 존재의 관념 혹은 법칙이다. 이 법칙은 인간의 정신과 사물의 양쪽에 모두 반영된다. 따라서 본유관념이기도 하고 경험적 관념이기도 하다.
흔히 PI와 PNC를 사유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법칙들은 존재의 법칙이라고 해야 합니다. 즉 이들은 논리적 경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존재가 사유와 현실에 동시에 반영된 것입니다.
그리스 최초의 존재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존재와 사유는 동일하다” 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말은 “존재의 특성이 일차적으로 논리적이다“는 말입니다. (철학의 항해 Unit 2-1 참조)
사실 로크가 언급한 동일률(What is is)는 파르메니데스의 원리입니다.
그런데 로크에게 경험은 근본적으로 “감각적 경험(sensory experience)”을 의미합니다.
이 법칙들은 감각적 경험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닙니다. 논리적 경험입니다.
즉 이 법칙들은 경험적이고 동시에 본유적(innate)입니다. 외적-내적 사실입니다. 즉 영혼에도 박혀있고 세상에도 박혀 있는 법칙입니다.
왜냐하면 일상생활에서 사람들은 “양자 택일 (either ~ or)” 의 논리적 경험을 하면서 이 법칙들이 인식이 됩니다. 그러나 이를 개념적 수준에서 파악한 것은 결국 철학입니다. 즉 철학에서 비로소 “A는 A이다” 라는 동일률이나 “A이며 동시에 not A 일수 없다 는 모순률이 정립됩니다.
따라서 저의 입장은 로크의 주장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 즉 PI PNC는 본유관념이라기 보다는 논리적-경험적 관념입니다,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법칙입니다. 달리 말하면 존재의 관념입니다. 영혼의 법칙이고 동시에 세상의 법칙입니다.
여기서 “감각적 경험(sensory experience)”만을 경험으로 간주한 로크와는 달리 “논리와 사고”(logic and thought) 역시 경험으로 간주할 수 있습니다.
동일률이나 모순률이 없다면 인생은 참 쉬워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A냐? B냐?“ 하고 선택이나 결단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흔히 우리가 말하는 양자택일(either ~ or)의 관념이 실은 모순률의 한 변형입니다.
하여간 “A는 A이다” 라는 동일률이나 “A이며 동시에 not A 일수 없다”는 모순률은 모든 존재와 사고, 언어와 사회 생활 그리고 신경계, 동·식물 등에 반드시 적용되는 규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어린이와 바보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 그리고 광물도 이 규칙을 지킵니다. 아니 이 규칙에 따라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이가 조금만 먹으면 스스로 이 규칙을 이해하게 됩니다. 물론 고등학교나 대학에 가서는 모순률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모순률은 사실 논리의 법칙일뿐 아니라 모든 존재를 규정하는 법칙입니다, 즉 존재의 법칙입니다. 신(神)마저도 이 규칙을 지켜야합니다. PI와 PNC가 인식되는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서 존재의 규칙이란 이 규칙의 범위를, 즉 모든 사물과 현실을, 말합니다. ① 언어의 규칙은 일관성의 원리와 양자택일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일관성의 원리란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주제는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말은 잘 달린다” 라는 대화를 하다가 아무런 상황변화도 없는데 갑자기 “말은 희다” 라고 하면 안 됩니다.
양자택일의 원리는 위에서 언급했습니다.
② 명제적(이론적) 규칙은 학교나 철학 책에서 배우는 형태 즉 “A는 A이다” 라는 동일률이나 “A이며 동시에 not A 일수 없다”는 모순률을 말합니다. 혹은 기호논리학적으로 A=A, not (A and not A) 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로크의 주장은 약간 수정이 필요합니다. 즉 PI와 PNC는 본유관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을 알기 위해서 교육이나 학습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존재의 법칙이고 관념입니다. 따라서 원시인이나 바보라고 할지라도 이 규칙들을 따라야 하고 또 실제로 따르고 있습니다. 가령 불이 났는데 불이 뜨겁기도 하고 안 뜨겁기도 하다면 불을 무서워하지 않고 불에 접근하다가 타죽을 수도 있습니다. “~을 해야 반드시 한다(must)” 는 필연성은 모순률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PI와 PNC는 원래 존재의 규칙인에 이것이 경험적으로 나타나고 마지막으로 학문적, 이론적 인식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3. 아리스토텔레스의 모순률
논리 법칙에 대한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법칙들의 원래 형태, 즉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적인 저술에 나타난 모순률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는 모순률에는 두 가지 버전이 있습니다.
모순률의 첫 번째 버전은, 이것이 주요 버전으로 간주되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즉, 동일한 속성이 동일한 주어에 속하고 또 동시에 같은 관점에서 속하지 않을 수 없다. “It is, that the same attribute cannot at the same time belong and not belong to the same subject and in the same respect. (형이상학 IV 3 1005b 19–20)
두 번째 버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동일한 사람이 동일한 사물이 존재하고 또 존재하지 않는다고 동시에 믿는 것은 불가능하다. “It is impossible for the same man at the same time to believe the same thing to be and not to be. (형이상학 IV 3 1005b 29–30)
모순률의 첫 번째 버전은 위에서 말한 아이가 말하는 예와 같습니다. 저는 다른 예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이 빵은 하얗다” 이 문장에서 속성으로서의 "하얗다"은 이 문장의 주어 이 빵에 속해있습니다. 동시에 “이 빵은 하얗지 않다” 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이것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한 PNC의 요점입니다. 두 번째 버전의 모순률은 첫 번째 PNC 버전과 동일합니다.
게다가 A=A 혹은 “What is is“라는 동일률의 원리는 모순률의 긍정적인 표현입니다.
동일률은 존재와 사유의 동일성을 주장한 파르메니데스에 의해 원천적으로 주장되었습니다.
이상으로 우리는 동일률과 모순률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확실한 진리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동일률과 모순률은 사고의 법칙일 뿐만 아니라 존재의 법칙이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로크의 주장 즉 “동일률, 모순률도 후천적으로 배워서 아는 것이다” 라는 것은 수정 되어야 합니다. 모든 경험과 독립하여 모든 경험에 앞서는 법칙이 있습니다. 이런 법칙 위에서 비로소 경험적 지식이 가능해 집니다. 로크의 말처럼 우리의 거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러나 그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바로 존재와 사유를 통과하는 법칙 즉 동일률과 모순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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