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만보는 바보
<안 소 영 작가>
담석증으로 구미차병원에서 2011년 5월 4일 수술을 한 후 5월 6일까지 3일간 입원을 하고 입원기간중 (3일간) 고전소설 『책만 보는 바보』저자 안소영 선생님의 책을 읽게 되었다
이덕무가 쓴 짧은 자서전인 '간서치전'(看書痴傳)을 접하고 이덕무라는 인물에 흥미를 느낀 저자가 오랜 시간 관련된 글을 두루 찾아보고 여기에 상상력을 더하여 집필한 책이다.
'실학'과 '이덕무'는 고등학교 때 역사서에서 배운 기억은 있었지만 뚜렷하게 다가오는 지식은 없었다.
하지만 풍부한 자료와 작가의 상상으로 조선시대의 책벌레인 이덕무와 그의 벗들을 생동감 있는 존재로 시대상황에 맞게 전개하여 200년전 조선사회로 빠져 들게 되었다.
'
이덕무와 벗들은 지금으로부터 2백여 년 전의 사람들이며, 흔히 조선 후기의 실학자라고 불리는, 우리에게는 역사의 인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짧지 않은 생애 동안 그들도 분명, 우리처럼 온갖 감정, 기쁨과 슬픔을 느끼고 희망과 좌절도 겪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책에 씌어진 그들 혹은 역사 속의 인물들에게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고 역사 속의 일이라 하여 시제는 과거형이요, 설명 위주의 서술은 건조할 것이라 본다. 그들은 우리와는 거리를 둔 채, 그저 책 속에 머물러 있을 뿐이고, 그들을 우리 곁으로, 숨쉬는 인간으로 불러낼 수 없을까? 이 책《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의 기획, 집필은 이런 아쉬움과 바람에서 작가는 책을 쓰게 되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
일찍이 이덕무에 매료되어 그의 저술은 물론 그와 관련된 글을 샅샅이 찾아 읽어 온 이 책의 저자는 이덕무의 마음속으로 깊이 들어가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자처하며 평생 책을 벗 삼아 살았던 이덕무, 풍부한 감성과 섬세한 눈길로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가 되어 그의 벗들과 그 시대를 우리들에게 다가오게 했다.
이덕무는 조선 정조 때의 문인, 실학자. 자는 무관(懋官), 호는 청장관(靑莊館), 형암(炯庵)·아정(雅亭). 서얼 출신으로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으나, 박학다식하고 시문에 능하여 젊어서부터 많은 저술을 남겼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유득공 등과 사귀었으며, 중국에까지 알려진 사가시인(四家詩人: 이덕무,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중의 한 사람이다.
이덕무에 대한 일반적인 소개문에 빠지지 않는 말이 ‘서자(얼) 출신 문인’ ‘박학다식’이다. 이덕무는 왕족의 후손이지만 그의 아버지가 서자였기에, 태어나면서부터 고단한 삶이 시작되고 내성적인 성격의 그는 집안 형편상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게 되면서, 더욱 말이 없고 조용한, 오직 책 속에서 책과 대화하며 성장했다.
그에게 책은 단지 보는 대상이 아니라 듣고 보고 느끼는, 살아 있는 존재이며 세계였고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어디에도 낄 데가 없었던 서자 신분의 그가 마음을 둘 곳은 책밖에 없었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이덕무가 책과 벗하고, 책 속의 사람들과 벗하는 나날들은 오래도록 계속되며 책이야말로 그의 으뜸가는 벗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이덕무는 백탑(원각사지 십층석탑, 지금의 탑골공원 안에 있음)이 있는 대사동(지금의 인사동)으로 이사하게 되는데, 이곳에서 그는 비로소 평생지기인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들을 사귀게 되고 이들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이서구를 제외하면 모두 서자 출신으로, 힘든 세월을 견디는 데 서로 의지가 되어 준 벗들이며, 백탑 아래 동네에는 이들 외에도 서자 출신 문인들이 많이 모여 살거나 모이기도 했는데, 그들을 사람들은 ‘백탑파(白塔派)’라 불렀다.
이덕무는 백탑 아래서 벗들뿐만 아니라, 더 큰 세계로 눈을 뜨게 해준 스승격인 담헌 홍대용과 연암 박지원과도 깊은 친분을 맺게 되고 홍대용과 박지원, 그리고 이서구는 명문가의 사대부로, 당시 이들의 사귐은 신분과 처지를 뛰어넘는 파격적인 것으로, 무엇보다 사람의 성품을 먼저 보고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느 선비들처럼 유교경전만을 파고들어봐야 벼슬에 나아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기에, 이덕무와 그의 벗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주변의 사물이나 자연, 자신의 감정을 깊이 들여다보는 것에 많이 쏠리고 이러한 시선은 자연스레 문학적인 언어로 표현되어, 각자의 개성과 감수성이 뛰어난 시와 문장들을 많이 남기고, 《백탑청연집(白塔淸緣集)》과 같은 문집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또한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몸소 뼈저리게 느끼고 있던 이덕무와 벗들이었기에, 완고한 유교사회의 모순이 여기저기서 드러나기 시작하는 조선 후기 사회 현실이 절실하게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들은, 감수성이 예민한 문학청년에서 현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새롭게 바꾸어 가려는 개혁적인 사상가로 변모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그들의 행로를 찬찬히 따라가고 이덕무처럼 섬세한 저자의 눈길이 그들의 생각이 여물어가는 과정을 전개한다.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모두 조선 후기의 실학자라 불린다. 이 책에서는 굳이 ‘실학’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이덕무와 벗들의 생각을 통해 실학이 생겨난 배경, 실학자라 불린 사람들이 지닌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언뜻 생각하면 책벌레 이덕무와 실학은 어딘가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이러한 생각은 실학을 그저 편리함이나 효율성만을 얻으려는 실용이란 말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처럼 해박한 이덕무의 지식은 풍부한 고증을 거쳐 엄격한 사실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 또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에 입각한 실학적인 학문 태도라 할 수 있다.
이덕무는 유난히 어렸을 때부터 독서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좋아했다.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다가도 방에 햇살이 가장 밝게 비추는 시간에 책이 빼곡히 꽂혀 있는 방에서 책을 읽곤 했었다. 이덕무가 성인이 되어서 아내와 자식들을 얻었을 때에도 이덕무는 서자 신분 때문에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책을 큰소리로 읽으며 배고픔과 추위를 덜어냈다. 하지만 이덕무는 딸 하나를 잃고 말았다.아내가 삯바느질을 해가며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고 자신이 정말로 좋아하던 책인 '맹자'라는 일곱 권의 책을 팔아서 돈과 바꿨다. 항상 책만 보던 바보는 친한 벗인 유득공에게 찾아갔고, 유득공은 벗을 위해 자신이 가장 아끼던 책인 '좌씨 춘추'를 팔아서 술과 바꿨다. 그리고 이덕무는 백탑아래에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이덕무는 백탑 아래에 보금자리를 마련했고 박지원선생을 비롯한 홍대용선생과 박제가, 백동수가 살고 있었다. 이덕무가 책을 읽다가 바람을 쐬러 백탑 아래에 나오면 항상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백동수도 함께 나와서 이야기를 하며 조금씩 조금씩 친분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이덕무의 벗들은 책을 조금씩 팔아서 이덕무에게 '청장서옥'이라는 공부방을 지어주기도 하고 서로의 시를 바꾸어 읽어가며 평가도 해 주는 등 형제처럼 지냈다. 하지만 이들도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 수는 없었다. 평소에 무술에 관심이 많던 백동수는 무술을 위해 기린협에 가서 거주하기로 했다. 예상대로 벗들은 백동수를 붙잡았지만 결국 그의 의지를 꺾지는 못 했다. 이덕무는 책을 읽다가 궁금한 점이 있어도 스승에게 물어볼 수 없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벗들이 스승이라는 생각을 했다.벗들과 함께 글을 돌려 읽으며 평가도 해 주고 글에 대한 충고도 해 주고 했다.
이덕무가 벗들과 함께 행복해 할 무렵, 이덕무는 유득공에 의해 지구는 둥글다는 것을 알게 되고 홍대용은 중국에, 박제가와 이덕무는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 일행을 따라 북경에, 유득공은 심양에 다녀오고, 박지원은 뒤늦게 중국에 다녀왔다. 이 때 부터 이들은 큰 세계와의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중국에 다녀온 후에 이덕무는 유득공과 박제가와 함께 규장각 검서관이라는 대궐의 새로운 직책에 임명되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에 이덕무는 며느리도 얻었고 손자도 얻었다. 하지만 홍대용의 뒤를 따라 이덕무는 1793년 51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책의 주인공이자 화자인 이덕무는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칭하지만, 이덕무와 그의 벗인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등은 결코 책 속에서만 머무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몸서 체험하면서 현실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새롭게 바꾸어 가려는 개혁
적인 사상가로 변모한다.
저자는 사실과 상상을 바탕으로 그들의 행로를 찬찬히 추적한다. 이를 통해 어린이가 당시의 실학자들의 생각과 시대상을 짚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무엇보다 역사 속의 인물을 생생하게 복원한 것이 인상적이다.
“스스로를 책만 보는 바보라 하였지만, 이덕무 그리고 그의 벗들은 결코 책 속에서만 머무르던 사람들은 아니었고 이덕무와 벗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라 불리지만, 이들이 몰두했던 실학(實學)이란 말에서 그저 편리함이나 효율성만을 떠올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 종일 들판에서 일하고 돌아와 봐야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넉넉하지 못했던 조선 백성들의 사는 모습, 그것을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젊은 그들의 새로운 학문은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굶주림의 고통을 겪어 보았고, 날 때부터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은 신분제도의 문제점을 뼈저리게 느껴왔기에, 그처럼 뜨거운 마음으로 개혁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이들을 알고부터 나는 실학이란 말을 대할 때마다, 부당한 대우를 받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연민, 잘못된 것을 고치려 하지 않는 사람들과 사회에 대한 뜨거운 분노를 먼저 떠올리게 되었다고 저자는<머리말>에서 전하고 있다.
‘실학’은 사색이나 논변 자체를 위한 사대부의 학문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고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온갖 모순과 문제를 해명하거나 해결하기 위한 학문으로의 커다란 방향 전환이었고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은 이제까지 내려오는 학문과 제도의 권위에 따르지 않고 현실에 비추어 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개혁하려 하였다. 그리고 젊은 그들에 의해 세상은 새로운 방향으로 꿈틀대고 있었다.
이덕무와 벗들은 그러한 시대의 흐름 한가운데 있었으며 사회의 문제가 다양한 만큼, 이들이 관심을 기울인 분야도 조선의 역사, 농업, 상공업, 관료제 개혁 등 다양하였다.
하지만 이 책은 무슨 무슨 학파로 분류되는 정형화된 실학자들로서 이덕무와 그의 벗들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그들 개개인의 가슴속에 담긴 생각을 먼저 헤아리며, 세상과 인간을 대하는 그들의 마음과 태도에 눈길을 보냈다. 예컨대 중상학파, 북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인 박제가가 무엇을 붙들고 고민하였던가, 저 유명한《북학의》를 쓰기까지의 그의 가슴앓이를 이해하고 잊혀진 발해의 역사를 복원해내고자 하는 유득공의 충정과 잰 발걸음의 여정을 함께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구미시는 2007년부터 전시민이 같은 책을 읽고 다양한 생각을나누고 토론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구미시민으로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높이고도서관 도시, 책읽는 구미를 위해 『한책 하나구미 운동』을 펼쳐 오고 있다.
1회「마당을 나온 암탉」, 2회「연어」, 3회「너도 하늘말나리야」, 4회「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에 이어 2011년은「책만 보는 바보」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하였다.
「책만 보는 바보」는 안소영 작가의 작품으로 간서치(看書痴), 즉 책만 보는 바보라 불리웠던 조선시대 선비 이덕무와 그의 벗들에 대한 이야기로 이덕무가 쓴 짧은 자서전 <간서치전>을 접한 후, 그 관심이 이덕무와 친하게 지낸 인물들과 시대에까지 이어져 이 책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실학파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을 비롯하여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이서구 등의 이야기가 출신의 벽으로 높은 학식에도 불구하고 존경받을 수 없었던 삶의 애환과 지극한 책사랑이 담겨 있다.
看書痴傳
목멱산(木覓山 남산의 별칭) 아래 어떤 어리석은 사람이 살았는데, 어눌(語訥)하여 말을 잘하지 못하였으며,
성격이 졸렬하고 게을러 시무(時務)를 알지 못하고, 바둑이나 장기는 더욱 알지 못하였다.
木覓山下。有痴人。口訥不善言。性懶拙。不識時務。奕棋尤不知也.
남들이 욕을 하여도 변명하지 않고, 칭찬을 하여도 자긍(自矜)하지 않고 오직 책보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아
추위나 더위나 배고픔을 전연 알지 못하였다.
人辱之不辨。譽之不矜。惟看書爲樂。寒暑飢病。殊不知。
어렸을 때부터 21세가 되기까지 일찍이 하루도 고서(古書)를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그의 방은 매우
적었다. 그러나 동창ㆍ남창ㆍ서창이 있어 동쪽 서쪽으로 해를 따라 밝은 데에서 책을 보았다. 보지
못한 책을 보면 문득 기뻐서 웃으니, 집안 사람들은 그의 웃음을 보면 기이한 책[奇書]을 구한 것을 알았다.
自塗鴉之年。至二十一歲。手未嘗一日釋古書。其室甚小。然有東牕。有南牕。有西牕焉。隨其日之東西。
受明看書。見未見書。輒喜而笑。家人見其笑。知其得奇書也。
자미(子美 두보(杜甫)의 자)의 오언율시(五言律詩)를 더욱 좋아하여 앓는 사람처럼 웅얼거리고, 깊이
생각하다가 심오한 뜻을 깨우치면 매우 기뻐서 일어나 주선(周旋 왔다 갔다 걸어다니는 것)하는데 그
소리가 마치 갈 까마귀가 짖는 듯하였다.
尤喜子美五言律。沉吟如痛疴。得其深奧。喜甚。起而周旋。其音如鴉叫。
혹은 조용히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을 크게 뜨고 멀거니 보기도 하고, 혹은 꿈꾸는 사람처럼 혼자서 중얼거리기도
하니, 사람들이 지목하여 간서치(看書痴 책만 보는 바보)라 하여도 웃으며 받아들였다.
或寂然無響。瞠然熟視。或自語如夢寐人。目之爲看書痴。亦喜而受之。
그의 전기(傳記)를 써 주는 사람이 없기에 붓을 들어 그 일을 써서 ‘간서치전 (看書痴傳)’을 만들고 그의 성명은 기록하지 않는다.
無人作其傳。仍奮筆書其事。爲看書痴傳。不記其名姓焉。
【첨어】
2011. 5. 3 오후 직원 석회를 마치고 사무실 잔무처리로 직원들과 중국집 마파두부로 저녁을 먹고 나서 시간이 조금 지나서 갑자기 배에 통증이 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잘 못 먹어 그러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통증을 참고 견디다가 계속 아파와서 퇴근을 했다. 집에 도착한 이후에도 통증은 계속되고 해서 매실 엑기스를 먹고 억지로 잠을 청해 새벽 2시경 잠을 깼다. 초저녁보다 배에 통증이 더해 왔다.
생땀이 나고 통증은 참을 수 없을 정도 심해 냉장고 우유종류인 요플레를 하나 꺼내 먹으면 소화가 되겠거니 하고 요플레를 먹자 말자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토하고 통증은 계속되었다. 웬만하면 참고 견디는 성격인데 견디기 힘들었다.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 걱정스럽게 안절부절하면서 병원에 가자고 재촉을 해서 집근처에 있는 차병원 응급실로 가서 진통제 주사를 맞고 피검사, CT 등 당직의사가 검사를 하고 증세가 담석증으로 판단되는데 전문의에게 최종적인 진단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진통제 주사의 효과가 있어서 인지 통증은 멎었다.
새벽 5시쯤 일단 퇴원해서 쉬었다가 사무실 출근을 하고 5. 4 10:00 다시 차병원 내과 전문의를 찾아 새벽에 응급실에서 검사한 내용으로 담석증으로 진단이 내렸다
너무 참기 힘든 통증이라 수술에 동의하고 당일 오후 6시부터 2시간에 걸처 수술을 하고 입원을 하고 치료를 하면서 권장도서 고전소설 『책만 보는 바보』저자 안소영 선생님의 책을 읽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