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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을 위하여
한창훈 소설가
이놈의 세상엔 사람들 참 많다. 그렇지 않은가. 당장 문 열고 나가보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지나간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그저 그런, 고만고만한 갑남을녀, 가갸거겨 들이다. 그런데 아무나 한 명 붙들고 확대경으로 들여다보면 느닷없는 정보가, 기가 막힌 사연에 생각지도 못한 질병까지 들어있다. 이래서 나는 니체의 ‘무덤 하나마다 세계사 한 편씩’ 이라는 말과 ‘사람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라고 한 찰리 채플린의 발언을 신뢰한다.
김수우. 시인이자 사진작가이다. 그러나 이것도 그동안 쓴 책이나 사진집을 통해서나 알 수 있다. 나머지는 잘 모른다. 그녀는 베일에 쌓여 있다. 베일에 쌓여있다는 표현은 존재에 대한 비유이면서 외형 묘사이기도 하다. 볼 때마다 기다란 천 같은 것으로 몸을 칭칭 감고 있으니까. 어떤 때는 이불을 제외한 모든 것을 둘둘 감고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쓰고 남은 커튼 같은 거 말이다. 그래서 이국적으로 보인다. 그렇게 천을 감은 채 앉아있는 옆모습은 국내와 국외가 혼재된 여인네로 보인다. 사실이 그렇다.
나는 십여 년 전 대전에서 그녀를 처음 봤다. 이강산 시인이 소개를 해주었다. 전반적으로 수수하면서 우아했는데 그때도 뭘 둘둘 감고 있었다. 경상도 말을 쓰며 잘 웃기는 하지만 사람들에게 어느 정도 이상의 거리를 허용하지는 않는 스타일, 로 기억된다.
이강산 시인의 설명을 듣고 나는 좀 놀랬다. 뜻밖에도, 사하라 사막에서 오랫동안 살다 귀국했단다. 스페인 말도 잘한단다. 벌써 이국적이다. 근데 뭐, 스페인어 잘해서 뭐. 시인 소설가들끼리 만나 놀 때 스페인어 쓸 일이 어디 있겠는가. 스페인, 하면 플라맹고의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떠오른다. 요리와 축구, 투우까지. 그녀는 혼자 중얼거리는 버릇이 있기는 하지만 나서서 스페인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지는 않았다. 공도 안차고 소싸움은 더더욱 안했다.
십 여 년이 지난 지금도 김수우 시인에 대해서 알기는 쉽지 않다. 우선 한국에 별로 없다. 어쩌다 통화를 하거나 소식을 들어도 대부분 다른 곳이다. 우리나라 이곳저곳이 아니다. 국제적이다. 당장, 최근에는 쿠바에서 머물다가 돌아왔다. 그렇다면 잠깐만, 요 몇 년 동안 그녀가 간 곳을 살펴보자.
인도 세 번. 중국 세 번. 이집트, 라다크, 파키스탄 북부에서 파미르고원 넘어 중국 카슈가르 까지 잇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다녀왔고 티베트 카일라스(수미산) 또한 들렸으며 네팔 쪽 히말라야도 빼놓지 않았다. 그리고 쿠바에 머물다가 멕시코, 과테말라, 파나마, 페루, 콜롬비아 같은 곳을, 보통 사람은 한 번도 못 가본 곳을 두루 거치고 돌아왔다.
뭐한다고 이렇게 돌아다녔을까. 혹시 스파이 아닐까?
물론, 아무리 범지구적인 발을 지녔다 하더라도 꼬마 때부터 외국을 다니지 않았다.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부산 영도 산복도로 비탈에서 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시절 빌리거나 훔친 책으로 비굴한 독서를 했으며 중학교 때 상담교사로부터 ‘무분별한 독서로 인한 정서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학교와 가정 양쪽으로부터 책만 들면 매를 맞는, 참으로 이상한 성장기를 거친다. 어떻게? 이렇게.
‘일어나 달님에게 절해라’
꾸던 꿈, 나직한 목소리에 억지로 부축해 일어난다
하늘을 꽉 채운, 쪽문 문턱까지 내려와 기다리는 보름달
때 묻은 벽지 사방무늬가 고요하다
남편을 원양어선에 태워보내고 밤마다 네 남매 스웨터를 짜던 엄마는
달이 골목을 비집고 들어올 때마다 아홉 살 딸을 자꾸 깨웠다
- 「환한 遺産」 부분
어머니는 운동화 필통 주름치마를 외상으로 사주었다 늘 그랬다 아직도 꿈속에서 외상값을 갚는 어머니
- 「아직」 부분
단칸방에 조롱조롱하던 뒤꿈치들
구멍 난 양말에 찔레잎처럼 돋아나던 발가락들
- 「다시, 영도」 부분
심지어는 이런 풍경도 그 시절부터 보기 시작했다.
빨래 널어놓고 바다를 한참 바라보던 할머니 뒷모습
봉창을 가로지르는 테이프 자국
문득 도깨비가 되어 건둥거릴 것 같은 터주항아리
사물함에서 하루하루 젊어지는 먼지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에 나오는 한 그루 나무
다가옴과 물러남 사이, 접시와 고등어 사이, 별로와 대단의 사이, 돌무덤과 극락 사이, 노숙과 신문지 사이, 텔레비전과 사막 사이, 별안간과 지루함 사이, 표지와 제목 사이, 사이의 모든 사이에서
- 「반달의 탈각」 부분
이런 감각, 기억을 가지고 있었기에 그 이상한 정서장애는 훼손되지 않은 채 발전하여 부산진여상 문예부장을 역임하게 된다(그게 유일한 자랑거리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 시절을 싸잡아 정리하면 죽음의 문제에 대한 고민에 빠져 개똥철학을 기초로 한 다음 가톨릭, 불교, 개신교 등을 나름 전전한 것이다. 씰데없이.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말했듯이 웬만하면 그 정도 짓거리로 성장들 했으니까. 다만 시작은 화려하나 끝이 시르죽을 뿐이다. 그런데 김수우 시인은 영혼의 진화를 위한 본격적인 발걸음을 시작한다. 이른바 지구별 행보. 23살 때부터. 그 행보의 결정적인 역할은 아버지였다.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을 넘어 삶의 형태까지 그어준 아버지. 아버지는 원양어선 기관장이셨다.
선고처럼 붙어 있는 머리맡 사진
동생들과 내가 유채꽃밭에서 웃고 있다
그 웃음 속에서 아버진 삶을 집행했다
깊이 내리고 오래 끌고 높이 추어올리던 그물과 그물들, 그물코 안에 아버지 방이 있었다 기관실 복도 끝 비린 방, 종이배를 잘 접던 일곱 살 눈에도 따개비보다 벼랑진 방
평생이었다 고깃길 따라 삐걱대던, 기름내 질척한 유한의 방에서 아버진 무한의 방이 되었다
여섯 식구 하루에 수십 번씩 열고 닫는
육지에 닿은 후 이십 년이 넘도록 그 방을 괴고 있는지
스무 명 대가족사진 속 소복소복 핀 미소에서 어둑한 방 하나 흔들린다
팔순 아버지의 녹슨 방, 쓸고 닦고 꽃병을 놓아도 아직 비리다 아무리 행복한 사진을 걸어도
생이 얼마나 쩐내 나는 방인지 겨우 눈치챈다
파도,
내가 집행한 푸른 아버지
- 「파도의 방」 전문
인생은 우연이 필연처럼 보이게 되는 과정이다. 당시 아버지는 아프리카 대륙 북서쪽 인근 대서양에서 조업 중이었다. 어느 날 라스팔마스로 이동을 하려는데 같은 회사 소속 청년 하나가 편승을 하게 된다. 서사하라 사막에서 모래폭풍이 일어 비행기가 안 떴기 때문이다. 청년의 공식 직책은 어업기술보조. 하지만 경비정이 출동하면 선박들에게 알리는, 약간 거시기한, 이를테면 남자들이 군대에서 줄곧 해왔던, 지금도 공무원이나 회사나 학교에서도 흔히들 하고 있는, 이른바 떴다, 고 알려주는 짓이 본 업무였다, 고 한다.
한 배를 탄다는 것은 운명공동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게 차나 비행기와는 다르다. 오랜 시간 파도치는 바다를 같이 항해하는 행위가 그렇게 만든다. 아버지는 청년을 보며 한국에 두고 온 딸을 떠올렸다. 둘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어떤 가, 내 딸.’ ‘좋습니다, 저는 어떻습니까?’ ‘나도 좋네.’ 이런 결론을 맺는다. 당사자하고는 아무 상관없이.
암튼 그 청년은 한국에 와서 기관장님 따님을 만났다. 딸은 아버지의 의견을 존중했다. 그렇게 맞선을 치르고 달랑 일회의 데이트를 거친 다음 결혼식을 올린다(이 대목에서 만난 지 세 번 만에 같이 잠을 잤다고 나에게 놀림을 당하곤 하는데, 아무래도 그렇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렇게 되겠는가, 어디).
그러니까 그녀의 첫 번째 행로는 먼저 떠난 남편을 찾아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것. 어디로? 사하라 사막으로. 사막이 다 너네 집인가, 이런 질문 가능하다. 그래서 대답한다. 모리타니 공화국의 누아디브라는 도시. 말해봤자 아무 소용없는, 듣도 보도 못한 곳이지만 그곳에서 2년 여를 지낸다.
하늘이 사람을 낼 때 너는 교사가 되라, 노동자가 되어라, 그냥 놀아라, 뭐 이렇게 정해준다고 치면 그녀에게는 세상을 돌아다녀라, 이렇게 운명 지워주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김수우 시인은 자신의 북카페에서 단아한 자세로 곱게 차를 따르고 있지만 언제라도 저 먼 곳으로 갈 준비가 늘 되어있는 듯만 하다.
재작년 여름 그녀가 쿠바로 갈 때 나는 북극해로 출발했다. 이거 말로만 한다면 아주 근사한 존재 같지만 나는 두 달 동안 꽁꽁 얼어서 왔다. 그녀가 부러웠던 이유이다. 남의 빵은 확실히 크다. 북극해보다 나는 에메랄드 빛(그렇게 들었다) 카리브 해를 보고 싶었다. 쿠바라는 나라가 주는 이미지가 있다. 이를테면 혁명, 체 게바라, 자유, 느긋함, 완전무료 의료혜택 같은 매력은 물론이거니와 야자수 잎으로 만든 집, 칵테일, 그리고 빔 벤더스 감독이 뿅 가서 자신의 영화 <파리 텍사스>사운드로 썼던 음악(내 기억에 그는 쿠바 길거리 술집에서 음악을 듣고 반했다고 한다) 을 들으며 (솔직하게 만해보면) 그곳 여인네 얼굴도 한번 보고 싶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아는 스페인어라고는 부에노스 디아스(좋은 아침), 요 소이 노벨리스타(전 소설가입니다) 정도 밖에 없지만 말이다. 북극해는 그런 거 하나도 없었다. 그저 얼음뿐이었다. 지구 반대편을 가도 그녀와 나는 이렇게 팔자가 갈렸다.
생텍쥐페리가 어린 왕자를 만났던 사막에서 그녀는 아들을 낳았다. 어떤 게 더 의미 있는지 경중을 가리기 어렵다. 둘 다 소중하니까. 생텍쥐페리가 목이 말랐던 것처럼 임산부는 입덧이 심했다. 생 무가 먹고 싶었다. 그런데 그녀의 집은 누아디브에서 유일한 한국가정이었다. 어디서 무를 구할 것인가. 입덧은 남편을 능력자로 만들어 낸다. 그는 대서양 앞바다에서 조업하는 모든 한국 원양어선들에게 무선을 때렸다.
“생 무 있는가, 생 무가 급히 필요하다. 오버.”
무가 없다보니 선박들끼리도 무선을 주고받았다. 그러다 한 배에서 대답이 왔다.
“생 무는 없지만 대신 깍두기는 있다, 오버.”
열흘 만에 식탁에 깍두기가 놓였다. 양파로 김치를 담아먹던 상황이니 그녀의 감동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깍두기를 갖고 있지 못했던 선원들은 복숭아나 다른 과일들을 보내왔다. 지들이 아빠도 아니면서.
‘그들이 누구인지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연락 닿은 적이 없다. 그들은 모두 어디에 있을까. 그렇게 하나의 생명이 기적으로 태어나는 데는 보이지 않는 많은 사랑들이 출렁거린다’ 고 그녀는 일전에 나온 산문집『 당신은 나의 기적입니다 』에 밝혀놓았다.
아이를 낳고 나서 사막을 바라보는 눈이 깊어졌다.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을 하나 새로 만들었는데. 그러니까 아이는 어디에서 왔는가 부터 시작해서 모래는 어디서 왔을까, 사막은 한때 숲이었고 그 숲의 시절 전에는 바다였다는데… 이렇게 존재의 시원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아마 거기서부터 본격적인 시작(詩作)과 사진 작업은 시작되었을 것이다. 한 컷 한 컷 사진 찍고 감상을 기록하며 시 한편 완성하기 위해 깊은 밤까지 끙끙대는 것은 모두 자신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타인을 알아야 하는 것이니까.
장미를 두고 온 어린왕자는 소행성 B612로 돌아가고 생텍쥐페리도 새로운 비행을 시작한 것처럼 그녀는 이사를 한다. 스페인령 카나리아제도 라스팔마스로 가서 10년 가까이 지낸다. 아시다시피(모르실라나?) 라스팔마스는 우리나라 원양어업 기지이다. 그곳에서 원양어선 선원들의 삶과 그곳까지 밀려온 교포들의 인생을 바라보게 된다. 그곳을 본거지로 두고 유럽을 싸돌아다닌다. 유럽 땅 곳곳 그녀 신발이 안 닿은 곳이 없다. 그리고 여행의 끝은 돌아오는 것.
35살 귀국. 일단 대전에 정착한다(남편이 충청남도 보령 사람이다). 강의도 나가고 책을 내고 하다가 부산으로 되돌아왔으며 그 사이에도 세상 이곳저곳 더 돌아다니다가 지금에 이른 것이다.
“모르겠어요. 어떻게 살았는지… 그냥 흘러온 느낌이고 또 그냥 흘러갈 것 같은 느낌이기도 하고.”
숱한 이동에 대해 내가 질문 했을 때 했던 대답이다. 하긴 이것 말고 어떤 대답이 또 있겠는가. 그것은 이미 깊어졌다는 소리이다. 우리는 죽음 직전에 삶을 돌아다보고 고개 한번 끄덕이는 것이 목표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이랬던 거군, 이 소박하면서 분명한 깨달음 하나 얻으면 죽은 다음 아주 작은 조각으로 해체되어 세상 구석구석으로 흩어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녀는 이제 북카페 백년어 서원에서 물고기를 키우고 있다. 부산 원도심 골목 동광동에 있다. 그곳에 가보면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어딘가로 가고 있는 벽이 있다. 알만 한 사람들 이름을 하나씩 달고 있는 나무 물고기들이다.
어차피 우리 인생은, 사흘 동안 방구석에서 맹하게 처박혀 있다하더라도, 어딘가로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야 그 다음 것들이 온다. 행어(行魚)들이다. 행어는 멸치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혼자서는 겁나고 쓸쓸해서 멸치는 떼를 지어 이동한다. 우리가 그러하듯이.
나무물고기들은 각각의 주인(이라기보다는 이름 붙인 이들의 상징이자 상관물인데)에 의해 그녀가 위탁 관리를 맡고 있다. 관리를 맡긴 이들은 한 번씩 찾아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를 만난다. 그동안 어디로, 어느 정도 흘러갔는지 확인한다.
내 것은 없다. 나야 날마다 살아있는 물고기를 잡아 죽이고 먹어 치우는 팔자라 그런 거 갖고 있기가 어색하고 부끄럽다. 대신 그물에 걸려 올라온 철갑둥어 한 마리를 맡겼다. 황금색에 마름모꼴 까만 줄무늬가 있는 물고기이다. 물론 김수우 시인은 자신이 선물 받은 거라고 여긴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철갑둥어 등신불이 도착했다 세월호에서 보낸 우편처럼 (중략) 비늘 칸칸에서 노란 국화 냄새가 난다
(중략)
무심, 깊은, 단단한, 노련한, 가시지느러미가 있는 등신불의 전언
이제 걸어갈 거예요
사라진 발원지를 향하여, 향하여
- 「철갑둥어」 부분
그녀는 숱한 이동으로 인해 물고기의 잠영이야 말로 가장 온순하며 비밀스럽고 제의적이며 존재론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안 보이게 움직이는 순한 족속들이니까. 그것은 이번 시집 첫머리에 써놓은 ‘잊혀진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는 숭고한 영혼들의 용감한 몰락’ 과 같다. 이런 말 해도 된다면, 하겠다. 그녀의 이번 시집 참 좋다. 숭고하고 용감한 몰락, 그 과정과 내려앉아 닿는 지점이 그대로 보이니까. 그리고
앞서간 사람이 떨구고 간 담뱃불빛
그는 모를 것이다 담뱃불이 자신을 오래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 최후가 아름답고 아프다는 사실을
진실은 앞이 아니라 뒤에 있다
-「뒤」 부분
이 시를 읽으며 그녀가 그토록 길고 긴 행보를 해온 이유가 자신의 뒷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뒷모습이 아름다운 자야말로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