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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 본관 남편 입구(주 출입구), 왼쪽에 4.19혁명때 경찰의 총탄에 사망한 "강수영 열사 추모비"가 보입니다.
왼쪽 뒤편 신암 뒷산
1971 본관 서편 입구
1960년대 초반, 경남공고 서편 본관앞에 가교사를 지어놓고 생활하던 중앙중학교 옛 모습
이땐 염직과 실습공장, 기계과 실습공장 건립 전 입니다.
1964년 12월에 중앙중학교는 부산시립 부전도서관 앞에 새교사를 지어 이사하게 됩니다.
'60년대 중반 경남공고 모습
1972 항공사진, A : 금속과 실습공장, B : 금속과 교실, C : 화기과 실습공장 및 기전과 교실(3층),
D : 화학과 실습실 및 교실, E : 요업과 교실 및 실습공장, F : 체력단련실(보디빌딩). G : 창고
1972 경남공고 운동장, 뒤편에 육군 교도소와 병무청이 보이네
그 뒤편 좌측에 백양산 불웅령 기슭, 그 우측옆에 성지곡에서 만덕으로 넘어가는 바람 고개,
중앙에 쇠미산이 보이고 그 우측에 금정산 기슭이 보이네..
'70년대 후반 정문
'80년대 교정 모습
2010년대 초반 교정
2014년 교정
지축 탑
가술인은 조국 근대화의 기수
교훈, 6회 이수종, 7회 김홍래
지축인의 긍지, 8회 도종이, 위 2015/08/30 사진들은 23회 다음카페에 응용화학과 오석동 후배님이
올린사진을 가져 왔습니다.
강수영 열사 추모비
이하 곤색 글은 이석희 선생님 (본교 3회) 이 쓰신 본교 초기 역사이며
첨부 사진은 인터넷 어기저기서 수집한 것 입니다.
開校, 光復, 6.25 와 慶工 (1)
우리 모교인 경남공업고등학교의 개교에 관한 역사를 회고해 본다.
본교는 광복1년 전 해인 1944년 4월21일에 부산공립제2공업학교(釜山公立第二工業學校5學年制)로 개교하였다.
당시는 일본의 식민지 시대였는데 제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으로 말미암아 일본의 기술인력이 매우 부족하였
다. 따라서 기술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1943년에 일본교육칙령(日本敎育勅令)에 의하여 일본과 조선의 상업계
학교를 줄이고 공업학교를 증설하기로 하였다. 이에 따라서 名門 부산제2상업학교(부산상고,5년제)를 폐교하고
그곳에 부산공립제2공업학교(경남공고,5년제)가 개교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곳의 位置가 현재의 서면 롯데백화
점자리였다.
초대 교장으로 渡邊三吉(와다나베미요시)교장이 취임하고 건축과 1학급 조선과 1학급을 설치하였다. 그때는
부산제2상업학교는 폐교가 되고 학생모집을 중지했지만 재학중인 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2개의 학교가
같이 있었고 오다나베 교장이 2개의 학교장을 겸임을 하였던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감격스러운 조국의 광복을 맞이하고 日帝의 교육에서 해방이
되었다. 따라서 부산제2상업학교가 다시 개교를 하였고 와다나베 교장은 辭職하였다. 이에 따라서 광복 한달 후
인 1945년 9월 14일부로 부산제1공업학교의 강삼영(姜三榮)교장이 부산제2공업학교의 사무취급을 인계 받고
그 10일 후인 1945년 9월 24일에 김택진(金擇辰)교장이 취임하여 2개의 공업학교를 겸임(兼任)을 하였다.
그리하여 부산제1공업학교(현 남부교육청자리)로 학교를 옮겨갔다. 1945년 10월 1일 요업과(窯業科) 1학급을
증설하였다. 그때에는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이어서 주방용기가 도자기제품으로 되었기 때문에 부산지방에 영도
에 大韓陶器를 비롯한 요업공장이 많아서 요업기술자가 많이 요구되던 때였다. 그래서 건축과, 조선과, 요업과
3학급이 설치되었다. 다음해인 1946년 8월 15일에 오계운(吳啓運)교장이 부산제2공업중학교 교장으로 취임
(就任)하고 1946년 9월 7일 校名을 경남공립공업중학교(慶南公立工業中學校 6學年制)로 개명(改名)하였다.
校名의 개명은 일제시대때 만든 부산제2학교라는 학교명이 적절하지 못하여 해방이 되면서 교명을 모두다
바꾸었다. 참고로 부산제1공업학교가 부산공업중학교로, 부산제2공업학교가 경남공업중학교로, 부산제1중학교
가 부산중학교로, 부산제2중학교가 경남중학교로, 부산제1상업학교가 경남상업중학교로, 부산제2상업학교가
부산상업중학교로, 부산항(港)여자중학교가 경남여자중학교로 각각 교명을 고쳤던 것이다. 일제시대에는 고등
학교가 없었고 중학교가 4년제 혹은 5년제 등이 있었는데 광복후 1946년에 일괄하는 6년제 중학교로 연장
시켰다. 오늘날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합친 학제였다.
1946년 9월 7일 건축과, 조선과, 요업과가 지원학생수 부족으로 이를 폐지하고 화학제품과, 기계과, 염직과
(染色紡織科)를 설치하였다. 당시에는 건축과, 조선과 라는 것이 망치로 나무 집 만들고 나무배 만드는 “노동자”
직업으로 생각했다. 또한 한 構內에 2개의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많았던 것이다. 1946년
9월 20일에 학교를 대연동의 외곽 지역에서 교통이 편리한 초량동 774번지로 이전하였다.
그곳은 일제시대에 초량실천상업학교(草粱實踐商業學校 2년제 女商)가 있었던 곳으로 초량 기차역(草粱 汽車驛)
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정면에 오륙도 바다가 바라보이고 뒤에는 구봉산(龜峰山 일명 伏兵山)아래에
숲이 울창한 초량 철도 수원지(현 서중학교,동일초등학교 자리)가 있어 공기 좋고 조용한 곳이었다.
1950년 초량 시절의 경남공업중(경남공고)주변 항공사진
1946년 초량동 시절의 교정 모습. 현 구봉성당 자리 (1967년 초량성당에서 분당)
목조로 된 2층의 본교사가 축대(築臺)위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에는 운동장이 있었다. 본관 뒤편에는 정구장과
별관 교실(칸을 틔워서 강당으로 사용함)과 직원 사택이 있었다. 지금은 그곳에 천주교 구봉성당이 세워져 있다.
그때는 교사수가 20명, 학생수가 500명 정도로 사제간에 정의(情誼)가 있고 낭만이 있었다. 학교가 비대하면
사제간의 대화가 없어진다. 특히 학교가 초량 역에 가까워서 통근열차를 이용하는 시골학생들이 많았고 학생
들이 순박하고 성실하였다. 교사들도 훌륭한 분들이 많아서 학생들은 스승을 존경하였다.
교가를 작사 작곡하신 김점득(金点得)선생은 밴드부를 만들어서 지도를 하시고 대회 행진을 할 때는 밴드부가
선두에 서서 우렁찬 연주를 하면서 사기를 드높였다. 표옥준(表玉俊 수학)선생은 유도 부를 만드시어 방과후에
몸소 유도복을 입고 학생들을 단련시켰다. 영어를 가르치신 이상찬(李相讚)선생은 콘사이스를 손에 들고 다니
면서 읽으시고, 애써 정확한 영어발음을 가르치셨다.
그때는 일본식 영어를 배워서 ‘택시’를 ‘다꾸시’라고 불렀다. 뒷날 연세대학교 교수로 가셨다. 그때 축구부가
결성이 되어서 각종 대회에 출전했다. 남기택코치(南基澤 경공2회, 해군사관학교, 편풍고 전국우승, 본교 코치)
도 당시에 활약했던 선수였다. 지금 전포동의 학교부지도 이 무렵에 확보하고, 1949년 4월 21일 개교 기념일에
새 교지에 전교생이 가서 기념식수(植樹)도 하고, 잡초가 무성한 운동장에서 축구시합을 하였다. 당시 그 주변
에는 민가(民家)가 없었고 황량한 벌판에 불과 했었다. 간선도로 변에 서면 전차 차고만 덩그렇게 있었다. 지금
은 그곳에 한전사옥(韓電社屋)이 있다. 교지 입구의 동천(東川)하천에는 다리가 없었고, 나무 電柱 두개가 나란
히 걸쳐 있었다.
그때는 교통수단이 마차(馬車)나 전차(電車)뿐이었는데 서면 로터리는 시내 전차의 종점 이였고 동시에 동래
전차의 환승점(換乘点)이었다. 마차가 다녔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겠지만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은 버스를 만들
지도 못하였고 또한 정유회사도 없어서 비싼 휘발유를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휘발유 한 방이 피 한 방울’이라
는 구호가 있을 정도였다. 지금의 동구 범일동 시장 입구가 마차 종점이었다.
서부영화에 나오는 포장마차를 조랑말이 끌고 10여명의 사람을 태우고 범일동에서 충무동까지 다녔는데 말
엉덩이에는 말통 주머니를 달고 달렸다. 그러한데 구관(舊館) 언덕길에서는 말 힘이 부쳐서 더 오르지 못하고
뒷걸음질을 하기 때문에 손님들이 마차에서 내려와서 마차를 밀어 올리곤 하였다. 말에게는 가혹한 고역이
아닐 수 없었다. 서면에서 동래온천장까지는 東萊電車가 다녔다. 단선 철로 위로 전차가 운행되었는데 역마다
멈추어 서서 마주 오는 차가 지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서면로터리에는 전차를 타려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다. 봄가을에는 가족 등반하여 전차도 타고 동래온천을 하는 것이 즐거운 年中行事였다.
특히 겨울철에 서면 먼지바람이 유명했다. 하마정(下馬亭)에서 내려오는 북풍과 낙동강에서 불어오는 서풍이
마주치면서 회오리바람을 만들었다. 박상문(朴相文)선생의 증언(경공 동창회보 창간호에 기載 [옛날을回想하
며])에 의하면 현재의 전포동 학교 부지를 그 당시의 학부모님의 찬조금을 받아 3만평의 적산대지(敵産垈地
일본인 명의의 대지)를 구입했다고 한다.
開校, 光復, 6.25와 慶工 (2)
1950년 초여름의 일요일 아침에 6.25 동란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것이 전쟁인줄 믿지를 않았다. 당시만 해도 개성의 38선 부근에서 인민
군과 국방군 사이에 소규모의 전투가 자주 일어났다.
한때는 인민군 소대가 투항해 온 일도 있었다. 육군 참모총장 채병덕장군은 ‘전쟁이 일어
나면 점심을 평양에서 먹고 저녁을 압록강에서 먹는다’고 豪言壯談을 하였다.
그러한데 인민군이 소련제 전차를 앞세우고 破竹之勢로 내려오자 국방군은 防禦戰을 해보
지도 못하고 후퇴하여 붕괴(崩壞)상태가 되었다.
당시에 美軍은 한국에서 모두 철수한 후였고 군사고문단이 잔류하고 있었다.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되고 국방군은 하나밖에 없었던 한강철교를 폭파 해버렸다.
인민군은 8월 15일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는 목표를 세우고 南進을 계속하자 맥아더장군
이 긴급히 와서 전선을 시찰하고 駐日 美軍이 한국에 투입되고 다시 UN군이 각국에서 참전을
하여 겨우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고 치열한 격전을 벌렸던 것이다.
부산이 임시수도가 되면서 정부기관과 군부대, 병참부대, 육군 병원이 집결하고 따라서
피난민이 매일 밀려와 인구10만 명의 도시가 갑자기 200만 명으로 팽창하였다.
초량의 校舍는 육군 군악부대에 징발되어 학교의 수업은 중단되고 젊은 교사들은 군에
징집되고 상급학생들은 학도병으로 지원하거나 헌병학교, 통신학교 간부후보학교등에 입학
하여 단기교육을 받은 뒤에 전선으로 配置되어 갔다.
低學年 학생들은 비상소집을 하여 군 차량이 질주하는 간선도로에 배치되어 통행인의 교통
정리를 하고, 수영 비행장 건설공사에 학생들이 동원되어 일렬로 길게 서서 장산(萇山)에서
돌덩어리를 운반하는 작업도 하였다.
그때 학생들은 군복을 입고 木銃을 어깨에 매고 군사 교육을 받았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學生 敎鍊大會가 남항동 방파제 광장에서 열렸었다.
학교별로 小隊가 참석하여 소대장의 구령에 따라서 制式訓練을 실시하고, 審査官들이 채점
을 하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金鐘元 헌병사령관이 경공 소대 앞에 나타났다.
그분은 계급이 대령으로 이 대회의 위원장이다. 레이반 안경을 끼고 붉게 탄 얼굴에 입술
이 앞으로 튀어나오고 우락부락 하게 보였다. 별명이 백두산 호랑이라고 불렸다.
그는 지휘봉을 손에 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경공 소대를 직접 지휘하였다.
앞으로 갓, 뒤로 갓, 우로 갓, 좌로 갓, 간격 넓혀 갓, 간격 좁혀 갓, 호령 부쳐 뒤로돌
아 갓 하며 숨가쁘게 구령을 하고는 갑자기 그는 슬며시 돌아서는 것이었다.
그러한데 소대가 행진하고 있는 앞에는 바로 바다가 있었기 때문에 선두가 더 이상 나아가
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고 행진이 멈추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후에 학생들은 그때 우리가 바다 속으로 들어갔더라면 1등을 했을 것이라 하며 매우 아쉬
워하였다.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서 1950년 10울 5일 학교를 충무동으로 옮겼다.
충무동의 海岸에 있는 부산유지공업소를 실습공장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곳의 위치가 바로 남부민 초등학교가 있는 언덕 아래다. 그곳에다 교무실과 교실 4개를
마련하여 학교를 再開하고 학생들을 다시 모으기 시작했다.
1951년 2월 7일에는 전후 복구공사를 할 인력양성을 위하여 토목과 1학급을 증설하고 김기
발(金基發부산공전 교장)선생이 부임하였다.
1951년 6월에는 전쟁의 와중(渦中)에 學制가 개편(改編)되였다.
문교부(文敎部)는 일제시대의 학제를 없애고 미국식으로 고쳐서 6년제 중학교를 중학교와
고등학교로 분리하였다.
이에 따라 경남공업중학교를 없애고 校名을 부산제일공업고등학교(釜山第一工業高等學校)
로 개명하였다.
경남(慶南)이라는 교명이 부산지역과 맞지 않다는 상부의 결정에 따라서 「경남」교명을
가진 학교는 일괄해서 「부산제일」로 고치었다.
따라서 중학 1학년, 2학년 학생의 일부는 新設한 영도중학교(현 남중)로 이관하고 남은
학생은 경남공업중학교에서 연차로 졸업하였다.
그때 중학 3학년 학생은 입학 시험을 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中學 4학년 5학년 학생은
무시험으로 고2, 고3학년에 편입되었다.
그러한데 그 당시 충무동의 학교 수업이라는 것이, 시간표가 제대로 만들어진 수업이 아니
라 敎師가 부족하여 자습도하고, 문달선(文達善)교장선생님은 漢文도 가르치고, 음악도 많
이 배웠다. 음악 담당 김학성(金鶴成)선생은 이름난 바이올리니스트로 바이올린 연주를 하면
서, 아름다운 이태리가곡을 많이 가르쳐 주셨다.
에피소드가 있다. 충무동의 실습공장 마당에서 전교생 공쿠르대회가 열렸는데 학생들이 마
치 노래자랑대회처럼 유행가를 자랑스럽게 부르고 앙코르를 요청하면서 흥겨워하였다.
김학성 선생님은 이것을 매우 못 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참고 계셨다. 드디어 심사 결과
가 발표되었다. 1등에 이태리가곡 ‘라파르마’를 고음으로 부른 키가 작은 2학년 학생이
수상하고, 2등에는 우리 민요 ‘배틀 노래’를 부른 3학년 권중환(權重煥)학생이, 3등에는
군가를 씩씩하게 부른 3학년 권종국(權宗國)학생이 각각 상을 받았다.
김학성선생은 민요를 부른 학생을 칭찬해 주시고, 한편으로 학생으로써 유행가를 부른 것
을 호되게 꾸짖으셨다. 군가를 부른 권종국 학생은 품행이 올바른 모범 학생으로 국제시장
(도떼기시장)에서 빙수장사를 하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여 서울농대 축산학과에 입학하고
뒷날 호주에서 학위도 받아 서울농대 교수가 되었다.
충무동의 실습공장 앞에는 푸른 바다가 있어서 여름철에 학생들은 방파제의 맑은 물에서
수영을 즐겼다. 지금은 그곳을 매립하여 魚販場과 냉동공장이 들어서고 어선들이 붐비고
있다.
1949년 3월 26일 오계운 교장이 경남여자중학교로 전출하시고 이상철(李相喆)교장이 취임
하셨다. 오계운 교장은 둥근 얼굴에 안경을 끼고 온화한 분이셨고 이상철 교장은 매부리코
를 하고 곧고 엄한 모습이셨다.
1950년 2월 18일 이상철 교장이 마산고등학교로 전출하시고,
1952년 2월에 문달선(文장達善)교장이 梁山農高로 전출하시고 이영순(李英淳)교장이 취임
하였다. 이영순 교장은 긴 얼굴에 옛날 식 둥근 안경을 끼고 시를 좋아하시어 조례 훈화 때
‘청춘이 가기 전에 백발이 먼저 왔구나’라는 시를 읊으셨다.
1951년 10월 1일에 충무동의 실습공장이 협소하여 송도에 假校舍를 착공하였다.
1952년 3월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다. 화학제품과 45명, 염직과 34명 합계79명이었
다. 1회 졸업생 중에서 서울공대 섬유공학과에 이희걸(李晞杰) 임병화(林炳和)씨 등이 입학
했다. 이희걸씨는 한때 모교에서 교편을 잡으셨다. 두분 다 본교 동창회장을 역임하였다.
백봉기(白奉基 1회 염직과) 배덕호(裵德浩 2회 염직과 전 삼성염색대표)선배님도 서울에
健在하시며 고령에도 불구하고 재경 지축 동문회에 참석하여 후배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있
다.
1952년 5월 1일 토목과를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이관하면서 토목과 학생과 선생이 부산공고
로 옮겨야 했다. 부산공고는 物理系로 하고 부산제일공고는 化學系로 特性化 하라는 시달에
의한 것이다.
1953년 4월 10일에 충무동 실습공장으로부터 송도 암남동 100번지의 신축 가교사로 학교
를 이전하였다.
남부민동의 송도 윗길에는 천마산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바위가 서 있다. 지금 그 바위 위
에 영도 섬과 남부민동을 연결하는 송전탑이 세워져 있다.
影島는 옛날 신라시대부터 유명한 牧馬場이었다. 말들이 너무나 날쌔게 달렸기 때문에 말
의 그림자를 볼 수가 없다고 하여 절영도(絶影島)라 불렸는데 일제시대에 絶자를 떼어버리
고 影島(그림자 섬. 가게시마)로 이름을 고쳐 불렀다.
일본사람의 눈에는 말의 그림자가 있었던 것 같다.
한데 그 무수한 말 중에서 뛰어난 天馬(heavenly horse)가 탄생하였고, 장군이 그 천마를
타고 영도의 봉래산(蓬萊山)에서 남부민동 바위산으로 바다를 건너뛰면서 천마가 놀던 산이
라 하여 天馬山이라는지명이 생겼다고 한다.
천마산 바위에는 지금도 그 말의 앞 발자국 2개가 남아있다. 또한 봉래산 동편 바위에 신
발같이 생긴 바위 하나가 놓여있는데 주민들이 그것을 장사 신발 바위라 부르고 있다.
남부민동의 천마산 바위가 주민들로부터 외경(畏敬)의 대상이 되어, 그 바위를 경계로 하
여 바위 남쪽 지역을 암남동(岩南洞)으로 부르고 있다.
암남동에는 송도 해수욕장과 더불어, 해안 풍경이 아름다운 암남자연공원(岩南自然公園)
이 있다.
충무동과 송도 시절 경남공고 항공사진 1950년
첫댓글 1972 항공사진, A~G 까지 무슨 건물인지, 댓글 좀 달아 주세요..
나는 요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본관과 본관앞 정원, 염직과 실습공장,운동장,농구장 쪽으로 많이 다니고
본관 뒤편 쪽은 몇번 안 다녀봐서..^.^
내 기억으로는 A : 금속과 실습공장, B : 금속과 교실, C : 화기과 실습공장 및 기전과 교실(3층), D : 화학과 실습실 및 교실이며 E, F는 요업과 친구들이 잘 알겠지만 E : 요업과 교실 및 실습공장, F : 체력단련실로 기억함. G : 창고(?)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