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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불교 창립자' 太雲 김형렬 - "미륵불 甑山이 용화세계 열 것이다" | |||||||||
1894년 정읍에서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태운도 이에 적극 가담하여 출전했다. 서울을 향해 진군하는 동학군을 따라 청주전투까지 참가했으나, 동행한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901년 7월 증산이 도를 깨달았다는 소문을 듣고 만나보기를 희망하다가, 1902년 4월 증산을 다시 만난 태운은 그 날로 증산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다. 이후 태운은 증산이 1909년 6월 세상을 떠날 때까지 8년동안 성심껏 시봉했으며, 증산이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할 때 가장 큰 조력자가 되었다. 1904년 태운은 당시 15세였던 자신의 넷째 딸 말순(末順)으로 하여금 증산의 수종을 들게 했다. 이 때문에 훗날 말순은 미륵불의 좌보처인 홍덕관음불(興德觀音佛)로 믿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약장, 둔궤 등 증산의 유물이 1907년부터 증산을 모셨던 고판례(高判禮)에게 전해졌고, 마침내 1911년 9월 고부인이 증산의 영(靈)과 통한 다음 정읍 대흥리에 증산교단 최초의 교단인 태을교를 창립했다. 1913년 봄 태운은 대흥리로 가서 고부인을 뵙고 증산이 저술한 현무경(玄武經)을 등사해 와서 그 이치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후 태운은 교권을 장악할 야망을 지녔던 차경석(車京石)과 불화가 생겨 태을교를 떠났다. 태운은 1914년 가을 증산의 본부인인 정치순(鄭治順)을 모셔다 증산의 성령(聖靈)이 감응되게 한다고 주송(呪誦) 수련을 시켰으나, 정부인이 수련석에서 실신하여 허사가 되고 말았다. 이에 태운은 자신이 직접 통령(通靈)하겠다고 결심하고, 1915년 봄 모악산 금강대에 올라 백일동안 수도에 전력했다. 마침내 그는 신안(神眼)이 열려 증산의 영을 통해 영서(靈書)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금강대문답(金剛臺問答)’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후 따르는 사람이 늘어나자 자신의 집에서 별도의 교파를 창립하였다. 처음 이 교파는 증산교단의 대표적 주문인 태을주(太乙呪)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동학과 같이 시천주(侍天呪)로 수련시키면서, 입교자의 생년지지(生年地支)에 해당하는 동물을 그린 물형부(物形符)를 그리게 했다. 수련시에는 이 물형부를 날마다 수십장씩 그린 뒤에 그 동물과 각자의 이름을 새긴 4각형의 인장(印章)을 찍어서 불사르게 했다. 이에대해 태운은 선천에는 문자부(文字符)를 사용했지만 후천에는 물형부로 조화권능을 부리는데, 인간의 생년지지가 곧 그 사람에게 선천적으로 지정된 물형부의 자료이므로 그 지지에 해당하는 동물을 많이 그리면 필력을 얻고 몸에 주력(呪力)이 쌓인다고 가르쳤다. 나아가 태운은 이렇게 하면 온갖 병을 물리치고 재앙을 막을수 있다고 가르쳤고, 증산을 미륵불(彌勒佛)로 신앙하며 금산사 미륵전의 미륵불이 바로 증산의 영체(靈體)가 깃들어 있는 불존(佛尊)이라고 주장했다. 1916년 봄에는 독실한 신자 360명을 선발하여 육무(六戊)라는 것을 전국 각지에 묻어 새로운 세상을 열게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918년 태운은 전주 위봉사(威鳳寺) 주지 곽법경(郭法鏡), 대원사(大院寺) 주지 박금곡(朴錦谷) 등과 협의하여 위봉사 전주포교당을 근거로 교단을 세우고, 금산사에서 미륵불교선양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포교했다. 1919년 9월 태운은 신도 80여명과 함께 금산사 미륵전에서 치성을 드렸다. 이때 금산사 주지 김윤창(金潤昌)이 “김형렬과 곽법경이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일으키려 한다”는 밀고장을 일본경찰에 보냈다. 이에 경찰이 금산사를 급습, 전원 체포하여 전주 일본검사국에 송치했다. 이 사건과 관련, 1982년 5월 금산사 만인교 옆에 ‘태운 김형렬 선생 등 88애국지사 충혼비’가 건립되었다. 내용은 태운을 비롯하여 군자금재정책 장기동, 360도종직책 김자현, 위봉사 주지 곽법경 등이 전재산을 매각하여 미륵사상을 포덕할 것을 결의하고, 증산 강일순 선생의 명에 의해 국권회복운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이들은 1919년 독립운동 군자금 수금 운동본부를 결성하여 7천여명을 모았으며, 전국의 미륵숭봉자 가운데 총대 88명을 뽑았다고 한다. 당시 19세였던 백성욱(훗날 내무부장관, 동국대총장 역임)이 상해임시정부에 자금 전달자로 선정되었는데, 1917년 3만여원이라는 거금을 1차로 송금했고, 그후에도 수 차례에 걸쳐 밀파되었다고 증언했다. 금산사 치성은 실은 군자금 조달 전국대표자회의였는데, 일제가 6개월간 혹독한 고문과 취조를 했지만 확실한 증거를 잡을수 없었다. 당시 병사자와 옥사자가 61명이나 됐으며, 겨우 27명만 살아남아 1920년 3월 석방되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태운은 이듬해 봄 서울로 올라가 곽법경, 장기동, 신극, 이종옥, 신성우, 정동훈, 정태환 등 흩어졌던 신도들을 규합하여 미륵불교진흥회(彌勒佛敎振興會)를 조직해 종교활동을 재개했다. 이듬해인 1922년 9월에는 미륵불교(彌勒佛敎)라는 교명으로 바꾸고 본부를 금산사에 두고 포교에 몰두했다. 1923년 봄 태운은 일본정부의 고급관리, 조선총독부 관리, 각 도, 부, 군 관리들의 명부를 작성하여 모든 사람의 이름마다 부(符) 한 장씩을 그려 이름을 쓴 뒤, 핵심신도 360명을 선발하여 한 사람에게 한 고을씩 맡기고 부를 나눠주면서, 각 군 전신주 밑과 신사(神社) 문 앞에 묻게 했다. 이때 돼지고기 한 점과 문어, 전복 한 개씩과 호주(胡酒) 한 잔씩을 부(符)에 싸서 같이 묻게 했다. 이러한 일을 행한 뒤 태운은 가을이 오면 일본에 큰 재앙이 일어나리라 예언했다. 그런데 과연 추석 무렵 일본에 대지진이 일어나, 태운의 예언이 들어맞았다는 소문이 퍼져 신도들이 모이고 교세가 급증했다. 1923년 6월 태운이 다시 영서(靈書)를 받았다. 가을이 되면 차경석의 보천교가 와해되리라 예언했는데, 과연 보천교에 혁신운동이 일어났다. 그의 예언이 들어맞자 교세가 다시 크게 발전했다. 그러나 또 다른 영서를 잘못 해석하여 군산에서 쌀을 교역해 교단운영자금으로 사용하려다 실패, 교금을 탕진하자 1924년 봄부터 교세가 침체되었다. 그해 9월 태운이 서울에 올라가 있을 때, 마침 보천교를 탈퇴하고 증산의 행적을 책으로 편찬하려는 이상호를 만나 자신이 보고 들은 증산의 가르침을 전했다. 당시 태운은 임의로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이적을 보여 보천교 탈퇴자 수천명을 미륵불교로 개종시켰다고 한다. 1926년 10월 태운은 이상호에게 일체의 교무를 맡기고, 대원사에 들어가 수련했다. 그러나 교단 사무소를 금산사에 두지말고 따로 교당을 지어 옮기자는 의견과 이에 반대하는 주요 간부들 사이의 불화로 교단이 위축되었다. 태운은 자신이 받은 영서 가운데 좋은 것을 가려내고 유교 경전 가운데 좋은 구절을 뽑아 ‘중화집(中和集)’을 간행하고자 했는데, 그의 사후에 발간되었다. 1931년 10월 태운이 세상을 떠나자, 교단은 와해상태가 되었다. 그뒤 미륵불교는 김봉진(金奉振)파와 유제봉(柳濟鳳)파로 나뉘었다가, 유제봉이 미륵불교를 재건하였다. 1951년 12월에는 최선호(崔善湖)가 태운의 계통을 이어 금산리 자택에 미륵불교라는 간판을 걸고 포교했다. 훗날 이 교단은 최선호의 부인 최선애(崔善愛)에 의해 1970년 대한불교법상종(大韓佛敎法相宗)이라는 이름으로 문공부에 등록했다. 태운은 일제강점기에 종교조직으로 신도들을 모아 은밀하게 군자금을 모금해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수행한 애국지사였다. 그는 다소 주술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민중들의 염원과 독립의지를 종교적인 방법으로 집약했던 인물이었다. 또한 태운은 증산의 최초의 종도로서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8년동안 한결같이 모신 지극한 성경신(誠敬信)의 소유자였다. 그는 증산이 바로 미륵불이라고 강조하여, 새로운 이상세계인 용화세계를 열어 갈 구세주로 굳게 믿었다. 결국 태운은 증산을 불교식으로 이해함으로써 증산교 교리의 외연을 확장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태운은 증산의 행적과 가르침을 구술로 후세에 전해 증산교단의 발전에 큰 공적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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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증산도 도맥은 강증산(일순)-- 김형렬 (조철제:태극도 .차경석: 보천교는 종도) ---- 박한경(대순진리회) --- 박성인존미륵 으로 이어진다.
태극도에서는 조철제를 옥황상제라고 대순진리회는 박한경이라한다.그러나 대두목은 도통을 열어줄수 있어야 한다. 모두 태을주 주문을 외우고 도통을 꿈꾸고 있지만 대두목이 아니므로 도통을 열어 줄수가 없다. 천상 세계를 가보면 천존으로 는 강증산 상제가 계신다.
자칭, 천자. 미륵. 재림주 .구세주. 성황.용화라는 자 들이 있으나 무슨공부를 했느냐? 무엇으로 도를 공부하였는가? 를 질문하면 그들의 실체가 나타난다. 자신의 전생을 보지 못하면 도통한자가 아니다. 만일 도통 한것이 사실이라면 도통자에게 "천지주역"을 읊어봐라? 하고 천천~~ 천신계가 어떻게 움직이는가? 를 설명할수가 있어야 한다.
성현들이 "天地 周易" 으로 공부를 하여 도를 통한다. 천상계에 가보면 천존은 강성상제이고 인존은 박성인존이며 이도일체이다. 그르므로 구천응원 뇌성보화 박성인존미륵 하감지위라고 주문을 외우는것이다. 천존도 인존이 하는데로 따라야 하며 합일체가 되어 있지 않았다면 도통하지 않은 것이다.(인존미륵 어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