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즈메리와 배우인 남편 거이는 브로드웨이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고급 주택가에 있는 브램퍼드 아파트로 이사를 옵니다. 아파트는 더할 나위없이 쾌적하고 이웃들도 친절하기 그지 없습니다. 당연히 그들은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지요. 몇가지 이상한 일이 있었지만 별로 대단한 일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로즈메리는 꿈속에서 남편같기도 하고, 끔찍한 괴물같기도 한 존재에게 성폭행을 당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임신을 하게 되죠.
그리고 사소하게 보였던 것들이 점점 불길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다르게 보입니다. 친절한 이웃, 유능한 산부인과 의사, 자상한 남편... 마침내 로즈메리는 아이를 출산합니다. 아이는 사랑스럽습니다. 단, 고양이 눈과 같은 황금색 눈과 갈쿠리 달린 손, 꼬리를 제외하면 말이죠. 아이를 품에 안은 로즈메리는 마침내... (- -;;;)
아이라 레빈은 굉장히 특이한 작가입니다. '죽음 전의 키스'(맷 딜런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죠)라는 걸작 드릴러 물로 데뷔한 이후 모습을 숨겼습니다. 그리고 14년 뒤 '로즈메리의 아기'를 들고 나와 다시 세상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바로 이 두번째 작품은 재능있는 작가가 자신의 능력을 100퍼센트 발휘한 일급소설입니다. 사실 '호러'라는 장르에서 보면 좀 특이한 소설이죠.
우리가 장르에서 기대하는 정다운 클리셰들은 일체 등장하지 않습니다. 상큼하고 세련되게 그려져 있는 뉴욕의 풍경 아래서 사탄이 탄생하는 겁니다.
이 책을 읽어 나가면서 독자는 상당히 혼란스러운 감정의 흔들림을 경험합니다. 여주인공 로즈메리는 그 친절하고 상냥하던 이웃 사람들, 산부인과 의사, 그리고 심지어 남편까지 악마숭배자였던 것을 까맣게 모릅니다. 마침내 아이가 태어나고 그녀는 그들에게서 자기 아이를 보호하려고 결심합니다. 혼란스럽지요. 단순한 플롯이라면 우리는 아이를 어떻게든 없애는 쪽에 공감하겠지만 여주인공의 행위에도 공감하게 되는 겁니다. 결론은? 읽어보시면 압니다.
(- - ;;; 스코틀랜드의 어느 유스호스텔에서 우리나라에서 이미 보았던 X 파일이 방영되는 것을 보고 무심코 스포일러가 되었다가 집단구타를 당할 뻔 한 아픈 기억이 지금도 생생...)
장르 소설이라는 벽은 참으로 두텁습니다. 그런데, 일단 장르 소설이 정말로 장르 자체에 충실한다면 그 감동은 장르의 벽을 한 달음에 뛰어 넘습니다. 보편적인 클래식이 되는 거죠. 필립 K 딕, 알프레드 베스터, 레이몬드 챈들러 이 모두 이 벽을 뛰어넘은 사람들입니다. 사실 '로즈메리의 아기'는 장르 소설은 아닙니다. 그래서 오히려 장르 자체의 목적(공포감)은 더할 나위없이 충족시키지만 고전의 대열에 끼기는 어렵죠. 하지만 이 후 70년대에 시작된미국의 소위 '모던 호러'의 포문을 여는 작품으로서 자리잡습니다.
70년대는 재미있는 시대입니다(안 그런 시대가 어디 있겠습니까만).
3J는 다 죽었고 비틀즈는 해체했습니다. 디스코의 시대였고 35미리 포르노 영화의 전성시대였습니다. 그리고 모던 호러가 시작되죠. '엑소시스트', '캐리', '샤이닝', '할로윈'등이 모두 이 때 나왔습니다.
모두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제작된 때깔나는 화면과 사운드로 만들어졌죠. 50년대의 그 유치한 몬스터 물과 로저 코만, 에드 우드 류등의 B급 영화와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심지어 '엑소시스트'는 아카데미 작품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왜 그랬을 까요? 왜 호러였을 까요?
적과 싸우다가 적이 보이지 않게 된 70년대, 미국인들은 스크린이라는 거울에서 적을 발견한 것 같아요. 적이 보이지 않으면 자신이 적일 경우가 많죠. 머리에 꽃을 떼고 디스코를 듣기 시작한 미국인들이 말이죠. 50년대에 만들어졌던 돈 시겔의 '신체 강탈자의 침입'의 70년대 리메이크 판(필립 카우프만 감독의)에서는 전작의 메커시즘, 혹은 공산주의에 대한 메타포 대신, 고민 따위는 모두 잊고 살자는 유혹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골치아픈 군산 복합체, 인종차별, 사랑과 평화는 모두 잊어버리자는 유혹 말입니다. 호러가 제대로 동시대인의 감정 밑바닥을 건드린 거죠.
어쩐지 익숙하지 않나요? 80년대를 거리에서 싸우다가 90년대를 맞이한 우리에게도 말이죠. '스크림'이 히트를 치고, '여고괴담'이 만들어지는 지금의 우리에게 말입니다.
스티븐 킹은 그가 쓴 호러에 대한 에세이 'Danse Macabre'에서 호러를 세 단계로 구분합니다. 'Gross-out','Horror','Terror'의 단계로요.
억지로 옮겨 보면 '역겨움', '소름끼침','공포' 뭐 그정도죠. 많은 호러물은 첫 단계에서 그칩니다. 소위 '스플래터 무비'로 통칭되는 '13일의 금요일'류의 영화입니다. 그런데 사실 첫 단계에서 'Horror'란 'Humor'와 동의어입니다. 피터 잭슨의 '데드 얼라이브', 샘 레이미의 '이블 데드'같은 영화는 웃으라고 만든 영화입니다. 호러는 코미디와 친척입니다. 베이직한 코미디의 주인공은 말도 안되는 상황을 극단화 합니다.
어떤 녀석이 있는데, 그 녀석은 목이 잘려 죽었다가 살아나고, 호수 밑에 수장되어 죽었다가 살아나고, 감전되어서 죽었다가 살아나고, 나중에는 지옥에서 끌려가는 것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좀 우습지 않나요?
'13일의 금요일'의 영원한 안티 히어로 제이슨의 파란만장한 삶입니다.
(- -;;;)
결국 제이슨과 에이스 벤추라는 결국 닮은 꼴이죠. 보다 많은 괴물을, 혹은 보다 악질인 살인마를 죽이고 죽이는 것이 첫번째 단계의 호러 영화입니다. 사실 이런 영화는 그리 유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상 좋기까지 합니다. 누구 말마따나 괴물은 아무리 죽여도 되거든요. 현실에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정치적으로 옳고 자시고도 없습니다.
두번째 단계에서 부터 호러는 우리 무의식을 건드립니다. 평화롭던 중산층의 아이는 아무 이유없이 귀신이 들리고, 겨울이 되어 문을 닫은 호텔에서 보일러 관리나 하며 편하게 글을 쓰려던 가장은 자기 아내와 외아들을 못 죽여 안달입니다. 그렇습니다. '엑소시스트'의 악령은 미국인 누구나 겪을 수 있는 테러의 메타포이며 '샤이닝'의 레드럼은 바로 가족의 해체의 메타포로 볼 수 있는 거죠(물론 제 생각입니다. 아니라고 생각하시면 아닌 것이고. - -;;;). '로즈메리의 아기'는 물질적인 풍요와 프리 섹스 속에서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을 건드린 겁니다. 이런 70년대, 그리고 진지한 호러는 가고 레이건의 80년대에서는 스플래터 무비가 등장하게 된 것이죠.
새 직장으로 옮기며 이사를 가는 바람에 자료의 부족상 당분간 리뷰는 못 쓸 것 같군요. 하지만 조만간에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 대한 조악한 리뷰를 올려볼 까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읽고 있는(실은 고군분투 하고 있는) 'The man in the high castle'에 대한 리뷰도 조만간(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