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 위에 재봉틀 한 대가 놓여 있다
365일 수의를 짓느라 낡아지고 칠 벗겨진 재봉틀
순한 눈망울의 맹인 안내견처럼 풀밭에 앉아 있다
그 푸른 지팡이에 이끌려온 내 만혼晩婚의 날들
된장독 이불 보따리 같은 가재 도구들의 곁에 부려놓고
신호등 앞에서 앞발을 모으고 있는 것처럼 앉아 있다
저 신호등의 색깔이 푸른 제비꽃으로 바뀌면
또 어디로 가나? 눈 깜박이는 나비 한 마리
재봉틀 위에 날아와 앉아, 낮선 길을 눈새김 하듯 날개를 접는다 풀로 만들어진 수의
풀의 실을 뽑아 지어진 옷을
매일 하루 하루에게 입히며, 그대 위해 옷 한 벌 지어본 적 없는
품삯, 풀에서 뽑아낸 실로 지어
풀처럼 깨끗이 삭아 갈, 또 하루를 꿈꾸는지
나비가 팔랑 나래를 펴고 울타리를 넘어 날아간다
풀의
옷은, 풀잎이듯
태우면 고운 재의 입자粒子만 남는, 눈길 거두고
몸 일으킨 맹인 안내견, 목줄 내밀어 새로 이삿짐을 푼 집의 방으로
다시, 나를 데려갈 것이다
풀밭 위에
놓여있는 재봉틀 한 대,
황혼을 이끌고 온 해거름의 일꾼처럼, 순한 눈망울을 껌벅이며
마당 가에
앉아 있는, 내 만혼晩婚의
텃밭,
-현대시 8월호-
*몽유속을 걷다
요즘 나는 <머리에 떨어진 벽돌>을 꿈꾼다
길을 걷다가, 멍청히 빈 공터를 서성이다가 문득
어디선가 떨어져 내린 벽돌이 머리에 꽝 부딪친 순간
(사망은 말고,)
머리통 속만 깜깜히 어두워져 버렸으면......, 하고 상
상한다
또 두개골 속의 물렁한 뇌가 돌처럼 딱딱히 굳어버린
그 순간,
등에 닭털 날개라도 돋아났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 닭털 날개를 달고 날지도 못하면서 날 것처럼 푸
드득이는 모습이
서커스의 우스꽝스런 어릿광대 같다고 해도
나는 <머리에 떨어진 벽돌>을 꿈꾸곤 한다
그리고 박제의 가짜 날개를 달고, 이 도시를 몽유
도원처럼 거닐었으면......, 하고
다시 상상한다. <머리에 떨어진 벽돌>.
뒤로 넘어지다가 코가 깨질 때처럼, 최소한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재수 없다는 이 불행, 이 생의 돌발성에 실려
머리 속에는 캄캄히 타버린 기억의 재밖에 들어 있지
않은데
기억회로에는 살아온 어떤 생의 무늬도 비쳐지지 않
는데
나는 이 불치(?)의 기억상실증 환자가 되어, 거리를
무릉도원처럼 거닐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두개골에 벽돌이 꽝 부딪힌 그 순간,
텅 빈 머리통 속에 덜컥 <공중정원>이 들어서기를
그 공중정원에서 닭털 날개를 달고, 반가사유상 같은
우주의 주민의 산책을 꿈꾸는 것이다. 마치 베를린 장
벽이 무너진 것 같은
해방된 표정을 낯짝에 달고, 이 도시가 유토피아라도
되는 듯이
그 모습 또한,
불타는 소돔을 못 잊어 문득 뒤돌아본 <소금기둥> 같
다고 해도.
- 몽유 속을 걷다 / 실천문학사, 1998
*흉터, 어느 작부로부터의 편지
-엉망으로 취해,뱃놈 인생은 말짱 개털이라고 내 남루한
치마폭에 오물을 게워놓고,폐선 속의 쥐새끼처럼 하룻밤
내 썩은 몸뚱이를 다녀가신 선생님께-
바다 위에 노을이 타오르면 온몸 석유 끼얹고 분신하던 그이의 모습이 보여요
와락 그 불덩이를 껴안았다가 얻은 왼쪽 얼굴과 귀밑 목덜미에 반져 있는
그 火傷 제 섬이에요 낡은 통발배가 버러진 고무신짝처럼 떠 있는 남해의 작은
落島 밤이면 선창의 붉은 불빛 객혈처럼 흐르는 좁은 술집 골목 술자리에서
빈번이 쫓겨나던 작부---그래요 제 흉터의 섬 견고한 바다의 물결로 첩첩이
쌓은 제 감옥이에요 철조망 번뜩이는 탐조등은 없지만 스스로 벽을 쌓아
유폐된 감옥 절해 고도----
그이가 살아 있었다면---온몸 멍처럼 시퍼렇게 물들이는 바다의 저 푸른 쪽빛
마치 농익은 오얏을 깨물 때의 그 상큼한 맛으로 내 오관을 저리게 했을지도---
철마다 흐드러지게 피는 저 핏빛 동백 내 목에 화환으로 타올라 세상의 가슴에
내 꽃무늬 화사한 문신으로 새겨졌을지도----
그러나 저는 알아요 스스로 갇힌 이 감옥 세상을 향한 집념 인간을 위한 모든
욕망을 버렸을 때 다가오는 포근한 고절감 또 이것이 얼마나 금찍스런 감옥
인가를 그 안온암이 얼마나 뼈저린 자기 방어인가를 저는 알아요 자기 위안의
내 견고한 섬 허망 위에 허망을 쌓아 물거품만 허벅지게 피웠다가 덧없이
스러지는 포말의 집이라는 것을.
흉터---그이가 아니었다면 태어나지 않았을 섬 이제 정분난 남정네가 주고 간
정표 같아요 죽어서 비로소 잉태된 그이의 흔적이에요 온통 그믐밤처럼 꺼멓던
탄광촌 제 몸 곡괭이가 되어야 살아남던 삶들 그들의 구멍 숭숭 뚫린 가슴의
空洞 같던 갱 앞에서 스스로 온몸 불꽃 피워 어두운 삶을 밝히려 했던 그이
몸 안주 삼아 들고 다니던 내 들병이 같던 새월 썩은 몸둥이 무엇이 좋다고
밤마다 파고들어 몸 던져 껴안아야 할 날들을 몸으로 말해 주던 그이.
그 흉터 술맛 떨어진다고 흘러 흘러온 갯촌의 시린 술주정을 피해 얼굴이 밑천인
이 화류의 세계에서 내치는 손길 손톱 세워들고 돼지 얼굴 보고 잡아먹냐고
악머구리 몸부림 대신 홀로 어둠 속의 방파제로 나와 일렁이는 밤물결 앞에 서면
마치 최면이듯 부드럽게 속삭이는 그 영원한 잠에의 유혹---그 허망이 지어놓은
집으로 돌아가서 그이와 함께 잠들 이불만 펴면 되는 것을.
그러나 선생님 병도 오래 앓으면 수족 같은 정이 든다 했던가요?
얼굴에 술을 끼얹으며 썩은 내 품을 파고드는 비린 생선내음
절이고 절여진 퇴락한 어촌의 그 한서린 세월 그것 또한 내가 껴안아야 할 흉터가
아닌가요? 이 땅 암호처럼 그이가 내게 주고 간 흉터 그 살아 있는 날들의
의미가 아니던가요? 잡풀도 새들의 둥지를 짓는데----.
*물고기 무덤
물고기야
나는 생선을 좋아한다. 살아, 퍼득퍼득 뛰는 놈을 회
를 쳐, 초고추장에 푹,
소주 한 잔 칵! 생각만 해도 의시시하다
뜨거운 천렵의 강가에선 더욱 소름끼친다
살아, 퍼득이는 놈을 찾아 천방지축이 되는 나의
벌거벗음, 물고기야
사람의 몸 속에는 강이 있다
모든 것을, 태어난 곳으로 되돌려주는
살은 살에게 주고, 뼈만으로 흐르는 강이 있다
그 뼈의 강은
죽비,
깨라! 살 한 점 없는 부끄러움 빈 그릇 위에 앙상히
떠올라도
물고기는 무덤을 짓지 않는다
물고기의 눈에는 눈꺼풀이 없다
뼈는 물고기의 주검을 물로 흐르게 하지만
살은 항문으로 오물을 흐르게 한다
그럼 물고기의 무덤은 인간의 뱃속? 그러나
물고기야
어두운 밤길, 가로등을 켠 뼈가 있다
제 어둠을 밝히지 못해 두 눈 핏발 켠 뼈가 있다
살은 살에게 주고, 아무리 뼈만으로 헤엄치고 싶어도
줄 살이 없는 뼈가 있다
그때, 너는 살을 찾기 위한 단백질 주공급원,
밤길을 걸어, 차가운 上流의 물에 핏발 아픈 두 눈의
열을 푸는
열목어,
그 뼈의 가로등의 눈으로 보면
세상은 부끄러움의 뼈 한 자락도 부끄러워, 방취제인
무덤을 뿌린다
나는 생선을 좋아한다
소주 한 잔 촛불 켜마, 내 몸 속의 강에 살 한 점 남김
없이
너를 방생하며, 뼈를 다오
티없이 맑은 下流의 물에 열목어를 다오
- 몽유 속을 걷다-
*빈집 속의 빈집
땅끝을 지나,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땅끝에 매달려/
저기, 수척한 바다처럼 누워있는
사람, 그 바다에 /
나는 얼마나 많은 섬들을 띄워놓았던가
말의 섬들,/
햇살 속에 온갖 어족의 비늘로도 반짝이던
그 다도해,그러나 그 섬들은/
이제 마당가에 뒹구는 빈 장독들처럼
불룩해진 배로 /
상상임신의 헛구역질만 하고 있음을 보네,
말의 뼈를 뽑아 /
삭아버린 서까래 하나 얹지 못한
덜컹이는 바람벽의 못 하나 되지 못한 /
빗방울 스미는
저 녹슨 함석 지붕 하나 떠받치지 못한 /
말의 무수한 발자국만 남긴
몸, 이제 이 땅의 끝까지 지나왔지만 /
저기,赤湖에 잠겨
잡풀 우거진 빈집으로 누워있는 사람,/
그 빈집에 들어서야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알겠네
*환상통(幻想痛)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배어 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 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쳤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 없고, 바퀴 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잇는 창 밖,
몸에 붙어 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 버린 듯한 그 상처에서, 끝없이 통증이 스며 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나는 처음, 그 말이 그녀의 울음인지 몰랐다
나는 배가 고파요-. 오늘 밤, 잠잘 곳이 없어요-. 하
는, 신음인지도 몰랐다
한 불구의, 공원을 떠돌아 다니며 몸을 파는 어린 창녀
의, 남자를 유혹하는
눈웃음인 줄만 알았다
걸을 때마다 몸과 심한 불화를 일으키는, 미발육의, 우
스꽝스러운 그 몸이
얼마나 값싼 것인가를 나타내는, 기호인 줄만 알았다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않아, 걸을 때마다 등나무처럼 뒤
틀리는, 그 기형의 걸음걸이로
남산 공원을 떠돌며, 만나는 남자들에게마다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하던
그말이-.
나는 갈 곳이 없어요-.
지금<내 몸이 불타고 있어요>하는, 비명인지도 몰
랐다
자신의 불구,
그 부끄러움을 마비시키기 위해, 신경 안정제를 마약처럼
삼키고
그 몽롱함으로, 공원의 풀숲
공중변소 속에서도 몸을 팔던 그녀
어릴 때부터 그 짜장면 한 그릇을 먹는 것이 꿈이었던
그것이 그때, 그녀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세계였던-,
그 몸을 팔기 위해
걸어 들어간 공원의 어두운 풀숲
더러운 냄새나는 공중변소 속에서, 그 우스꽝스런 불구
의 몸 때문에
양동 빈민굴 사창가에서마저 몸을 팔 수 없어, 남산 공
원의 떠돌이 창녀가 된
그녀가 마지막으로 움켜쥘 수 있었던-.
짜장면 한 그릇만 사주실래요?
정말 나는 처음 그 말이, 종의 돌연변이인 줄만 알았다
변이 유전인자에의한, 이상 진화인 줄만 알았다
자신의 불구 때문에, 영혼이 먼저
소아마비에 걸린-.
-[환상통]중에서
첫댓글 미소님 감 쏴, 해요. 제가 좋아하는 김신용 시인님 시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제 창고로 스크랩 해 갑니다
푹 빠져 몽유 속을 걸은 듯 비틀거립니다. 감사^^
시간이 없어서 자주 들어 와야 겠네요 .수고 감사합니다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
제 방으로 업고가서~눈~사랑 할랍니다, 감사요.
원본 게시글에 꼬리말 인사를 남깁니다.
퍼오지 않고 직접 타이핑했더니 이제보니 오타가 많았습니다, 이해하시길....
미소님 좋은 시 올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구나 직접 타이핑하시는 수고까지... 가슴뭉클하게 하는 시들이네요. 김신용 시인은 그 삶이 슬픔 자체였다죠
미소님의 변하지 않는 카페 사랑이 있어 바람같은 저가 가끔 이렇게 와서 둥지를 틀곤 합니다. 정호승님의 '부처'도 끝내 줍니다.
잘 감상하고 퍼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