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가문의 일대종사 황비홍 홍가권의 종사 황비홍은 한때 청나라 해군제독 유영복 장군의 간청으로 수군의 무예를 지도하는 교관직을 맡게 되었는데 그 연유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한다. 당시 황비홍은 제자들에게 무예교습외에는 중국고전 민속놀이인 사자춤에 능하여 인근에 명성이 높았다. 이 사자춤은 사자의 탈은 두 사람이 들어가 뒤집어 쓰고 앞에서 방울을 흔드는 선잽이를 슛으며 사자와 똑 같은 흉내를 내는 특이한 놀이인데 한마리의 사자와 한명의 선잽이로 한팀이 되어 중국의 큰 행사나 명일에 인기종목의 하나로 등장된다. 또한 용의 춤 놀이도 있다.
어느날 황비홍은 제자들과 같이 광주 하남의 유명한 명승지인 금화묘 앞 넓은 공지에서 사자춤을 시작하니 수천의 구경꾼이 모였다. 황은 사자춤외에 자신의 무예와 제자들의 시범도 보였는데 이때 구경꾼중에 광주 관청의 무예훈련원 사범인 진태균이란 사람이 있었다. 진태균은 만주 사람으로서 기골이 장대하고 무술이 뛰어나 그 재주를 청조로부터 인정받아 훈련원대장직을 보게 되었다. 진태균이 보니 황의 무예가 높음을 알고 동행했던 부하를 시켜 황을 관청으로 초대하였다. 포리의 안내를 받아 관청에 들어가 진을 만나 초대한 연유를 묻자 진이 말하기를 "선생의 시범은 잘 보았소 선생의 무예가 높은 공이 있음을 보고 무예수업을 하는 나로써 한수 배우고자 하여 시합을 청하는 바이요" 하며 도전해 왔다. 황은 말하기를 " 저는 아직 공이 깊이 못하니 사양하겠소"하며 사양 했으나 진의 강권에 못이겨 시합을 허락하였다. 진은 자신의 무예를 과시하고자 먼저 전수로 일초를 공격하였다. 황은 진의 공격을 홍가 무예의 한수인 수교를 써서 진의 팔목을 잡았다. 수교는 홍가 무예중 위력있는 초식이었다. 진은 급한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잡힌팔은 놔두고 한손으로 황의 정면을 치자 황은 호학쌍형권의 한수인 요룡귀동의 초식으로 재빨리 막자 진은 물러나는 수법으로 대마보의 기술을 쓰니 황은 진을 따라 들어가며 삼성작탄각의 연속쓸어 돌리기를 써서 진의 마보를 치니 진은 이수에 걸려 나가 떨어졌다한다. 진은 깜짝 놀라며 떨어지는 순간 이제는 죽거나 크게 다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황은 다음 공격을 거두고 빠른 몸 놀림으로 접근하여 쓰러지는 진을 받아 일으켜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황의 행동에 진은 무사로서 크게 감명받아 정식으로 자신의 패배를 자인함과 동시에 황의 처사에 감사했다 한다. 이어서 진은 자신의 상관에게 황을 소개하고 황의 무예와 좋은점을 소개하니 상관도 황의 무예를 보았으므로 황을 치하하고 곧 잔치를 열어 황을 즐겁게 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튿날 관청의 상관은 자신의 상관인 광동과 광서를 지배하는 양광의 총독인 오전미장군에게 황비홍에 관하여 보고하니 오총독은 황을 초청하여 유장군 휘하에 수군 무술교관직을 맡겼다. 그 후 군의 총사령관인 유영복 장군이 무예수련중 실수로 다리의 뼈를 크게 다쳐 여러의원이 백약을 곰으나 효험을 못보던중 황의 의술이 높다는 마를 듣고 황을 불러 치료를 부탁하니 몇일만에 상처를 깨끗이 낮게 되었다. 이 일로 유장군과 군대의 사람들은 황의 의술은 신술이라고 불렀다. 유장군은 보답의 뜻으로 술예비정(術藝비精)이란 4 글자가 새겨진 커다란 금판을 상으로 주었다. 그 후 황은 광동지방과 광서지방 두곳에서 위치한 군대의 교련을 맡게 되었고 그 밖에서는 제자를 양성하여 의술로 여러 사람들을 치료하니 그는 바쁜몸이 되었다. 광주시 제일의 큰 시장인 삼란시장의 상인 모두가 지신들의 체력 단련을 위하여 황의 무명을 듣고 지도해 줄것을 간청해 왔다. 그러나 황은 홍가문의 종사로서 여러일이 많아 대신 자기의 유능한 고제자 양관을 시켜서 삼란의 상인을 지도하게 하였다. 황은 제자를 많이 양성했고 유명한 인물도 많이 배출하였다. 그는 홍가의 무술을 널리 전파하기 위하여 고제자들에게 각지의 도장을 세워 홍가 무예를 가르치니 2대 3대 4대 5대에 걸쳐 많은 제자가 배출되어 홍가권은 단연 남해파중의 제일 큰 문파로서 번창하게 되었다. 황비홍은 자신의 1대 제자중 최고의 고단자들을 모아 한방을 만들어 그 이름을 용호방이라고 하였다. 황비홍은 말년에 홍콩의 보지림 지관 주인 육정강에게 무술을 지도하였다. 그때 홍콩에서는 육정강이 개설한 지관이 하나 있었는데 근처의 타문파의 도장에서 쳐들어와 싸움이 벌어졋는데 육정강의 제자들이 다치고 도장이 부서졌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난 황은 단신으로 찾아가 관주에게 사과할것을 요구했으나 황이 늙고 혼자온 것을 알고 얕잡아 보고 불손하게 굴었다. 또한 오히려 무리를 지어 황을 공격하니 황은 대노하여 수십명을 일시에 쓰러 뜨렸다 한다. 이일로 말썽이 나자 광주로 피신하여 보지림총관에서 제자를 양성하며 한편으로 인술도 펴면서 지내던중 1923년 광주에서 상단 사건이 일어나서 체육관아 모두 불타 버렸다. 그 후 황비홍은 1924년 향년 70세로 죽으니 홍가문의 많은 제자들이 각처에 도장을 세워 계속 제자를 양성하여 오늘날까지 그 명맥이 전해져 오고 있다 한다....